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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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내 살 같지 않을 때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한없이 투명해지려면

계속 말해야 한다.

싸움이 불가피하더라도.


은유 저자의 에세이 글을 읽을 때마다 삶에 밀착돼 있어서 좋기도 하고 이렇게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도 되나 싶어지기도 한다. 개인사 전시류의 글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은유 저자의 글을 읽는건 전시가 전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을 의미화하는데 능하다고나 할까. 내 생활 주변에서 들리는 일상의 언어로 직조한 촌철살인의 문장을 읽다보면 알 수 없는 시원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어"라는 깨달음. 


예를 들면 남성들의 무(관)심함에 대해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거다"라고 쓴다. 사회학, 뇌과학, 행동심리학 등 다양한 도구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이 '증후'에 대해 저자는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p.58


저자의 출간 도서 목록을 훑어보니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첫 책 『올드걸의 시집』에 이어 두 번째로 낸 산문집이다. 첫 책이 절판된 후 그 책에서 일부를 추리고 여러 매체에 연재했던 칼럼들을 모았다. "생에 울컥한 순간 일상을 추스르며 적어간 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의 기록"은 때론 폭소를 때론 폭풍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는 "여자라는 본분, 존재라는 물은, 사랑이라는 의미, 일이라는 가치"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고 쉬지않고 썼다. "엄마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의 일회성을 자각"하고 "생의 본질이 아닌 것에 한눈 팔지 않게 됐다"고 말한 저자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지금도 글쓰고 강의하고 엄마로서의 삶도 충실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연과 강의에서 "밥에 올인하지 않으련다"고 들리는 말을 하셨지만 부지런한 천성이 어디가나 싶다.)


저자의 삶에서 놀라웠던 건 '시'를 읽는다는 대목이었다.(개인적으로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늦은 귀가 후 난장판에 된 집에 들어서서 아무 것에도 손댈 수 없을 때 그는 놀랍게도 '시'를 읽었다. 그러고 나면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한 시들은 저자의 말대로 피로 직진해 마음으로 흡수됐던 모양이다. 은유 저자의 글은 단순 명료하면서도 종종 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시 자체에 대한 앎도 풍부해 삶과 이어지는 글을 쓰고 시를 붙여 책 한 권을 써냈다. 인터뷰와 르포에서 보이는 작가만의 감수성 또한 시 읽기에 상당 부분 빚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생활에서 찾은 소재로 쓴 글을 읽고 나니 저자가 일할 때와 집에서의 모습이 그려진다. 조근조근한 목소리까지 떠올리니 가까운 친분 관계인 듯 여겨지기도 한다. 곰살맞은 저자의 성격을 느꼈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지역 학습관 글쓰기 강의 마지막 날이었다. 각자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고 있었는데 은유 '강사님'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수강 인원에 맞춰 사온 덧신이었다. 전원 여성 수강생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그 덧신을 오래도록 신었고 신을 때마다 '강사'님이 떠올랐다. 은유는 따뜻한 성품으로 꿋꿋한 글을 쓰는 저자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딜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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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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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인권 운동을 하던 저자가 마주한 고통과 그 고통의 주변 세계를 고찰한 책이다. 누구든 한 번은 고통의 당사자 혹은 고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한 번의 상처로 지나가는 고통이나 시간이 가면 털어버릴 수 있는 고통이 아닌 고통의 당사자를 파괴할 정도의 고통은 곁을 지키는 사람조차 망연하게 만들곤 한다. 저자 엄기호는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 세계"에 주목했다. 다시 말해 '고통'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고통을 겪는 이들이 그 곁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해부하고 "고통의 곁이 말할 수 있어야" 함을 환기하기 하고 있다.


최근 가까운 이가 겪는 고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야 했던 경험때문에 관념적 수사가 많아 다소 어려운 책임에도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적시하는 "고통의 말할 수 없음"이 무엇인지 "고통의 겪는 이의 언어는 '주문'일 수 밖에 없다"는 문장의 의미를 경험 속에서 해석해낼 수 있었다.


