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둥그배미야 - 김용택 선생님이 들려 주는 논 이야기
김용택 지음, 신혜원 그림 / 푸른숲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2003년 1월에 초판을 샀을 때는 책값이 8500원이었는데,
그새 정가가 1만원으로 올랐다.

화가 신혜원 선생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글쓴이 김용택 선생의 동네에
들락거리며 세밀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모름지기 그림책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개중에 오자와 곤충 그림의 이름이 빠진 것이 눈에 띄지만,
지금쯤은 고쳐졌으리라 생각하련다.

해와 달과 비와 구름과 바람과 캄캄한 밤과 더불어
깨어나고 생동하고 잠들고 쉬는
논 이야기가 재미있고 충만하다.
논에 사는 미꾸라지가 겨울에 땅을 파고 들어가는지는 정말 몰랐다.

끝부분에 눈에 거슬린 것이 있는데, 74쪽에
“동네 모든 사람들이 들판으로 다 나가거든. 논을 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논으로 가 논을 매면 여자들은 새참을 만들고, 점심을 만들지.”라고 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나 보다.
82쪽에도 “농부들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비와 바람과 물과 햇살, 캄캄한 밤”이 벼를 여물게 했다고 한다.
‘농민’의 피와 땀과 눈물이 아니라 ‘농부(農夫)’만의 피와 땀과 눈물이란다.
그래서 별 2개를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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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두 개 가차 없이 깎으셨네요.
하하. 과감한 처사에 박수.

가랑비 2006-11-0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깎아서 박수를 받다니. 하하, 감사합니다, 꾸벅! ^^

반딧불,, 2006-11-03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깍으셨어요!

가랑비 2006-11-0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반딧불님. 그림과 내용은 아주 실한 책이어요. 아마 보셨겠지만... ^^a

조선인 2006-11-0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했당... ㅠ.ㅠ

가랑비 2006-11-0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무엇에? o.o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고에 다닐 적에,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싫었다. 나는 뭔가 ‘다른’ 자극을 원했던 것 같다. 다른 생각, 다른 깨달음, 좀더 수준 높은 이성(理性).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마치 여학생 공동체에 있는 양 착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만약 내가 남자라서 남학생 사이에 있었다면 더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페미니즘, 곧 여성주의는 내게 축복이었다. 내 존재를 긍정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 여성인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 욕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가해자’인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 정체성에 ‘만족’했고, 더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저항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저항의식에 ‘안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러나 여성주의는 안주해야 할 해답이 아니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35쪽)는 데에 아프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전에 어느 남자 후배가 여자 후배에게 커피를 타달라고 했는데 그 여자 후배가 커피를 타주려 하자, “자기가 직접 타 마시라고 해. 팔이 없어, 다리가 없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팔이나 다리가 없다면 자기 스스로 커피도 타지 못하는, 좀 모자란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 아닌가. 정말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 그런가 하면 나는, 여자 후배에게는 언제든지 생각나는 대로 잘못을 지적하고 조언해주는데 남자 후배에게는 자존심 다칠까봐 한 번 더 생각하곤 한다. 남자 후배가 더 경력도 나이도 많은 까닭도 있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여성의 타자 역시 여성이 아니라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79쪽) 여성 스스로 가부장제 질서를 내면화하지 않은 사회는,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도 계속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직히 나는 가끔 의식적으로 웃어주고, 의식적으로 목소리에 애교를 싣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은 여성에게 억압이자 자원”(156쪽)이란 걸 무심결에 알고 있었을까.

머리가 아프다. 페미니즘은 곧 도전, 그러니까 끊임없는 문제 제기인 것이다. 하지만, 모순덩어리인 내가 가끔은 문제를 제기할 줄 알 때, 나는 내가 대견하다. 그래, 나는 누군가 나 자신을 ‘여자’로만 취급하려 할 때는 분명히 저항해온 것 같다. 각자 다른 감성을 지니고, 다른 역사와 관계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그냥 ‘여자’라는 단일한 존재로 치부해버리는 폭력에 대해. 하지만 혹시 나 아닌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냥 ‘여자’로만 취급하지 않았을까?

