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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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만나는 지점이고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경성의 길목이었다. p.107


황석영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에 눈길을 두게 만든 한 문장이다. 소설이 배경이 된 '영등포', 그 장소에 이끌려 책을 들었다. 이젠 떠났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지금 시대는 고향의 의미가 크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따라 혹은 거주 조건에 따라 수시로 이주하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40년 가까이 산 동네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유년기의 기억이 흩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게다. 공기 중에 항상 희미하게나마 기차 철거덩 거리는 소리가 들리던 동네, 오갈데 없는 노숙자들이 곳곳에 누워있는 풍경이 일상인 역주변, 80년대까지 다다미 깔린 2층이 있는 적산가옥이 있던, 홍수가 지면 침수를 걱정해야 하는 동네, 기억 속 영등포의 과거가 책에 들어 있었다. 함께 자란 오랜 친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린 내가 등장하는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책은 발전소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하는 이진오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아파트 십육층 높이, 사십 오 미터 상공에서 위장 파산 후 해외로 공장을 옮긴 사측에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자리를 잡았다. 폭 일미터 남짓에 열여섯걸음 쯤 되는 공장 굴뚝 테두리 위의 생활이다. 이진오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하늘 위에서 꿈인듯 환상인듯 자신을 찾아온 친구와 가족들을 만난다. 그는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강화 출신의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이 일거리를 찾아 오면서 영등포 생활이 시작된다. 마포 나루에서 처음 기차를 본 이백만은 달리는 무쇠덩어리에 매료되고 유달리 좋았던 손재주 덕어 영등포 철도 공작창에 일자리를 잡는다.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삼대의 시작이다.


'영등포'라는 장소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또는 주요 사전의 소재로 소설 속에 녹아있다. 철도와 인연을 맺은 이백만은 가족을 이루고 아들, 손자, 증손자에 이르도록 영등포에 삶의 터를 두었다. 영등포 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가 옛 지명으로 등장한다. 영등포 시장, 문래동 방향에 있던 방직공장, 당산, 옹기말 그리고 나의 옛집이 있던 고추말까지. 영등포는 '진등포'라고 불릴 정도로 진 땅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여름 장마가 오래가면 마당 하수도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등포의 침수는 이백만 가족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이백만이 일하러 나간 사이 삽시간에 집과 동네가 물에 잠긴다. 다행히 이백만의 아내 주안댁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영등포가 도시로서 거친 역사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영등포를 지나는 철도가 놓인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경부선, 경인선 등의 철로가 지나가는 자리의 땅은 강제로 몰수되고 철도건설 노역에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 일제 수탈을 위한 기반 시설 공사에 조선 인민이 희생되었다. 때문에 의병들의 공격 목표가 됐었다고 했다. 조선인의 피땀으로 지은 시설물이 조선 사람들을 황폐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결국 조선인이 파괴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철도가 놓이면서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부역에 끌려나와 고생하고, 가족이나 친척이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열차 운행과 철도공사를 끈질기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맘때에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가 망하여 일어나게 된 의병들도 철도를 주요 공격의 목표로 삼곤 했다. p.79


그러니 어찌 철도가 조선 사람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지 않았겠는가. p.83


책은 이진오의 고공 농성 과정 사이 사이에 이백만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엮어 넣고 있다. 증조부모인 이백만과 주안댁, 조부모 이일철과 신금이, 아버지 이지산과 윤복례의 삶이 신화처럼 펼쳐진다. 특히 주안댁과 신금이 이야기가 특별했다. 인천 바닷가 출신의 주안댁은 홍수로 고립된 남편을 땟목을 만들어 구하고 사람이 깔린 짐마차를 거뜬히 들어올릴 정도로 장사다. 무뚝뚝하면서도 생활력 강한 주안댁은 어려웠던 시절 어떻게든 가족의 삶을 꾸려나갔던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이일철의 아내 신금이는 당시 보통학교까지 나온 엘리트 여성이었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다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이이철을 통해 그의 형 이일철과 맺어졌다. 그런데 신금이는 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신기라고 할 법한 눈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의 미래 또는 마음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미래에 시동생이 될 이이철을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감옥의 창살이 드리울 줄무늬를 봤다. 가제본에서 다 읽지 못한 그녀의 삶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철도 직원이었던 이일철은 월북한 사람으로 나온다. 월북하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아들 이지산은 반공포로가 되었고 한 쪽 다리를 잃는다. 이들이 그렇게 된 이유 또한 책의 후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윗 세대는 일제의 수탈에 맞섰고 그 자손인 현재의 이진오는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항해 노동운동을 한다.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는 농성현장을 찾아 아들을 격려한다. 아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하고 있는 행동, 노동 운동의 의미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꼿꼿한 말을 굴뚝 꼭대기에 위태롭게 선 아들에게 할 수 있기까지는 대체 어떤 세월이 있었던 걸까. 월북한 시아버지 때문에 겪었을 서슬퍼런 공포, 불편한 몸이 된 남편을 대신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을 고난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들에게 이런 당당한 말을 건넬 수 있다니.


