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우리들과 나누고 싶었던 9가지 이야기
이백만 지음 / 바다출판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평] <노무현이 우리들과 나누고 싶었던 9가지 이야기> 
(이백만 지음|바다출판사 펴냄|2013년 5월)


2009년 5월 23일 오전, 서해의 작은섬 덕적도는 고요했다. 봄의 햇살은 바다와 땅의 경계를 허물며 단단한 빛깔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여행의 막바지 여흥을 즐기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그때, 다급한 전화가 울렸다. 내 핸드폰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핸드폰에도 거의 동시에. 불길함을 예감하며 받던 전화 너머로 노무현 전(前)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각기 다른 이들이 거의 비슷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뜨거운 슬픔이 나라를 장악했다. 가슴을 여미던 슬픔은 전국 곳곳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숱한 울음으로 흘러넘쳤다. 대통령 후보부터 재임 시절까지 '자격 미달의 대통령'으로, 퇴임 후 갖가지 의혹들을 거론하며 '파렴치한 대통령'으로 비난하고 희롱하던 언론들은, 돌연 최고의 찬사를 추념의 말들 속에 슬쩍 섞었다.

그는 가장 뛰어난 대통령은 아니었을망정 가장 뜨겁게 사랑 받았던 대통령이었다. 그것만은 분명해 보였고, 그것을 확인한 어떤 이들은 다시 노무현이란 이름이 두려웠고, 어떤 이들은 그 이름에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전자의 두려움은 '친노종북' 프레임을 내걸었고, 후자의 희망은 '친노의 부활'이란 성급한 야심을 탐했다.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한 전자는 '노무현'을 다시 희롱하기 시작했고, 패배한 후자는 더욱 야멸찬 비토로 피아(彼我)를 구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무현 서거 4주기를 맞이하는 오늘, 다시 '노무현의 정신'을 묻는다.

노무현의 '말'을 복원하다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이백만은 120여 개의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을 모으고 해설을 입혀 <노무현이 우리들과 나누고 싶었던 9가지 이야기>를 펴냈다. '왜곡의 유리벽에 갇힌' 원형 그대로의 말을 복원하였으므로, 그 어록은 기실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일 것이다. 그 화두는 보다 구체적으로 국가의 역할, 경제의 본질, 민주주의, 정치의 희망, 평화, 역사, 진보의 미래, 다음 세대, 사람 사는 세상 등의 9개의 주제로 정리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비토의 대상이었다. 그는 좌파인 동시에 신자유주의자로 비토되었다. 야당에게 권력을 양분하는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분열주의자로 비난받았다. 진보정당의 반대에도 이라크 파병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했지만, 그는 늘 종북주의자로 의심받았다. 한미 FTA를 추진했지만, 그는 반 시장주의자로 공격받았다. 검찰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검찰은 도리어 퇴임 후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가치나 정책의 당위를 떠나 그는 숱한 왜곡에 시달려야 했다. 보수언론은 그의 말에 앞뒤 맥락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왜곡했다. 이 책의 의의는 그 왜곡된 말의 진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노무현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가치들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말의 맥락을, 당시 대통령을 보좌했던 참모들의 해설과 배경을 곁들어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9월 광주에서 언론인과의 대화모임을 가졌다.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간담회였다. 실제 발언은 이러하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호남에 대해 반드시 의리를 지키겠다. 호남 사람들이 나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 내가 유일한 대안이 아니었나. 호남 사람들의 당시 정서는 이회창 후보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지역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경상도 사람인 나를 선택하게 된 것 아니냐."(본문 186쪽)

그러나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호남 사람들이 나를 위해 찍었나요? 내가 예뻐서라기보다 이회창 후보가 싫어서 찍은 것 아니냐."(본문 186쪽)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호남 비하 발언'으로 왜곡 보도하여 대통령은 졸지에 배신자가 되었고 호남 민심은 싸늘하게 식었으며, 지금까지도 '친노'는 호남에선 비호감이다.