(덧붙이고 싶은 말)
53쪽, “남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 명사에는 인(人)이 붙지만, 여성 명사에는 녀(女)가 붙는다. 우리말 여성형 지칭에서 유일하게 인 자가 붙는 경우는 미망인(未亡人,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여자)뿐이다”고 했는데, 한 가지 더 있다. 그건 바로 ‘부인’이다. 한글로는 부인 하나지만, 한자로는 두 가지다. 夫人과 婦人. 夫人은 남의 아내나 자기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고, 婦人은 결혼한 여자란 뜻이다. 결국 결혼해서 남성에게 종속된 경우다.

101쪽, 다이어트 뒤에 오는 “폭식은 남성의 투사(投射, 남 탓으로 돌리는)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內射, 자기 탓으로 돌리는)로 일종의 우울증인데, 사회가 싫어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자기 처벌이다”라고 했다. 폭식이 우울증의 일종인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능에 따라 몸이 반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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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6-10-3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이어요. (으잉?) ^^;;; 고마워요 따우님~
참, 이 책을 선물해주신 로드무비님 고맙습니다~

2007-01-31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7-01-3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 소심하다니깐요. ^^ 폐, 많이 끼치고 살아요 저. 님께도 폐 끼친 적 있잖아요. 그냥 폐 끼치는 거하고 존재감 자체에 생채기를 내는 건 다르다고 믿으면서...
 
그림 속 나의 마을
타시마 세이조 지음, 박종진 옮김 / 뜨란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그새 절판되었네. 상품 정보에는 출간일이 2002년 6월 24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건 표지를 바꾸어 새로 펴낸 날짜이고, 내게 있는 책은 2000년 8월 18일 1판 1쇄를 펴냈다고 인쇄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그림 속 나의 마을]

내가 이 책을 살 무렵, 이 책을 소재로 만든 일본 영화가 막 수입 개봉되었다. 난 그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이 맑고 아름답게 펼쳐지리라 생각했고, 책도 그러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책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물론 일본이 패전한 후 어려웠던 시절, 병약했던 작가와 쌍둥이 형이 어른들 속을 무던히도 썩이면서 시냇물과 물고기와 새와 원시적 생명력을 경주했던 이야기가 팔팔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살던 시골 마을 어른들은 순박하고 착하지만은 않았다. 동구 밖 산기슭의 동굴에 떠돌이 늙은이가 와서 자리 잡자 ‘괜히 저런 데서 불 피우다가 산불이 나면 큰일난다’며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가서 떠돌이를 몰아내고, 민주 교육을 시도하는 젊은 교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쌍둥이 형제도, 낚시하러 갔다가 물고기가 낚싯줄을 끊고 도망쳐 낚싯바늘을 잃으면, 낚시도구를 파는 늙은 조선인 부부의 집에다 돌을 던지며 “조센진! 조센진!” 하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괴롭힘당할 때 옆을 지켜주던 센지(마을 전체의 기피 인물이었던)가 누명을 쓰고 교장에게 매를 맞을 때도, 정의감이 강한 엄마가 무슨 까닭에선지 센지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을 때도 쌍둥이 형제는 감히 나서서 센지를 위해 변호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야기들을 솔직히 내보인 점, 그게 바로 이 책의 가치 아닐까. 어찌 어린 시절이 아름답기만 하며 어찌 시골이 순박하기만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사실을 아프게 인정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작가가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에게도 숨기면서, 문득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잘못을 솔직히 사죄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나는 아직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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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6-10-24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치를 간파(?)해부리시는데, 어찌 성숙하시지 않았다 말씀하실까요. 깨달음없는 저같은 중생 더 부끄러워질라 캅니다.