"노동 투쟁은 원래가 이씨네 피에 들어 있다. 너 혼자 호강하며 밥 먹자는 게 아니구, 노동자 모두 사람답게 살아보자 그거 아니겠냐?"

"한두달 새 내려올 생각 아예 마라. 쩌어 예전부터 지금까정 죽은 사람이 숱하게 쌨다."

그녀가 하는 말은 큰 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이 늘 입에 달고 쓰던 말이었다. 그 말은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의했고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말이었다. pp.155-156


고공 농성을 시작하던 때 공장 굴뚝에 올라간 이진오가 현수막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난간에 붙잡아 맨 현수막을 안쪽에서 바라보는 이진오의 눈에 글자들이 거꾸로 보인다.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이진오의 농성이 그리고 조금 더 낫게 살기 위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노동자들의 노력이 모두 거꾸로 된 글씨처럼 허망해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하장보동노용고 지저각매할분'이라는 글씨는 농성의 이유를 밝히는 제목답게 크게, '!직복원전 계승조노'라는 글씨는 소제목처럼 그 아래 작게 썼다. 이진오는 그것을 올려다볼 사람들의 세상 반대쪽에서 거꾸로 보이는 글씨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p.12


가제본만 읽은 터라 책의 후반 내용은 알지 못한다. 책의 나머지 반에는 이일철이 월북하게 되는 사연, 이이철이 옥사하게 된 이유, 이지산과 윤옥례가 맺어지게 된 과정이 담겨 있으리라. 작가는 이진오의 고공농성의 끝도 알려줄까. 『철도원 삼대』가 풀어놓는 영등포와 철도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삶과도 이어질 그 마지막이 얼마간 희망적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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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오페라
캐서린 M. 발렌티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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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물이 많으며 쉽게 흥분하는 '지구'라는 이름의 행성"의 한 구석, 잉들랜드. 숙취로 쓰러져있던 물이 가도 한참 간 글램록 스타 데니시 얄로(예명: 데시벨 존스) 앞에 물고기플라멩고가 나타난다. 오묘한 색깔의 물고기 눈과 플라멩고를 닮은 새다리로 서있는 그는 지구의 마지막을 경고한다. 자신은 우주 어딘가 멀리서 왔으며 대니가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에서 인류 문명의 지각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외계의 구성원들이 지구 자원을 소멸시키겠다고 말이다.


뭔가 웃기는 코메디의 시작같다. 캐서린 M. 발렌티의 책 『스페이스 오페라』의 설정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해야 하는, 범우주적 대향연!"이라거나 "짜릿하고 기발한 상상이 폭발하는 포복절도 코믹 SF"와 같은 홍보 문구의 의미를 깨닫는데는 채 2페이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책은 기상천외한 상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상상 불가한 인물(혹은 외계생물)이 등장해 얼핏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 풀어나간다. 영화에서도 자주 보기 힘든 상상의 외계인들을 떠올려보기 위해서, 작가가 설명하는 장면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기 위해서 집중력이 필요했다. 즐거운 상상이 가득한 책이 이렇게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것임을 처음 깨달았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가졌다면 남들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하는 일들이 종종 머리 속에 떠오르는 독자라면 쉽게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난 그런 독자가 아니었다. 지구인에게 일상적인 지구환경 이외의 것들을 책 읽는 내내 상상하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책은 그야말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보다 「루니툰」"의 세계였다.


