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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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생산력이 폭발한다. 신작이 속속 출간된다. 읽고 돌아서면 신작 소식을 접하는 기분이 들 지경.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이 나온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데 단편집 『방금 떠나온 세계』가 출간됐고 잠시후 짧은 소설집 『행성어 서점』과 소설 『므레모사』를 내놨다. 작년 초에 나온 『사이보그가 되다』까지 포함하면 한 해에 무려 다섯 권의 책을 냈다.(단독 저작의 경우만 볼 때. 단편소설 앤솔러지 『놀이터는 24』에도 참여했다) 독자로서 편애하는 작가의 책이 읽어야할 목록에 쌓여있다는 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다 갑작스런 슬럼프에 빠진다거나 하지 않을지 노파심이 생길 지경이다.(계속 다작하시면 물론 좋겠지만)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 요약해본다면 '이해 불가능성을 담지한 관계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울산부터 우주까지 펼쳐진 상상력을 담은 일곱 편의 단편에는 다른 세계를 사는 존재들이 잠시나마 서로 겹쳐지는 "접촉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 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그 세계 사이에 어떻게 접촉면ㅡ 혹은 선이나 점, 공유되는 공간ㅡ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소설을 쓰며 내가 고심해온 주제였다.

p.322, 작가의 말 中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세계는 각 단편들에서 다양하게 묘사된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는 죽음을 잊은 불멸인들의 행성을 배경으로 하고 「마리의 춤」에는 시각을 잃은 사람들, 「로라」에는 고유수용 감각 이상을 겪는 사람, 「숨그림자」에는 후각으로 소통하는 행성, 「오래된 협약」에는 예정된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 사제들, 「인지 공간」에는 인지를 공유하는 집단, 「케빈 방정식」에는 일반인과 다른 시간 감각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 세계에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식과 다른 세계를 사는 등장인물은 「로라」에서처럼 다름을 수용하거나 「인지 공간」에서처럼 집단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잊은 불멸인들은 무료함을 몰아내기 위해 온갖 유희용 실험에 몰두했다. 도시를 유지하는 기계들에게 자의식이 부여된 것도 그 실험의 일부였다. 불멸인들은 기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법 또한 알았기에, 기계들은 자의식을 지닌 채로 그들의 주인에게 복종했다. 신체 교체를 위해 생산된 복제들에게서 자의식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이어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복제들의 자의식은 불멸인의 자의식이 전송되는 순간에 즉시 제거되었으므로.

pp.36-37, 「최후의 라이오니」 中


다른 세계(존재)에 대한 가장 오만한 대응을 보여주는 설정은 「최후의 라이오니」에서 볼 수 있었다. 배양된 복제에 자의식을 전송하는 기술로 죽음이 없는 삶을 살게 된 불멸인들은 장난삼아 '기계'와 '복제'에게 자의식을 생성한다. 그러나 '자의식'을 가지고도 그들은 단지 '기계'일 뿐이고 '복제'일 뿐이어서 불멸인들에게 복종하고 신체를 강탈당해야 한다. 다른 존재의 자의식 따윈 불멸인들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불멸인들의 행태는 다름에 대한 타자화의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를 완전하게 인식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오감 중 어느 하나가 누락될 경우의 세계는 불완전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감각 손실은 다른 감각을 발달시키기도 한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뇌를 통신으로 직접 연결해 소통하는 「마리의 춤」과 지하 세계에서 오래 살면서 시각이 약해진 사람들이 후각 정보로 소통하는 「숨그림자」에서 처럼. 오감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세계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나는 모그들과 달리 이런 형태의 소통에 익숙하지 않아다. 순간 마리가 왜 자신들의 소통 방식을 더 진보한 것으로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공간 속에서 모든 목소리가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었다. 그들이 불필요한 감각 정보를 보리고 추상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감고도 여전히 시각 정보를 기다리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p.89, 「마리의 춤」 中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 둘은 겹쳐지지는 않지만 접점을 만들어 낸다.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아는 순간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로라」에서 진은 세 번째 팔을 이식한 로라를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둘 사이를 완벽하게 납득시킬 해답이 없음에도 둘의 관계가 지속된다. 이렇게 부조화를 내포한 조화는 「숨그림자」와 「케빈 방정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존재하고 "같은 시간을 점유"하지는 못하지만 삶을 계속된다.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때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p.126, 「로라」 中


[(…) 어차피 우린 다 비슷한 본성을 지녔어. 어떤 세계가 너를 받아주는 게 아니야. 그저 그곳에 너를 받아주는 어떤 사람이 있는 거야.]