'노무현 정신'의 민낯

저자 이백만은 노무현의 말들, 그 정신의 민낯을 '질문'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노무현은 질문했고, 그 답을 찾았다. 간혹 착오가 있었고 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성공한 부분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소위 ABR(Anything But Roh, 무조건 노무현과 반대로) 지침 아래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폐기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등장하며 노무현의 정책들은 재평가되고 되살아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비전 2030'은 박근혜 정부의 '한국형 복지국가'에 영향을 주었고, 과학기술 정책 강화(과학기술부 복원), 행복도시(세종시) 건설 등의 정책도 다시 추진되고 있다.


'노무현 정신'을 일면하고 싶다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갈피마다 새겨진 말들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의 민낯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맥락을 이루는 서사들은 종종 사무치도록 감동적이다. 특히 탈권위적 대통령의 모습은 우리의 그리움을 자극한다.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낸 이은희씨의 회고다. "청와대 들어가서 한 달이 채 안 됐을 무렵이다. 출근길에 소나기가 내렸는데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에 근무해온 목수 아저씨였다. 청와대 생활만 햇수로 30년.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영욕을 지켜봐온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나는 영부인께 목수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대통령이 그분을 만났다. '청와대에서 제일 높은 분이 계신 줄 모르고 인사가 늦었습니다.'"(본문 63쪽)

"법치주의란 국민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권력이 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노무현의 말은, 스테판 에셀이 강조한 "법의 수호자는 이상의 수호자다."라는 당위에 닿아있고, 용산 철거민과 쌍용차 노동자 등을 에워싸고 겁박하던 이명박 정부의 법치주의에 맞선다. 특정 대통령 후보를 편든 것으로 의심되는 이명박 정부의 검찰과 국정원은,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십시오.",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다시 대통령이 되어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노무현의 말을 더욱 그립게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지만, 생색내지 않았고 브라질과의 협상에서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며 시가를 피우던 룰라 대통령에게 투박한 영어로 "Give me a cigarette!(시가 한 대 주시오!)"라고 말하며 퉁 치던 멋진 사람이기도 했다.

'실패한 대통령'의 진심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의 죽음을 듣고 울었고, 분향소에서도 울었다. 그가 남긴 글과 말들을 읽으면서도 울었고, 앞으로도 사무치는 그리움에 간혹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그 자신의 평가였다. 역설이 아닌, 직설의 언어였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의 설명이다. "노무현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규정한 첫 대통령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실패로 규정한 것은 그가 평소 즐겨 사용했던 어법상의 역설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못 박았다."(본문 211쪽)

그를 좋아하지만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 건설, 한미 FTA 등의 정책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선의로 추진했던 정책들도 좌초되기 일쑤였다. 지지자들이나 여당조차 제대로 설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라는 대통령의 말은, 무능의 고백으로 들렸다.

저자는 "정치인의 어록은 삶의 증거"라고 말하며, 노무현의 말을 옹호한다. 저자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서술이 다소 편파적이라는 것도 안다. 따라서 나는 노무현의 말을 무조건 옹호하기보단 그저 그의 민낯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말과 달랐던 정치적 행보도 똑같이 적시하고, 실패한 다짐으로 끝난 말들의 이유도 기록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뒤, 한 지지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대선 패배를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백한 것이다. 누군가를 비토하고 스스로 고취하고 고립되는 정신은, 또 다른 왜곡이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신'은 실패를 고백하고 다독이는 연대에서 시작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테판 에셀, 죽음도 차마 멈추지 못한 진보의 꿈
[서평] 낭만적인 레지스탕스의 마지막 책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목수정 옮김│문학동네 펴냄│2013년 4월│1만4천500원)


발터 벤야민은 진보를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쳐드는 꽃들'과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에 비유한 적이 있다. 태양을 향하여 자신의 은밀한 시선을 고집하는 향일성(向日性)과 천사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여 마침내 미래로 떠밀어내는 거대한 폭풍에 순응하는 일은, 진보주의자의 사명과도 관련이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의 폭력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하고 호소하던 '낭만적인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은 우리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진보주의자의 전형에 가깝다. 2010년, 그의 나이 92세에 쓴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는, 무관심과 체념에 길들여진 이들을 한껏 자극하며 미국 월스트리트 오큐파이(occupy) 운동과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 운동 등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스테판 에셀은 2013년 2월 27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책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2012년 출간된 그의 마지막 책이다(한국에선 2013년 4월 출간).