데시벨 존스가 울며 겨자먹기로 출전해야 하는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는 전 우주의 존재들의 생존 가능성을 검증하는 장이다. 한 번의 퍼포먼스로 그 행성에게 주어지는 우주 자원의 분배와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당연히 무대에 오르는 팀은 그 행성을 대표할 만한 실력을 갖춘 아티스트여야 하겠다. 그런데 당락을 결정하는 심사위원이 외계 생명들이다. 그들의 심미안은 전우주적이다. 일개 행성 거주자들의 오감에 좋은 음악이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의 심사위원 귀에도 좋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가요제 개최 위원회는 지구를 특별히 배려하는 차원에서 우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인의 목록을 보냈다. 그런데 여기에 또 지독한 함정이 있었으니, 데시벨 존스의 밴드를 제외한 나머지 가수들은 이미 고인이었던 것. 인기있었던 때가 언제인기 가물거리는 데시벨 존스에게 준비된 무대는 전 인류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요제의 평가 기준은 무엇인가. 데시벨 존스는 어떤 산을 넘어야 인류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 우주 그랑프리 가요제가 만들어진 계기는 지적 생명체와 '고기'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소비하고, 호흡하고, 배설하고, 소란을 일으키고, 번식하고" "지독하고 본능적인 혐오감"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고기'. '고기'들은 우주선을 만들 정도의 기술은 있지만 "초월성도 없고 영혼도 없"었다. 인류가 '고기'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서는 데시벨 존스가 "소름키티고, 근사하며, 찬란하고, 흠잡을 데 없이 지성체다운" 무대를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인류는 정말 '고기'가 아닌 '지성체'일까. 과연 인류는 전 은하계의 모든 행성이 하나의 문명으로 합쳐지려는 노력에 상응할만한 평화와 화합의 존재일까.


그대들의 작은 행성에 사는 이들은 이와 같은 리듬을 멈추게 하지 않을 만큼 친절한가? 노래꾼들과 이야기꾼들과 비단옷을 입는 사람들을 짓밟지 않을 만큼 친절한가? 그런 짓을 하는 것들은 괴물이라서 그래. 예술을 말살하고, 책을 태우고, 음악을 금지하고, 귀가 있는 존재들에게 "그 시끄러운 소리 좀 꺼 버리라."고 소리치고, 하늘에 대고 진실을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자신만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바깥세상까지 또렷하게 볼 줄도 모르는 것들은 다 괴물이야. 그대들이 사는 곳은 언제 어디서나 음악이 울려 퍼질 만큼 좋은 세상인가?

그대들에게는 영혼이 있는가? p.162


'반짝이펑크족 글램록 메시아'이자 '천상의 글램록 쓰레기 색마'인 데시벨 존스가 인류 대표 아트스트로 선발된데엔 음악성 외의 이유가 있었다. 우주의 화합을 목적으로 한 가요제에서 노래를 부를 가수라면 '화합'과 '공존'의 의미 정도는 알아야 하겠다. 데시벨 존스는 자신의 밴드 앱솔루트 제로스가 겪은 부침에서 '차별'과 '배제'의 고통을 배웠다. 밴드 멤버는 파키스탄 계 나이지리아인과 웨일스계 스웨덴인의 자손인 데스와 일본인과 프랑스인 혼혈인 캐나다계 유대인이었던 미라, 터키 난민 출신 오르트였다. 밴드는 하루 아침에 인기의 정점에 올랐다. 그리고 또 하루 아침에 몰락했다. 불법체류자 강제 추방령에 동요하던 미라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데스와 오르트는 미라의 죽음 이후 하락의 세월을 살았다. 영국 땅에 살면서 최고의 인기를 몰아가던 그룹이 외국인에 대한 '차별'에 꺾인 것이다. 영국의 관료들은 그들을 '영국인 밴드'가 아닌 '잡탕족 밴드'로 부르며 경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들의 목숨도 데스의 목소리에 달렸는걸. 인류가 살아남아야할 가치를 증명할 단 한 사람이 데시벨 존스인걸.


