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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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세계관이 모여있는 박서련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좀비부터 자아분열까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녀의 소설에 적응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이제 첫 번째 단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는데 두 번째 단편을 마주하고는 낯선 느낌에 잠시 읽기를 멈췄다. 잠깐 동안 현실의 삶을 살다 다시 소설을 펼쳤다. 마지막 일곱 번째 단편을 읽을 때까지 이 행동은 계속되었다.


기묘하면서도 몽롱한 환상의 세계를 작가의 스타일대로 풀어놓은 소설은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소설에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파멸에 이른 도시를 탈출하는 한 여자와 남자아이의 기묘한 동행, 자신의 정자와 공여 받은 난자로 엄마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의 험난한 출산기,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도서관에 불을 지르려는 '나', 분열된 '나'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인물까지 소위 말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여러 장르의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심리 묘사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고정된 성 역할과 시대가 변한 만큼 달라져야 하는 가정의 형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또한 삶과 죽음, 여성들 간의 연대와 사랑, 젊음과 노화 등 인간의 욕망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신기한 건 낯선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각 단편의 영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점이다. 짧은 SF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 속에서 작가가 만드어낸 세계에 조금씩 스며들 수 있었다. 이전에 박서련 작가의 소설 <마르타의 일>을 읽고 굉장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소재와 장르를 자유롭게 넘어 다니는 그녀의 글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졌다.  

P. 11 
어떤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 뭔가를 하고 있다. 아무 접점이 없어 얼굴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이, 인간들이…… 살아 있다.

P. 77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는 다음, 다음 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 낡아버린 몸에 소년의 음성을 지닌 여자 오선재의 몸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
.

P. 197
나는 목이 잘려 죽는다. 언젠가. 오늘은 아닌 미래에. 멀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 마치 이미 나 자신이 목 잘려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것처럼.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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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구한 라이프보트
미치 앨봄 지음, 장성주 옮김 / 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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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는 제이슨 램버트가 소유한 호환 요트 ‘갤럭시호’가 갑작스러운 폭파 소리와 함께 침몰하게 되고 살아남은 열 명의 사람들은 라이프보트에 간신히 올라탄 채 표류 중이다. 구조대는 보이지 않고 음식과 물도 떨어져가던 표류 생활이 이어지던 중 바다에서 한 남자를 건져 올린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허겁지겁 음식과 물을 받아먹던 그는 자신이 ‘신’이라 말한다. 


한편 육지에서는 어린 딸을 잃고 아내와의 사이도 소원해진 한 형사가 ‘갤럭시호’의 라이프보트 잔해를 발견하고 숨겨진 단서를 몰래 찾아 사건을 진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갤럭시호’의 침몰 이유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까.


소설은 바다에서 사고 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육지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뉴스 형식의 글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바다의 이야기는 한 남자가 남긴 그날의 기록이다. 화자의 시점에서 라이프보트 안의 상황을 설명한다. 육지의 이야기는 라이프보트 잔해에서 발견한 수첩을 내용을 따라 그날의 진실을 추적하는 형사를 보여준다. 증거품에 먼저 손을 대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수첩은 아이를 잃고 허물어진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작가는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의 순간 인간이 가진 양면성을 이야기한다.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순간에 '신'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어떤 말을 가장 먼저 할까.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서 빨리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라이프보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모습을 보며 가슴으로는 절대 저러면 안돼라고 하지만 머릿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상황에 만감이 교차한다. 바다 위에서는 죽음과 육지에서는 무의미한 인생과 맞서는 인물을 보며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아본다. 절망의 순간에도 생존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현재가 힘겨워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떠오른 생각이다.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과 바다와 육지, 뉴스를 오가는 속도감 있는 전개 덕분에 소설을 한층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갤럭시호가 침몰하게 된 이유가 밝혀졌을 때는 살짝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감동적인 이야기와 미스터리적 요소가 잘 어우러진 소설이다. 

