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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톨킨의 책들이 얼마나 유명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또하나의 사실: '호빗'이란 게 유럽 전설에 원래 등장하는 건지 궁금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한사전에서 'hobbit'을 찾아보았다. 뜻밖에도 항목이 있었는데, 설명이 이렇다. '영국의 작가 Tolkien의 작품에 나오는 가공의 난쟁이.' 내가 가지고 있는 영한사전이 89년판이니까 국내에선 [반지]고 톨킨이고 거의 알려져있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흔히들 [반지의 제왕]을 판타지의 걸작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엔 대하역사소설적인 성격도 상당히 강하다. 이를테면 [서유기](이거야말로 동양 판타지의 고전이자 정점이 아닐까)같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삼국지]같기도 한 것이다. 다만 후자의 측면은 바탕에 도저하게 깔려있어서 금방 드러나지를 않을 따름이다. 이런 면은 본 번역판의 4-6권에 나뉘어 실려있는 방대한 양의 부록(거의 한 권 분량이다)을 통해서, 나아가 [반지]의 전사(前史)랄 수 있는 [실마릴리온](제1기를 주로 다룬)까지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삼국지]나 심지어 호메로스의 서사시들과도 달리 [반지]는 실제 유럽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컨대 저자는 1권 서장에서 이야기의 배경(제3기 말엽)이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랜 옛날'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고대 문명의 시대가 되겠다. 제4기부터를 우리가 아는 실제의 고대 문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짧게 잡아도 5천여년 전까지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거의 아무도 이런 설정을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소설의 사실성과 그것을 읽는 재미 혹은 보람이 또한 무슨 상관인가? 제갈공명의 호풍환우가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시비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이 유럽식 대하소설을 읽어주면 될 것이다.
사실성의 빈 자리를 풍족하게 대신해주고 있는 것은 [서유기]의 재미와 모험이다. [서유기]가 갖가지 동양사상과 설화들을 자유자재로 가져다 써먹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 [반지]에서도 벌어진다. 요정족과 난쟁이족에서부터 마법사, 악마, 용, 영웅과 보검(나르실), 신통력을 지닌 보물들(팔란티르의 돌 등등), 상위계의 신적 존재들(발라르), 아틀란티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가라앉은 옛 땅(누메노르)과 [니벨룽겐의 반지]를 연상시키는 반지까지, 그야말로 유럽의 신화, 전설, 민담, 설화를 집대성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반지]는 유럽, 만만치 않은 역사와 유산을 지닌 이 지역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호빗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있는 촌구석 샤이어가 알고 보니 몇 천년 전에는 자유종족과 악의 세력 간의 처절한 격전장이었다든가, 스치듯 묘사되는 폐허더미가 실은 과거 한 왕조의 도읍이고 주인공은 그 후예였다든가 하는 설정은 뒷산 언덕에 1-2천년은 된 유적을 묵혀두고 사는 '구대륙 사람들'이 아니면 감히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같은 영어로 쓰여졌다는 이유만으로 '영미문학'이라는 분류가 통용되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톨킨과 긴즈버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미국, 캐나다, 호주 정도만을 따로 모아 '영어권 신대륙 문학'으로 묶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러 가지 점에서 [반지]는 동서양의 고전 대하소설들을 상기시킨다. 길이와 설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던져주는 교훈성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보는 만큼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아마 그러할 것이다.) 이들과 달리 [반지]는 불과 50년 된 '현대문학'일 뿐이지만, 그리고 혹은 그래서 아직까지는 대중소설의 명작 정도로만 취급되고 있지만, 보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오딧세이아], [신곡], 그리고 [파우스트]로 이어지는 유구한 유럽 대하문학의 적통을 잇는 작품으로 자리매김될 것이 틀림없다. 그 대하적 위용에 있어서나 판타지적 성격에 있어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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