가랑비 2006-10-2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님, 무슨 송구스러운 말씀을. 제가 워낙 살면서 찔리는 짓을 많이 한지라. 흠흠.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고모리 요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니 ‘군대를 포기한다’는 일본 헌법 9조는 대단한 법이다. 어떤 나라가 군대를 포기한단 말인가? 전쟁 범죄를 저지른 국가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같이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어째서 군대가 있을까? 뭐, 사실 자위대를 군대가 아니라고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적어도 일본 헌법 9조에는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밖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단 말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말에 함정이 있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전쟁 · 군대 포기 조항은 바로 천황을 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항복 선언 뒤 연합국의 정부들은 당연히 천황 히로히토에게 전쟁 책임을 물으려 했다. 히로히토는 전범으로서 법정에 서야 하고 천황제는 폐지될 참이었다.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려면 뭔가 획기적인 것을 대신 제안해야 했고, 그래서 일본 최고위 정치인들과 맥아더 군정은 군대와 천황을 맞바꾼 것이다.

그러면 전쟁 책임은 누가 지는가? 아니, 누가 누구에게 지는가? 항복 직후 일본 정부는 ‘일억 총참회론’을 내세웠다. “우리나라가 패전한 원인은 전력의 급속한 괴멸에 있었다. …… 원자폭탄의 출현과 소련의 진출…… 너무나도 많은 규칙과 법률이 남발되었고, ……또 국민 도덕의 저하도 패인 가운데 하나였다. …… 지금 군관민, 국민 전체가 철저히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94-95쪽) 그러니까 히로히토와 정부 · 군부의 지도자들이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일본 국민과 식민지 민중 앞에서 전쟁을 결정하고 강행한 데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는 게 아니라, 군관민, 곧 일본 국민 전체가 천황 앞에서 전쟁에 져서 죄송하다고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국 정부들에 대한 책임은 군부 지도자들이 전범 법정에서 졌고, 히로히토는 다만 제사장으로서 이세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영령’들을 위로했다.

신(臣)으로서의 병사가 군(君)으로서의 천황에게 바친 충성에 기초하는 전사(戰死)는 국가를 위한 죽음이 되고, 그 전사자의 영혼은 제사 대권을 가진 현인신인 천황의 참배를 받음으로써 ‘국가의 신령(神靈)’이 된다. 이러한 ‘야스쿠니’의 논리는 청일전쟁 때 전국화되었고, 러일전쟁 때 발생한 방대한 전사자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전사자의 영혼에 ‘영령’이라는 말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영령’은 ‘천자’에게 ‘위령(慰靈)’되어 비로소 ‘호국의 신’이 되는 것이다.(144쪽)

이것이 바로 그토록 야스쿠니가 중요한 까닭이구나. 요즘도 현충일이면 들려오는 ‘호국 영령’이란 표현이 새삼 소름 끼친다. 전쟁에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국가를 위한 죽음’으로 찬미하는 순간, 국가주의의 폭력은 은폐되고 숭고한 희생만 남는다. 이들의 죽음은 숭고하니, 너도 ‘국가를 위해’ 숭고하게 죽으라는 선동.

일본인 중에, 일본이란 나라가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이 가해자 국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떤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책임에 부응하여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인 지은이는 ‘문학자인 내가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서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이른바 ‘옥음 방송’―해방기를 다룬 한국 드라마에서도 곧잘 나오곤 하는, 라디오로 방송된 항복 선언―의 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꼼꼼히 읽고, 또 패전 직전부터 이른바 ‘전후 체제’ 형성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와 미군정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히로히토가 어떻게 전쟁 책임을 피해갔으며 현대 일본인의 ‘전후’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고자 했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해석한 듯한 부분도 가끔 있지만...
우리 앞에는, 응답해야 할 어떤 역사적인 책임이 없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서 종전 처리가 진행되었던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에 읽은 [도쿄대재판](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033371)이 꽤 도움이 되었다.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지음(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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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6-10-1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선물해주신 마태우스님 고맙습니다~!

산사춘 2006-10-18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국망령들이 여직 힘을 뻗치고 댕긴다는게 부끄러운 일입지라. 묵과하고 넘어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해자가 된다는 걸 다시 명심해 봅니다.

