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혹은 종장
재택 임종이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암에 걸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병원의 치료나
호스피스의 돌봄을 거부하고 익숙한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그 선택지가 같이 살던 아들 내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행복했다.
아들 부부나 손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참기 힘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모두가 나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지내고 싶어 한다고,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항암제는 사용하지 않을 것, 연명치료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하에 나는 재택 임종을 선택했다.
일흔셋. 어쩌면 죽기에는 아직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공포심이나 불만은 없었다.
큼직한 집에서 사랑하는 아내, 믿음직한 아들, 상냥한 며느리,
귀여운 손녀에게 둘러싸여 보내는 노후.
설령 내일, 괴로움 속에서 이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곁에
가족이 있어준다면 웃으며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다만 나는 지금부터 사흘 동안만큼은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
왼쪽 손목에 감긴 웨어러블 단말기에 사흘 후 날짜를 음성으로 입력하자
캘린더 기능에 기록된 ‘8월 17일, 오전 10시, 쇼와 거리 교차로, 레오타드 소녀’
라는 스케줄이 불려나왔다.
쇼와 거리 교차로라고 하면 우리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이 동네에서 제일 큰 교차로다.
레오타드 소녀라는 것은 그 옆에 세워진 동상 이름이었다.
사흘 후 오전 10시 쇼와 거리 교차로, 레오타드 소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스케줄에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내가 사용하는 단말기는 월말이 되면 다음 달에 입력된 스케줄을
자동적으로 통지해준다. 그 기능으로 이 스케줄을 알게 되었지만,
과연 이건 누구와 한 약속일까? 나는 언제 이 약속을 입력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한테 그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내 단말기에 몰래 스케줄을 입력한 걸까?
단말기는 성문 인증을 하기 때문에 타인은 조작할 수 없을 테지만,
무슨 일에든 숨겨진 테크닉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물어봤지만, 역시 아무도 짚이는 구석이 없다고 했다.
손녀는 “할아버지가 입력해놓고 잊어버린 거 아니야?”라고 얄미운 소리를 했다.
역시 그렇게까지 늙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 나한테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 또한 생각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아니, 어쩌면 정말로 내가 입력해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어, 누가 입력했든 상관없다.
사흘 후 오전 10시. 쇼와 거리 교차로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그곳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게 지금 내가 제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사흘간은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
머리맡의 불을 끄고 슬슬 자려고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잠에서 깨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틀.
다행히도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상당히 양호해서
이틀 후에 잠시 외출하는 것 정도라면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고 낙관하고 있다.
교차로까지 나들이를 나가는 것은 오랜만이다.
나이답지 않게 들떠 좋은 꿈을 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노크 소리에 바로 눈을 떴다.
“들어오렴. 문 열려 있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전등만 켜서 방문자를 들였다.
머뭇거리며 얼굴을 내민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인 손녀, 아이[愛]였다.
“할아버지, 자고 있었어?”
“슬슬 잘까 싶었지. 괜찮아.”
“몸은 어때?”
“나쁘진 않아.”
“이야기 잠시 할 수 있어?”
“물론이지. 들어오렴.”
뒷짐을 지고 문을 조용히 닫은 아이는 뭘 그리 망설이는지
좀처럼 용건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수상쩍다.
아이는 평소 이렇게 얌전한 성격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라면 똑 부러지게 하는 타입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러니? 뭐든지 말해보렴.”
몸을 일으켜서 되도록 자상하게 말을 걸었다.
설령 가족일지라도 아무래도 동성에게는 엄격하고
이성에게는 부드러워지기 마련인지,
손녀는 엄격한 할머니보다도 자상한 할아버지 쪽을 따른다.
물론 할머니도 아이를 몹시 사랑하고 있지만
때론 엄하게 매를 들어주기에 나는 마음 놓고 사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가까이 다가와서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평소엔 하교하면 제일 먼저 내 방에 와서
다녀왔다고 말해주던 아이가 오늘은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슨 말썽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억지로 물으려 하지 않고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잠시 울고 있던 아이가 훌쩍이면서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나온 그 말을 주워 연결해보니,
아무래도 그 정도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