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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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운명을 믿어본 적 있니?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런던에는 운명을 믿지 않는 여자가 있었다. 한번 맡은 냄새는 영원히 기억하는 조향사 앨리스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친구들과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서 점쟁이의 예언을 듣게 된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앨리스는 인생을 위해 여행을 떠나라는 점쟁이의 예언을 듣게 된 후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앨리스는 괴짜 화가인 이웃집 남자 달드리의 설득에 못 이겨 점쟁이의 예언을 이정표 삼아 이스탄불로 여행을 떠난다.


​다소 이국적인 풍경의 나라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내 예상보다 엄청난 일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여섯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점쟁이의 말 때문에 단순히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앨리스의 여행에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진정한 뿌리를 찾아가는 그 발걸음을 통해 자식을 향한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마주할 수 있었고 잃어버린 가족의 기억을 찾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현실에서 아날로그적 여행은 신선하면서도 정겹게 보였다. 특히 앨리스와 달드리가 주고받는 서신에서 서로를 향한 애틋함과 신뢰와 공감 등을 느낄 수 있고 운명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작가는 역사적 아픔을 배경으로 앨리스와  달드리의 운명을 결정한 퍼즐 조각을 하나씩 보여준다. 여러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다 보면 서로를 향한 사랑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볼 수 있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타로 점괘나 오늘의 운세에도 혹한다. 그래서 분명 어딘가에 영혼의 반쪽이라 여기는 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나에게도 두 개의 삶이 있다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나 또한 여섯 명의 사람을 만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에라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생겨났다.


평소 사랑 이야기를 즐겨 읽지 않지만 앨리스와 달드리의 마법 같은 사랑의 여정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몰입하고 있었다. 무더위조차 날려버린 두 사람의 여행이 오래도록 기억이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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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의 집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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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미스터리를 즐겨 있는 건 소설의 상황과 현실의 모습이 묘하게 닮아 있어 소설의 내용에 깊이 있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가시의 집> 역시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소설이었다.


​중학교 교사인 호카리 신이치는 학생을 통해 학내 집단 괴롭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만 책임 회피를 하려는 교장의 태도에 그 역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어느 날 초등학생인 자신의 딸 유카가 집단 괴롭힘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중학생 아들과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내까지 유카의 사고를 계기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호카리 부부는 유카의 학교로 찾아가지만 역시나 교사의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가 쌓이게 되고 딸을 괴롭힌 주동자의 이름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은 보도가 되면서 가해자를 향한 비난은 거세지게 되고 결국 가해자인 오오와 아야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살해 용의자로 유카의 오빠가 경찰에 연행된다. 한순간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게 되면서 호카리는 가족은 점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집단 괴롭힘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며 평범한 가족의 일상과 그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조금씩 드러낸다. 가해자를 단순히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준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심리에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다. 


최근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교사들의 고충과 소설 속에 묘사된 교사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집단 괴롭힘을 대하는 학교의 어정쩡한 대응이 겹쳐지면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극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그저 재미로 정보를 퍼나르는 무책임한 네티즌까지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점점 더 심각해지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나카야마 시치리 작가의 책을 즐겨 읽는 건 다소 민감한 주제일지라도 가독성이 좋다는 점이다. 이 소설 역시 불편한 주제임에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현실과 무척 닮았다는 점, 그리고 사건의 범인을 나름대로 추리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잘 보여준다는 점도 소설을 읽는 재미를 높여주었다. 교사와 아빠라는 입장에서 처음엔 보인 미온적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가족을 위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제목과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회 구조적 문제, 각자가 숨기고 있는 가시 등 씁쓸하지만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p. 58
“아빠는 아빠야, 선생이야, 어느 쪽이에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
p. 265
누구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걸까, 아니면 타인을 위한 걸까. 냉방이 강하지 않은데도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사토미는 양손으로 컵을 감싸 손가락을 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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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번 버스의 기적
프레야 샘슨 지음, 윤선미 옮김 / 모모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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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88번 버스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의 기막힌 사연이 있다. 이별의 아픔을 안고 런던에 온 '리비'는 88번 버스에서 '프랭크'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그의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60년 전 첫눈에 반한 붉은 머리의 여성을 찾으려는 여정에 프랭크의 요양 보호사 딜런이 함께하면서 이들의 인생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과연 두 사람은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책 표지부터 따뜻한 이야기일 거란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는 데 예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과 사랑스러운 캐릭터, 유쾌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까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소설이다. 푹푹 찌는 날씨에 특별히 좋을 일도 없는 지금의 내가 딱 원하는 행복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신나면서도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하고 감동적이면서도 신파적이지 않은 기적 같은 이야기가 참 좋았다.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원치 않은 의대에 입학하면서 꿈을 포기했던 리비는 프러포즈를 기대했던 8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고 집도 직장도 잃은 채 언니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리비의 상황부터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에서 평범한 청춘들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리비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가 꼭 성공하길 기대했다. 그 일을 계기로 리비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하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프랭크의 요양 보호사인 딜런은 60년 전의 추억이기에 첫사랑이 런던에 살고 있다는 확신부터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첫사랑을 찾지 못했을 때 프랭크가 받을 충격에 걱정하며 리비의 계획에 반대했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딜런과 계획형 인간 리비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게 된다. 하지만 프랭크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지고 첫사랑을 찾는 일에도 진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리비는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이 더 좋았던 건 마냥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다툼, 연인 간의 오해, 임신과 결혼 등 우리가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이 적절하게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실망하고 다투고 상처받지만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기꺼이 도움을 건넨다. 이런 감동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강력 범죄 뉴스가 끊이지 않고 대형 참사에도 서로 나 몰라라 하는 현실에서 이 책을 만나 잠시나마 세상의 따뜻함과 진정한 우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88번 버스의 기적이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p. 458-459
프랭크가 손을 뻗어 리비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았다.
"이렇게 다시 보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네요."
프랭크의 떨리는 손을 리비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름이 모자이크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리비도 프랭크의 손을 꼭 잡았다.
"저도 다시 만나게 돼서 너무 좋은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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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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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땐 어디론가 떠나는 인간을 뜻하는 줄 알았다. 환승이라는 단어 자체를 쓸 일이 많지 않기에 그저 교통수단의 일부로 여겼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을 환승이라 표현하며 지금껏 거쳐 간 수많은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 한정현과 작가 한정현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할 수 있다.