가랑비 2006-10-1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춘님, 가만히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가해자가 된다... 아, 정말 무서운 일이어요. ㅠ.ㅠ
 
에밀리 초원의 빛 그린게이블즈 앤스북스 1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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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에밀리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다. 내게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그저 빨간 머리 앤의 작가일 뿐이어서, 에밀리 시리즈의 1권인 이 책, “에밀리 초원의 빛”을 읽을 때는 내내 에밀리와 앤이 비슷한 점, 다른 점을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2권 “에밀리 영혼에 뜨는 별”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에밀리를 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3권 “에밀리 여자의 행복”을 다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에밀리가 좋아졌다.

책을 읽는 동안 그저 에밀리가 좋지만은 않았던 것은, 사람이 다 그렇듯이, 에밀리에게는 사랑스러운 점도 있고 미운 면모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2권 112쪽) 하고 다짐할 때도 좋지만, 성서에 나오는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비유*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나는 지혜로운 처녀가 싫어. 너무 이기적이니까. 그녀들은 그 가련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조금쯤 기름을 나누어주어도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저 부정한 집사나 마찬가지로 저런 처녀들에 대해서도 칭찬할 생각이 없으셨을 거야. 단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부주의하거나 어리석게 행동하면 빈틈없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을 것이므로 주의하라고 하고 싶으셨을 거야. 나라면 집에서 영리한 처녀들과 맛있는 것을 먹기보다 밖에 있는 어리석은 소녀들 가운데 섞여 그들을 돕고 위로하고 싶을 것 같은데”(2권 124~125쪽)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선 이런 생각을 내게 들려준 것이 고마워 에밀리를 꼭 껴안고 싶다. 성서의 이 부분에 대한 보수 기독교의 설교를 완전히 뒤집는 해석이다!

* 마태복음 25장에서(공동번역성서)
1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왔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 갔고 문은 잠겨졌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하지만 ‘뉴문의 머리 집안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자꾸 들먹이고, 페리를 스스럼없는 친구로 삼아 잘 대해주면서도 “분명 스토브파이프타운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2권 353쪽)고 일기에 쓰는 걸 보면 에밀리가 미워진다. 나도 지금까지 시대와 지역과 문화를 통해 습득한 편견을 다 깨뜨리지 못했지만.

작가는 이 책을 에밀리의 ‘전기’라고 누누이 강조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2권 이후 일저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쉽다. 1권에서 나는 에밀리보다 야성적인 일저가 더 좋았다. 맨발로 숲을 뛰어다니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비겁한 짓에는 당당히 맞서고... 그런데 2권 이후 일저는 그냥 예쁘고 천방지축인 아가씨가 되어버렸다. 작가는 일저가 아름답고 매력 있다고 되풀이 ‘설명’하지만, 등장인물의 매력은 설명될 게 아니라 손에 잡힐 듯 와 닿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내 에밀리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자꾸 쓰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건, 그만큼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기대와 희망과 사랑을 품고 있다는 게 아닐까. 또 부러웠던 건 에밀리가 끊임없이 교감하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자연이다. 숲과 바람과 늘 대화할 수 있다니.

이들 책의 원제는 각각 Emily of New Moon(1923),  Emily Climbs(1925), Emily's Quest(1927)인데, 3권의 번역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에밀리 여자의 행복”이라니, ‘여자의 행복’이라는 게 따로 있단 말인가?

조선인님, 연보라빛우주님, 수니나라님 덕분에 이들 책을 장만했습니다. 고마워요! 세 분이 선물해주신 게 2004년 12월... 헉.

(덧붙임) 한 가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빼먹었다. 에밀리 이야기는 앤 이야기에 비해 "현실적"이다. 그래서 앤 이야기 등장인물들의 단점들이 때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과 달리, 에밀리 이야기 속 사람들은 실제로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견디기 어렵기도 하고 은근히 정이 들기도 한다. 좀더... 어른다운 이야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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