'낭만적인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마지막 책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이면서 낭만주의자로 살았다.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다가 부헨발트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세 곳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처형될 위기를 넘긴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그는 외교관으로 유엔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인류의 인권과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은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았지만, 사실 그의 삶엔 성공보다 실패와 좌절의 시간들이 더 많았다.

'죽을 운명밖에 남은 것이 없어 보이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시간'이 그러했고, '따분한 서류들을 뒤적이고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했던 중재들을 반복하던 외교관 시절'이 그러했다. 하지만 에셀은 로자가 관찰한 대로,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 혁명의 시간에 한걸음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숱한 좌절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평생 레지스탕스로 살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담긴 과거에 대한 그의 회상과 현재의 고백과 미래의 다짐들은 놀랍도록 한결같다. 그는 피끓는 청년의 때에도 투쟁했고, 90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했다. 심지어 위태롭던 열일곱 살에도 뜨겁게 사랑했고, 결혼한 이후에도, 중년과 노년의 삶을 살면서도 충만한 에로스의 사랑을 견지했다.

무엇보다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사랑을 사랑하고 감탄에 감탄하는' 삶을 살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시를 낭송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낭송하던 시는 '절망에 썩어버리지 않고 미래를 향한 격렬한 희망으로' 그를 구원했다. '시는 우리 눈앞에 놓인 이 너절한 현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였고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였다.

나를 바르게 지탱해주었던 첫 번째 힘은 우리 집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내 부모님의 삶의 핵심이자 유익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들의 영향이다. 내 부모님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신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시를 내게 물려주었다.(중략) 내게 시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는 우리를 활짝 피어나게 해주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로부터 초월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본문 158쪽)

Starost Film


투쟁하면서도 지치지 않은 희망을 소유한다는 것,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진보가 소명인 삶을 산다는 것. 에셀은 위기에 처하거나, 좌절과 패배를 당할 때면 더욱 강렬한 희망으로 시를 읊고 뜨거운 사랑을 수행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갈망한다. 어쩌면 혁명가에게 필요한 한가지는, 굳센 낭만의 결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불꽃 같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불꽃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나는
타오른다, 나를 탕진해버리기 위해.
내가 손에 쥔 것들은 빛이 되고,
내가 방치한 것은 재가 된다.
나는 확실히 불꽃이기 때문이다!

_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 중에서(본문 36쪽)

스테판 에셀은 유럽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미국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비관적 전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의 지구에서 60억명의 인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헌신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자연 속에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온전한 민주주의의 구축을 위해 투쟁할 것을 요청한다. 그 투쟁의 방식은 분노하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실행될 것이다.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이 책은 자서전이면서도 일종의 유언 같은 책이다. 그러나 책의 갈피마다 흥미롭고 생동하는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탓일까, 책은 다소 산만해 보이기도 하고 동의하기 힘든 대목도 있다. 하지만 에셀의 불꽃같은 삶을 어찌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연대의 부름 앞에, 작은 차이를 고집하며 어찌 홀로 고착될 수 있겠는가. '죽음도 차마 멈추지 못할 진보에 대한 그 간절한 희망과 신념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역자 목수정이 쓴 대로, 사람들은 에셀을 이상주의자로 불렀지만,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인식했다. 역사의 진화를 명백히 관찰한 결과가 에셀의 현실주의 속에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하늘을 벗삼아 땅을 걷는 혁명가에게 요구되는 자질일지도 모른다. 그의 생전, 진보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의 놀라운 성공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진보의 꿈'에 대한 '현실적인 갈망의 표현'이자 희망의 작은 증거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한때 '불꽃'같았던 이 땅의 혁명가들의 과거가, 그들의 무기력한 현재가 떠올랐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일베'의 젊디젊은 청춘들의 야만과 그 이름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지지자들의 아집은, '노무현 정신'이 꿈꾸던 진보의 세계를 더욱 아득하게 한다. 5·18 광주항쟁을 왜곡하려는 음험한 시도 앞에, 그리고 강정과 밀양 등지에 계속되는 약자들의 투쟁과 그들을 거세하려는 온갖 폭력 앞에, 무관심과 망각의 시간을 견디는 비루한 나의 현실에게 에셀의 위로는 값지다.

