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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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때" 낳은 딸 "인생에 도통 관심이 없는" 엄마, "도무지 사회성이라고는 없는 철부지", "저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 김 작가가 있다. 딸은 "늘 차가운 강물 한 줄기가" "몸을 가로질러" 흐르는 것을 느끼고 "세상에는 꼭 알지 않아도 되는 일도 있"다는 진리를 터득한 "덩치 크고 과묵한 아이였다." 살림에 무능한 엄마를 '김 작가'라 부르며 딸 영인은 "학비를 대 주는 조건으로 고용된 가정부"처럼 집안 일을 하며 역시 글을 쓴다. 엄마가 연 글쓰기 교실에는 수 많은 남자가 스쳐가고 영인은 줄기차게 글을 쓴다.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소설을 쓴다. 


딸의 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엄마 김 작가의 모습은 어른이라는 호칭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지만 영인이 자신의 삶을 굳게 헤쳐가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태도가 틀리지는 않았다 싶다. 김 작가는 자신의 감정에(만) 솔직했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거나 강요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을 '엄마'라는 한 가지 시선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글쓰기를 놓지않는 '진짜' 작가였다.


소설은 영인이 글쓰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머리 속에 무수히 만들어오던 끝에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지경에 이른다. 자신은 생각이 문장으로 떠오르는데 누구나 다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 후 글을 쓰게 됐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글쓰기에 빠지는 어떤 한 순간을 겪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걸까 혹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오랜 단련 끝에 작가적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 오는 걸까.


그때, 할머니네 집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에 혀를 데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하나의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떨림에 몸을 맡긴 채 거듭 다짐했다. 글을 쓰리라! 글을 쓰리라! 죽어도 쓰리라. 그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나쁜 문장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글이 저절로 떠오르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기쁨은 매우 컸다.

p.59


그리고 튜터는 덧붙였다. "생활과 글쓰기의 관계도 그래요. 18세기 영국에서 소설 독자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봐도, 그래도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계층은 글을 읽을 불빛이 있고 여가가 있었던 입주 하인 계급들이었어요. 글을 쓰려면 글을 쓰는 일과 더불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해야죠. 너무 가난해도 너무 부자여도 글을 쓰기 힘듭니다."

그럼 이제 와서 결론을 말해 볼까. 생활과 글쓰기는 절대로 병행할 수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늘 한쪽이 부서지고 깨졌다.

p.162


글을 쓰겠다는 열망을 품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환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 일 외에 다른 일에서 정신줄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임신 초기의 울렁증처럼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도가 심해지면 바보가 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병을 앓는다.

pp.214-215


물도 채우지 않은 튜브 속에 수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전에는 뭘 쓰려고 해도 생각만 있고 쓸 수가 없어서 힘이 들었지만 글도 술술 풀려 힘도 들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우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우울해서 글을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건 사실이었다. (…) "한번 써 봐. 인생이 얼마나 깊어지는데." (…)

하지만 내가 쓴 글들이 정말 소설답다거나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그렇고 그런 글일 뿐이었다. 그러나 왠지 일거수일투족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하지 않으면 중요한 걸 다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째깍거리는 움직임도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고 그 순간만큼은 충만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p.255


김 작가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혹은 '종이컵을 든 동네 아줌마들의 결연한 수다방')에서 삶을 나눌 이웃들을 얻고 영인은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에서 글쓰기의 열망을 나누려 했다. 김 작가의 발병으로 미국에 있던 영인은 급히 귀국하고 마치 딸을 부르려고 아팠던 것처럼 엄마의 병은 사라진다. 둘은 다시 공동의 삶을 이어간다. 그들이 삶을 터를 일군 곳에서 둘의 라이팅 클럽이 다시 시작된다. 모임의 이름은 "계동 라이팅 클럽".


강영숙 작가가 글쓰는 과정이 소설에 반영된 것처럼 읽혔다. 이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글쓰는 사람이 됐구나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생활의 틈틈이 책을 계속 읽고 그 속의 문장들을 삶에 대입하고 생각을 굴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생각은 문장이 됐다. 책에는 여러 소설과 영화가 등장한다. 이런 책과 영화들이 작가를 만들었다 싶어 제목들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책 속의 문장을 읽고 생각을 하는 작가만의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신산한 삶 속에서 영인이 읽었거나 떠올린 책은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시몬 베유의 『노동 일기』,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세르반테스의 『돈키오테』, 이사벨 아옌데의 『파울라』 등이다.