3부로 구성된 책의 첫 부분에서는 "고통의 겪는 이의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고가는지를" 다룬다. 고통 당하는 사람의 비명에 가까운 언어가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주변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실감났다. 울부짖는 사람 곁에선 아무런 말도 필요없게 된다. 울음과 넋두리는 누군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닐 뿐더러 대답한들 의미가 전해질리 없다.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듣기를 강요하는 말이다.

p.106


저자는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면서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본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받고 있음을 말하려면 고통 자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의 당사자에게도 고통의 서사를 구성할 곁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p.114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어떻게 고통이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는지",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들여다본다. 고통은 전시되고 소비된다. 더 쎄게 보여주고 말하는 고통이 더 많은 주목을 받고 고통은 더이상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재미가 된다. '정의'라는 명분으로 신상털이가 이뤄지고 플랫폼은 피해자를 관종으로 만들어버린다.


저자는 '곁'에 선 사람이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쓴다. 3부에서는 당사자가 말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자리는 '곁'이며 그 '곁'이 굳건하기 위해 '곁'을 지키는 '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곁'의 역할을 윤리적으로 미화시키는 일을 경계한다. 고통의 '곁'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하며 지쳤을 때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책감을 갖지 않고 역할을 교대할 수 있을 때 더 나은 보살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불길한 조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길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 대신 고통의 곁에 선 이에게 나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어주기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것은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말로 윤리화되고 미학화되어 있다.

pp.16-17


책은 고통에 대해 말하는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앎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를 제안한다. 고통의 당사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나와서 '곁'의 위치에서 고통을 말할 수 있다. '곁'의 자리에 서는 가장 좋은 도구가 '글쓰기'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면서 파괴된 내면을 재건할 수 있다고 전한다. 곁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통의 당사자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자신과 고통에 대한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스스로의 독자가 됨으로써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게 만든다.


글쓰기는 그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인 복수성을 짓는 '구축의 도구'이기도 한 셈이다.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할 수 있었다. 동행이 있을 때 사람은 동행의 말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그 말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말과 글을 쓸 수 있었다. 말과 글의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가 아니라 '곁'이었다. 곁에서 말과 글이 나오고, 말과 글을 통해 곁이 생긴다. 말과 글을 만들고 또 그 말과 글을 만들 수 있는 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동행'이다. 글을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p.238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마주했었다. 조울증으로 정신병원 강제 입원까지 경험했던 저자는 투병을 글로 기록하면서 그 시간들을 의미화했다. 완치 가능성이 희박한 지병을 가진 환자이면서 자신의 병력을 기록하는 기록자로서 '곁'의 자리를 만든 저자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기자'라는 글쓰는 직업인이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고통의 당사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경험을 하얀 종이에 문자로 인쇄해 스스로 읽어보는 작업이 의미있으리라 여겨졌다.


고통을 대하는 저자의 숙고가 지식인의 이름값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저자는 "고통과 동행하는 그들"과 "동행하는 것"이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적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숙고하여 다른 이야기로 변위해 돌려주고, 그들이 거기에 다시 응답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고통의 '곁'을 고통 옆에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곁'의 '곁'으로서 역할을 고민하는 지식인이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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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
나타샤 패런트 지음, 리디아 코리 그림, 김지은 옮김 / 사계절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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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먼 옛날, 머나먼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왕과 왕비가 딸을 낳고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를 불러 이 아기의 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법사는 무척 기뻐하면서 아기가 훌륭한 공주로 자라나게 돕겠다고 약속했다.(p.7)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작은 옛날 공주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이 왕자나 기다리는, 에덴동산의 이브만큼이나 식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대모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마법사는 다른 동화에서 같은 부탁을 받았던 마법사나 요정이나 마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공주라……. 이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마법사는 고민 끝에 다른 공주들을 연구해 보기로 하고 마법 거울에게 넓은 세상에 나가 훌륭한 공주에 대해 알아내도록 부탁한다. 마법 거울은 마법사에게 돌아와 어떤 답을 해줄까?『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마법 거울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여덟 명의 공주를 만나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매무새를 좀 단정히 해야 할 것 같아.”

“신경 쓰지 마.”

