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자라지 않는 아이 유유와 아빠의 일곱 해 여행
마리우스 세라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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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조용히 빛이 되어준 아이, 유유
- 마리우스 세라,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를 읽고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는 스페인에서 소설가이자 언론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리우스 세라의 자전적 에세이다.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아들의 전 생애를 담담히 기록해나가고 있는 이 책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대신 오히려 더 절제된 시선으로 유유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유는 행정용어로 85퍼센트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가족들은 나머지 15퍼센트로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향해 도전한다. 몸무게가 비교적 적게 나갈 때 보다 먼 곳을 여행하고자 하는 가족들의 의지. 일곱 해라는 짧은 생을 허락받은 유유를 위해 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려는 가족들의 모습이 여과 없이 펼쳐진다. 이런 가족들 덕분에 휠체어가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유유의 세상이 된다.

 

 장애아를 둔 부모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놓이곤 한다. 어딘가 위축되거나 주눅 든 채 숨어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우리와 조금 다른 그들을 ‘틀리다’고 생각하는 병든 시선이 몸이 불편한 그들을 더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유유의 가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도 당당하게 식사를 마친다. 휠체어를 가로막는 불법주정차들을 물리치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의 불합리한 시선에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매순간 자신감과 의욕이 충만할 수는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절망과 비통함 역시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엄마의 손길도, 아빠의 보살핌도, 누나의 속삭임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유. 그저 멍하니 휠체어에 누운 채 수많은 약에 의지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 하지만 아버지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매순간 하늘의 계시를 염원한다. 연약한 유유로 인해 불사신이 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애끓는 부정이 곳곳에 드러난다. 과연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다면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반문해보게 된다. 좀처럼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저 아이에게 나는 어떤 부모인지, 어떤 부모가 되어줄 것인지를 고민해 본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유의 달리는 모습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뮤토스코프(이미지를 연속해서 넘겨 보여줌으로써 움직이는 효과를 내는 활동사진) 작업을 통해 유유는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아들의 달리는 모습을 간절하게 염원하던 아버지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순간, 유유는 마음속의 말을 전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야 만다.

 

 선천적 뇌질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가만히 한 자세로 누워서만 지내야 하는 아이. 평균 수명 7년. 일찌감치 사망선고를 받은 채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 유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치명적인 장애를 지닌 유유는 알고 보니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절망 이면의 희망을 보게 만드는 아이, 눈물과 웃음의 참 의미를 알게 해 준 아이, 평범한 일상의 축복을 역설하는 아이,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단단하게 영글게 해 준 아이. 가능성 희망 기적이라는 단어의 절박함을 알게 해 준 아이. 유유는 가만히 휠체어에 누운 채 이 세상을 살다 갔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들은 오히려 더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유유로 인해 더 강인해진 가족의 이야기, 그들의 삶 속에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보이는 장애를 넘어 보이지 않는 희망을 발견해 나가는 유유 가족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듯하게 덥혀줄 것이다.

 

- 책 속 추천 구절

 

행정 용어로는 85퍼센트의 장해를 지닌 장애인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이런 모든 꼬리표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유이스는 나의 둘째 아이다. 그 애한테는 조금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몸이 약한 아들을 돌보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매달린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와 딸아이는 유이스가 15퍼센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돕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4쪽)

 

우리가 줄을 서 있는데, 한 나이든 아주머니가 다가와 유이스를 가리키며 당신의 두 딸도 유유와 같다고 말한다. (…) 어떤 식으로 위로의 말을 전할까 곰곰 생각하는 사이 아주머니가 선수를 친다. 전혀 빈정거리는 빛 없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과 환한 미소로 반박할 수 없는 한마디를 한다.
“이 아이들은 하느님의 선물이에요.”(119쪽) 

 

이처럼 쉽게 상처받는 아들이 있어, 예전 같으면 고통스럽게 느꼈을 수많은 역경 앞에서 나는 상처받지 않는 존재가 된다. 아들이 그처럼 약한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힘을 비축한다. 이런 내 모습은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하다. 아들과 함께 있기에 나는 불사신이 된다. (145쪽)

 

우리는 유이스의 VIP 카드 덕분에 줄도 서지 않고 유로디즈니의 놀이기구란 기구는 다 타며 사흘을 꽉 채워 보낸다. 카를라는 보는 것마다 빼놓지 않고 동생의 귀에 전달하는 남미 방송국의 사회자로 변신한다. 딸아이의 생글거리는 눈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감탄이 마구 뿜어 나온다. 유유가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우리의 특별한 VIP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165~166쪽)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달리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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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 그림편지 - 행복을 그리는 화가 이수동이 전하는 80통의 위로 토닥토닥 그림편지 1
이수동 글.그림 / 아트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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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건네는 이수동 화가의 그림편지