잭 런던의 『강철 군화』는 영인이 동거했던 B와의 첫 만남에 매개가 됐던 소설이다. B와 지내는 동안에 영인은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묵은 짐 속에서 책을 꺼내 읽은 작가를 납득하게 된다.


알레스카 체험을 위주로 쓴 일명 북극 소설들, 문명에 길들여진 개가 다시 야성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가 재미있을까. 문학성은 뛰어난데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텍스트의 예술성보다는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어느 시기에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바로 『강철 군화』가 그랬고 그 책이 B와 나를 연결해 주는 끈이었다.

pp.154-155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는 영원히 사는 인간을 소재로 한 점이 특별했다. 영인은 "영원히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소설 속 등장인물 포스카의 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 "나는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지요. 앞으로 만년이 지난다 해도 난 잘못을 저지를 테지요. 사람은 결국 진보를 못 하는 법이지요."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시간에 관한 소설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길게 늘여 놓은 뒤, 존재의 비밀을 탐구하고 존재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 없이 늘어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 그럼 포스카는 특별히 구원받았던 걸까. 구원이고 뭐고 주어진 시간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죽어버리는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무한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도 존중하지만 중간에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도 존중한다.

pp.213-214


인간의 진보를 부정하는 글에 매혹되면서도 영인은 김 작가가 이끄는 글쓰기 모임의 연대 의식을 (비웃으면서도) 눈여겼다. 뜬금없었던 미국 생활을 접고 돌아온 그녀가 '계동 라이팅 클럽'을 지지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 작가가 "너무나 글이 쓰고 싶어서 죽을 수 없었"다면 영인은 (미우나 고우나) 엄마라는 존재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단할 것 없는 사람들이 꾸린 별난 '라이팅 클럽' 이야기는 한 사람이 작가로 등단하고 한 사람은 생계에 매인 채로 끝난다. 영인은 "소설을 쓰지 못"했지만 다시 시몬 베유의 『노동 일기』를 읽는다. 이십 대의 시간을 통과하며 김 작가가 글쓰는 마음을 영인도 알게 됐다. 쓰레기들이 가득해 보였던 엄마의 세계를 지지할 수 있게 된 영인에게 "네일 아티스트 출신 유명 작가"는 너무 먼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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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인생 - 야설 작가 보카치오, 존경하는 사람이 생기다!
조반니 보카치오 지음, 허성심 옮김 / 인간희극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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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단테 알리기에리의 전기다. 중세를 대표하는 작가의 전기라고 부르기엔 상당히 소략한 분량이다. 한 손에 잡히는 갸름한 판형에 130쪽 정도다. 그 안에 탄생과 교육, 사랑과 결혼, 정치적 명예, 망명, 죽음의 순간까지 그려넣었고 심지어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를 꾸짖기 위해 한 개의 장을 할애했다. 


단테에 대해 알려진 생애사적 정보들이 보카치오의 서술에 의지하고 있다.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장면과 그녀의 외모에 대한 서술이라던가 단테 사후 행방이 묘연하던 『신곡』의 마지막 원고를 찾게된 경위라던가 하는 대목들이 그것이다. 아홉 살 단테가 처음 만난 베아트리체의 용모에 대한 묘사다.


여덟 살 쯤 되어 보이는 폴로 포르티나리의 어린 딸 비체(베아트리체의 애칭. 그러나 단테는 그녀를 애칭으로 부르지 않고 항상 본명인 베아트리체로 불렀다)도 그곳에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어린 아이답지 않게 아름답고 상냥하며 매력이 넘쳤다. 또래의 소녀에서 볼 수 없는 사려 깊음과 겸손함이 목소리와 자태에서 배어나왔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조화를 이루고 얼굴에는 우아함이 흘렀다. 이런 베아트리체를 두고 사람들은 어린 천사 같다고 했따. 이렇게 묘사되는, 어쩌면 묘사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을지 모르는 베아트리체가 단테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pp.25-26


아홉 살 인생에도 인생의 연인은 이렇게 다가오는가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열여섯에 죽음을 불사하는 정서가 아무렇지 않은 거라면 여덟, 아홉 살에 이성을 바라보는 안목도 남다르리라.