"…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자들은 멸종된 게 아니라 너희들이 멸종시킨 거야. 육식동물이라는 이유로 말이지. 사자들은 육식동물인데다 너희처럼 생기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으니까 너희한테 위험한 존재였겠지. … 더구나 너희들은 사자들이 먹기 좋아하는 물질로 만들어졌으니까."

"… 하마는 어떻게 됐어? 도도새는? 기린은? 게네들은 초식동물이라서 너희 종족이 존속하는 데 전혀 위협이 안되는데도 똑같이 말살해 버렸어. 한 마리도 남김없이. 그 외에도 라코타족과 크리족과 호주의 원주민 태즈매니아족처럼 비슷한 사례들이 아주 많지. 이제 … 형편없는 변명이라도 제발 해주겠니? 너희는 마지막 사자나 하마나 도도새나 마야니 농부의 목을 베기 전에 그들에게 노래할 기회는 줘 봤니? 박자를 정할 시간은 줬어? 자기 목숨을 걸고 춤출 기회는? 단지 먹고 새끼를 낳고 햇볕 아래 누워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죽고 싶은 열망 외에도 더 많은 게 있다는 걸 너희한테 증명해 보일 기회를 그들에게 줬냐고?" p.317


인류는 야만스럽다. 현재까지 보여준 행태는 그랬다.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살육하다 못해 절멸시켰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단지 그렇게 할 수 있으니 했을 뿐이다. 다른 존재의 가치를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외계인들은 자비롭다. 인류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줬으니까. 단 그들이 펼쳥놓은 멍석이 아주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죽은 생명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와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개체도 우주 속의 삶을 함께할 수 있는 일원으로 인정하는 다양성을 지녔다. 하지만 그런 지각력이 있다고 해서 착하기까지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은하 사회도 여전히 사회고 "사회는 쓰레기 같은 거"니까. 노래만으로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 포함돼 있는 초고난이도의 가요제가 펼쳐진다.


삶은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어리석다.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절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한, 우주의 역사와 한 행성의 역사와 한 생물체의 역사는 화면에 가사가 나오는 간단한 노래이자 따라가기 쉽게 반짝이면서도 간간이 평화로운 빛이 감도는 유익하고 친절한 거대 디스코볼이 된다. p.416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를 수도 있다. 난데 없이 전 지구인 앞에 한 날 한시에 외계인이 나타난다. 물고기와 플라멩고 새를 닮았다는 게 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우주선은 스테이크 한 조각과 우유를 마시고 자라난다. 온 집안의 물건들을 흡수해서 쑥쑥. 전자렌지의 액정은 우주선 계기판이 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너구리판다가 네온 빛깔의 거대한 산호초를 닮은 성간 우주선을 조정한다. 책에 펼쳐진 '스페이스'는 상상 불능의 세계였다. 읽은 것을 머리 속에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이 멈춘 것 같았다. 책 홍보에 따르면 <라라랜드> 제작진이 이 호화로운 우주대잔치를 영화화하려고 준비중이란다. 책을 읽으면서 가늠하기 가장 어려웠던 외계의 기준에 부합하는 음악성이 무엇인지는 시각화의 천재들이 만든 영화 개봉 후에야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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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62 Vol.5 : 바이러스 케플러62 5
티모 파르벨라.비외른 소르틀란 지음, 파시 핏캐넨 그림, 손화수 옮김 / 얼리틴스(자음과모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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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62e 행성으로 떠난 여행의 막이 내렸다. 6권의 책에 걸친 질문과 호기심의 시간이었다. 지구로부터 1200광년 떨어진 케플러 62로 간 아이들, 그 아이들에겐 전 인류의 운명을 담은 임무가 주어져 있다. 황폐한 지구를 대신할 인류의 터전을 닦는 일이다. 위험해진 지구를 떠나 인류구원의 임무를 띤 아이들이 우주여행을 떠난다. 현재와 같은 환경 파괴가 계속된다면 지구 이외의 삶을 터전을 찾는 일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다. 핀란드와 노르웨이의 작가 티모 파르벨라, 비외른 소르틀란의 케플러62에 등장하는 케플러62e는 거문고자리에 실제로 존재하는 행성이다. 책은 생명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지구형 행성으로 탐험대를 파견하는 설정이다. 놀랍게도 탐험대는 십대의 아이들이며 선발 방식은 게임이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아이들의 상상력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 아이들은 실제로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 남는다. 다만 아이들이 맞닥트린 위험들이 새로운 행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데 이 책의 반전이 있었다.