- 이수동, 『토닥토닥 그림편지』를 읽고

 

생각해보면 우리말 중에는 건넬수록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는 말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맘때가 되면 새삼 생각나고 나누고 싶어지는 말이 있는데요, 이 말은 스스로에게 건네도 좋지만 타인과 나누면 더 좋습니다. 사실 이 말은 의태어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동작으로 표현되는 언어. 가만히 혀를 놀려 발음해 보면 참으로 정감이 가는 말, 바로 ‘토닥토닥’입니다. 부부 사이에, 부모 자식 간에, 친구 사이 혹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자주 회자될수록 좋은 말이지요. 관계의 물꼬를 트게 해주는 말. 말이 필요 없는 말. 때론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말. 행복을 그리는 화가 이수동이 토닥토닥 위로를 건넵니다. 그림편지 가득 따스함을 담아서 말이지요.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글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텐데요, 그림책을 보더라도 글을 먼저 읽는 답니다. 글을 통해 그림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가끔은 그림에서 더 많은 글이 읽힐 때가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자유로운 몸짓(굳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도)을 발견하게 되면 이미 정형화된 글은 마음에 담아 둘 이유가 없어집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이수동 화가의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 중 하나랍니다.

 

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그의 화폭에 담긴 사람들의 몸짓은 사뿐 날아오를 듯 가벼워 보입니다. 어디론가 누군가로 향하는 그 몸짓에는 설렘과 사랑이 있습니다. 정겹고 그립고 따듯한 사람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몹시도 두근거립니다. 때론 노곤해지기도 합니다. 온기 때문이지요. 그, 그녀 혹은 그들이 나누는 몸짓 속에는 여유로운 휴식과 사색의 시간이 흐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이 영원처럼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따듯한 포옹은 단연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인데요, 자꾸 보고 있자니 누군가를 가슴 가득 꼭 끌어안고 싶어집니다. 꼭 안기고 싶어집니다.

 

글 한 번 읽고 그림 두 번 보고 생각 세 번하고……. 물론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만 비중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리는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글과 그림 모두 따듯합니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평온합니다. 볼수록 마음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주네요. 자꾸만 떠올리고 싶은 사람, 볼수록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수동 화가의 그림이 꼭 그렇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그의 글이 꼭 그렇습니다. 달을 향해 수줍게 피어오르는 달맞이꽃 같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 같은 꽃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책. 추워진 날씨에 옷깃만 여미지 마시고 마음부터 다독여보심이 어떠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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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dy5 2011-12-23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아해요.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지요. 말 그대로 토닥토닥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책이니까요.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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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내가 과연 ‘나’인가
-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를 읽고
 
고문자(拷問者). 격동의 시절 암암리에 맹활약을 펼친 고문기술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고문자란 어떠한 이유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 행동을 타인의 생활 반경 안에서 펼치는 사람을 말한다. 그로 인해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지고 생활은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당신에게도 혹시 그런 고문자가 있는가? 전혀 다른 성향, 전혀 다른 성격, 전혀 이해 받지 못할 행동으로 평화로웠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려 드는 사람.
 
은퇴 후 시골에서의 한적한 삶을 꿈꾸어온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에게 첫 눈에 <우리집>이라고 단언할 만한 매력적인 집이 나타난다. 자그마한 시골마을, 눈에 보이는 집이라고는 의사가 살고 있다는 이웃집 한 채 뿐인 곳.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여차해서 일이 생기면 바로 도움을 청할 거리에 의사가 살고 있다. 이런 곳이라면 생의 마지막 날까지 머무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 아닌가. 그러나 행복은 일장춘몽일 뿐. 오후 네 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평생 꿈꾸어왔던 평화로운 삶은 수렁 속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매일 오후 네 시만 되면 어김없이 문을 두드린다. 마치 자기 집인 양 들어와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채 두 시간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 돌아간다. 바로 유일한 이웃집에 산다는 의사 양반 팔라메드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이 없다. <그렇소>, <아니오>와 같은 긍정 혹은 부정의 대답만을 내뱉는다. 에밀이 굳게 마음을 먹고 <왜죠?>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을 요하는 질문을 건네기라도 하면 경멸에 찬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다. 마치 자신에게 대단한 결례라도 저지른 것처럼 상대방을 무한하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 그렇지만 정작 자신이 범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결례가 아닌 것처럼 행동을 한다.
 