P. 356 
결국에는 바다가 있고, 육지가 있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뉴스가 있다. 그 뉴스를 널리 전파하고자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로 그 이야기의 주제는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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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 13일 동안 이어지는 책에 대한 책 이야기
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지연 옮김 / 김영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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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이렇게 짧은 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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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만성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 부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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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간 오른쪽 아랫배와 옆구리에 통증이 지속되었다. 하루 이틀 지속될 때도 있고 짧은 시간 나타났다 사라졌던 적도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이 생겨났다. 결국 올봄 미루었던 국가건강검진과 거금을 들인 추가 검진까지 진행했다.


당시 통증은 극심했고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2주 후 받은 결과는 만성위염을 제외하고는 이상 없음이었다. 순간 내가 거짓말쟁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난 오랜 시간 통증으로 고통받았는데 이상 없다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정체불명의 병에 시달린 저자의 이야기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무렵부터 정체불명의 증상들에 시달린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고 의사들은 그녀가 아픈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 역시 내가 아팠을 때 원인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왜 무엇 때문에 통증이 생기는지 알면 분명 없앨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 이상이 없으면 의사들은 스트레스  때문이라 말하고 운동을 병행하라는 처방을 내린다.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저자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된다.


​저자는 신체적 고통과 자신의 병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로 인한 심리적 고통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모호한 병 때문에 피로도와  통증이 극심했지만 여성의 질병은 심리적인 문제라는 오래된 편견으로 인해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아픈 이유를 찾고 건강을 찾으려는 여정을 계속한다. 그래서 이 책은 병의 회복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갈 의지를 보여준다. 


​건강검진 이후 통증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어느 순간 콕콕 찌르는 통증이 나타날지 몰라 늘 긴장하고 있다. 저자가 써 내려간 10년의 기록은 자신의 고통을 떨쳐버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이야기다. 스스로 면역계와 의학에 대해 공부하고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치유법에도 매달리며 살아남으려 한 그녀의 투쟁기는 현대 의학의 한계와 질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생각을 확장시킨다.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는 병을 극복하는 건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는 인식 너머에 있는 만성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p. 79
만성질환은 결국 심한 불안을 끌어낸다. 계속 아프다 보면 통증 같은 실제 증상으로 인한 아픔을, 훗날 통증이 더 심해지고 건강이 악화될 수 있다는 불안에서 생기는 아픔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질병이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은 의미를 창조하는 기계로서 새로운 상태에 끝도 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그 자체로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p. 88
지식이 있으면 치료 혹은 치유의 희망이 생긴다. 치유가 안 된다고 해도, 진단을 앎의 한 형태로서 진단이 나와야 타인에게 우리의 경험을 인정받을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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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 - 뇌과학과 정신의학을 통해 예민함을 나만의 능력으로
전홍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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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예민한 아이였다. 좋게 말해서 눈치가 빠른 거지, 유독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랐다. 그런 성향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고 이런저런 사정까지 겹쳐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공황장애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이라 나는 아프지 않다고 큰소리치며 진료실을 나왔다. 이런 예민함을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정신의학 전문의 전홍진 교수는 이 책에서 예민함을 자신만의 능력으로 바꾸는 실천법을 이야기한다. 예민한 특성을 4가지로 나누어 다양한 상담 사례를 소개하고 이를 통해 감정들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능력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분명 책에는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데 왜 상당 부분 내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을까. 특히 불안과 우울편에 소개된 사례는 내가 실제 겪었던 일들이 대부분이라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실수했거나 잘못한 기억이 자꾸 떠오르며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고 이러다 죽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타인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고 땅만 보며 걷던 시간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와 맞지 않는 상사와의 대립 때문에 회사 생활이 힘겨웠던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예민함 때문에 방전되어 무너졌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그런 시절도 있었지 하고 넘기지만 당시에는 다음 날 눈을 뜨는 것조차 두려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괜찮아졌을까. 그 답은 5부 실천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스스로 찾아서 하고 있던 일들이 이 책의 실천편에 담긴 내용과 상당히 비슷했다. 홀로서기를 선택한 후  외부의 자극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내게 맞는 생활 패턴을 찾아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좋아하는 일을 안전 기지로 택하여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여러 시도를 해보면서 예민함을 활용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고 있었다. 예민함을 단점이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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