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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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림 하나와 낯선 그림 하나두 그림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매끈한 외모를 지녔다꽤 날카로운 인상의 앉아 있는 남자를 그린 그림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려 애쓰던 중에 눈에 익혔었다프루스트 소설 속 인물의 모델이 됐다는 사람이었다그때는 익숙해지지 않았던 그의 이름은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사크 백작이다그리고 제목에 등장하는 '빨간 코트'의 주인공이 있다꽤나 극적인 자세로 선명한 빨간 색 옷을 온몸에 두르고 역시 붉은 배경을 등진채 서있다작품 제목은 <집에 있는 닥터 포치>. 이런 의상을 입고 있는 곳이 집이었고 이런 외모를 지닌 사람의 직업이 또 의사였다책은 이 두사람과 또 한사람의 여행으로 시작한다.




소설가가 쓴 실제 인물의 일대기이니 얼마나 극적일까 싶은 기대도 있었다하지만 전작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에서 느낀 바가 지나친 기대를 접는데 도움이 됐다빨간 코트를 입은 그 남자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책이겠건만 이야기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진행되지 않는다저자는 그리 만만하게 서사를 풀어가는 사람이 아니다일정한 줄거리가 있는 소설도 퍼즐을 맞추듯 쓰지 않는가전 생애가 낱낱히 밝혀져 있는 사람도 아니고 불분명한 여러 자료를 모아 한 사람의 일대기를 추적한 글이 한 줄의 맥락으로 이어졌을리 없다저자는 자신이 구성해낸 한 사람의 일생이 실제 그 사람의 삶과 완벽히 일치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아껴서 사용하면이 말은 전기 작가의 언어에서 가장 강력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된다이것은 우리가 읽고 있는 점잖은 한ㅡ삶의ㅡ연구가 그 모든 세부와 길이와 주석에도 불구하고그 모든 사실적 확실성과 자신만만한 가설에도 불구하고하나의 공적 삶의 공적 판본이자 하나의 사적 삶의 부분적 판본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준다.

p.149.

 

 

때문에 저자는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세밀히 묘사하고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펼쳐 보인다. 상반되는 설들에 둘러싸인 닥터 포치에 대한 저자 자신의 판단의 근거를 확보하고 인물에 대한 여러 정황들을 제시함으로써 책의 객관성을 세우기 위해서였을 게다.

붉은 코트를 입은 의사 포치의 시대는 이른바 '벨 에포크'라 불리는 시대다이름의 의미만 보자면 '좋은 시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이 시점에 이런 서정적인 이름이 붙은 이유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즐거운 영국', '황금시대', '벨 에포크'. 이런 빛나는 상표명은 늘 회고적으로 만들어진다. 1895년이나 1900년에 파리에 살던 누구도 서로 "우리는 '벨 에포크'를 살고 있으니 한껏 즐기는 게 좋아"하고 말한 적이 없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파국적 패배와 1914~1918년 프랑스의 파국적 승리 사이 평화의 시기를 묘사하는 이 말은 1940~1941프랑스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나서야 언어에 등장했다.

(…)

실제로 당시 그 '아름다운 시절'은 정치적 불안정과 위기와 추문으로 가득한 신경증적인, 심지어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국가적 불안의 시기였다ㅡ그리고 그렇게 느껴졌다.

p.42

 

그러니까 '벨 에포크' 시대의 이면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는 말이다. 책은 아름다운 불안의 시기와 그 시간을 살아간 유럽 유명인사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어디에나 포치가 있다. 유행을 선도하는 (거의) 댄디의 한 사람이었고(완벽한 댄디가 되기엔 출신 계급이 낮았다.) 시대를 풍미한 배우 베르나르의 연인이었으며 드레퓌스의 의사로 에밀 졸라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화가 존 싱어 사전트와 막역히 지내며 붉은 코트 초상화의 모델이 됐고 화가와의 인연으로 유명한 <X 부인>의 모델인 고트로 부인과 친분을 쌓았다. 또 프루스트 가족의 오랜 친구였다.


그 시대의 '댄디'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했다. 작가 프루스트의 모습은 몽테스키우 백작에게서 비롯하고 백작의 원본은 화가 휘슬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취향을 좌우하는 존재' '댄디' '유미주의자'들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아이러니함이다.