도대체 그는 왜 매일 일정한 시각에 방문을 하는 것일까. 물을 수도 없다.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내내 침묵으로만 일관할 수도 없다. 평생 ‘예의’로 중무장한 채 살아온 에밀은 이 침입자에게조차 예의를 다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런 말이나 거의 혼자 떠들다시피 해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말이다.
 
살아가다보면 본의 아니게 특수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한의 상황! 그럴 때가 되면 사람은 자신의 숨겨진 내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 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 하는 난해한 질문에 봉착하기에 이른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 시』는 바로 이런 이야기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또 다른 일면을 깨닫게 된 어느 평범한 노인의 치명적인 고통과 극단적인 선택.
 
어찌 보면 이야기는 단순하다. 매일 오후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이웃집 불청객과 보내는 시간 동안의 상황이 주요내용을 이룬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렇소>, <아니오> 혹은 긴 침묵만이 이어지는 그 대화 말이다. 그런데 긴장감이 넘친다.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서로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표정과 말투 행동이 심각한 상황과는 반대로 위트 있게 펼쳐진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재주 덕분에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살아가는 동안 사람이 지켜내야 하는 예의란 것이 어느 선까지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막바지에 툭 하고 던져놓은 듯 마침내 드러나는 반전은 독자에게 궁극의 질문을 던진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과연 ‘나’인가 라는. 남들이 규정해 놓은 나를 진정한 ‘나’인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세상의 속도전에 떠밀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살아왔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철학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이 소설을 기회삼아서 말이다.
 
그런데 팔라메드는 정말 그 같은 결론을 원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 구원인가, 처형인가! 책을 덮고 나서도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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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30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아멜리 노통브 저도 무지 좋아하는데!! 반가워요, 소울노트님 :)

soulnote 2011-12-22 00:51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가워요^^ 말없는수다쟁이님!!! 이제서야 봤네요...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셔요^^
 
위로
이철환 글.그림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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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 이철환, 『위로』를 읽고


한낮의 부산함이 모두 사그라들고,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침묵의 시간이 찾아오면 소리들이 명징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애써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귓전을 울리는 나직하지만 선명한 소리들. 그것은 세상의 소리이자 내면에서 들려오는 나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 소리들과 마주할 때면 마음이 헛헛해질 때가 있다. 때로는 정신이 또렷해지기도 한다. 대체 얼마만큼의 소란스러움 안에 갇혀 살았기에 주변을 맴도는 이 소리들을 듣지 못했을까 싶다가도 이제라도 말을 건네 오는 것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의 차이를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는 내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책이 있다. 바로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의 신작 『위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 때의 함박웃음을 잃는 일이기도하다. 아이는 하루 온종일 세상을 탐색하느라 바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깔깔 웃고 걱정 없이 잘 자고 바지런히 움직인다. 자신의 세계에 푹 빠져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른이 되면 다르다. 무엇을 해도 타인의 이목에 신경을 쓰게 된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삶을 맞추려하다 보니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다. 바로 불치병에 가까운 ‘비교병’ 때문이다. 책의 주인공 파란나비 피터 역시 타인의 삶을 부러워한다. 자신이 가진 파란날개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모른 채 붉은 날개만을 동경한다. 원하던 것을 갖게 되면 과연 행복해질까. 결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진 것에 대한 만족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늘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위로』는 재미있는 교과서 같은 책이다. 교과서처럼 바르지만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다. 이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읽다보면 세상의 진리와 순리를 깨닫게 된다. 조목조목 자세하고 친절한 가르침에 자주 밑줄을 긋게 된다. 그런 면에서 교과서와 비슷하지만 교과서에는 없는 감동이 있다. 파란나비 피터의 여정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위기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피터는 붉은 날개를 갖게 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불신 오해 약육강식 소통의 부재 권력의 쓸쓸한 이면 등을 경험하게 된다.