아리, 요니, 마리에를 비롯한 개척자 일행이 도착한 행성의 자연환경은 지구 못지 않다.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초원, 울창한 삼림에 풍부한 물까지 일견 완벽해보이는 이곳 케플러62e. 걸림돌이 있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선주민이다. 털없는 곰을 닮은 그나메르 족과 사람보다 큰 여치 형상의 초원족. 행성의 선주민과의 공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을까. 아이들이 타고 떠난 우주선은 1492년 콜럼버스가 인도대륙을 찾아 떠날 때 탔던 배들의 이름을 땄다. 새로운 행성에서 우리 인류는 또다른 콜럼버스가 될 것인가. 4권이까지 보아온 케플러로의 여행은 아이들이 개척자라는 이름의 살육자가 되는 길을 따르는 듯 보였다. 앞서 초원족과 조우했던 마리에는 그들의 선의를 믿는다. 다른 일행들은 낯선 존재들을 신뢰해야 할 지 선뜻 판단하지 못한다.


개척자 일행 안에서 분열이 일어난다. 뭔가를 숨기는 듯한 지휘자 올리비아의 행동때문이다. 의문스러운 캡슐의 정체를 숨기고 무기에 등록된 생체 정보를 몰래 변경한다. 그녀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 각자의 특기를 발휘해 살아남아야 하는 이 때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왕이라니. 올리비아는 공생의 방법을 찾기 보다 폭력을 앞세우는 인간을 회의하면서도 해결방법은 그 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독자에게 올리비아의 판단에 대한 생각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나보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지시가 나의 생각과 다를 때 특히 그 결과가 파괴적일 것이 자명해 보일 때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를 묻고 싶었던 듯하다. 올리비아와 같은 수동적인 판단에 안주하는 것으로 책임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왜, 인간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 걸까? 서로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 외에는 진정으로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케플러62 VOL.5』 p.43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실패의 연속일 뿐이다.

『케플러62 VOL.5』 p.121


초원족이라 불리는 대형 여치를 닮은 종족들과 마리에의 생각은 올리비아와 다르다. 폭력을 폭력으로 혹은 할 수 있다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빠른 방법을 옳다고 생각하는 그 반대편에 초원족과 마리에가 있다. 마리에는 세계적인 게임 및 군수산업 수장의 딸로 태어났다. 부족한 것 없이 누리고 살았고 돈으로 친구까지 살 수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폭력을 믿지 않는다. "KILL THEM ALL"을 가훈으로 삼은 집안 내력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마리에 안에 숨겨진 따뜻함을 초원족이 알아봤을 것이다. 지구를 파괴한 힘이 케플러62e를 위협하자 마리에는 괴로워 한다. 초원족은 엄청난 에너지의 근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또한 파멸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지목된다. 자신의 힘으로 초원족과 행성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한 마리에는 초원족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리에의 머리 속에는 초원족의 목소리가 울린다.


선한 힘을 믿어야 한다. 오직 선한 힘만.

희망을 가져라.

『케플러62 VOL.6』 pp.78-80


무엇이든 지배하려는 왕 앞에서 '선한 힘'과 '희망'이 의미가 있을까. 이야기 속에서는 물론 의미가 있다. 의미가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긴 시간을 두고 볼 때 의미있는 일이 단기적으로 고통뿐일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럼에도 선함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이 손 잡을 수 있어야 탐욕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위험을 앞두고 서로의 손을 잡은 마리에와 아리처럼.


마리에가 손을 내밀었다. 아리는 마리에의 손을 덥썩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은 바짝 말라 있었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길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따스했다.