(…)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p.182, 「숨그림자」 中


"그래. 언니는 이 풍경을 보고 싶었던 거지."

나는 문득 언니와 나의 시간이 다시는 겹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우리가 아주 다른 풍경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도.

이제 언니를 보내줘야 했다. 우리의 세계가 어느 순간 분리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 우리가 다시 같은 시간을 점유하며 살아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언니는 그 시간을 계속 살아갈 것이다.

pp.319-320, 「케빈 방정식」 中


서로의 희생을 바탕으로 공존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오래된 협약」에서 행성 벨라타는 그 땅에 착륙한 인간들의 삶을 위해 생태계를 멈춘다. 인간에게 독성을 뿜어내지않기 위해서다. 대신 인간들은 약하게 남은 독성에도 불구하고 행성을 해치지 않기로 약속한다. 행성 벨라타와 인간은 이 협약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서로에게 양보하고 공존의 길을 찾는다.


제가 평생을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결정들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벨라타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

p.225, 「오래된 협약」 中


다르게 여겨지는 생각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인지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인간의 인지 중 공유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것들은 삭제되는 세계에서 개별성은 사라진다. 다른 생각의 가능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의미있는 기억만 남겨지는 세계에서 개인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생각은 개인의 소멸 이전에 사라지고 만다. 작가는 '진리'만 옳은 것인지를 묻는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한다면, 각자의 해석이 다르다면 더 많은 진실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스피어가 정말로 분열일까? 스피어를 갖게 된 우리는 정말로 같은 격자를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 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p.268, 「인지 공간」 中


읽을 수록 빠져드는 김초엽 월드의 또 한 세계를 빠져나왔다. 다른 생각, 다른 해석이 여러 진실을 만들어낸다는 문장처럼 작가가 그려낸 세계에는 각각의 독특함이 배어있다. 단편마다 다른 세계를 읽어내다 보면 우주터널을 통과해 행성간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천만다행으로 마지막 단편에서 작가는 대한민국 울산에 독자를 내려놓는다. 거주지와 멀다고 불평할 이유는 없다. 알 수 없는 독성 물질이 대기를 채우고 후각으로 소통하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행성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부지런하고 이해심 깊은 작가가 예비한 다음 여행, 기꺼이 동참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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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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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김영하북클럽'에 소개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유명 소설가가 이 책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을까. 많고 많은 고통 서사 중 하나로 여겨졌을 듯 싶다. 주 독자층인 어른의 고통을 다룬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내용도 아니니 관심이 적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하'라는 이름의 영향력은 이 책이 가진 원래의 힘보다 더 멀리 가게 만들었다. 덕분에 독자들은 아이의 고통에 더 다가서게 됐다.


​책은 작가 모드 쥘리앵의 어린 시절 경험을 담고 있다. 한 남자의 괴상한 신념이 자본과 만나 아내와 아이를 인질로 잡고 평생을 고문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팔려왔고 아이는 어린 시절 사육을 경험해야 했다. 철저히 고립된 환경은 이들의 고통을 감췄고 아이는 자라서 결혼할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시대에 가능한 걸까 어이없는 가운데 『배움의 발견』과 『언오소독스』가 생각났다. 부모의 신념, 특히 가부장의 신념은 가정을 얼마든지 자신만의 천구, 가족의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작년 한 해 나온 아동학대 뉴스만 떠올려봐도 그 빈도가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 강압적인 아버지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다. 특히 어머니의 방관은 공포의 수위를 더하고 아이를 고립감에 빠지게 만든다.