쓰라린 고통 뒤에 마침내 깨닫게 되는 이해 배려 소통에 관한 이야기. 고정관념이 얼마나 치명적인 편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높이 올라가는 삶보다 깊이 있는 삶에 대해 고민해본다. 존재의 욕망과 이중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에 따라 세상이 얼마만큼 달라질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면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위로’라는 말을 떠올리면 날 선 생각들이 경계 없이 허물어진다. 포근하고 따뜻해진다.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약해보이지 않으려고 단단히 옭아맸던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놓게 된다. 내 안에 내제된 이중성과 양면성으로부터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홀가분하게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누군가 내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 온다면 정말이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위로를 건네는 일도 받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으려는 듯 저마다 철옹성 같은 벽을 쌓은 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삶의 어느 순간, 타인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때가 찾아와도 ‘나 좀 위로해 주세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위로는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단 한 번의 손길, 단 한 번의 눈빛이면 충분한데 우리는 그것을 받지 못해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위로를 건네는 일에도 위로를 받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은 어찌 보면 서글픈 인생들. 이 책을 읽고 나면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위로받지 못해 헛헛한 마음을 누군가를 위로하며 채울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생길지도. 슬프지만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책, 이철환의 『위로』를 읽고 자신부터 위로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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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dy5 2011-12-23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스스로를 위로해줄 책이 필요했는데,요 책 하나 입고 해야겠네요.
 
고양이와 선인장 - 사랑에 빠졌을 때 1초는 10년보다 길다
원태연.아메바피쉬.이철원 지음 / 시루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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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첫 눈에 알아본 순간, 이미 하나가 되었다
-원태연, 『고양이와 선인장』을 읽고

 햇살 좋은 창가에 화분을 내어둔다. 가끔 물을 주고, 가끔 말을 걸고, 가끔 눈길을 준다. 가끔이지만 지속적인 관심. 그래서일까. 화분 속의 그것은 생기가 넘쳐 보인다. 매끈한 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싱한 탄력. 나와 같이 숨을 쉬고 하루를 살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진다. 생명을 지닌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의지. 강렬하고도 애틋하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주는 대상이 있을 때 그 에너지는 더 강해지는 법.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 고양이와 선인장처럼 말이다.

 오디오그래픽노블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고양이와 선인장』은 원태연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은 에세이집이다. 오디오그래픽노블? 낯설지만 새롭고 신선한 느낌! 곧바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창가에 놓아둔 화분에서 아이비가 바람에 한들거린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고양이 외로워와 선인장 땡큐의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이 더 싱그럽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고 괜스레 미소도 짓게 된다. 전보다 더 애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오로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가능한 일. 사랑은 사람을 새롭게 살게 한다. 어느 날 서로를 알아본 고양이와 선인장이 그랬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고양이와 선인장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 것만으로 이미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로를 더 알고 싶은 호기심, 서로를 걱정하는 안부, 서로를 소유하고 싶은 질투,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관심……. 모든 사랑의 과정에 동반되는 이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고양이와 선인장의 마음에 투영되어 있는 책,『고양이와 선인장』은 빛처럼 맑고 투명하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삶은 고단하다. 괜스레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게 된다. 나도 불편하고 상대방도 불편해한다. 그쯤 되면 혼자일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 나만의 공간 안에서 갇힌 듯 자유롭게 사는 법을 터득해간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소위 말해 사회부적응자. 고양이 외로워가 그랬고, 원태연 시인이 그랬다. 열일 곱, 처음 자신의 시가 남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부터 마흔 하나가 된 지금까지 원태연 시인은 시인도, 작사가도 영화감독도 아닌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박탈감. 시인으로는 이례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아야 했던 인생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고양이 외로워에 투영된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고양이와 선인장의 이야기는 비단 고양이와 선인장의 이야기만은 아니기에 공감이 간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 살아있는 한 늘 반복되는 고질병과도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해 충만해짐을 알기에 그 아픈 사랑을 자꾸만 되풀이하곤 한다. 반복되는 사랑, 그럼에도 어느 한 순간도 똑같지 않은 신비한 마법과도 같은 사랑. 때론 미.친.거.아.냐.라는 말을 들어도 좋을 만큼 사랑은 목숨을 걸게 만들기도 한다. 땡큐를 향해 온 몸이 부서질 듯 달려가는 외로워처럼.

 고양이와 선인장의 사랑이야기? 유치하지 않냐구요? 유치하지 않답니다. 가볍지 않냐구요? 글쎄요, 저에게는 가벼운 이야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원태연’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이 책을 유치하거나 혹은 가벼운 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추측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 결국은 대중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그를 평가절하 해온 게 일정부분 사실이니까요. 실은 제가 그랬답니다. ‘원태연 시인의 책이네. 고양이와 선인장이라고? 유치할 것 같은데. 왠지 가벼워 보여.’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었습니다. 원태연 시인으로 인해 한 시절을 무사히 건너온 제가 세류에 휩쓸려 그를 평가절하 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데요, 땡큐와 외로워의 이야기는요, 선인장과 고양이의 사랑이야기만은 아니기에 마음이 아프고 절절하고 애틋하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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