삼성을 살다 - 12년 9개월
이은의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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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삼성을 살다』를 삼성비판서라고 여기고 집어든 사람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눈썹 가운데가 찡그러질 수 있습니다. 어느새 ‘크나큰 악’처럼 되어버린 삼성을 질겅질겅 씹는 맛에 취한 나머지 이 책 또한 자신의 ‘안줏감’으로 삼으려 한다면,『삼성을 살다』는 그 욕망을 살며시 꺾어버리니까요. 이와 다르게 직장성희롱을 다룬 이의 글이라기에 솔깃한 나머지 침이 바싹바싹 말라가며 그 얘기가 언제 나오는지 책을 휙휙 넘기는 이들도 있겠죠.

 

그러나 ‘놀랍게도’『삼성을 살다』는 제목 그대로 12년 하고도 9달을 삼성에서 일한 사람의 경험일 ‘뿐’입니다.『삼성을 생각한다』가 김용철이 겪은 이야기였듯 이 책도 마찬가지로 삼성에서 청춘을 보내며 느끼고 고민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행여나 자신의 정치의식’에 변화가 생길까봐 인문사회 책은 전혀 읽지 않거나 정치경제문제는 잘 모른다면서 삼성이라는 낱말에 심드렁할지라도 지은이가 수다 떨듯 쓴 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네요. 특히나 젊은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연애사와 가족관계를 잘 버무려 한층 더 글이 맛깔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초점은 ‘못된 삼성’이 아닙니다. 삼성과 소송하여 이기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여겨봐야 하는 건 ‘그녀가 싸우는 이유’, 바로 이것입니다. 여느 여자들처럼 인기 있는 연속극들을 본방사수하고 여행하길 좋아하며 신문에 사진이 실릴 때 초라하고 화난 것처럼 나오기보다 예쁘게 나오길 바라는 ‘평범한 직장 여성’이 다들 알아서 쉬쉬하며 기는 삼성과 맞장을 뜹니다. 그녀는 어떤 배짱이 있던 걸까요?

 

무엇보다도, 이건 그냥 나를 위한 싸움이었다. 긴 시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오롯이 내 의지로 하는 싸움이니, 이 싸움이 내 의지에 반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당장에라도 그만할 수 있었다. 책임져야 하는 마음이 많아지는 만큼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271쪽

 

여성으로서 당하는 설움과 노염들을 다른 여자들에게 되풀이되지 않거나 적어도 또래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싸운 것도 있겠으나, 그보다 ‘나’를 위한 싸움이라는 말에 어떤 ‘바뀜’을 느낍니다. ‘정의’라든지 ‘민주화’라든지 뭐 대단한 ‘이념’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당연하게 믿고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던 몸가짐은 아예 물러난 것이죠.

 

다시 말해, 한국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쳤으며 그에 따라 새로운 윤리가 빚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소중함’입니다. 지은이가 여러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싸운 까닭도 ‘정의’나 ‘민주주의’같은 것들을 그 자체로 떠받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싸운 것이죠. 나의 욕망을 떳떳이 드러내는 ‘자유의 사회’로 접어든 것이죠.

 

이런 ‘나의 소중함’은 나뿐인 이기주의라기보다는 서구근대화의 영향에 따라 ‘자유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나이든 이들은 자신이 따르는 집단에 자신을 끼어 맞추며 살았다면 이젠 삶의 틀이 변한 것이죠. 국가도 중요하고 손윗사람의 분부도 귀담아듣겠지만 이에 앞서 ‘나의 욕망’을 헤아리고 이를 누리는 것이 채워져야 하는 시대입니다. 좋든 나쁘든 이 자유주의의 흐름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매우 자연스럽고 하나의 도덕처럼 자리 잡았죠.

 

한국에서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휘두르는 배불뚝이들이의 허튼소리처럼 되어버려 ‘자유주의’라는 말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대단한 진보성’을 갖고 있기에 너무 차갑게 대할 수만은 없죠. 지은이도 겪었듯, 어디서 주워들은 같잖은 용어들을 중얼거리며 좌파랍시고 흥분만 하는 이들보다 어떤 면에선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상대가 아무리 무서워도 입 다물지 않는 자유주의가 이 사회에 필요한 것처럼 보이니까요.