나의 공포감은 그 거인을 오로지 혼자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커진다. 어머니에게서는 그 어떤 도움도 보호도 기대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디디에 선생'은 신적인 존재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숭배하고 동시에 증오한다. 하지만 결코 맞서지는 못한다.

p.36


보호자를 자칭하는 아버지가 아이에게 닥친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아이는 의심을 품는다. 믿음과 현실이 다를 때 전지전능함에 균열이 시작된다.


누군가 내 안에서 절규한다. 린다처럼 죽도록 절규한다. 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디 있을 까? 나를 지켜주는 방패이며 보호자이자 수호천사라더니, 뭐든 볼 수 있고 뭐든 다 안다더니, 무엇보다 어떤 게 나에게 좋은지 다 안다더니. 삶의 모든 순간을 이 세상의 추함과 인간들의 사악함에서 나를 지켜내는 데 바칠 거라더니. 

p.116


『배움의 발견』과 『언오소독스』에서와 유사하게 모드 쥘리엥이 겪은 고통의 시절을 함께 한 것은 책이었다. 아버지가 읽게 한 나이 수준에 맞지 않는 독서는 괴로움을 주기도 했지만 아이가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꿈꾸고 용기를 북돋웠다.


나는 그레고르다. 하지만 따라가야 할 모델을, 본보기를, 이상을 찾았다. 당테스가 나에게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p.137


『백치』를 읽을 때는 금맥을 발견한 기분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에 빠진다. 그의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매혹된다. (…) 그럼에도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 p.157


나는 언제든 다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서, 싸울 준비가 된 나는 마틸드다. 모드는 가련한 낙오자다. 모드는 두려움에 떨고, 늘 복종한다. 하지만 마틸드는 전사다. 전투를 치르는 것은 마틸드다. 『적과 흑』에서 만난 마틸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 마틸드는 나의 은밀한 친구가 되어 나에게 용기를 주고 기운을 북돋는다. p.243


아이 마음 속 질문은 본격적으로 커졌다. 무조건 받아들이던 아버지의 말과 규칙들이 부조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질문은 책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은 그녀의 삶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모드의 어머니는 어려서 남편에게 팔려온 후 오직 자녀 생산과 교육을 위해 키워졌다. 자신이 당한 고통이 크기때문인지 어머니는 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인다. 남편에게 질책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할 뿐이고 오히려 남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녀의 심리는 어떤 상태였을까. 그녀 자신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 상태여서 있지도 않은 남편의 사랑을 위해 딸을 경쟁상대로 삼은 걸까. 남편이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자식에 대한 애정도 사그라들고 딸과의 연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걸까.


페리소의 '왜?'가 지금껏 내 머릿속에 맴돌던 모든 '왜?'들과 하나가 되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왜 린다를 가두지? 왜 페리소를 묶어두지? 왜 나는 밖에 나가면 안 되지? 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면 안 되지? 왜 이브는 담뱃불을 내 무릎에 대고 끄지? 왜 레몽은 나에게 그 짓을 하지? 왜 내 방에는 난방을 틀면 안되지? 왜 씻으면 안 되지? 왜 아무도 소설책에서처럼 나를 안아주지 않지? 왜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면 안 되지? 왜?

하지만 가장 중요한 '왜?'는 따로 있다. 왜 어머니는 나를 미워하지?

p.212


아동기를 벗어난 한 순간 모드는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게 된다. 이 책의 부제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외부로 나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 살 때부터 감금생활을 했음에도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타고난 용기도 작용했겠지만 엄혹한 환경에서 자신을 지킨 그녀만의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적에 곁을 지킨 동물과 다양하게 접한 음악은 그녀의 감성이 박제되는 것을 막았고 책은 직접 마주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마음속의 싸움이 멈춘다. (…) 아무튼 초인에 대한 매혹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 눈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보인다. (…) 나는 자유롭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다. 집 없이 살아야 한다면, 괜찮다. 제대로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면, 그것도 괜찮다. 개 한마리가 보내주는 사랑의 눈길만 있으면 더이상 먹지 않아도 좋다. 살아갈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다. (…) 아버지가 말하는 이른바 초인들의 세계에 대한 매혹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pp.260-261