결국 좋은 인생은 우리가 축적해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라고.(본문 162쪽)

우리의 혁명은 실패한 것일까. 스테판 에셀은 진보와 퇴보가 반복하고 '집단의 압박과 개인의 돌파 사이에 심한 모순들이 뒤엉킬지라도'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고 썼다. 만약 에셀이 이 땅, 우리 곁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패배는 숙명일지라도 진보는 소명이라고, 그러니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고, '사랑하고 감탄하며 다시 시작하라'고. 뜨겁게 생동하는 목소리로.


EB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 광주', 그들의 노래를 들으라

[서평]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창비|2013년 4월)



나는 1995년, 강원도 춘천 102보충대에 입대하여 신병교육대에 배치되었다. 첫날 밤, 내가 속한 내부반 조교는 대뜸 전라도 놈들은 기립하라고 소리치며 머리를 박으라고 했다. 6주 훈련 동안 우리는 수시로 기합을 받았는데, 같은 말이라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동료들은 조금 더 모질게 당했다. 

제대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득,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과 달리 서울말을 곧잘 쓰는 것을 발견했다. 언젠가 광주 태생의 선배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내게 '넌 아직 광주를 모른다'며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2013.4)의 주인공 '정애'의 친구 '옥택'은, 서울서 살다 설 명절에 고향집에 들렀는데 친구들이 서울 말투를 흉보자, 그는 이렇게 하소연한다. 

"그것이 그러니깐, 서울서 전라도 말을 쓰거나 전라도 사람이란 것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나는 살기 위해 내 고향 말을 버렸던 거라구."(본문 190쪽)

맞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

공선옥의 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던 1970년 무렵부터 5·18이 있던 1980년 전후 시대의 숱한 폭력에 스러져간 여성들의 이야기다. 소설은 '1980년 광주'를 공들여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전후 광주를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정애'와 '묘자'다. 

'정애'의 아버지는 투전판에서 돈을 잃고 일도 잃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웠던 아버지는, 결국 말 못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믿을 만한 사람은 큰딸 '정애' 밖에 없었다. 밑으론 철없는 동생들 '순애'와 '명기', 세살 짜리 막내 '명애'가 있었고, 어머니 뱃속엔 곧 태어날 생명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정애'는 고달팠다. 각 가호에 일인씩 새마을사업에 차출되어야 했기 때문에, 정애는 시멘트 반죽 함지박을 머리에 매고 날라야했다. 어느 한밤 중 도둑이 들며 헛간 뒤 돌담장을 부수었고,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던 돼지는 돌담에 깔려 즉사했다. 곤히 자던 닭들이 지붕 위로, 산 위로 도망쳤다. 동네 이웃 '정샌'이 닭을 몰아 갔고, 새마을이발소 '박샌'이 아버지가 꿔간 보리쌀 한 가마니와 퉁치며 죽은 돼지를 끌고 갔다. 

연쇄점 주인 '김주사'는 동생 '순애'의 성을 유린하고 그 값으로 하드를 줬다. 연쇄점 마당에서 부로꾸 찍는 남자는 '정애'를 강간했다. 그리고 '순애'는 잠만 자고 기력을 잃어갔다. 순애가 '깨구락가치' 죽어갈 때, 아버지가 전보를 받고 돌아왔지만 너무 늦었다. 

결국 '순애'를 땅에 묻은 아버지는 '정샌'을 죽이려 찾은 새마을이발소에서 자신이 먼저 칼에 맞아 죽고만다. 마침 이발을 하러 왔던 '종택'은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끌려갔다. 어머니는 출산을 하다 죽고, 갓 태어난 쌍둥이도 죽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정애'의 집을 이장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쥐어주고, '정애'와 그 식구들을 도시로 쫓아냈다. 5·18이 있기 직전의 일이다. 

