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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3 세트 - 전3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평점 :
우린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제주도다!
『제주도우다』 1권, p.297
해방 후 일본에서 귀향길에 오른 제주민에게 미군이 물었다. 북조선으로 가겠느냐, 남조선으로 가겠느냐. 전쟁 중 살아남기에 급급해 조국의 상황을 몰랐던 사람들은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북도 남도 아닌 제주도로 가겠다"고.
제주도는 이질적인 환경 때문에 육지와는 다른 역사적 상황에 종종 처했다. 육지에서 구할 수 없는 특산물을 공물로 수탈당했고 빼앗기다 못해 탈출하려는 주민을 묶어두기 위해 이 백년 동안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은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로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기에는 군사기지로 이용됐다. 한라산 자락의 조붓한 농토와 바다에 의지해 살아온 제주민은 고립된 지리적 특성때문에 역사적 격변기를 더 혹독하게 겪었다. 작가 현기영은 제주가 겪은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소설 『제주도우다』에 형상화했다.
제주 출신의 현기영 작가는 공식 역사가 덮어왔던 섬의 실상을 꾸준히 밝혀왔다. 소설집 『순이삼촌』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4·3항쟁과 제주 현대사의 이면을 파고들었다. 「순이삼촌」을 출판한 후에는 독재 정부에게 고문당하고 금서로 지정되는 고초를 겪었다. 당시의 권력자가 30년의 비행을 감추고자 한 일이었다. 작가이기 이전에 제주민이었던 현기영이 당한 상황은 1940년대가 여전히 실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제주가 헤쳐온 환난을 소설 『제주도우다』에서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의 역사로 표현했다. 그런데 소설 속 그 세월은 과거가 아니다. 현재도 굳건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제주4·3정립 연구·유족회는 제주 각지에 추모·표지석을 세웠다. 추모 표지석 내용을 눈여겨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표현이 보인다. "이곳 세화리 1452-3번지는 4·3 당시 제1구(제주) 경찰서 세화지서 옛터이다.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무장폭도 40여명이 세화지서를 습격했다." 여기서 '무장폭도'로 지칭된 사람들은 누굴까. 제주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이 표지석을 본다면 그 사람은 '4·3'과 경찰서를 점거한 '폭도'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2023년 제주에는 아직 남과 북으로 우와 좌로 나뉘었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제주도우다』는 선문대할망의 전설부터 1950년대까지 제주의 역사를 그린다. 노년에 이른 작가 현기영은 자신이 나고 자랐으며 작품활동의 근원이 된 제주의 총체를 하나의 소설에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간 장편, 중단편 소설을 출간하며 꾸준히 알렸던 제주와 4·3이 『제주도우다』에 망라돼있다.
소설은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자 부부 임창근과 안영미가 4·3항쟁을 다룬 장편 다큐 기획에서 시작한다. 제주 출신인 안영미에게는 4·3항쟁에 가담했던 할아버지 안창세가 있었고 다큐는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할 예정이었다. 안창세는 참사의 와중에 "누나와 외삼촌을 한꺼번에 잃었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끌려갔었다." 그는 평생을 "그 사건에 영혼이 붙들린 채" 고립된 삶을 살았다. 손녀 부부의 청에도 안창세는 끝까지 입을 다물려했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리라는 절망감때문이었다.
"(…) 그건 천하 인간 세상에 없던 일이여. 바로 지옥이주, 지옥! 아무리 내가 말해주어도 느네들은 당최 모른다게. 당해보지 못한 너네들이 어떵 그 엄청난 걸 이해할 것고. 모르고서는 좋은 영화 못 말들주. 엉터리밖에 못 만들어."
할아버지의 말 속에는 그때 그 사태를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줘도 결코 그 참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깊은 단절감이 있었다.
『제주도우다』 1권, p.17
안창세의 일생이 "영미야, 창근아"로 시작하는 이야기로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에는 제주도의 기원과 역사가 스며있다. 선문대 할망 설화, 고려 시대 복속, 조선 시대의 수탈과 민란, 기미년 3·1 만세운동이 이어진다. 제주는 혹독한 일본의 착취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항일 시위를 조직했던 활동가들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어린 창세와 누이 만옥은 항일 투쟁 회오리 속에 비밀 야학을 다니며 배움을 계속했다.
사람은 그 산천을 닮는다고 했거니와, 그들을 가난하제 만든 화산섬의 척박한 풍토는 그들의 심성을 거칠게 만들기도 했다. (…) 게다가 그곳 선비들 중 상당수는 유배객과 망명객의 후손이었으니 그들의 핏속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분노의 씨앗이 감춰져 있기도 했을 것이다. 출륙 금지에 의한 이백년간의 유폐 생활이 그러한 심성을 더욱 조장했을 것이다. 그 선비들은 교활을 싫어하고 단순명료를 좋아해서 어떤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목숨까지 바치기도 했다. 관권의 침학이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민란이 일어났을 때, 몸 바쳐 무리를 이끄는 장도(將頭)들이 바로 그들 중에서 나왔다.