​저자는 스스로에게 스무 개도 넘는 이름을 붙였다. 난희, 경아, 프란디에 등 수많은 이름은 각각의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인생을 사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는 이러한 환승을 통해 자유롭고 편안한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이름으로만 살아왔기에 그녀의 생각이 신선하면서도 신기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무거운 삶의 짐을 홀로 짊어져야 했던 과거의 나에게 여러 존재를 만들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삶이 조금을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한 사람의 삶에서 공감과 위로를 받는다.


​저자는 개인적 이야기부터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꽤 담담하게 보여준다. 마치 친한 친구와 조곤조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을 온전하게 지켜주는 환승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글로써 풀어나간다. 


저자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이름들 역시 같은 선상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지켜준 이름들 덕분에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를 지켜나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나라면 어떤 이름으로 환승할 수 있을까. 어느 소설 속 주인공으로 환승 여행을 떠나볼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소설이 더 읽고 싶어졌다. 어느 소설에서든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해 본다.

p. 43-44
고유성을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름에 힘을 좀 줬던 거다. 

p. 138-139
내 인생의 모토는 '살아만 있자'인데, 사실 이건 책과 인생이 유사하다고 느끼는 지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책이 끝나지만 않으면 다음 장은 분명 예측 불가하지만 흥미로운 일들이 존재하고, 인생도 그렇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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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이시우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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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픈 홀어머니를 모시며 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세일은 '업계 최고 대우'로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일간지 광고에 혹해 이력서를 넣어본다. 예상치 못하게 면접을 보게 된 세일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 이내에 인적조차 없는 개활지 한가운데 있는 건물에서 면접에 임하고 합격하고 만다. 


정체 모를 이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다인실 병실에 입원해 있던 어머니가 특실로 옮겨지고 수억의 대출이 쉽게 이루어지는 등 사회적 대우가 180도 달라진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제 겨우 입사했고 그마저도 3개월 인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상황에서 통장에 꽂히는 월급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큰 금액이었다. 


놀라운 건 세일이 맡은 업무가 벽에 붙어 있는 시곗바늘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게 전부라는 점이다. 월급은 국가에서 받고 국정원이 경호해 주는 이 회사의 정제는 무엇일까.

성별, 학력, 자격, 나이무관
3교대 근무
정년보장
업계 최고 대우


단 네 줄의 신입사원 모집 공고. 그럼에도 업계 최고 대우를 보장한다는 문구에 가장 먼저 신경이 쓰인다. 이 의문투성이 소설을 읽으면 가장 먼저 든 질문은 '과연 나라면 이 회사에 입사할 수 있을까'였다.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스러운 세명의 노인들만 있는 이 곳에 덜컥 발을 내밀 수 있을까. 이에 더해 하는 업무에 비해 과도한 대우도 무서웠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소설을 읽을수록 계속되었다. 


이 기묘한 소설은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을 담고 있다. 작가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받게 되는 차별적 대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학벌도 배경도 인맥도 없는 취준생이 한순간에 국가 원수 급 대우를 받는 상황이 어이없으면서도 두렵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은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일의 업무는 8시간 동안 시계를 지켜보는 일이다. 9시에 있는 시곗바늘이 3시를 넘어가게 되면 손잡이를 잡아당겨야 한다. 하지만 손잡이를 당겼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3시가 넘어가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의 판단을 믿고 한 선택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무거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설정과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세 노인의 정체와 이들이 맡은 업무의 의미, 꿈속에서 세일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 등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남아있다.

p. 293
문명이, 이 세계가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이 내가,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자네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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