가난한 '정애'의 곁에는 오직 옆집 사는 벗 '묘자'의 위로만 있을 뿐이었다. '정애'가 광주로 떠나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묘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의 식당을 찾아갔다. 엄마는 재혼했으나 다시 과부가 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묘자'는 5년 전 '5·18 또라이'였던 '박용재'를 만나 결혼한다. '용재'는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던 봄'까지 카센터에서 일했으나,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이후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꺼리는 '폭도'였던 까닭이다. 

'용재'와 '묘자'는 가난했고 '용재'는 점점 미쳐갔다. 5년 전 그때, '용재'는 광주시민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상무대, 교도소, 삼청교육대를 거쳐 검옥에 갇혔다. 그는 삼청교육대 이야기를 꺼낼 때면 온몸이 얼어붙고 딱꾹질을 하곤 했다. 그리고 라일락이 피던 4월이 되면, 군인들에게 이유없이 당했다는 5월이 다가오면 몸살을 앓거나 이상한 소리를 냈다. 


돈을 구하러 시장을 전전하던 '묘자'는 시장 상인들에게 '미친년' 소리를 듣던 '정애'와 마주친다. 광주로 가서 콩나물을 팔던 '정애'는 광주 항쟁이 있던 어느 날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미친년'이 되었단다. 

소설은 '정애'와 '묘자'의 삶을 교차시키며 시대의 고통을 추적하고 폭로하고 해명한다. 폭력의 시대를 사는 굶주린 사람들은 무도하고 잔인했다. 그들 모두 약자였지만, 그들보다 약한 이들에겐 더욱 가혹했다. 가장 약한 자들은 우정과 사랑으로 연대했지만, 그들의 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정애'는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로 옥살이를 한 '종택'과 동거하며 살길을 찾지만 그들의 노력은 무력하고 허무한 최후를 맞이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은 죽거나 미쳐갔다. '정애'도, '묘자'의 신랑도 미쳤다. 미치지 않고선 숨 쉴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은 한편 당연하다. '미친 정애'를 찾아온 '박샌댁'은 이렇게 말한다. 

"동네 사람들 다 미쳤지. 나도 미쳤지. 내 속의 이 큰 슬픔을 누구한테 말할까.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다 미친 거여.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만이 미치지 않은 거여. 그래 그런 거여. 정애 자네만이 미치지 않은 사람이여. 올바른 사람이여. 아름다운 사람이여."(본문 198쪽)

'박샌댁'의 목소리였지만, 작가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공선옥은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비극적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라고 하였다. '정애'도, '묘자'도 이름만 다를 뿐 실존했던 비극이었단다. 비극을 견딜 수 없어,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이 되었던 이들에게, 작가는 '당신은 올바른 사람이여. 아름다운 사람이여'라고 다독거리고 있는 것이다. 

홀로 울어야 했던 그대, 광주


소설에는 유독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언어 장애를 가진 '정애'의 어머니가 그랬고, 가난에 집을 떠나 도시로 가야했던 아버지의 말이 그러했고, 차츰 미쳐가는 '정애'의 말이 그랬다. '키욱키욱파파라파휴우라!', '수리수리마수리 수수리 사바하', '아바아바사융기샹가바' 그것은 소리였고, 울음이었고, 노래였다. 

"나는 어머니의 진짜 말은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말 속에 있는 것같이 여겨졌다. 어머니가 알아먹을 수 있는 말로 하는 말은 가짜인 것만 같았다."(본문 262쪽)

작가 공선옥은 '작가의 말'에서, 그 '알아들 수 없는 말'의 출처를 밝힌다. 작가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 '진짜 말'로 느껴졌다고 고백한다('정애 어머니'는 작가 어머니의 슬픈 과거가 반영되었다). 어쩌면 소설 속 그들이 읊조리는 숱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오늘 우리가 외면하는 '진짜 말'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소설을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들어주는 사람 없어 혼자 울어야 했던 그대, 광주'에게 바친다고 썼다. 