약한 존재를 향한 폭력은 너무도 흔하고 그것을 전시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보호의 의무를 진 어른이 가해자가 되고 벗어날 힘이 없는 아이는 희생된다. 참담하여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무시로 일관할 수 없는 일이다. 괴로워도 들여다보고 귀기울여야 한다. 다른 이의 관심이 아이를 구조할 수 있다. 『완벽한 아이』는 '부모'라는 고통를 벗어나려는 아이의 처절한 노력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상황을 알아보고 탈출을 도운 어른이 있다. 소설이라 해도 놀라울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다. 영향력 있는 작가가 책을 알려 많은 이들이 읽고 그만큼 주위의 고통에 눈이 밝아졌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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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페스트 / 시지프 신화 동서문화사 월드북 154
알베르 카뮈 지음, 이혜윤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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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에 편두통을 앓았음에도 불구 아름다운 장정에 반해 『페스트』를 읽고 감동한 끝에 다시 잡은 카뮈. 카뮈는 "같은 주제로 세 개의 장르에 걸쳐 작품을 쓴 유일한 작가"라고 한다.(서평가 로쟈 이현우) '부조리'를 테마로 쓴 작품은 소설 『이방인』,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다. '반항'을 중심으로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계엄령』을 묶었다. '사랑'을 주제로 에세이 『안과 겉』을 썼고 소설 『최초의 인간』을 미완성 유고로 남겼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자면 앞서 읽었던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는 중심 주제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을 읽어 보니 앞의 두 작품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물론 세 작품 모두 부조리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포함돼 있어 같은 작가의 작품 경향을 알 수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희곡과 에세이를 더 읽어 봐야 작가의 '부조리', '반항', '사랑'에 대해 알수 있을 텐데 『이방인』은 독자로서의 의욕을 꺾이게 만들었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p.11


아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강렬한 첫 문장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벌써 화자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이 드러난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고 알게 됐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망 시점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모른다는 부연 설명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장들은 '어머니'와 '사망'의 관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나' 뫼르소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상식를 벗어나 보이는 화자의 언행은 작품 내내 이어진다. '부조리'라는 철학적 테마를 구현했다는 소설에서 '상식'을 찾는 독자가 '비상식'적일까.


​뫼르소는 "어머니 일만 없었다면"이라며 산책을 즐기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냐는 제안은 거절한다. 어머니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제는 드러누워 12시간 동안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는 주변 타인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일에서도 '무의미'함을 되뇐다. 어머니의 죽음에 "내 탓이 아니라며" 그런 말조차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으며 야심을 뒀던 학업을 포기한 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학창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고 말한다. 무의미로 점철된 삶이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언제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까.

p.23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결국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p.26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p.


"결혼하고 싶은지" 묻는 여자 친구에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아무 중요성도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며 비슷한 관계의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했을" 거라 답한다. 연인(과 같은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누구나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비슷하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는 그런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런 모든 것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p.38


'나'가 그나마 긍정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대상은 자연이다. 장례 중에 "열어놓은 문으로 시원한 밤공기에 꽃향기가 실려"오는 걸 느끼고 장지로 가는 길에서 "상쾌한 흙냄새를 들이마"신다. "퇴근해 부둣가를" "걸으며 돌아오"던 중 "하늘은 초록빛이었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며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감정 역시 결정적 사건을 앞두고 변화한다. "뜨거운 햇볕에 마치 따귀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느껴지고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볕에" "머리속이 꽝꽝 울리"는 가운데 뫼르소는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짙은 취기(醉氣)"에 빠진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눈앞에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뜨거운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후볐다. 그때 모든 것이 흔들렸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비 오듯 쏟아놓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뻣뻣해지고, 총을 든 손에 경련이 났다. 방아쇠는 부드러웠다.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p.51