“모두 언니를 만난 것만으로도 기뻐할 거야.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도 그런 적이 없었고.” (p.86~p.87)


“이젠 내가 뭘 할 수 없다고는 정말정말 그만 말했으면 좋겠어. 나를 도와줄래, 아니면 그냥 나 혼자 할까? 왜냐하면 나는 부딪혀 보지 않고 포기부터 하지는 않을 거거든!” (p.236)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을 쓴 나타샤 패런트 작가는 ‘처음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은 날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치 시공간이 다른 어느 신비한 나라의 궁전 정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을 읽는 독자들도 시공간이 다른 여덟 공주의 신비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알록달록 색색가지로 칠해진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책이다.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여 깊이 있는 색감이 아름다운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의 그림은 리디아 코리 작가가 그렸다. 리디아 코리 작가는 로열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배웠고, 현재는 영국 헤이스팅스에 거주하며,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린다. 잘 만든 영화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듯 리디아 코리 작가의 그림은 이야기마다 주요 색조를 달리하며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의 이야기에 분위기를 만든다. 엘로이즈의 초록색 숲, 레일라의 핑크빛 일출, 엘렌의 진파랑 바다, 아베요미의 주황색과 에메랄드빛 폭포 등 공주들은 각자의 색을 가지며 리듬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젤 왕비는 레인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 헤인 왕국 사람이었다. 거기는 규칙이 달라서 자녀들이 노를 저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지면 망설임 없이 물가로 내보냈다. 왕비는 결혼과 동시에 항해를 포기해야 했을 때 무척 속상했다. 딸인 엘렌이 자신이 누렸던 즐거움을 똑같이 누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카트리오나, 아일사, 이세베일 공주의 열두 번째 생일이 지날 때마다, 딸들이 먼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렌 공주가 슬퍼하는 걸 직접 보고서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p.98)


비록 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을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리젤 왕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꿈을 가진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 주면 그 꿈은 점점 커질 것이고, 모험심이 가득한 아이에게 배를 주면 그 아이는 곧 배를 타고 떠날 거라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p.117)


“우리는 로즈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걸요.” 엄마가 속삭였다.

“우리는 로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요.” (p.164)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여덟 소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어른들의 모습도 이야기해준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어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어른으로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을까?


공주에게는 왕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 바꾸어 나갈 넓은 세상이 필요하다. (p.257 옮긴이의 말)


김지은 번역가가 옮긴이의 말에서 ‘공주에게 필요한 것은 넓은 세상’이라고 한 말에 적극 공감한다. ‘자신의 뜻을 펼치고 바꾸어 나갈 넓은 세상’은 공주를 포함한 모든 소녀에게 필요하다. 나타샤 패런트 작가는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며 ‘훌륭한 공주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물었는데,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훌륭한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이 한국말로 번역된 첫 작품이라니, 나타샤 패런트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국말로 번역 출간되어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아기자기한 그림과 빨간 리본에 금박으로 제목이 새겨진 표지가 예뻐서 책의 안쪽이 궁금하면서도 선뜻 책장이 열리지 않았다. ‘공주’라는 단어가 품은 계급적 차별의 의미가 못내 거슬려서다. ‘공주’라는 단어는 ‘어린 여자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정실 왕비가 낳은 임금의 딸’을 칭하지 않는가. 혈통으로 사람의 존엄과 귀함을 따지는 임금의 딸이 주인공인 이야기보다는 그냥 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더 궁금하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공주라는 계급적 이미지를 덜어내고 여덟 소녀의 이야기로 읽어도 아주 재미있다. ‘공주’를 소녀로 바꾸면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겠지만, ‘여덟 소녀와 마법 거울’이라는 제목은 작가에게도 출판사에서도 아직은 부족하게 느꼈을 것 같다. 쥘 베른의 소설 ‘15소년 표류기’가 ‘15왕자 표류기’가 아니어도 충분한 것처럼 ‘소녀’도 ‘공주’가 아닌 ‘소녀’ 그 자체로 충분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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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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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읽었다. 열일곱 호정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문장은 십대 청소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가운데 감정의 흔들림 또한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알게 된 작가는 『푸른 사자 와니니』의 이현이었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에서도 빛났던 서정적인 묘사는 십대의 사계절을 담아낸 책에 잘 어우러졌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시절의 불안함과 홀로 떨어진 듯한 고립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막막함을 그리는 작가의 문장은 주인공 호정을 잘 형상화해냈다.