『제주도우다』 1권, p.43
창세의 아버지는 바다에서 죽었다. 남매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배워온 재봉질로 끼니를 이었다. 섬 사람들의 생활은 칠만 관동군이 제주에 주둔하면서 "삶이 아닌 삶"이 됐다. 섬주민 전체가 전쟁 준비에 강제로 투입됐고 물자란 물자, 낱알 한 톨까지 징발당했다. 어린 창세도 잔뜨르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 끌려간다. 작가는 서사 곳곳에 당시 불렸던 노래 가사를 넣었다. 이야기에 녹아든 유행가, 군가, 동요 등은 문화사 자료같이 보여 작품에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한라산 곧은 나무는 전신주로 다 나가고
보리깨나 거둘 밭은 비행장으로 다 나가고
말깨나 하는 놈은 감옥소로 다 나가고
아기깨나 낳을 년은 정신대로 다 나가고
힘깨나 쓸 사내 놈은 강제 노력에 다 나가니
도대체 이놈의 종노릇이 웬말이냐
『제주도우다』 1권, p.101
일왕의 항복 후 섬은 자유의 희망으로 가득찼다. 주민들은 빠른 시간 안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차치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이 섬에 들어오기까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미군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아직 섬에서 철수하지 않은 일본 관동군이 치안을 담당하게 했다. 미군이 주둔한 다음의 형세는 점입가경이었다. 주민들의 민주적인 조직 인민위원회를 해산하고 인력부족을 이유로 친일세력을 재등용했다. 미군은 주민들을 구경거리 삼았고 민간인 살상도 서슴지 않은데다 일제때와 같은 수탈이 다시 시작됐다. 제주민에겐 일제나 미군정의 지배가 다르지 않았다.
3권으로 이뤄진 소설의 1권은 미군정의 본색이 드러나고 해방 후 잠시 찾아왔던 자유의 분위기에 암운이 닥치는 1부와 2부를 다룬다. 시기로는 1945년까지. 2권 3부에서는 도민들의 귀환과 반미 시위, 충남부대, 서북청년단 등 육지 토벌 부대 입도, 단독선거 반대 시위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1948년 초까지의 상황을 그린다.
맥아더는 일본 경제의 안정을 위해 조선인의 은행 잔고를 동결시켰다. 해방 후 귀국하려는 섬주민은 빈털털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수가 7만. 섬의 빈곤은 갈 수록 정도를 더했다. 미군의 폭정을 견디는 제주민은 남과 북을 나눠 통치하고 각각의 정부를 세우겠다는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위는 갈 수록 고조됐고 폭력 진압을 위한 토벌대가 투입됐다. 서북청년단의 등장이다.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온 청년들을 기독교 단체에서 거뒀고 이들이 폭력조직 서북청년단의 모태가 됐다. 공산당에 대한 피맺힌 원한을 제주 학살로 해소한 이들은 종교의 품 안으로 돌아가 신분을 세탁하고 선량은 국민이 됐다.
밑도 끝도 없는 동족의 학대를 마주한 섬 사람들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념을 선택한 이는 삶을 선택한 사람을 뒤로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뜨거운 열정으로 뭉쳐 있던 결속과 믿음에 공포와 불신의 기류가 밀려들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좌우 개념 없이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해오던 공동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탈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향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니, 상당수가 대청과 학련에 가입했다.
『제주도우다』 2권, p.307
3권 4부는 1948년 4·3봉기 직전과 직후를 그린다. 3월 6일 조천중학원 자치회 회장 김용철 조천 지서 사망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스스로를 '인민자위대'라 칭한 입산 청년들은 4월 3일 봉화를 올리고 "일제히 경찰지서들을 습격했다."
4월 3일에 산부대가 공격한 곳은 스물네개 경찰지서 가운데 고문이 심했던 열한개 지서, 그리고 경찰 후원회 간부, 대청 간부 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사망자는 민간인 여덟명, 경찰 네명, 산군 두명이었다.
『제주도우다』 3권, p.25
토벌 명령을 받았던 9연대 연대장 김익렬과 산부대 군사총책 김달삼은 무익한 전투를 피해 평화협상에 나섰다. 그 사이 시간을 번 미군정은 전열을 정비해 무력 진압에 나섰다. 온건파 연대장을 전출시키고 서청 인원을 대거 파견했다. 5·10단독 선거를 막으려는 제주의 투쟁은 필사적이었다. 5·10선거 보이콧으로 토벌 작전은 더욱 격화됐고 입산자는 갈 수록 늘었다. 토벌대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고문했다. 행방불명이 속출했다. 안창세는 그 때를 회상다.