『케플러62 VOL.5』 p.94


정세랑 작가는 이 책을 추천하면서 "이 책을 읽을 어린 SF 독자들이 경험할 짧지만 강렬한 몰입이, 어쩌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채널예스, http://ch.yes24.com/Article/View/41591) 『케플러62』는 어린이 또는 청소년 도서라고만 분류하기엔 아까운 책이다. 세계를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인간이 복잡한 존재이고 모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게임 중독, 환경 문제, AI의 폭주같은 현재 또는 근 미래에 대두될 수 있는 문제를 흥미진진하게 다루면서도 잊지 말아야할 존재에 대한 존중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말한다. 등장인물 묘사는 아기자기 하지만 그 귀여운 인물들이 마주하는 환경에 대한 묘사는 서늘할 때가 있다. 그림과 내용의 조화가 탁월하다. 글에 맞춰 그림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문장과 함께 간다. 그림이 이야기를 대신하기도 한다. 글쓴이와 그린이의 협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아이들이 한 번 읽고 재밌어 하는 책과 자꾸 보면서 생각을 다시 해보는 책은 다르다. 『케플러62』는 후자다. 한 눈에 내용을 일별 할 수 있는 책도 아니거니와 등장인물의 심리도 숙고해봐야 한다. 생각하는 책읽기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어렵지 않다.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재미를 느끼는 과정에서 아이의 생각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는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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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이의 초강력 수련기 1 - 머니맨 어벤저스, 건방이 시즌2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 6
천효정 지음, 이정태 그림 / 비룡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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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수련이 초강력 수련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하늘의 방위'라는 진지한 뜻의 이름을 스승 오방도사에게 받은 건방이는 시즌1을 통해 진정한 무술인이 되는 길을 찾아왔다. 시즌 1의 다섯 권은 건방이가 오방도사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고 도꼬, 초아, 오지만, 최호길과 같은 무술인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을 그렸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사연과 성격을 지녔다. 주인공 건방이는 권법을 수련하고, 검술을 연마하는 초아를 좋아한다. 각석술 발차기를 필살기로 쓰는 도꼬, 이 초3 어린이의 실제 나이는 서른 중반이란다. 회춘풀을 먹고 지나치게 젊어진(?) 거다. 최호길은 학교 일짱, 오지만은 뭔가 미심쩍은 암수를 쓰는 학교 최고의 정보통이다.


건방이와 도꼬는 '머니맨'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생들의 보호자로 활동한다. 학교 주변에서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은 "머니맨 도와줘요!"를 세 번 외친다. 정체를 숨긴 두 명의 머니맨은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다른 무술인 친구들도 머니맨을 돕는다. 새로운 시즌 첫 번째 책 <머니맨 어벤저스>에는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유튜브 스타 '송송' 그 주인공이다. 예쁜 외모에 돌고래 고음으로 큰 인기를 얻은 스타가 건방이네 학교로 전학을 온 것. 그리고 학교에 온 첫날부터 건방이를 찾아와 아는 척을 한다. 초아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방이와 역시 같은 마음인 호길이는 서로 다른 이유로 긴장감에 빠져든다. 그 와중에 '적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악인이 나타난다. 화난 아이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적귀와 대적해야하는 머니맨, 쉽지않은 상대를 어떻게 꺾을까. 송송이는 자신의 특기를 활용해 머니맨들이 예상치 못한 도움을 준다.


『코드네임』의 작가 강경수가 그림을 그렸던 시즌 1에 이어 시즌 2에서는 이정태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었다. 시즌 1의 그림이 손맛이 느껴지는 만화체였다면 시즌 2는 좀더 시각적이다. TV만화영화나 게임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선명하고 사실적인 그림이다.