보카치오가 그려낸 단테의 생애는 작가의 상상이 듬뿍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 책에 참고 문헌이나 인용의 출처를 바란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보니 책 초반부터 이런 서술은 사실일까 싶은 대목이 꽤 보였다. 특히 베아트리체의 죽음에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그들은 단테가 아내를 맞이하면 어떻까 생각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연인이 비통의 원인이었다면 새로 맞이할 아내는 기쁨의 원천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p.30


보카치오는 베아트리체의 죽음에 상심한 단테를 위로하고자 집안 어른들이 혼인을 제안했다고 썼다. 그러나 지금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은 그와 다르다. 둘 모두 일찌감치 결혼해서 베아트리체 사망 당시에는 이미 각자에게 배우자가 있었다. 둘의 인연이 어째서 결혼으로 연결되지 못했는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으니 추측해보자면 단테의 마음 속 사랑이었지 않나 싶다. 단테가 그린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과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인 건 아닐까. 단테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했던 사람 말이다.


미완성으로 남을 뻔 한 『신곡』이 완성본이 될 수 있었던 사연도 흥미진진하다. 이 역시 보카치오의 창작인지 혹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전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신곡』이라는 걸작에 아우라를 보태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예상치 못하게 추방을 당하게 된 단테는 미처 원고를 챙기지 못한 책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집을 약탈하던 자가 작품의 훌륭함을 알아채고 작가에게 원고를 전달했다고 한다. 신비로운 일은 작품을 완성한 후에도 일어난다. 서사시의 마지막 부분을 미처 세상에 내놓기 전에 작가가 사망한 것이다. 가족들도 원고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하얀 옷을 입고 얼굴에 범상치 않은 빛을 띤 아버지가 방금 전 꿈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 야코포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사용하던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벽의 한 지점을 손으로 만지며 "네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이 여기에 있구나."라고 말했다.

pp.108-109


야코포는 단테의 아들이다. 죽은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원고를 감춰둔 장소를 알려준 것이다. 혹시 단테가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아들이 완성한 후 찾았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당시 가짜 문헌을 밝히는 기술이 나름 발전해 있었고 아들이 단테만 한 능력을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역사가 흐르는 동안 거짓이 들통났으리라 믿어본다. 아무튼 역사에 남은 걸작은 그에 상응하는 탄생기를 갖게 되는 것 같다.


『신곡』에서 『데카메론』으로 넘어가면서 보카치오가 그린 단테의 생애를 조망했다. 중세 전성기를 관통하는 작가들이 서로 얽혀 있는 친분의 그물 한 자락을 들여다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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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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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소통 제한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다. 거리두기 제한이 종료됐고 확진자도 격리되지 않는 때를 반기다보니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다. 분명 오랫동안 기다린 순간이긴 한데 이제 밖으로 나가면 정말 누군가를 직접 대면하는 일이 전과 같이 느껴질까 싶어서다. 단절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 사이를 채우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종종 느꼈다. 서로 가까이 있다는 걸 불편하게 여기고 작은 일에도 타인과 각을 세우는 경우가 눈에 띄었다. 타인이 곧 내 건강의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츠리다보니 무의식 중에 내가 아닌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 여기게 되어 버린 듯 했다. 우리의 변화된 마음의 지형은 외적인 움직임의 제한이 풀리고 나면 수월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인간 종 생존의 핵심을 "협력"이라 강조한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적자'의 개념을 "신체적 적자"와 동일시해선 안된다며 "살아남아 생존 가능한 후손을 남길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의미가 아니라고 못박는다. 다윈과 그 추종자들이 남긴 생존 전략은 다음과 같다.


다윈은 자연에서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고 썼다. 다윈을 위시하여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p.20


책은 '자상함'과 '친화력'의 새삼스런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그 이면에 존재할 수 있는 부작용인 "타자에 대한 잔인성"을 탐구한다. 일정의 테두리 안에 친밀감을 공유하는 내집단 밖의 존재들에 대해 판단할 때 인간은 이성적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채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의적인 관계가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인지 발달을 폭발시켰다는 주장은 장대익 교수의 『울트라 소셜』과 비슷한 맥락이다. 장대익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인간들간의 특별한 관계성을 '초사회성'이라 명명했고 이것이 인류의 생태적 성공의 열쇠 중 하나라고 보았다. 여기까지는 두 책의 서술이 유사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특별한 점은 '친화력'(또는 '초사회성') 발달의 원인으로 '자기가축화'를 제시한 데 있다. 