'태양'때문에 권총이 발사되고 "불행의 문" 열렸다. 뫼르소도 그렇게 느꼈는지는 의문이다.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태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 생활 중에 괴로운 일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 정도다. 그는 곧 익숙해졌고 불행하지 않았다. '습관'이 된 괴로움, "언제나 같은 날이" "감방으로 밀려오는 것"이란 표현에서 『시지프 신화』의 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실패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지속되는 삶과 그것을 지탱하는 습관의 힘을 말이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뫼르소가 자신과 대면하는 기회였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을 배운 뒤부터는, 지루한 일도 없어졌다. (…) 그처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무시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p.63


천장에 뚫린 창문으로 다가가서 마지막 빛 속에 다시 한 번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심각하다고 해서 놀라울 건 없었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달 이래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내 귀에 울리고 있었던 소리임을 알아차리고, 그동안 줄곧 내가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p.65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의 변화를 더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의 욕망을 발견한다.


(…) 문지기는 나를 바라보고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때 나는 무엇인가 방청석 전체를 격앙시키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71


(…) 셀레스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나를 위해 자기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나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 

p.71


뫼르소의 변화가 회개로 가는 길을 열거나 하진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고 그는 죽음이라는 숙명이 20년쯤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며 자신의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 예를 들면 오늘이나 내일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뭔가를 뉘우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애인을 만들었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며 "영원히 관계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받아들이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커다란 분노가 내 죄를 씻어주고 희망을 모두 가시게 해 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비로소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나,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p.94-95


'삶의 끝은 죽음이고 예외는 없다'는 인생의 부조리를 인정하는 뫼르소의 태도는 이해하겠다. 죽음 이후 찾아올 신의 세계를 강요하는 종교인을 고함으로 쫒아낸 일도 납득이 간다. 세계는 사형수 하나의 죽음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뫼르소는 형제애를 느낀 건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뉘우쳐본 일이 없는 그이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오늘 이 순간도 꿋꿋이 받아들여 심지어 행복을 느끼는 걸까? 수감 기간에 그나마 느낀 세계와의 관계를 사형집행날 많은 구경꾼을 만남으로서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걸까? 그러면 그는 죽음의 순간에 외롭지 않을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오늘을 충실한 것에 행복을 느낄까.


뫼로소의 마지막은 여러모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사르트르의 해설과 책 말미의 '알베르 카뮈와 그 작품 세계에 관하여'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에는 『페스트』에서 느꼈던 공감의 정서가 없었다. 현실을 그린다기 보다는 철학적 알레고리로 작품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미진함이 남는다.


펜데믹 상황에 이입하며 『페스트』를 읽고 감동한 독자라면 『이방인』에 비슷한 기대를 갖진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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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초호화 스카이버 금장 에디션) - 1947년 오리지널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도서관 새책 서가에서 책 표지 덕에 발견(!)했다. 갈색 장정에 금색 글씨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도서관 도서는 책 본체와 분리되는 겉장이 있을 경우 제거한 후 소장하기 때문에 표지에 한글이 전무한 경우 외서처럼 보인다. 양피 가죽에 금장의 작은 프랑스어로 제목을 새긴 책을 유심히 보니 카뮈의 페스트였다. 코로나 발발 후 관심이 높아져서 이런 고급 장정의 책이 나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빌려가지 않고 서가에 남아 있다니.


​『시지프 신화』를 읽고 나서 카뮈를 더 읽어야할지 고민했다. '프랑스 작가' 콤플렉스 때문인지 이해력의 한계인지 또는 그 책이 유난히 어려웠던 건지 『시지프 신화』는 편두통을 유발했었다. 그러나 카뮈의 명성을 보건대 미처 깨닫지 못한 뭔가 있지 않을까 미심적은 마음도 있었다.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했다. 한편으론 전염병의 시대의 필독서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알제리 해변가의 프랑스 도청 소재지 오랑은 "평범하다는 게 첫인상인 도시"다. "일상을 벗어난" "사건이 일어날 만한 곳이 아"님에도 어느 날 그 일이 발생한다. 첫 조짐은 쥐였다. 곳곳에 죽은 쥐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서술자'라고 부르는 화자는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발생한 기간 동안의 연대기를 써내려간다. 『페스트』는 전염병의 연대기이자 도시 오랑의 사람들이 겪어낸 한 시기에 대한 기록이다.