어느 날, '정애'는 사라진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무성한 소문만이 떠돈다. 소설의 마지막 시제는 '지금'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영암집 주모 묘자'에게 '이 세상 모든 냄새가 나고 또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정애'가 찾아온다. '정애'의 영혼이었을까. 알 수 없다. 구천을 떠도는 '정애'와 해후한 '묘자'의 슬픔은, 그 시대를 견뎌 지금까지 살아온 이들의 가슴속에 여전한 고통으로 존재한다. 

지독한 슬픔은 '1980년 광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던 1970년 무렵에도 있었고, '1980년 광주'를 관통했던 이들의 5년 뒤, 10년 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는 슬픔이다. 그들의 순정을 짓밟던 폭력은, 오늘 그들의 슬픔을 망각하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박근혜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4800만원'짜리 5·18 민주화운동 공식기념곡을 공모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하려고 한다. 도대체 그들의 말을, 그들의 울음을, 그들의 노래를 듣지도, 묻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망각의 세월을 순응하며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광주의 봄은 오늘도 처연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혹의 문장들 -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는, 2500년 동양 사상의 정수들
사토 잇사이 지음, 노만수 엮고 옮김 / 알렙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만 번 흔들리는 '불혹'에게 띄우는 편지
[서평] 항심(恒心)의 결기를 촉구하는 아포리즘의 향연 <불혹의 문장들>


나의 '20년 지기' 택수에게,

우린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면 좁디좁은 골방에 앉아 먼동이 터오던 새벽까지 함께하곤 했었지. 짐짓 호방한 목소리로 세상을 논하거나, 유치한 언사로 사랑을 고백하고 조롱하던 스물 언저리, 남루했지만 적어도 비루하진 않았던 그때.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의 치기는, 어느 덧 세월 앞에 추억이 되었네. 벌써 스무 해가 흘렀다.

공자는 '미혹되지 않는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불렀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린 가녀린 봄바람에서 쉬이 흔들리고, 한순간의 모함에도 가슴이 무너지는 세월을 산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성년이 된, 우리 '92학번'과 그 이후 세대들은 무엇을 성취해야 할지 몰라 무력감에 시달리다 97년 IMF 사태를 맞이했지. 사회적 명분도 우리 것이 아니었고, 사회적 성공도 버거웠던 그 시절을 지나야 했다. 그렇게 세월을 견디며 다다른 마흔의 삶은 다시 위태롭다.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20년 지기'의 자네만이 나의 가슴속 열망, 혹은 고독을 알 것 같아서. 어쩌면 이 편지는 너의 이름을 빌어 나에게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혹의 열망과 고독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그것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그런 용기를 갖기까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단다. 이 편지의 시작은, 이 책을 나누고 싶은 바람이 부추긴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적 자기계발의 모범


이 책 <불혹의 문장들>은 일본 유학사(史)의 '백세(白世)의 홍유(鴻濡)'로 불리는 사토 잇사이의 잠언집이다. 불혹부터 40여 년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리를, 흡사 자수를 한 땀 한 땀 놓듯이 기록한 말(言)과 뜻(志)들'이다.

사토 잇사이는 52세에 <언지록>(1824)을, 66세에 <언지후록>(1837)을, 78세에 <언지만록>(1850)을, 80세에 <언지실록>(1854)을 썼고, 이 네 권을 합쳐 <언지사록>이라 부른다(우리나라엔 <언지록>이란 제목으로 완역본이 번역 출간되어 있다). <불혹의 문장들>은 시인이자 인문학자인 노만수가 <언지사록>을 8가지 주제로 나눠 발췌하고 해설을 입힌 책이다.