인간 종만의 특별한 친화력은 뇌속의 거울뉴런의 작용에서 시작되는 '마음이론'을 기초로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협력과 공생의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거다. 브라이언 헤어는 이러한 공감 학습의 과정이 '자기가축화'를 통해 '진화'했다고 말한다. 즉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것. '가축화'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자기가축화'는 '가축화'를 스스로 자의에 의해 겪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주거지 근처를 맴돌던 야생 청소부 늑대가 스스로 가축화해 야생 늑대보다 번성하는 개 품종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개는 "사람이 통제하는 가축화 이전에" "친화력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를 가축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동물 연구에서 나타나는 자기가축화의 증거들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집단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더 나은 방안으로 '자기가축화'를 선택했다. 가축화 과정에서 '협력적 의사 소통 능력'이 발전했고 호모사피엔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종이 됐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친밀함'에서 오는 결함을 피하지 못한다. 


사람 자기 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 다정함 ,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매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p.226


책은 인류 진화의 열쇠이자 독이 된 자기가축화의 반작용을 해소할 방책으로 '접촉'을 제시한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가장 강력한 접촉의 형태로 '우정'을 말하며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지도자를 외면하라고 제안하고 도시의 주거 환경을 "서로 다른 배경과 다양한 관점 및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일 수 있게 계획해야 한다 등의 현실적으로 보이는 방안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굳이 진화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던 것들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세상이 '자기가축화'의 반작용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간다면 또 다른 비책이 필요한 건 아닐까.


'자기가축화' 개념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은 소득이다. 특별할 것 없는 주장에도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 건 '김영하 북클럽'의 명성도 있겠지만 익숙한 내용도 다시 꺼내 봐야할 만큼 '다정함'이 '다급'한 사회적 분위기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함'을 어떤 문제의 비방으로 찾기보다 어디에나 당연히 있는 무엇으로 여기게 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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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 자폐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
조제프 쇼바네크 지음, 이정은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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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시작된 자폐인에 대한 관심이 출판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는가보다. 자폐를 다룬 책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싶었는데 현대지성에서 책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을 독서모임에 지원해주었다. 관심있는 참여자를 모아 책을 읽고 모임 시간을 정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참여자 각자의 의문점들을 모아 논제문을 만들어 토론의 맥을 만들었다 토론 당일 멀리 타 지역의 참여자까지 온라인으로 접속해 얼굴을 맞대고 책과 저자, 자폐 그리고 '나'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의 저자 조제프 쇼바네크는 고기능 자폐로 진단받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자폐'라는 병명이 널리 사용되지 않던 과거, 저자의 특별한 정서와 행동 방식은 타인에게 정신적인 문제로 보였고 '치료'라는 이름의 처방은 고통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운 좋게 저자는 자신의 관심 분야인 언어를 붙잡을 수 있었고 10개 국어를 습득했으며 철학을 공부했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본 자폐가 아닌 당사자의 체험으로 쓴 책은 관찰로는 파악하기 힘든 마음의 모습들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폐의 모습이 '평범'의 외피를 가진 우리 자신에게서도 멀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책에 대한 별점은 5점 만점에 3.5점에서 4.7점까지 나왔다. 자폐인 본인의 경험을 솔직하게 썼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 높은 점수를 줬지만 단편적인 서술이 이어져 몰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지적과 산만한 구성이 아쉽지만 이런 부분도 자폐인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고난을 달관한 저자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는 말씀, 정도는 덜하지만 토론 참여자 자신과의 유사성을 많이 발견해 놀라웠다는 반응도 있었다. 단락 앞쪽에 붙인 소제목들이 흐트러질 수 있는 서술의 중심을 잡아줘서 좋았다는 언급, 꾸밈없이 소박한 서술들에서 '자본주의의 냄새'를 벗어난 진정성이 느껴졌다는 의견도 있었다. 


토론 내내 '정상성은 무엇인가'와 '누가 정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이야기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저자 쇼바네크의 경험들은 우리들 비자폐인이 당연시하는 '정상'의 기준에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저자는 낯선 환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불안감을 느꼈다. 토론자 각자가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떠올려 보고 저자의 상황과 비교해 이야기나눴다. 