잡히면 무조건 죽도록 때렸주. 형편없이 두들겨 패니 살 수가 없어. (…) 그러니 입산할 수밖에. 그 사람들이 뭐 사상이 있거나 특별히 애국심이 많아서가 아니고 그냥 매 안 맞으려고 입산한 거라.
『제주도우다』 3권, p.57
항쟁의 거대한 불꽃은 이제 급격히 그 생명력을 잃고 있었다. 살기 위해선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공포가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더니, 절망적 상황이 된 지금에는 공포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군경 토벌대의 무자비한 파괴 공작은 그때까지 한 몸 같았던 도민 공동체를 두쪽으로 찢어놓았다. 두쪽으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적대관계가 되도록 내몰렸. 모든 사람이 좌냐 우냐, 산이냐 해변이냐,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찢겨나갔다. 저항 세력을 산부대, 산군 혹은 산사람이라고 부르던 것이 토벌대가 시키는대로 차츰 폭도 혹은 산폭도로 변해갔다. 폭도 놈, 폭도 년을 흔히 불렀다. 처음에는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으나 그렇게 불러야 살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산사람은 이제 두렵고 낯선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우다』 3권, pp.69-70
소설의 5부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한다. 제주 파병을 거부한 이 사건으로 산부대는 한 때 고무되지만 토벌대들은 남자만 보면 총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벌은 해안에서 산쪽으로 일정하게 진행됐다. 산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소개된 산마을은 불태워졌고 마을에 남은 사람은 학살됐다. 학살의 이유따윈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시체가 됐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은 산부대의 전력을 무화시켰다. 마을은 잿더미가 되고 이웃과 가족은 처형돼 시체로 나뒹굴었다. 산군은 공포에 빠진 주민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굶주림 속에 하나둘 죽어갔다.
산군과 마을의 연락병 역할을 하다 입산한 창세는 토벌대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투항했다. 혹독한 고문을 견딘 끝에 석방된 그에겐 산에 남은 스승이 준 만년필이 있었다. 살아남아 겪은 모든 일을 글로 쓰라던 스승의 당부는 지켜지지 못했다. 안창세에게 4·3의 기억은 결코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뭔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아아, 우리의 죽음이 아무 보람도, 아무 가치도 없는 죽음이 되어버렸어. 그것이 원통해! 도대체 이건 인간의 죽음이 아니여. 짐승의 죽음이라도 이런 떼죽음은 없어. 너무 억울해, 원통하고 절통해! 우린 결코, 우린 결코 죽어도 죽지 않을 거여! 너무도 원통해 죽어도 죽을 수 없어!
『제주도우다』 3권, p.265
소설 마지막 대목의 문장은 핏물과 한탄에 잠긴 듯했다. 안창세의 목소리는 죽음과 죽음과 죽음, 끝없는 죽음을 전한다. 청년의 죽음, 촌민의 죽음, 할아버지와 손자의 죽음, 형제의 죽음, 젊은 부부의 죽음, 젊은 아낙의 죽음, 노파의 죽음,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죽음, 엄마와 아기의 죽음……
작가는 4·3의 참상 속에도 삶이 있음을, 그 풍경을 받치는 섬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투쟁 가운데 사랑을 꽃피었고 연을 맺었으며 아이가 탄생했다. 산군은 토벌대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밤을 도와 아내와 재회하고 밭의 곡식을 베었다. 한라산 중산간의 말 목장에서 어린 말을 길들이는 순간을 그리는 대목과 원정 물질에 나서는 해녀들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은 작가의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4·3의 시간을 산 생존자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럼에도 어느 한쪽이 다른 일방을 '폭도'라 지칭하는 표지석을 세우는 일이 가능하다. 집단 학살에 가담한 자들이 피해자인 양한다. 표지석을 묵과하는 마음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일을 생각하는 건 아닐지. 그런 가책 때문에, 같은 도민끼리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무지한 뻔뻔함을 견디는 건 아닐지.
작가 현기영은 『제주도우다』에서 통해 4·3을 탈이념화했다. 제주도민은 이념이나 사상때문에 투쟁에 나선 것이 아니다. 일제와 다르지 않은 미군정을 반대했고 사람을 빨갱이로만 보는 서북청년단과 토벌대의 폭거에서 목숨을 구하려했을 뿐이다. 민중을 수탈하고 독재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반대의 의견을 잠재워야 했던 쪽이 이념을 외피삼았다. 현기영의 『제주도우다』는 피 맺힌 민중의 목소리다. 아직도 붉고 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