소설인 열일곱 고등학생 호정이 가족과 보내는 일상으로 시작한다. 터울이 많이 지는 동생 진주화 함께 호수가 있는 공원에 놀러간 장면은 "행복한 가정"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정은 부모와 여동생이 만드는 '행복한' 그림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호정의 모습은 얼핏 사춘기라 불리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풀기 쉽지 않은 응어리가 드러난다.



초반의 서술은 가족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장면과 호정이 의사와 나누는 대화가 섞여 있어 서사를 따라 잡기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차츰 이런 서술 방식 자체가 스스로의 상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호정의 심리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정은 어린 시절 사업 실패를 겪은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겪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학교 안의 문제에 휩쓸린다.



호정은 전학생 은기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은기지만 일상을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호정은 은기가 스스로를 편안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걸 이해한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고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이 있더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알아 버린 애들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131


은기의 서사에 담긴 가정폭력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가정 안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덮어두려하는 동안 일어나는 피해와 피치못한 결말에 대해 또 불가피한 가해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오히려 덮어두어야 할 일들을 인간은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괴롭힘의 방식은 교묘했다. 물리적인 폭력이나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무너지게 했다. 소문을 만들고 뒤에서 속삭였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빈번했다. 호정과 은기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다른 면모를 보이는 아이들은 쉽게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가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금방 잊고 다른 소문을 찾아가지만 피해자들의 상처는 쉬이 나아질 수 없었다.


숙덕거리고 낄낄거렸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대면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애들의 눈초리만으로 충분했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돋운 한두 마디도 있었다. 그 애들은 나를 멋대로 상상 속의 진창에 굴리고 있었다.

p.212


법적으로 저촉되는 선만 안넘으면 죄가 되지 않는가. "법적인 처벌과 도덕적 단죄", "사회적 시선과 개인의 사정이 다를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이해의 가능성이 담겨 있지만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모든 게 더더욱 모호하죠. 법적인 처벌과 도덕적인 단죄가 다를 수 있고, 사회적인 시선과 개인의 사정이 다를 수 있고. 여러분도 이제 그런 모순을 알 만한 나이죠.

p.257


아이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은기는 학교를 떠나고 은기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었다고 자책하던 호정은 위태로운 정신 상태에 이른다. 소설 속 호정은 상담을 통해 문제를 직시하게 된다. 자기 안의 '아픈 나'를 인정하고 "엄마 아빠는 기억도 못할 사소한 이야기"지만 자신에겐 트라우마가 됐던 기억들을 소환하게 됐다. 그렇게 호정 안의 "몹시 안전했"던 "얼어붙은 호수"에 "봄"이 오기 시작한다. 호정은 그것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아이는 그일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 같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딱딱했던 호수의 표면이 녹으면서 다른 마음을 적실 수 있는 그런 봄을 호정은 두려워하면서도 바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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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주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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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 이주현은 한겨레신문사 기자다. 흔들림 없는 이성으로 객관적인 기사를 써야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직업 특성상 감정 조절이 어려운 병을 앓는 상태에서 직장 생활이 가능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앞섰다. 그는 무려 24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정신병을 터부시하는 생각들이 여전한 가운데 누구나 알만한 일터에 다니는 직장인이 자신의 병을 부러 공개한 이유도 궁금했다.


'조울병'에 대해 막연히 극단의 기쁨과 슬픔을 오간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어떤 기전을 통해 발병되는지 치료과정이나 예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드러내며 '조울병'이라는 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한 병적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고 대학생 때 연애 문제로 상처를 받고 나서 가벼운 증상을 보였지만 알아 채기 힘들었다는 것 등이 병의 시작이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병은 본격적으로 발병했고 저자는 "조울의 파도"를 타야했다. 그 사이 두 번에 걸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조울병'이 어떻게 사람의 일상과 주변 관계를 파괴하는지 서술하는 가운데 그의 직장 동료들이 인상에 크게 남았다. 지나치게 일에 몰두해 비정상적으로 바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다 입원해버린 그를 꾸준히 찾아주는 동료가 있었고 일을 계속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부모님의 판단을 만류하는 선배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부모님에게 선배는 "힘든 상태라 잠시 쉬어야 할 뿐이다. 너무 젊은데 일을 중단하는 건 맞지 않다."며 설득했다. 그 선배가 바로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구본준 기자다. 그의 세심한 관찰이 놀랍고 따뜻한 배려가 그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p.45