이어 저자가 학교에 다니던 중 심리코칭에서 시작해 정신분석가와 정신의학자를 만나 일종의 '치료'를 받는 과정을 함께 훑어보았다. 저자의 상태 개선이 이 과정이 도움이 됐을지 의문스러웠고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진단명으로 쇼바네크라는 사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책에 제시된 자폐증의 특징들의 상당수는 일반인들고 공유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기준으로 자폐를 판단한다면 '우리도 역시 (어느 정도는) 자폐가 아닐까'하는 질문에 토론자 모두가 공감했다.


장애를 판단하는데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작용할까.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정서적, 태도적 요소들이 조금 '특별하게' 드러나는 걸 '비정상'이라고 판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책 속에는 정상인이라고 여겨지는 그 누구보다도 올바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자폐인이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두 시간을 꽉 채운 토론을 마쳤다. 다음은 토론자들이 남긴 후기.


읽고만 말은 책과 토론까지 한 책은 확실히 이해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모임이었다.

여러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통신 장애로 100 퍼센트 다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님의 자폐 특징 정리는 나 자신이 편견에 싸여 살고 있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유사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이질감이나 혐오감으로 보다는 또다른 특징으로, 가능성을 가진 특질로 보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케 해 주었다. 

김** 님의 토론 후기


조제프 쇼바네크의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는 책을 손에 받은 순간,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세상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나로서는 반가운 현상이다. '다른'이란 말이 눈에 띄었던 것처럼 190cm 넘는 훤칠한 작가가 나오는 동영상을 찾아 보며 카메라 앵글에 눈을 잘 마주하지는 못하더라도 더이상 '바질의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그가 아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 용기를 내어 사회의 한 부류의 예시로 자신의 이야기를   소수(자폐)의 입장과 이해를 알리듯 더이상 '자폐'의 블안 심리보다는 모호한 경계를 정상성 현실로 끌어 오는 교량적 역할자로서 그의 자전적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되니 문맥속 위트와  그의 외형적 자폐이자 고기능 자폐인이 아닌 내면적 비자폐인으로 느껴지며 그의 노고로 다가온다. [4장] 서두의  인용문 중 '조금 이상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미셀 오디아르 감독의 말처럼 완벽하지 않은 빈 구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로 남으리라 믿는다.

또 다른 김** 님의 토론 후기


혼자 읽고만 책과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책은 다르게 남는다.

궁금하지 않던 것에 대해 관심을 갖은 무모함으로 또 하나의 경계를 부순듯한 기분이다. 훌륭하신 자폐인님을 통해 ‘자폐’에 대해서 또 자폐인이 보는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되고 또 거기서 저를 발견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토론 참여자분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p.190) - 오늘 나누지 못한 5장(약물 중독 그리고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 중에.

다만, 짧은 시간이 아쉬울 뿐~^^

이** 님의 토론 후기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자폐인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자폐自閉를 자개自開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모습들이 곳곳에 담겨있었는데, 그게 특별한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제프 쇼바네크가 말하고 있는 자폐 현상은 내게도, 주변 이웃에게서도 쉽게 보여지는 것들이었다. 연관된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떠올라 연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차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태에 이르면서 책 제목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에 새삼 감탄했다. 저자가 겪어왔던 여러 사건들이 이 한 문장으로 응축되어 담겨있는 듯 했다.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고, ‘비정상’이 아니라 ‘독특함’이다!” 마침내 이런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수에 속하지 않는 독특한 자폐인들을 나의 ‘특별한 일부 이웃’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고. 난 그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평범한 일인’이면 되는 것이라는 나름 명쾌한 답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다름’과 ‘독특함’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 토론, 책의 가치가 배가되는 의미있고 행복한 나눔이었다. 