어린이 심사위원이 수상작을 뽑았다는 2014년 제2회 스토리킹 수상작에서 시작한 시리즈이기 때문인지 건방이 이야기에는 은근슬적 교훈을 드러내는 어른의 눈이 없다. 앞선 시즌에서는 아이들의 스승들이 등장해 가르침을 주기도 했었던 듯 하지만 시즌 2의 시작에는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잠깐 얼굴을 내비치는 단 하나의 의미있는 어른인 담임선생님은 그 별명이 AI다. 농담할 때조차 무표정하다. 때문에 시즌 2의 1편 머니맨 어벤저스는 아이들 세상이다. 유튜브 스타를 동경하고, 항상 돈이 궁하고, 좋아하는 이성친구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아이들 말이다. 공부에 치이고 학원가기 바쁜 현실판 아이들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에 빠져든다. 능력을 연마하면 뛰어난 실력을 갖게 되는, 어려움이 닥쳐도 친구들과 함께 이려낼 수 있는 세계. 이야기를 통해서나마 아이들이 네 활개를 펼칠 수 있길 바란다.


무슨 도사와 문하 제자들이 등장한다해서 치고 받는 무공 장면만 계속되는 건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는 선악의 문제, 정의의 기준과 같은 가치에 대한 판단을 생각하게 하는 질문들이 있다.


"머니맨 같은 녀석들은 나약해서 그런 놈들에게도 인정을 베풀기 때문이야. 인정이란 것은 본시 사람에게 쓰는 것이지, 쓰레기에겐 필요 없는 것인데 말이다. 안 그러냐?" p.15


도깨비 가면을 쓴 적귀의 말이다. 누군가를 인간적인 감정으로 돌보는 인정이라는 마음은 과연 '쓰레기'라 불리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겐 가지면 안되는 걸까.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진을 떠올려 보면 맞는 말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들도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모두 싸잡아 '쓰레기'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아이들이 생각을 더 했으면 하는 대목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송송처럼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 네가 어떤 애를 이상형으로 생각하든지 간에 나는 변함없이 그냥 나일 거야. 그러니까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p.159


건방이에게 송송이가 고백하는 말이다. "나는 변함없이 그냥 낭리 거야."라는 말이 통쾌했다. 좋아하는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초등 6학년 소녀는 분명 아주 멋진 아이일 거다. "네가 무엇을 바라든 내가 그 모습이 될게."가 아니다. 통쾌하기까지 하다. 이말은 생각이 뚜렷한 무술인만이 아닌 세상 모든 소년소녀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자아가 뚜렷해야 상대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자기만 내세우진 않아야겠지만.


<건방이> 시리스 시즌 2에서는 발랄한 무술 소년소녀들은 머니맨 어벤저스를 결성했다. 두 명이 활동하던 머니맨이 더 큰 적을 만나 여러 명이 모인 어벤저스로 변화한 것이다. 앞으로 더 확장될 모험에선 또 어떤 위협적인 적을 만나 강력한 수련을 쌓게 될까. 건방이의 다음 수련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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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발견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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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즉시 고전이 된 베스트셀러”라니, 홍보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의 발견”이라는 제목도 거대한데 출간과 동시에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걸까. 840쪽의 책 두께는 고전에 가까웠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대개 벽돌 두께를 가볍게 넘는 법인데 『진리의 발견』도 못지않은 부피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읽게 된 계기는 미리보기로 읽어본 에피소드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토막토막 연재된 글들이 흥미로웠다. 이렇게 존재감있는 부피의 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볍고 아름다운 문체였다.


책의 발문에서 다시 한번 흐믓해졌다. 올리버 색스의 친구였던 위스턴 휴 오든의 문장이었다. 올리버 색스와 관련 된 모든 것을 애정할 준비가 된 나에게 책 두께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별들이 타오른다면

우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하지만 우리가 보답할 수 없다면

동등한 애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좀더 사랑하는 쪽이 내가 되도록 해야지

- 위스턴 휴 오든


결론부터 말하자만 프롤로그부터 퐁당 빠져버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무슨 밑줄을 이렇게 많이 치고 색색깔의 택은 또 어찌나 많이 붙였는지. 시는 아닌데 시 같은 울림이 있는 문장이 책 속에 한가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전기인 듯도 하고 네 세기에 걸친 역사서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맥락였다. 여성에 대한, 여성을 사랑한 여성의, 여성과 여성의 이야기였다.


