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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페스트 / 시지프 신화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154
알베르 카뮈 지음, 이혜윤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6월
평점 :
『시지프 신화』에 편두통을 앓았음에도 불구 아름다운 장정에 반해 『페스트』를 읽고 감동한 끝에 다시 잡은 카뮈. 카뮈는 "같은 주제로 세 개의 장르에 걸쳐 작품을 쓴 유일한 작가"라고 한다.(서평가 로쟈 이현우) '부조리'를 테마로 쓴 작품은 소설 『이방인』,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다. '반항'을 중심으로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계엄령』을 묶었다. '사랑'을 주제로 에세이 『안과 겉』을 썼고 소설 『최초의 인간』을 미완성 유고로 남겼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자면 앞서 읽었던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는 중심 주제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을 읽어 보니 앞의 두 작품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물론 세 작품 모두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포함돼 있어 같은 작가의 작품 경향을 알 수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희곡과 에세이를 더 읽어 봐야 작가의 '부조리', '반항', '사랑'에 대해 알수 있을 텐데 『이방인』은 독자로서의 의욕을 꺾이게 만들었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p.11
아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강렬한 첫 문장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벌써 화자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이 드러난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고 알게 됐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망 시점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모른다는 부연 설명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장들은 '어머니'와 '사망'의 관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나' 뫼르소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상식를 벗어나 보이는 화자의 언행은 작품 내내 이어진다. '부조리'라는 철학적 테마를 구현했다는 소설에서 '상식'을 찾는 독자가 '비상식'적일까.
뫼르소는 "어머니 일만 없었다면"이라며 산책을 즐기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냐는 제안은 거절한다. 어머니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제는 드러누워 12시간 동안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는 주변 타인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일에서도 '무의미'함을 되뇐다. 어머니의 죽음에 "내 탓이 아니라며" 그런 말조차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으며 야심을 뒀던 학업을 포기한 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학창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고 말한다. 무의미로 점철된 삶이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언제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까.
p.23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결국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p.26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p.
"결혼하고 싶은지" 묻는 여자 친구에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아무 중요성도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며 비슷한 관계의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했을" 거라 답한다. 연인(과 같은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누구나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비슷하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는 그런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런 모든 것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p.38
'나'가 그나마 긍정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대상은 자연이다. 장례 중에 "열어놓은 문으로 시원한 밤공기에 꽃향기가 실려"오는 걸 느끼고 장지로 가는 길에서 "상쾌한 흙냄새를 들이마"신다. "퇴근해 부둣가를" "걸으며 돌아오"던 중 "하늘은 초록빛이었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며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감정 역시 결정적 사건을 앞두고 변화한다. "뜨거운 햇볕에 마치 따귀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느껴지고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에" "머리속이 꽝꽝 울리"는 가운데 뫼르소는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짙은 취기(醉氣)"에 빠진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눈앞에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뜨거운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후볐다. 그때 모든 것이 흔들렸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비 오듯 쏟아놓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뻣뻣해지고, 총을 든 손에 경련이 났다. 방아쇠는 부드러웠다.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p.51
'태양'때문에 권총이 발사되고 "불행의 문" 열렸다. 뫼르소도 그렇게 느꼈는지는 의문이다.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태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 생활 중에 괴로운 일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 정도다. 그는 곧 익숙해졌고 불행하지 않았다. '습관'이 된 괴로움, "언제나 같은 날이" "감방으로 밀려오는 것"이란 표현에서 『시지프 신화』의 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실패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지속되는 삶과 그것을 지탱하는 습관의 힘을 말이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뫼르소가 자신과 대면하는 기회였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배운 뒤부터는, 지루한 일도 없어졌다. (…) 그처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무시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p.63
천장에 뚫린 창문으로 다가가서 마지막 빛 속에 다시 한 번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심각하다고 해서 놀라울 건 없었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달 이래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 귀에 울리고 있었던 소리임을 알아차리고, 그동안 줄곧 내가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p.65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의 변화를 더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의 욕망을 발견한다.
(…) 문지기는 나를 바라보고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때 나는 무엇인가 방청석 전체를 격앙시키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71
(…) 셀레스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나를 위해 자기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p.71
뫼르소의 변화가 회개로 가는 길을 열거나 하진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고 그는 죽음이라는 숙명이 20년쯤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며 자신의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 예를 들면 오늘이나 내일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뭔가를 뉘우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애인을 만들었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며 "영원히 관계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받아들이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커다란 분노가 내 죄를 씻어주고 희망을 모두 가시게 해 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비로소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나,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p.94-95
'삶의 끝은 죽음이고 예외는 없다'는 인생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뫼르소의 태도는 이해하겠다. 죽음 이후 찾아올 신의 세계를 강요하는 종교인을 고함으로 쫒아낸 일도 납득이 간다. 세계는 사형수 하나의 죽음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뫼르소는 형제애를 느낀 건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뉘우쳐본 일이 없는 그이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오늘 이 순간도 꿋꿋이 받아들여 심지어 행복을 느끼는 걸까? 수감 기간에 그나마 느낀 세계와의 관계를 사형집행날 많은 구경꾼을 만남으로서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걸까? 그러면 그는 죽음의 순간에 외롭지 않을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오늘을 충실한 것에 행복을 느낄까.
뫼로소의 마지막은 여러모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사르트르의 해설과 책 말미의 '알베르 카뮈와 그 작품 세계에 관하여'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에는 『페스트』에서 느꼈던 공감의 정서가 없었다. 현실을 그린다기 보다는 철학적 알레고리로 작품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미진함이 남는다.
펜데믹 상황에 이입하며 『페스트』를 읽고 감동한 독자라면 『이방인』에 비슷한 기대를 갖진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