 

몽테스키우는 런던 방문 동안 휘슬러를 만났을 때부터 이 화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수염, 복장, 몸짓, 목소리, 재치, 취향을 복제했다. 프루스트는 몽테스키우를 만났을 때 편지와 몸짓에서, 발로 바닥을 두드리는 방식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백작을 복제하기 시작했다. 프루스트는 심지어 웃음을 터뜨릴 때 손으로 입을 가져가기 시작했다.ㅡ 몽테스키우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치아를 가리기 위해 그랬던 것일 뿐이지만.

pp.132-133

 

세간의 입소문은 포치에 대해 '구제불능의 유혹자'라고 단순한 '사교계 의사'라고 말하지만 많은 자료를 섭렵한 저자는 그의 다른 면을 본다. 포치는 "프랑스 부인과학을 일반 의학의 한낱 하부 단위에서 독자적인 분과로" 바꾼 전문의다. 그가 쓴 『부인과학 논문』은 여성 환자를 배려하는 인도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다. 효과적인 수술을 위해 소독과 병원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병원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병동을 장식해 정서적 측면을 보완했다.

 

"살균과 소독 절차의 도입에 따른 열광적인 흥분의 분위기 속에서 치료를 위한 부인과학은 어쩌면 너무나 배타적이고 급진적인 개입주의로 돌아선 것인지도 모릅니다."

(…)

"같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힘을 가진 우리 각자에게는 양심의 문제가 있습니다ㅡ양심은 의사, 특히 칼을 휘두르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

"나는 이 병원에서 훈련을 받을 젊은 의사들에게 겁을 주지 않고 병자를 진찰하는 방법, 환자의 정숙함에 불필요하게 상처를 주지 않고 진찰하는 방법, 경우에 따라서는 관대할 필요도 있고 엄할 필요도 있는 말로 병자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pp.205-206

 

포치는 "사교계의 의사, 책 수집가, 전반적인 교양을 갖추었고 대화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현재는 '사교계 의사'의 이미지만 남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료들은 그가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함을 주고, 혁신과 기술로 여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환자 수로 볼 때 부자보다 빈자를 많이 도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여성의 불평은 단 하나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고 그의 이름에 스캔들이 붙은 적"도 거의 없다. 포치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이미지와 다른 포치를 정의한다. "매우 지적이고, 결단이 빠르고, 과학적인 합리주의자"이며 "역사의 옳은 편에" 있는 사람으로.

 

그래서 나는 호색가 포치에 관심을 잃고걱정하는 가족적 남자 포치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의사 포치여행자 포치도회풍 인물 포치(속물 포치?), 국제주의자합리주의자다윈주의자과학자모더니스트 포치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절대 친구를 잃지 않는 남자 포치(반드레퓌스파만 아니라면). 미친 시대에 제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 포치.

p.219

 

이 책의 주요 인물은 작게든 크게든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과 연결된다에드몽 드 폴리냐크 왕자는 본명으로 등장하고포치는 닥터 코타르라는 인물에 녹아 있다몽테스키우 백작은 사를 뤼 남작의 "그림자 자아"프루스트는 "백작의 버릇을 복제하고귀족 생활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빨아들" "비열한 괴물로 변형"시켰다저자는 프루스트의 의도적인 서술이 아니라며 작가를 감싸려 한다.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인물의 완전한 복제가 아니고 그 반대 또한 실현되기 어렵다고 말이다저자는 프루스트에 대한 변명으로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독자로서는 이 대목이 줄리언 반스의 소설쓰기의 과정을 듣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공을 들여 다듬은 다른 누군가의 일화보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 또 소설가는 복사해서 소설에 붙이려는 어떤 계획적 의도를 갖고 실존하는 사람을 '연구'하지도 않는다전체 과정은 보통 그보다 훨씬 수동적이고스펀지 같고우연적이다독자의 동기ㅡ문학적 창조의 과정을 이해하고 싶다는ㅡ는 물론 정당하지만동시에 궁극적으로 무익하다아무리 자의식이 강한 소설가라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또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p.295

 

줄리언 반스는 닥터 포치의 이미지를 재구성해내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자료를 섭렵한 듯하다남아있는 각 인물들의 자서전적 글과 전기주고 받은 편지메모 등을 씨줄 날줄 삼아 '벨 에포크시대를 직조해냈다그림과 작품의 제목으로만 알고 있던 화가와 작가들이 삶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독서의 소득이었다오스카 와일드플로베르모파상알퐁스 도데이디스 워튼헨리 제임스 누구보다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고 싶은 동기가 되고 귀스타브 모로제임스 맥닐 휘슬러존 싱어 사전트오딜롱 르동을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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