"저자는 '마흔 살이 지나면서 처음으로 시간이 아깝다는 것을 알고' '마흔이 넘으면 점차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나' '마흔 살부터 육십 세까지는 한낮의 태양과 같으니 덕을 쌓고 큰일을 이루는 시절'이라고 하였다."(엮은이 서문, 본문 5쪽)

시간이 아깝다는 것을 처음 깨닫는 '마흔'의 때, 그로부터 어떤 '큰일을 이루는 시절'을 맞이하기까지, 우리에겐 어떤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걸까. 도대체 '큰일'을 향하여 질주할 수 있는 여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 사토 잇사이의 잠언은 과연 우리의 무력함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계발서의 위험성과 무용론을 말하곤 했었지. 대개의 자기계발서는 독자의 욕망에 최대한 응답하되, 종국에는 그것을 철저히 유린하는 것으로 끝난다. 자기계발서 분야의 지존인 어떤 작가는 고전 독서 10년이면 천재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왜곡이고 거짓이다. 그가 말하는 독서법으로 고전 탐독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고전을 자신의 업으로 탐독하고 연구했던 나의 동료들은 지금 대부분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 과연 '인문학적 자기계발'은 가능한 것일까. 중요한 것은, 자기계발의 목표와 과정에 있겠지. 이는 사토 잇사이가 말한 '큰일'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뜻을 세운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란 질문의 답을 찾으면 될 것 같다.

저자는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입지는 '자신의 불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의 불선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오로지 뜻만은 스승에게라도 양보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은 종종 '세속에 반하는' 방식으로 실천된다고 한다.

"입지의 '입(立)' 자는 수립(竪立, 곧게 섬), 표치(標置, 기품을 높이 가짐), 부동(不動), 이 세 가지의 의미를 함께 품고 있다. 즉 입지란 뜻을 곧게 세워 그 뜻으로 기품을 높이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마음으로 뜻을 펼치는 것이다."(언지록 22조, 본문 24쪽)

'부동의 마음'은 곧 '항심(恒心)의 결기'다. 뜻을 마음에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큰일'이다. 저자는 위로의 언어를 남발하지 않지만, 본래 우리 마음은 하늘에서 유래하였다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무엇을 더 채우는 방식이 아닌, 비워야만 이를 수 있는 마음의 진보다. '진보할 때 퇴보를 잊지 않는' 겸양과 성찰의 도리를 익히며, 홀로 고독의 자리를 사수하고 인내해야 한다.

"'수(需)' 자는 '비오는 하늘(雨天)'을 뜻한다. 비가 올 때는 기다리면 개이지만 기다리지 않으면 젖어버린다."(언지록 129조, 본문 33쪽)

인문학이란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 분야을 일컫지만, 그 어원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인간다움'이란 뜻이다. 즉 인문학은 참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앎의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마땅하다. 언젠가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앎의 신체성'을 통한 '몸의 인문학'을 강조하였다면, 사토 잇사이는 '마음공부'를 통한 '마음의 인문학'을 강조하는 셈이다. 결국 참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마음공부'라는 자기계발 혹은 자기수련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지.

흔들리는 '불혹'에게 권하는 절창의 아포리즘

이 책은 '마음을 어찌 기르란 말이냐'고 묻고, '의리로 마음을 길러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답한다. 자문자답처럼 보이나, 저자는 우리의 마음을 눈치 챈 듯하다. 불혹이란 이름을 가졌지만, 위태롭게 버티는 우리의 고독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의 미덕은, 마음의 본령이 결국 우리의 현실이란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지점에서 우린 위로 받고 용기를 얻는다.

"모든 경서를 읽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경험한 세상사와 사건을 경서의 각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실제의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성현의 말씀을 각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실제와 도리가 일치해, 학문은 결코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언지록 140조, 본문 149쪽)

'수양은 저잣거리에서도 이룰 수' 있어야 하며, 우리는 '땅을 따르며 하늘을 섬기는 양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의 수양이 중요하나, 마음이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자리도 중요한 까닭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는 현실적인 지침들로 가득하다.

가난해도 즐길 줄 아는 처세를, 길함과 흉함, 고통과 즐거움, 삶과 죽음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자족의 지혜를 기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선을 행할 마음 없이 학문을 탐하는 것은 자칫 화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큰소리치는 자는 사람됨의 도량이 작은 자이며, 장담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그 사람됨이 겁쟁이라 일갈한다. 하여 '자중하고 자중하고 자중하라'고 권면한다.