책은 케플러부터 시작한다. 정확히는 케플러의 어머니에서 시작한다. 케플러가 우주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쓴 책 《꿈》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린다. 사람들이 책의 우의적 묘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어머니가 고초를 겪은 이유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를 불학무식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본성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결정한 사회적 위치”였다는 말이다. 『진리의 발견』의 저자 마리아 포포바는 사회가 세운 한계를 뛰어넘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지만 마거릿 풀러,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레이철 카슨을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세 인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인물들이 살아간 시대의 상호관계와 주변 인물 사이의 연결점을 살필 때 한 인물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독립된 개인이라는 환상”, “타자라는 환상”을 탈피할 때 더 큰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다른 삶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pp.15-16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장편 서사시《오로라 리》의 모델이 된 마거릿 풀러는 미국의 여류평론가, 편집자, 여권운동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고 그녀의 드라마틱한 일생이 놀라웠다. 에머슨의 초월주의 운동을 함께 했고 죽기 전에 이탈리아의 해방운동에 참여해 그 과정을 글로 남겼지만 그녀의 가족과 함께 바다에 수장됐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나는 탁월해지기로 했습니다.”라고 선언했던 풀러는 “천재가 될 수 있는데, 누가 여편네가 된단 말인가?”라고 물으며 자신만의 길을 갔다.


《오로라 리》를 좋아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안에서 침잠했고 자신의 사랑에 몰두했다. 에밀리의 뜨거운 문장 뒤에는 수전이 있었다. 에밀리는 수전을 향한 사랑을 시에 고스란히 담았다. 수전은 먼저 에밀리의 친구였지만 후에 그녀의 오빠와 결혼한다. 평생 가까이 살면서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다. 저자는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시인으로서만이 아닌 여성을 사랑한 여성의 삶으로 다룬다.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모호한 의미로 마음을 설레게도 하고 꾸짖기도 하는” 그녀의 시들은 오랫동안 “후대에 남기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침묵의 봄』으로 잘 알려진 레이첼 카슨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눈길을 끈 것은 그 책과 말라리아 창궐의 연관성을 언급한 부분이었다. 『침묵의 봄』을 주제로 한 토론 모임에 참여했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가 한참 오가던 중 이 책이 아쉬운 부분이라며 어떤 분이 한 말을 『진리의 발견』에서 다시 만났다. 레이첼 카슨이 살충제 사용을 억제한 덕분에 말라리아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토론 당시에는 사실관계를 몰라서 침묵했다. 마리아 포포바에 따르면 그러한 악의적인 주장은 카슨을 반대하던 쪽에서 퍼뜨린 허위주장이었다. 내 머리 속에 든 수많은 허위 중 하나라도 수정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침묵의 봄》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 내가 이 책에 대한 논평을 트위터에 공유했을 때 누군가가 2500단어로 된 논평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답글을 달았다. 그는 당시의 허위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말라리아로 100만명이 사망한 책임을 카슨에게 돌렸다. 문화의 세포에 일단 자리 잡은 허위의 반감기가 이토록 길다. p.763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은 거미줄같은 책이다.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 속에 책 속 다른 인물의 인생 한 부분이 지나기도 하고 수세기를 앞뒤로 오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 많은 인물들이 서로서로 이렇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또 포포바는 그걸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책의 목차에는 각 장이 하나의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표시돼 있지만 책 내용 전체는 흐르듯이 연결된다. 앞장의 인물은 뒷장에 또 그 다음에 계속 등장한다. 그리고 목차에 표시된 인물 뿐 아니라 들으면 알만한 반가운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칼 세이건 같은. 특정인의 전기적 사실을 읽는다기 보다 어떤 흐름에 이끌린다는 기분으로 읽기를 권한다.


저자는 “아름다움 같은 어떤 진실은 상상과 의미 부여라는 빛을 슬쩍 비출 때 가장 명확하게 보인다”는 말을 저술의 기본 태도로 삼았다. 인물에 대해 끝없이 상상하고 그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기존에 알았던 그녀들의 모습보다 더 선명하고 친근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마리아 포포바가 묘사하는 장면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상상과 의미부여가 있었기에 새로운 마거릿 풀러와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레이첼 카슨의 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나게 아름답고 견고한 진실을 말이다.


아름다운 삶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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