 

“전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처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라 옷을 후줄근하게 입은 거, 가방을 바꿔들고 나오느라 BB크림도 없어서 민낯을 들이미는 거, 피곤했던 하루라 꼴이 초췌한 거... 제가 마음에 걸리는 건 이런 겁니다. 저한테 생긴 일이나, 제가 걸어가는 과정이나,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잖아요? 저는 그걸 알고 있을 뿐이에요.” 319쪽

 

삼성이 정해진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지은이는 법정 소송까지 벌이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성폭력에 따른 피해보다 더 고통스러운 ‘2차 피해’들과 그밖에 무마시키려는 온갖 회유들에 시달리면서도 꿋꿋이 맞설 수 있었던 것도, 여러 등쌀과 왕따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개 떨구지 않은 까닭도,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죠. 남들의 시선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행동을 나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싫은 걸 참으며 끙끙대기보다 내키지 않는 건 싫다고 말하는 ‘자유의 윤리’를 느낄 수 있네요.

 

삼성이라는 말 안엔 한마디로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와 욕망들이 뒤범벅되어있습니다. 이건희 일가가 지배하는 재벌기업 삼성부터 많은 이들이 뜨겁게 일하는 직장으로서의 삼성까지, 한국의 자랑이랍시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분칠된 삼성부터 국적을 넘어선 세계자본으로서의 삼성까지, 헌법에서도 보장하는 노조를 막고자 그악스럽게 탄압하였던 삼성부터 젊은이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기업으로서 삼성까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서 삼성부터 백혈병으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의 삼성까지, 이 수많은 엉킴들 사이에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길을 지은이는 삶으로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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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적 이성 -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 국가, 계급에 대한 비판적 성찰 아우또노미아총서 29
워너 본펠드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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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자”, 지구동네 골목골목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집니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은 이 ‘이행기’에 들어섰음을 일러줍니다. 한국은 공업화, 도시화, 정보화, 탈근대화까지 워낙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걸 겪으면서 맨날 ‘과도기’인 느낌이지만 또 새로운 길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이 사회를 세차게 휘감았던 신자유주의가 물러나고 있네요. ‘포스트신자유주의’를 맞고 있습니다.

 

너무 빠른 바뀜들에 신물이 날 만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팔을 내저으며 헤엄쳐갈 수밖에 없죠. 가만히 있다가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내려가기 십상이니까요. 새로운 시대를 맞아『전복적 이성』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들을 뒤엎습니다. 낡은 것들과 이별하기 위해 사회를 뒤집는 비판이 필요한 때니까요.

 

지은이 워너 본펠드는 맑스를 밑천 삼아 자본과 국가, 그리고 계급을 가늠합니다. 번뜩이는 대목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국가는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라는 맑스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대목에선 공감을 꽤 얻습니다. ‘국가’에 대한 책이 꽤 많이 나오는 까닭도 오늘날 국가를 보면 갸웃거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한국도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사태 들을 치르면서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물을 수밖에 없죠.

 

국가가 ‘복지’는 커녕 나서지 말라는 자유경제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읽다보면 국가가 끼어들지 않아야 세상이 잘 돌아갈 거 같은데, 국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제인들의 씨불거림대로 시장에 많은 걸 맡길수록 소스라치게도 국가폭력은 세집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자유와 국가폭력이 맞물린 구조니까요. 미국을 봐도 잘 알 수 있듯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시장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부는 시장의 뒤에서 팔뚝을 내보여야 합니다. 경제가 정치와 떼려야 떼어지지 않는 이유죠.

 

그래서 나치의 철학자 칼 슈미트와 신자유주의의 텃밭을 닦은 하이에크가 얼마나 가까운지, 경제자유주의가 독재와 얼마나 얽혀있는지 선보이는 데서 지은이의 글들이 빛납니다. 지난날 독재정권에 빌붙다가 오늘날 ‘시장만능주의’를 나불거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하죠. 한국의 이른바 ‘보수’층들 또한 앓고 있는 도착증세, 시장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자유를 버리는 독재도 상관없다는 ‘이상한 논리’의 뿌리를 밝혀줍니다.

 

지은이는 사회민주주의,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국제사회주의, 알튀세주의 같은 수많은 좌파들에게도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코뮤니즘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더라도 어느새 목적을 잃어버린 조직논리와 다중들 위에 서려는 권력의지에 취하기 마련이니까요. 다중들이 당이나 전위들에게 이끌어져야 한다는 건 ‘부르주아의 편견’을 좌파들이 받아들인 거라고 본펠드는 따끔하게 꼬집습니다. 다중에겐 자신들 위에서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 없기 때문에 다중들을 교육하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이죠.