저자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발병했을 때까지는 '회사'라는 집단에 아직 동료애가 존재했기 때문일까 혹은 그가 다닌 직장의 특수한 문화였을까. 치료과정에 일을 제대로 못했음에도 동료들은 그에게 기댈 수 있는 곁이 되어줬다. 동료의 존재는 저자가 완치되지 않는 조울병을 가진채 오랜 시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다.(그 조직(혹은 동료들)의 문화가 거의 판타지스럽기까지 하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대한 대목도 주의를 기울여볼 만하다. 다른 질환도 그렇겠지만 특히 정신병은 그 특성상 의사와 환자의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의료적 필요보다는 환자를 '타자화'하는 태도가 거리감의 더 큰 원인이 된다. 저자는 취재차 친분이 있던 유명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한 후 실망스런 반응을 마주한다.


기자로서의 용무인지, 환자로서 문제인지 사전에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던 것은 내 실수였다. 환자로서 찾아왔다고 했더니 바로 반응이 달라졌다. '언론계 종사자'에게 반응했던 호의적인 제스처가 금방 사라졌다. 의사와 환자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157


(…) 요즘 정신과 치료에선 정신분석보다 약물치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환자의 말에 성의 있게 응대하기보다는 증상에 잘 맞는 좋은 약을 주는 편이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

환자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의료인의 의무감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배려와 윤리에 기반한 거리 조절이 아니라, 자신이 '열등한 대상'으로서 '타자화'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pp.161-162


저자가 조울병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데는 무엇보다 가족의 조력이 컸다. 가족은 그의 병명을 알게 된 후 관련된 책을 읽으며 병에 대해 공부했다. 피치못해 강제 입원을 결정했을 때 분노하는 저자에게 아버지는 절절한 편지를 써서 그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했다. 언제 재발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들의 의연한 태도는 저자에게 큰 힘이 됐을 게다. 게다가 '완치'라는 끝이 없는 병일때 가족이 지지가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가족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 , 혹시 네가 조울병을 앓았고, 또 계속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해서 네게 중요한 일을 못 맡기겠다거나 아니면 너와 결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너와 인연이 아닌 거야. 그렇게 이해가 부족한 사람하고 어떻게 일을 함께하며, 어떻게 결혼해서 함께 살겠냐."

p.199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정리하며 병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막'과도 같은 조울병을 견디도 있는 삶과 그 과정에서 행했던 일들, 산책, 순례길 걷기, 운동 등의 활동을 정리한 책의 원고를 완성한 것은 2013년이었다. 책이 출판된 때는 2020년이다. 7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공개를 선택했다 해도 자신의 병을 드러내는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개인의 성찰을 위한 글쓰기와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일 사이에는 그만큼의 무게 차이가 있었다.


조울병의 사막을 먼저 건넌 이로서 뒤따른는 다른 이에게 저자는 '의사'를 거듭 권한다. 예전에는 '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마음먹기에 따른 증상으로 여겼지만 '조울병'은 명칭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분명한 '병'이다.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병이니 의사를 찾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의사는 많고 나에게 맞는 의사가 반드시 있으니 다른 의사 찾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전한다.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게 조증을 호소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술을 마시지 말아라. 사람과의 접촉면을 줄여라. 잘 안 되겠지만 혼자서 빈둥대라. 울증 환자에겐 이런 조언을 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아깝더라도 업무량을 줄여자. 산책하라. 스스로 먹을 음식을 천천히 준비하라. 조증이든 울증이든 핵심은 이거다. 괴로우면 의사를 찾아가라.

p.150


저자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조울의 사막을 건넜다. 그러나 책의 문체는 그 시간들을 무겁지 않게 기술한다. 쉬이 읽히지만 그가 살아낸 시간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이 느껴진다. 삐삐언니가 건넌 사막 끝에서 오래 머물 오아시스를 만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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