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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평점 :
견실한 건축가 남편과 조용한 심리상담가 아내가 나무랄데 없는 저택에 산다. 아이 없이 개 한 마리를 키우고 각자의 일에서도 성취를 거둔 부부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해선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부부가 비밀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게 마련이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부 자신도 모르는 듯 감춘,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 예를 들면 남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아내 같은 문제 말이다.
A.S.A. 해리슨의 소설 『조용한 아내』에는 탁 트인 호수와 하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저택에 사는 조디와 토드 부부가 등장한다. 토드는 자수성가한 건축가로 활동하고 조디는 개인심리상담가로 일한다. 외모조차 아름다운 조디는 자신의 이룬 가정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울타리가 영원히 유지되길 바라며 집안 내외를 가꾸고 남편 내조에 헌신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법적 부부가 아니다. 함께 살 뿐 결혼식을 올리지도 혼인신고를 하지도 않았다. 왜?
인생에 주어진 안정과 안전에 감사하며 그녀는 매일의 자유를, 요구와 복잡한 문제가 없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 결혼과 아이를 포기하면서 그녀는 여유로운 공간을 보장하는 깨끗한 백지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p.26
조디는 남편 토드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안다. 하룻밤 상대부터 지속적인 관계까지 대상이 많은 것도 안다. 심지어 토드도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안다. 둘에겐 가식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유지하기위해서 표면적인 평온을 유지하고자 한다. 조디는 ‘주변 사람들의 개별적 욕구와 특이성을 함께 수용하는 태도’로 계속 타협하는 과정이 ‘잘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한 가지 조건만 유지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켜주려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항상 우리를 친절히 대하라는 법도 없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분노와 분개의 감정만이 남는다. 마음의 평화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면을 강조할 때 온다. p.35
조디는 토드의 여자관계가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날 것임을 확신하고 토드 역시 불안한 관계들을 지속할 마음이 없다. 그저 남성성을 과시하며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남성의 당연한 본성이라고 여기며. 결혼관계가 유지되고 안정된 생활만 보장된다면 남편의 바람쯤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믿음은 위대롭기만 하다.
“남자들 모두 언젠가는 바람을 피워요.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내 아버지는 술과 바람을 피운 거죠.”
…
“난 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야 어떻게 보이든, 결혼으로 맺은 유대 관계는 파괴될 수 없는 법이거든요.” p.78-79
파국은 두 사람에게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갈매기처럼 다가온다. 작가는 종종 주변의 묘사를 통해 상황의 진행을 암시한다. 모든 단서를 무시하고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조디와 여느 여자들처럼 적당히 헤어질 거라고 여겼던 토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막다른 길에 갇힌다.
갈매기들은 망설이지도 어물쩍거리지도 않고, 수면 아래 자기들이 원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 전속력으로 곤두박질치며 무모하게 공격한다. 그들의 시끌벅적한 소리, 인간으로 치면 큭큭거리고 고소해하는 소리에도 먹이는 도망가지 못한다. 무엇이 덮치는지 알기도 전에 통째로 삼켜진다. p.135
스릴러라는 장르에 아들러 심리학을 결합한 소설이라고 했다. 한때 대단히 유행했던 아들러 심리학이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바 아는 게 없다. 어떤 부분이 아들러 심리학을 차용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아들러 심리학의 주요 개념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개념들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흥미롭게 읽는 한 가지 팁이 될 것이다. 코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 인물들이 각각 어떻게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지, 인물들의 관계는 어떤 결과로 나아가는지에 주의해볼 수 있다. 또 조디와 토드의 행동의 원인이 되는 열등감의 유래와 가족 구도, 출생순위의 영향 등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아들러 심리학을 기반으로 상담하는 조디가 내담자에 대해 하는 분석과 자신 스스로를 분석대상으로 삼는 부분도 비교해서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개인심리학의 특징은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목적을 분석하고(목적론), 인간을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서 파악하여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등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총체론), 객관적 사실보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의미부여 과정을 중요하게 보고(현상학적 관점), 내적 정신세계보다 대인관계를 분석하고(대인관계론), 주체적 결단능력을 중요시한다(실존주의)는 것이다. 주요 개념으로는 열등감과 보상, 우월추구, 생활양식, 허구적 목적, 공동체감과 사회적 관심, 가족구도와 출생순위, 삶의 과제 등이 있고, 변화를 위한 핵심 요인으로 격려를 강조한다.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네이버 지식백과]
조디에겐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바람피우기를 일삼는 아버지가 있었고, 토드에게는 가족을 구타하는 알콜중독자 아버지가 있었다. 조디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못 본 척 평생을 살았다. 토드의 어머니는 아들이 장성한 후 자신을 보호해 줄 때까지 폭력을 견뎠다. 조디는 삼남매 중 둘째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둘째라는 위치의 특성과 함께 터울이 많이 지는 오빠와의 관계, 또 동생에 대한 역할 등이 그녀의 마음을 형성하는데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조디는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결혼과 아이에 묶여 자신의 삶을 잃고 싶지 않았다. 법적 혼인과 아이를 거부한 이유다. 하지만 그녀가 피하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삶은 스스로 회피했던 조건들로 인해 자신에게 그대로 반복된다.
제러드: 어떤 면에서는 부모님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를 당신이 치르는 셈일 텐데요.
조디: 저는 제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요. 행복해지고 싶어요.
제러드: 행복한 우리가 미리 처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디: 제 처지가 어머니처럼 되고 만다면, 탓할 사람은 저 자신밖에 없겠죠. p.164
조디는 정말로 토드가 죽기를 바란 걸까. 토드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를 잃으면 자신이 무엇을 잃게 되는지 알고 있었던 걸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내 입장은 부정적이다. 조디는 상황에 휩쓸렸을 뿐이다. 냉철해보이지만 실은 순박했던 그녀는 혼란 속에서 자기가 하는 결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우발적인 의도에 따른 결과에 의하면 토드는 조디의 평화로운 삶에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어떤 사건을 전혀 겪지 않았던 듯이 살아가는 능력’을 발견했다. 조디의 ‘능력’은 이번에도 발휘될 것이고 자신이 잃을 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자유’를 누릴 것이다.
숨차게 달려온 모든 서사에도 불구하고 조디의 자기 인식, 세계관, 믿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주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변화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아들러식 결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