 

대중이 그들 자신을 책임진다면 혁명적 당에는 무슨 역할이 남는가? 그것은 대중의 일부가 되어 자신의 ‘지도력’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혁명적 대중 위에 자신의 지도력을 선언할 것인가? 대중이 자신들의 노력 속에서 자기결정을 달성하려고 고집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는가? 239~240쪽

 

2008년 촛불시위는 그동안 믿어왔던 사회운동과 투쟁방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만큼 사회관계가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시민단체나 운동권의 ‘지도’를 받으면서 머릿수 채우던 ‘대중동원’의 시대는 저문 것이죠.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그 생각들이 만나고 섞이면서 사회를 움직이는 시대, 발달한 통신기술로 서로 접속하고 어울리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혁명’이라는 말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사회정치체가 바뀌는 혁명에는 갈등과 싸움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군사무기가 너무나 무섭고 끔찍해져서 그동안 혁명은 쑥 수그러들었지요. 그렇지만 인간해방을 위한 혁명의 불길은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으며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끝없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어떤 세력을 갈음하여 다른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던 혁명이 아니라 다중 모두가 연결되고 공부하면서 사회에 참여하여 세상을 바꿔내는 ‘혁명’이 나타나는 것이죠.

 

인류 역사는 역사 자체가 끌고 가거나 어떤 법칙 따라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몸짓 하나 하나가, 인간들의 욕망들이 모이고 모여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면서 멀리 보며 꿈을 꾸고 꾸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이유죠. 맑스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였는데, 지은이 또한 얘기합니다. 지금을, 확신을 의심하라!

 

나는 혁명이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계시록적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명은 부정의 과정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로 우리를 자동적으로 이끌어주는 역사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발전의 객관적인 법칙들을 심도 깊게 과학적으로 통찰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와는 다른 이야기, 즉 확실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고안된 역사적 법칙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의 달성은 자본과 그 국가에 대한 성실하고 정직한 투쟁에 달려 있다. 350~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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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까칠교수님의 글쓰기 수업
로저 로젠블랫 지음, 승영조 옮김 / 돋을새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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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글쓰기교실이 여기저기 동네방네 생겨났고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글쓰기가 일상에서 그리고 사회에서도 대단히 중요해졌습니다. 비록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수많은 블로그의 의미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언어 안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선보입니다.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에도, 인간은 언어를 만나 ‘주체’가 되고, 글을 통해서 ‘나와 너’는 이어집니다.

 

이에 따라 글쓰기 책들이 쏟아집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여러 가지 이야기와 방법들을 담은 책들이 꾸준하게 잘 팔려나가죠. 글을 더 잘 쓰려고 머리를 쥐어짜본 사람이라면 여러 책을 읽어보았을 테고, 책방을 거닐다 보면 나름 읽을 만한 책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렇지만 글쓰기 책들을 통해서 얻어야 하는 건 글 쓰는 ‘재주’가 아니라 한 시대를 떳떳이 살아나가겠다는 ‘영혼’이며,『하버드대 까칠교수님의 글쓰기 수업』도 이것을 얘기합니다.

 

이 책에서 눈길이 가는 건 ‘형식’입니다. 지은이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를 글로 써서 바로 알려주기보다는 자신의 수업 ‘현장’을 글로 적습니다. 글을 쓰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글쓰기를 설명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1. 어떻게 해라, 2. 어쩌고저쩌고, 3. 미주알고주알 등등 이렇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학생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읽는 이들이 스리슬쩍 느끼도록 책의 구성을 짰습니다.



한마디로 지은이는 손쉽게 그렇지만 읽고 나면 머잖아 잊히는 글을 쓰지 않고자 책 자체를 글쓰기의 방법으로 쓴 셈입니다. 마치 자신이 왜 소설 같은 글로써, 대화가 물결치는 글로써 글쓰기 책을 썼는지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듯 책장은 술술 넘어가지만 뒤로 넘어갈수록 쉬움을 통해서 특별함을 만들려는 글쓴이의 욕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흔하디흔한 글이 안 되려면 글에 불멸의 영혼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요. 작가가 겸손해 하는 걸 믿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나 불멸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에 대해 각별한 공포와 혐오감을 품고 있어요. 작가는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다채로운 많은 것들 속에서 계속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모든 작가들이 젊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젊은 독자들은 선배들의 성취를 모방하고 거듭 재창조하죠. 108쪽

 

어떻게 하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귀띔을 하지만 글쓴이가 얘기하듯 저마다 취향이 다르고 감각이 다릅니다. 누군가의 가슴을 뒤흔드는 글도 다른 이에겐 지루할 수 있죠. 그러니까 숱한 기교로 ‘멋들어진 글’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왜 글을 써야 하는지 글을 잘 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고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달콤함만을 담뿍 뿌려대어 읽을 때는 그냥저냥 재미나지만 읽고 나면 금세 가먹는 글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런 글쓴이들은 잠깐 반짝할 순 있을지언정 금세 이웁니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마치 미래에서 지금으로 되돌아온 듯 사회에 놀라고 시대와 싸워야 하죠. 그저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쓰는 글이 아니라 시대를 아우르는 글을 쓰라고 지은이는 속삭입니다.

