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창해ABC북 1
기유메트 앙드뢰 외 지음, 옥승혜 옮김 / 창해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이집트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이 책은 적합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사전식 구성이다. 가나다 항목별로 설명이 되어있다. 그 항목도 세분된 것이 아니라 수십개 가량의 항목에 각 2페이지 정도의 설명이 붙어있는 식이다. 한마디로 어중간하기 때문에 사전이라기에도 그렇고 개론서라기에도 그렇다. '주요 개념 해설집' 정도?

이 책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여행을 가서이다. 이집트 여행을 가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지참하실 것을 권한다. 여행을 떠나면서 무거운 책을 가져갈 수도 없고 그걸 다 읽을 시간도 없다. 이 책은 부피가 얇기 때문에 우선 합격. 박물관이다, 유적지다를 돌아다니다 보면 사전식 구성으로 되어있는 이 책의 진가가 비로소 드러난다. 유적 앞에서 바로 꺼내어 찾아 읽어보면 그 길고 복잡한 신화와 역사들이 다소나마 이해되는 것이다.(이집트의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유럽과 같이 상세한 안내문을 기대하지 마실 것.) 용도를 이해하고 잘 활용만 하면 괜찮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노신 지음, 이욱연 옮김 / 창 / 1991년 3월
평점 :
절판


루쉰을 처음 읽은 것이 대학 2학년때쯤, 그러니까 십몇년 전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사회는 지금보다 많이 한심해서 젊은이들은 무척 답답해했었다.(그때보다 현저히 나아진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도 못지 않게 답답해하는 것을 보고 곤혹스러워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심정에서 읽는 루쉰은 각별한 것이었다. 매 페이지마다가 내 가슴에 비수처럼 와 꽂혔고 정신이 번쩍 들도록 뒤통수를 후려쳤다. 20세기 초의 중국에 대한 그의 꾸짖음들이 마치 나와 우리 사회에 대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다시 루쉰을 읽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그때만큼 절절하고 날카로울까. 혹은 지금의 젊은이들은 루쉰을 읽고 그 당시의 나만큼 자극을 받을 수 있을까. 정신이 살아있는 글들은 제대로 조명받지도 못하고, 뻔한 속물적 유행과 기교와 얄팍한 감수성만이 모든 것인양 난무하는 지금의 한국 지성계에서 루쉰의 대쪽 선비정신은 어떤 값어치를 지닐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은 루쉰의 복권일까, 이 시대의 새로운 루쉰의 등장일까. 아직도 그의 앞에서 추궁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인 내가 처음 읽었던 그의 저술이 바로 이 산문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릭! 일본문화 - 고지라에서 에반게리온까지
김봉석 / 한겨레출판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98년 10월에 발행된 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4년여가 지났음에도 그동안 들어온 일본문화가 별로 안되다보니 많이 뒤떨어진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아발론]이 빠져있는 정도이다. 기획 자체가 '입문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이 확실하다. 아니라면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작품들을 300쪽에 다 넣을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얻고 싶은 분들에게는 절대 추천할 수 없다. 영화, 애니, TV, 대중음악, 기타(몇개의 게임, 소설, 잡지 정도)의 5가지 대분류 속에 각 10-20개의 소항목(작품 혹은 작가)이 소개되고 있다. 서술의 정확성이나 깊이나 시각 등은 한 마디로 무난하다. 종합 입문서 역할에 충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 한 권으로 읽는 쌍윳따니까야
전재성 지음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기불교의 정수이자 아직도 남방불교 최고의 경전인, 우리에게는 그동안 '아함경', '아함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온 것이 '니까야'다. 그중 먼저 '쌍윳따 니까야'(상응부; 잡아함에 해당) 부분을 전11권으로 팔리어 원본에서 완역한 전재성씨가 그것을 1권짜리 선집으로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총 2889경 가운데 122개를 뽑았다고 한다. 완역본 [쌍윳따]는 각권 550여쪽, 도합 60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것이 부담스러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성격의 '아함경' 선집은 여러 가지가 나와있지만 가장 최근의 팔리어 직역본으로부터 선별한 이 책이 가장 신뢰할 수 있을 듯하다. [법구경], [숫타니파타]와 함께 실존인물 석가모니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가르침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이 작품은 잘 되었다. 그 자체만으로 놓고 볼 때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일반적인 작품들을 판단할 때 들이댈 수 있는 기준들로 보아도 그렇고, 유태인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를 요리해낸 방법으로 보아도 그렇다. 미국에서도 유태인들은 결코 좋은 평가를 받는 집단이 아니다.(물론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태인을 거의 구경할 수도 없는 우리에게까지 알려져있듯, 돈만 알고 이기적이며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사람들로 악명이 높다. 슈피겔만이 그런 점을 모를 리 없고, 유태인의 비극을 다룬 만화에 대해 비유태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가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자신과 아버지라는 또하나의 대립항을 설정함으로써 위와 같은 비난들을 '일부 유태인만의 문제'로 비껴가게 만드는 것이었고, 이 카드는 멋지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비유태인 독자들이 하고 싶은 비난을 저자에 다름아닌 주인공 아들(본작은 자전적 실화이다)이 대신 해주고 있으니 독자들은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태인들이 '당한 사연'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하게 의도된 장치였든, 자신의 예술가 기질과 충돌해온 유태인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배금주의로 대표되는)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설정이었든, 결과적으로 거부감을 현저히 누그러뜨리고 있다.

한편 이러한 설정은 작품의 비극적인 중압감을 덜어주는 역할도 훌륭히 해낸다. 현실이라고 믿기조차 힘든 대학살극을 다룬 작품을 보면서도 우리가 종종 웃을 수도 있고 한숨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은, 그리하여 과도한 부담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이러한 이중구조의 덕이다.

기법적으로도 <쥐>는 뛰어나다. 유태인을 쥐로, 독일인을 고양이로 설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인은 개, 폴란드인은 돼지 등으로 그려놓고는 유태인이 폴란드인 행세를 할 때는 돼지 가면을 쓰고 다니는 식의 묘사는 참으로 절묘하다. 만화만이 성공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기법이란 게 무엇인지를 작가는 영리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가 만화가일 뿐만 아니라 만화사 전문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내용/정신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이 형식/묘사에 있어서의 비사실주의적 기법과 어떻게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상승작용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전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탄을 하며 읽어내린 다음에도 팔레스타인의 현실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유태인 작가가 유태인의 비극에 대해서 다뤘다는 사실 자체는 하등의 문제될 바가 없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도 그렇고, 러시아 치하의 동유럽 유태인들 이야기인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도 그렇다. 슈피겔만이 시오니즘을 두둔하는 흔적조차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작가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일까? 이 부분은 쉽지 않다. 창작자의 책무란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논하는 미학적 난제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일례로 전범 당사자인 독일인들은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줄곧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진해서 교육시키고 있다. 그것도 학교수업을 통해서. 반면 유태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이 당한 것만 끊임없이 강조하며, 심지어는 자신들과 함께 당한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기실 2차대전 당시에 최대의 희생자를 낸 것은 유태인이 아니라 러시아인들이었다. 또한 수많은 동유럽 사람들과 집시들, 좌익 등 반나치파도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비롯한 유태인 수난사의 어디에서도 그에 대해 적절한 만큼의 언급을 해주고 있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러한 점들이 본작의 성취를 절하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코 심심풀이용으로 소비될 것이 아닌 본작의 성격상, 더욱이 유태인도 독일인도 아닌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책을 덮고 나면 오히려 위와 같은 부분들에까지로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을 어찌하긴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