병명이 밝혀지고 도시가 봉쇄된다.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다 받아들이고 전염병과 싸우고 굴복한다. 언제 어디서 감염될지 모를 불확실한 상황에서 병마와의 전쟁 최전선에서 싸우는 의사가 있고 종교에 기대는 사람, 탈출하려는 사람, 그 와중에 사익을 챙기는 사람 그리고 묵묵히 옳다고 여기는 삶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술자는 펜데믹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아가는 인간 군상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초기에 페스트의 정체를 알아챈다. 20년전 파리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음을 아는 그는 일의 경과를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죽으리라는 걸, 도망치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걸 알았을텐데 미리 계획된대로 병약한 아내만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도시에 남는다. 그리고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인정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환자에게 매달린다.


사실 의사 리외는 바로 좀 전에 동료 의사에게 직업 '몇몇 환자들이 도시 곳곳에서 난데없이 페스트로 죽었다'고 인정해 놓고도, 여전히 그 재앙이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다만 의사이기에 신체적 고통을 일반인보다 더 잘 상상해서 가늠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예전과 똑같이 보이는 도시를 보며, 의사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살짝 가벼운 구역질이 일었다.

p.53


"아닐 겁니다. 파늘루 신부는 학자예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못 봤죠. 그래서 자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지만 교구 내의 종부성사를 집전하고 임종하는 사람의 마자막 숨소리를 들어 온 신부라면, 아무리 촌마을 신부더라도 나처럼 생각할 겁니다. 고통의 장점을 증명하기 전에, 그 고통을 보살피겠죠."

p.160


"어쩌면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게,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니까, 어쩌면 신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침묵하고 앉아 있는 하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기를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승리는 늘 일시적일 뿐이죠. 영원하지 않고."

(…)

"네, 압니다. 그렇다고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할 순 없어요."

"물론 그렇죠. 다만, 이제는 페스트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네. 끝없는 패배죠."

p.163


카뮈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로 파악한 작가다. 적어도 『페스트』의 등장인물들을 볼 때는 그렇다. 한없이 고통을 연민하는 리외도 그러하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선하거나 선한 쪽으로 변화한다. 시청 서기 조제프 그랑은 세심한 정리 능력으로 의료 자원 봉사대를 지원한다. 방문자로 오랑에 머물고 있는 호인 장 타루 역시 특별한 이유없이 리외를 돕기를 자처한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만이 관심사라는 그는 쉴 새 없는 업무 끝에 감염되어 죽음을 맞는다. 연인을 파리에 두고 온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는 탈출을 모색하던 중 마음을 바꿔 자원봉사에 투신한다. 감염자 수용소에서 아들을 잃은 예심판사 오통도 마찬가지다. 이타심이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아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거대한 의도는 없었다. 잃은 아들을 덜 생각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즉 자신이 먼저였다. 자신을 명확히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참된 선함이 가능한 일일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항상 무지에서 생긴다. 아무리 의도가 선했어도 무지하면 악의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대체로 사람은 악하다기보다는 선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해와 몰이해가 미덕과 악덕을 가르는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자신에게 살해할 권리까지 인정하는 무지다. 살인자의 영혼은 이처럼 맹목적이다. 극도로 명민한 통찰력이 없이는 참된 선의도 진짜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p.167


그렇다. 만약 인간이 영웅적인 사람을 본보기와 귀감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영웅'이 반드시 한 명 필요하다면, 서술자는 독자들에게 가진 거라곤 약간의 선한 마음과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이상뿐인 이 보잘것없고 존재감 없는 영웅을 추천하겠다. 그럼으로써 진리에는 그 본연의 마땅한 의미가, '2+2'에는 '4'라는 답이, 그리고 영웅주의에는 차선의 지위, 즉 행복이라는 고귀한 욕망보다 '절대로 앞서지 않고 그 바로 뒤'라는 부차적 자리가 딱 주어진다. 또한 이 연대기에도 '좋은 기분으로 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두드러지게 불쾌해한다거나 저속한 흥행물처럼 과잉된 감정 없이 하는 진술이라는 특징이 부여된다.

p.175


이야기를 마치면서 타루는 한쪽 다리를 흔들어서 발로 가볍게 테라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의사는 몸을 약간 일으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냐고 물었다.