 

여러분이 되고자 하는 그런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부조리함에 자신을 내던져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값진 것과 고결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대에 잘못 태어난 사람처럼 글을 써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 모든 시대에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시대를 아울러야 합니다.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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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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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더블』은 살짝 뜨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글에 쭉 스며있던 차가운 웃음이 이제는 대놓고 넘실거리기 때문입니다.『핑퐁』에서는 아예 이 세상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자고 하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가냘프게나마 희망이 서려있었다면 이제는 그마저도 드러나질 않습니다.

 

이건 박민규가 세상을 더 캄캄하게 읽어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이와 아울러 박민규라는 창에 비친 한국의 풍경이 그렇게도 서글프고 섬뜩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낌새입니다. 책에 실린 한숨은 바로 나와 우리 이웃들의 가슴 속 소리니까요. 왜 사는지 알지 못한 채 돈만을 쫓으며 세월을 보내는 우리네 일상을 박민규는 까발립니다.

 

돈, 돈 주면 되잖아... 그랬다 돈, 돈만 받으면 문제없지만 모르...겠다, 왜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 인간들이 늘어나는지... 결혼도 하고 좋은 차도 굴리는 인간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후...꽁초를 던지고 밤길을 다시 바라본다. 모르...겠다, 다시 기침이 터져나온다. 쿨럭쿨럭... 난 아무래도 폐암인지... 아니, 저 밤길을 달리고 하루하루 그저 돈만 받으면 문제없지만... 모르겠다, 형 그 새끼 찾아 죽이지 그랬어요? 야야, 내가 죽는 게 더 쉽더라야... 모르겠다, 왜 미국으로 도망간 인간은 잡을 수 없는 건지... 모르겠다. 모... 르겠다, 이러고 왜 사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230쪽

 

오직 물질과 소비만이 사람들을 휘어잡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시대이자 너무 깊은 생각과 진지한 고민은 부담스럽다고 너도 나도 손사래 치면서 엉뚱한 것들에 홀려 시시덕거리는 사회입니다. 살다보면 삶의 의미가 궁금해지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곰곰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어느새 이런 물음들은 짓눌리지요. 쳇바퀴 돌 듯 살아갈 때 그 흐름을 막아서는 것들은 죄다 거북하고 찝찝하니까요. 그냥 ‘생각 없이’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발을 놀리려는 ‘관성의 욕망’은 이미 우리 삶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래서 불쾌한 것입니다. 여차저차, 그간의 일들을 나는 늘어놓았다. 해서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냥 저런 게 떠 있으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데... 예컨대 일, 일, 일... 하는데 실은 저런 게 떠 있는 것입니다. 돈, 돈, 돈, 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래버리니... 문득 이젠 예전처럼 살 순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밥 볶는 얘길 좀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인간이 좀

 

호올스

 

하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왜 저런 게 나타나 기분을 복잡하게 하는지, 또 하필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뭔지... 불쾌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존재의 고민, 그런 건가? 잘은 몰라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어차피 적응은 하겠지만... 적응할거면서 왜 그래? 156~157쪽

 

이념이 죽어버리고 이념을 갖지 않는 게 이념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지난날의 뜨거움을 간직한 이들에게 남는 건 ‘회한’이나 ‘냉소’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힘겹게 싸운 끝에 주어진 시대는 “소녀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노염으로 고개를 떨군 이들 뒤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죽어간 이들의 진실을 보았고, 살아 진실을 논하는 자들의 거짓을 참아야 했었다. 변질과 변절, 변이와 변태... 적도 동지도 사라진 세상 속에서 그는 홀로이 외롭고 외로웠다. 싸워야 하지만 싸울 수 없는 세계...다시 만난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108~109쪽

 

그래서 그럴까요? 어느 때보다 종교가 사람들 일상을 파고듭니다. 이 소설집에서도 개신교의 콧김과 입김이 잔뜩 스며있는데, 심지어는 글을 나눌 때 십자가 표시를 쓰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우리네 일상이 교회당의 손아귀에 놓여있다는 얘기겠지요. 돈만을 쫓지만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과 세상살이에서 받는 어마어마한 괴로움을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풀고 있으니까요.