"남은 봄바람처럼 대하고, 가을 서리처럼 스스로를 삼가야 한다."(언지후록 33조, 본문 255쪽)

사토 잇사이의 처세술은 자연의 이치에 기초하고 순응한다. '정직을 마음의 각주로' 삼아 순리를 따르되, 타자를 향한 세심하고 곡진한 정성을 담는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 있어 처세의 달인은 곧 공자의 <논어>에 통달한 자로 '남의 말을 잘 헤아리고 안색을 잘 살피며, 자신을 남보다 낮추어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또 잇사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마흔 인생도


우리의 청춘은 남루할지언정 비루하진 않았는데, 우리의 불혹은 남루하진 않으나 비루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린 도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천만 번 흔들리는 인생은 비단 청춘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불혹의 자리는 쉬이 흔들리고 좌절하는 욕망의 비루함이 깃들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처세의 본질은, 자못 처연하고 위태롭다. 그런 우리를 향해, 사토 잇사이의 아포리즘은 항심(恒心)의 결기를 촉구한다. 본래 옳고 그름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서 유래한 것이니, 그 결기는 타당하다.

부디, 자네와 나의 인생도 그 뜻을 품었으면 좋겠다. 온갖 미혹에 위태롭던 우리의 존엄을 결연한 수양으로 회복하여, 사또 잇사이가 그랬던 것처럼 마침내 우리 인생이 죽음을 맞이할 때 '그 어떤 번뇌도 없는 고요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를 위해, 이 책을 읽고 나누며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을 다시 우리 가슴에 품자.

편지와 함께 책도 보내니, 꼭 읽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 20년만 더 사귀자.

2013년 5월,
그대의 '벗' 진형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주엔 특히, 재레미 다이아몬드의 문명대연구 3부작 완결판 <어제까지의 세계>, 강신주-지승호 대담집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주창윤의 <허기 사회>를 주목한다. 앞의 두 책은 작가의 면면과 행보에 주목했다면, 마지막 책은 그 기획력에 주목한다. 물론 모두 탐스러운 주제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세계 (양장)-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5월
35,800원 → 32,220원(10%할인) / 마일리지 1,7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3년 05월 11일에 저장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미 다이아몬드가 돌아왔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평생 연구와 최종 통찰을 담은 문명대연구 3부작 완결편이다. `더 나은 삶의 방식`과 `지속가능한 가치`는 가능할까. 역사 속에 본질을 찾고, 본질에 이르러 역동의 동력을 찾는 그의 치열한 탐구와 통찰을 기대한다!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강신주.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5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2013년 05월 11일에 저장
품절

일단 이번 주 최고의 기대작. 조금 삐딱하게 말하면, 22000원 정가에 600쪽의 책이니... 실망시키면 때려줄 거다.
허기사회-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
주창윤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5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3년 05월 11일에 저장

부제가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다. 목차도 좋다. 서문과 결론 제외하고 전개되는 표제는 `퇴행적 위로-나르시시즘의 과잉-속물성에 대한 분노-허기의 상황들`. 언뜻 예견되는 힌트들이 머리와 가슴을 한껏 자극한다. 그런데 ˝피로 사회˝와 ˝허기 사회˝는 어떤 연속성을 가지며, 어떤 차별성을 갖는가란 질문을 하는 순간, 이 책은 조금 초라해진다. 관건은 저자의 문장과 논증의 방식에 달려있겠지만. 아, 궁금하다, 이 책.
(학계에서 발표된 양질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아케이드 프로젝트` 시리즈. 오, 멋지다.)
인문세계지도- 지금의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트렌드 45
댄 스미스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4월
18,500원 → 16,650원(10%할인) / 마일리지 920원(5% 적립)
2013년 05월 11일에 저장
절판

`인문학`과 `공부`를 키워드로, `단단한` 책들을 선보인 유유 출판사의 신작. 출판사를 보고 일단 주목한다. 그런데 글로벌 트랜드와 핫이슈, 그리고 다섯 가지 주요 쟁점인 부와 불평등, 전쟁과 평화, 민주주의와 인권, 인류의 건강, 지구의 환경 등을 다룬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제목엔 `인문`이 붙어있다. 인문의 과잉이 살짝 지루하다. 흥미로운 책이나 암튼 제목은 좀 그렇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