"네, 그 길은 공감입니다."

p.320


하지만 많이 야윈 오통 씨가 힘없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신중하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에게서 뭔가가 결정적으로 변했다고 느꼈다.

(…)

"그런 게 아닙니다. 수용소로 다시 돌아가려고요."

(…)

"그러면 바쁠 테니까요. 좀 어리석은 말로 들리겠지만, 그러면 아들과 헤어졌다는 느낌이 덜해질 것 같아요."

p.326


예외적인 인물도 있다. 그랑의 이웃 코타르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도시가 봉쇄되고 나서 평안을 찾는다. 그를 암시하는 말들은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가 살아서 오랑에 등장한 듯 하다.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갇힌 상황을 이용해 사리사욕에 몰두하던 코타르는 페스트가 잠잠해지고 도시의 문이 열린 자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 욕심을 채우면 행복해지리라 믿었을테지만 마음은 손쓸수 없게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랑은 여주인의 담배 가게에서도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여주인이 알제에서 떠들썩했던 최근의 어떤 체포 건에 대해 말했다. 해변에서 아랍인을 살해한 어느 젊은 직장인의 이야기였다.

p.74


리외는 도시의 고통을 끝까지 직면했다. "직접 겪지 않는 고통은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을 자처했다. 어쩌면 길어진 재앙의 기간이 그를 견딜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재앙 한 가운데 놓인 사람들에겐 그것이 "한없는 제자리걸음"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세계의 끝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서 서툴게나마 연대감을 전하려고 애쓰는 생면부지의 우정 어린 음성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은 직접 겪지 않는 고통은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다는 끔찍한 무력감도 생생하게 밀려왔다.(…) 웅변이 고조될수록 그랑과 이 웅변가 사이의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본질적인 간격만 도드라졌다. (…) '아니. 함께 사랑하거나 함께 죽거나 둘 중 한 가지 방법뿐인데, 당신들은 너무 멀리 있어.'

p.176


사실 재앙만큼 볼거리 없이 밋밋한 것도 없다. 너무 오래 끌기 때문에 큰 불행도 단조롭게 만들어 버린다. 페스트라는 끔찍한 재앙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날들은 화려하고 잔인하며 거대한 화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여정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뭉개 버리는 한없는 제자리걸음으로 기억되었다.

p.227


카뮈는 재앙을 통해 "인간에게 경멸해야 할 것보다 칭찬해야 할 것이 더 많"음을 배웠다고 썼다. 소설 『페스트』 속의 한 해동안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2년째 겪고 있는 상황의 재현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봉쇄에 가까운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것에 의지해야 하고 근거가 불확실한 예측 외엔 희망을 걸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시절의 끝에 카뮈와 같은 배움을 얻길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리외와 같은 누군가가 남긴 담담한 증언을 읽을 수 있길 또한 바란다.