차** 님의 토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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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할 여자들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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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네 마르살의 책 지구를 구할 여자들의 원제는 Mother of Invention이다. 한국어판 제목이 원제보다 다소 도발적이며 페미니즘 도서임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사회의 일부가 페미라는 단어에 부담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용감한 표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근래에 이런 용감한 책들이 속속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페미니즘이 눈치보지 않고 드러나야할 때가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는 차치하고,

 

전작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경제학과 가부장의 관계를 해부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과학기술의 역사가 비켜간 여성의 문제를 다뤘다. “가방에 바퀴를 다는 데 왜 5000년이 걸렸을까”, “일론 머스크보다 100년 앞선 전기차의 발명”, “체스는 이겨도 청소는 못하는 AI” 등 소제목이 흥미를 돋운다. 책은 발명, 기술, 여성성, 신체, 미래의 구분 아래 두 개의 장을 각각 배치해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발명 부분에는 일명 캐리어라고 불리는 여행용 가방에 5000년 전부터 존재해 온 바퀴를 부착하는 아이디어가 적용된 사례와 100년 전에 몇 초 안에 배터리를 교체하는 기술과 시스템을 구축하고도 전기차가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를 들려준다.

 

기술 부분에서는 우주복 제작에 사용된 원단과 박음질 방법의 유래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여성 중심 분야에서 남성 중심 분야로 바뀌면서 일어난 일을 서술한다.

 

여성성을 다룬 대목에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투자유치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와 여성적인 일로 인식되는 분야에서의 성공의 영향과 한계를 설명한다.

 

AI가 대체할 수 있는 기술에 종속된 직업 세계의 모습과 AI가 대체할 수 없는 신체 지능이 필요한 분야 그리고 펜데믹 속에서 드러난 인간 사회의 연결성을 신체 부분에서 다룬다.

 

마지막 미래에서는 AI가 일자리를 빼앗는 시대에 감정, 관계, 돌봄 기술의 필요성과 배제해서는 안 될 젠더 개념을 강조한다.

 

책은 모든 발명과 기술의 발전에 숨은 젠더 차별을 논의한다. 여성성을 배제한 채로 이 세상은 만들어져 왔다. 자유로운 여행을 다니는 남성은 자신의 가방을 들고 다닐 힘이 있으므로 가방과 바퀴는 관련지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쉽게 시동이 걸리고 매연을 내뿜지 않는 깨끗한 전기차는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성을 위한 제품이므로 가부장이 구매할 목록에서 제외됐다. 여성 속옷 원단으로 만든 부드러운 우주복은 안전성 테스트를 번번히 통과하고도 수차례 반려 끝에 채택될 수 있었으며 우주인이 입기 위해 나사에 납품하기 위해 제작 과정과 별도로 도면 전문가가 그린 서류가 필요했다. 살아있는 계산 기계 즉 컴퓨터로 일했던 여성들은 남성과 동일 임금 지불을 거절한 정부와 승진 기회 박탈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 사라져갔다. 프로그래밍이 남자의 분야가 되자 고소득 전문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성이 일을 잘하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해줄 수 없고 한 여성이 특정 분야에서 저조할 경우 여성 전체가 일할 능력이 없다고 폄하당한다. 여성은 일을 잘해도 못해도 어떻게 해도 경제적 우위에 오를 수 없을뿐더러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여성 노동자 개개인이 일을 잘하지 못하면 그건 여성 전체가 임금을 적게 받아야 한다는 증거가 되었다. 저거 봐, 여자들은 남자만큼 일을 못 한다고!
그러나 동시에 정확히 반대의 주장도 할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 개개인이 일을 잘하면, 그 또한 여성이 임금을 적게 받아야 한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게 뭐든 간에 일에 대한 자질은 전부 여성이 돈을 적게 벌어야 하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비결은 여성이 뛰어나게 잘하는 일을 전부 타고난 여성적 자질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반면 어떤 남성이 무언가에 타고난 소질을 보이는 것은 정반대의 증거가 된다. 남성이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pp.122-123

 

저자는 현재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문제와 제2의 기계 시대, 인간 생존의 문제를 풀 해답으로 우리 사회의 지배적 기술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기술 발명품이 인간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기술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배제해왔던 생각 속에서 현재의 위기를 도울 기술이 나타날지 누가 아는가.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그러한 존재 방식이 가능한 기술을 만들 수 있다. 기존 관념에 얽매인 무의식적인 배제에서 탈피해야할 때다.

 

우리는 사회와 그 안의 개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주체가 기술 발명품이라고 종종 잘못 생각한다. () 젠더 같은 요인을 고려하면 이 세상과 경제,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속에서 기술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이 사실은 혁신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기술 문제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배제했고 누구의 아이디어가 발명이나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고려하면 우리는 더욱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pp.3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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