 

연예오락과 종교광신은 힘겨운 사람들을 달래주는 척 하면서 기운을 빼앗아가고 정치의식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알랑방귀들입니다. 그 냄새에 취할수록 체념과 짜증으로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다는 걸 박민규의『더블』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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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정신분석과 미학총서 5
김서영 지음 / 은행나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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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에 대한 관심도 높지만 그 못지않게 깔봄과 업신여김도 옴팡진 듯합니다. 자연과학에 푹 빠진 이들은 정신분석이 체계를 갖추지 못한 헛소리라며 짓뭉개고 사회과학을 좋아하는 이들은 정신분석이 넓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칸막이처럼 쓰인다고 성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설렁설렁 얘기를 들어주다가 어쭙잖게 이론을 들먹이는 짓거리를 걸러낸다면 정신분석은 얼마든지 ‘나’와 ‘사회’를 같이 바꿔낼 수 있는 지렛대가 됩니다.

 

정신분석은 그 환원적인 분석과 수구적 태도에 의해 자본주의의 하수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상징계로 이행하는 과정의 고통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파괴력과 다르지 않다. 거세라는 용어로 표현된─편안한 것을 버리고 변화를 선택하는─행위가 정신분석의 기본 전제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강조하였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닫힌 체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전제이다.『라캉 읽기』290쪽

 

한편 정신분석에 대한 지나친 떠받듦도 있지요. 오이디푸스, 남근, 실재, 무의식, 전이 따위를 아무 데다 가져다붙이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게 쓴 글들도 드물지 않더군요. 그러나 예수가 그렇듯 맑스가 그렇듯 누군가를 섬기면서 그것만이 “길”이자 “진리”라 믿는 건 진리에서 멀어지는 길이지요. 프로이트든 라캉이든 그들의 글이나 말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걸 잘 써먹어서 보다 더 산뜻한 삶을 살고 더욱 즐거운 사회를 열어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뜻을 잘 녹여낸『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은행나무. 2007]은 영화들을 살갑게 다루면서 정신분석의 세계로 부드럽게 이끌어주네요.

 

정신분석은 따로 어딘가에 가서 전문의에게 비싼 돈을 내어 상담을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정신분석은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잘못된 일들과 괴로운 기억, 약해진 모습과 숨기고 싶은 사실들을 하나씩 대면하여 다시는 이 괴로운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막”고 “자신이 잘하는 것과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일들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스스로에게 최선의 길을 찾아 주”는 일이니까요.(92쪽) 나 혼자서 곰곰 생각에 잠겨있을 때나 벗들과 가슴 속 얘기를 꺼내서 나눌 때 자신도 모르게 정신분석을 하는 셈입니다.

 

멈추어 자신에게 질문하자: “너 괜찮니?” 나는 현재 마음이 편하고 하는 일이 즐겁고 삶의 방향성이 있는가? 아니면 무엇인가 괴롭고 불편하거나 또는 어떤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가? 혹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참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가끔씩 멈추어 서서 나 자신에게 내 몸과 마음이 평안한가를 질문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이와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정신분석과 함께 살고 있다. 정신분석이란 자신의 상태와 행동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보살피는 과정이다. 91쪽

 

그래서 정신분석을 더 깊이 하면 할수록 슬기와 용기가 생깁니다. 내 안에 미처 몰랐던 나를 만나면서 더 싱싱한 나로 달라집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욕망하는지 헤아릴 수 있는 힘이 생기죠. 사람이기에 끝없이 환상에 휩싸이는데 정신분석을 하면 휩쓸리지는 않게 됩니다. 남들과 어울리지만 남들의 욕망을 무턱대고 욕망하지 않는 자유가 생겨나죠. 싫은 건 싫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후회의 쳇바퀴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바지합니다.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파투 놓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 파투가 나도 된다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미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욕망에 따라 인생을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234쪽

 

그렇다고 정신분석은 나만 들여다보면서 자아를 다독이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통해 너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지요. 내 안이 부글부글 끓고 어지러우면 남에게 신경 쓰지를 못 합니다. 정신분석을 통해 내 안의 일렁임이 가라앉으면 그 잔잔함 덕분에 남의 눈물이 보이고 누군가의 한숨이 들리죠.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나를 북돋기, 조금 더 의젓하게 남을 배려하기, 나에게서 세상으로 넘어가기, 이것들이 정신분석입니다.

 

내 안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상황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상관없이 살게 됩니다. 진정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기심과 욕심, 왜곡된 감정들이 채워지고 가는 곳마다, 하는 말마다 모두 다른 이에게 누가 됩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사실 나밖에 모른다는 말은 엄격히 말해 어폐가 있습니다. 그/그녀는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나와 남과 상황을 분석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큰다’, ‘성숙한다’, ‘어른이 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배려라는 것은 사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정신분석입니다. 250~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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