침묵하지 않고 페스트에 스러진 사람들을 위해 증언을 하기로,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의 기억을 남기기로 말이다. 재앙의 한복판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칭찬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큼은 말하기 위해서였다.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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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호스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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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은 단편 「음복」의 강렬한 인상이 오래 남았다. 가부장 전통과 세대간의 차이 그 안에에서 비틀린 여성의 문제를 제사와 음복이라는 소재에 담은 방식이 훌륭했고 무엇보다 이야기 속 상황 묘사가 생생하게 기억됐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오랜 상처를 주고 받고 그 대물림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짧다면 짧은 단편에 꽉 들어차 있었다. 강화길 작가의 또다른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화이트 호스』는 2017년부터 2020년 봄까지 발표됐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음복」을 비롯해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첫 세 편은 결말의 물음표가 던지는 질문이 이야기 전체를 뒤집는 공통점이 있었다. 차례로 읽어나가면서 이 단편집 전체 작품이 아이러니를 묻는 질문으로 묶이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세 번째가 끝이었다. 「음복」의 물음표는 '제사'와 그에 수반되는 '음복' 문화가 윗 세대와 아래 세대에게 부과하는 의미의 무게를 달리하고 있으며 화자의 시댁 안에서 존재하는 가족 간의 갈등이 가볍지 않음을 강조한다. 또한 여전히 진행 중인 이 모든 일이 가까운 미래에 쉬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시시함'을 물으면서.


참…… 시시하지?

p.42


질문은 비슷한 방식으로 「가원佳園」에서 이어진다. 화자는 어렸을 적 자신을 대하던 조부모의 대조적인 모습과 후에 알게된 실상이 다름, 그들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이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과거가 옛일로 머물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다 옛날 일이다. 모두.


그치?

p.74


「손」의 물음은 책임과 관련이 있다. 상의없이 해외근무를 연장한 남편, 적응하기 힘든 시골 학교 근무와 시어머니의 행동, 아이 양육에 대한 걱정 등이 화자를 괴롭힌다. 환경, 사람 모두 자신에게 적대적인 듯 서술되지만 마지막 질문은 문제가 모두 주변만의 탓일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어디선가 그것이 소리를 냈다.


뭐해?

p.110


강화길 작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서사에 잠재된 암시들 때문이다. 이야기의 재미만 이끌려 쉽사리 읽고 나면 마지막에 남은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된다. 아니 답하기 어려운 이유를 납득할 수 없게 된다.


세 번의 질문이 끝난 뒤에 아이러니 찾기가 시작된다. 단편 「서우」는 실종 살인 사건이 일어난 동네에 사는 여성의 귀가길을 보여준다. 미심쩍은 택시 기사와의 대화는 그녀가 사건과 연루된 듯한 인상을 강화해간다. 마지막 과연 위협을 느껴야할 사람은 택시 기사일까, 승객일까.


​「오물자의 출현」은 여배우의 이미지가 가십으로 소비되면서 비틀려가는 모습을 그린다. 여러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였다가 한 남자를 잊지 못하는 순정녀인 동시에 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가 하면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그녀는 인위적인 드라마 도취되어 일상의 자아 또한 왜곡된 채이다. 여자의 죽음은 인구에 회자되며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그 안에 진짜라 할 만한 무엇이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는 여전히 가십의 생산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로 발견된 일기의 출판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십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가십에 불과한 법이니까. 알면 됐고, 모르면 또 됐고, 뭐 그런 거 아니겠나.

p.183


「화이트 호스」는 작가의 소설 쓰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단편이다. 작가 스스로 길게 썼다고 적은 '작가의 말'에 이 단편을 쓰게 된 전말이 나온다. 작가는 밥 딜런과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를 듣고 얻은 영감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어느 날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아이디어를 얻어 소설을 첫 줄을 쓰게 됐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쓴 뒤 이어 결정했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할 거야. 귀신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될 거야. 고택에 갇힌 이야기가 될 거고. 고딕 스릴러가 될 거야. 화이트 호스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가 될 거야. 화이트 호스의 역사는 집의 역사가 될 것이고, 이곳에 머문 사람들의 기억이 될 거야. 그들의 기억에 따라 화이트 호스의 의미는 달라질 거야. 왜냐하면 쓰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에 의해 그 의미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그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지.

p.296, '작가의 말' 中


얼마나 짜릿했을까. "이걸 써야겠어."라고 외쳤을 때 얼마나 시원했을까. "쓰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에 의해" "의미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고 그것이 소설가가 '하는 일'이며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니. 이런 '일'을 "진짜 원하는 것"이라며 도장찍듯 말할 수 있는 작가가 강화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하는 동안 계속 읽을 수있는 독자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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