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 순례의 영성과 보행의 신학 IVP 영성의 보화 7
찰스 포스터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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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CTK)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link)

★원고가 길어서 잡지에는 조금 덜어냈습니다. 블로그엔 전문을 싣습니다. 



순례, ‘공중의 새를 보며’ 걷는 하루하루의 일생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찰스 포스터 지음윤종석 옮김IVP 펴냄2013년 4월)






먼 훗날, 아니 흐늘거리던 저녁노을 끝자락 감은빛 하늘이 곧 펼쳐질 지금 이 순간 내 생을 마친다면, 주께서 내가 이루거나 이루지 못한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걷던 길가에서 흘린 땀방울과 눈물 한 자락을 더 칭찬하고 위로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무언가를 이룬 그때가 아니라,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걷는 그 순간에 나의 최후를 맞길 바란다. 진정한 삶의 의미란, 그저 목표에 도달하는 것 혹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그것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비로소 믿음과 불신, 확신과 의심, 영혼과 육체, 내면과 외부세계, 천국과 세상 사이에서 바특이 존재하는 순례자의 영성을 우리는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의 보화’ 시리즈는 오랜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영성 훈련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를 위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기획물이다. 기도, 안식, 십일조, 금식, 절기, 성찬 등의 주제에 이어 이 책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순례’를 다룬다(하지만 한국에선 ‘절기 준수’를 다루는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 <The Liturgical Year>가 빠지고 마지막 주제인 이 책이 일곱 번째로 출간되었다. 순서가 바뀌어 출간되는 것은 괜찮지만, 시리즈 중 한 권을 누락한다면 독자로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시리즈 편집자인 필리스 티클은 ‘순례’라는 주제가 일곱 주제 중에서 가장 조심스럽고도 위험한 주제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여태껏 알던 진리들은 순례 도중에 아예 죽거나 아니면 오히려 시퍼렇게 되살아나 단단한 인식과 거룩한 애정이 되어 삶의 모든 부분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순례는 우리의 모든 확신을 ‘완전히 불확실하게’ 만든다. 


“예수는 뭔가에 사로잡히신 사람, 단 하나의 메시지밖에 없는 사람이시다.” 그분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다니시며 숱한 민중을 만나 천국을 설파하셨지만, 핵심은 단순했다. “나를 따르라”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모든 확신을 불확실한 것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순례는, 삶을 지탱하던 온갖 환상을 극복하며 “공중의 새를 보며” 걷는 하루하루의 일생이다.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나의 실존에 닿고자 숱한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것이다.  


한편 순례의 전통은 여타의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종교적 행위다. 그런 면에서 순례는 확실히 종교적이다. 다만 기독교 전통에서의 차별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여정 자체이지 도착이 아니다. 둘째,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재미있게 순례를 즐긴다. 무엇보다 순례의 유익한 점은, 순례를 통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고 육적인 것들을 폄훼하는, ‘최강의 이단’ 영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제대로 하기만 하면 순례야말로 영지주의를 물리치는 가장 잘 알려진 해독제 중 하나”이며, “순례자들이 영지주의를 짓밟는다면 그것이 곧 기독교의 순례”가 될 것이다.  


어떤 책은 완벽한 답변으로 단 하나의 의심의 여지도 봉쇄하지만, 어떤 책은 다소 허술한 비약을 일삼지만 마음을 충동하여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한다. 난, 답변을 주는 책보다 질문을 주는 책이, 안주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향해 추동하는 책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인 동시에 확실히 위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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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복음 -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심장
매트 챈들러 & 제라드 윌슨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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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CTK)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link)



다시 물어야 할 질문, “복음이란 무엇인가?”
<완전한 복음>(매트 챈들러, 제라드 윌슨 지음|장혜영 옮김새물결플러스 펴냄2013)


미국 댈러스에 위치한 빌리지교회(The Village Church)의 대표 목사인 매트 챈들러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하는 교회가 뷔페식당 같은 곳이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드십시오.”(110쪽) 그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취향에 맞춘 복음이 아닌, 철저하게 ‘선포되는 복음’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다른 여타의 가치나 가능성을 배제한다. ‘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인 이신론’이나 ‘번영 신학’ 따위는 결코 복음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 책의 목표는 복음의 규명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챈들러는 ‘땅에서 바라본 복음’과 ‘하늘에서 바라본 복음’이란 두 가지 지평에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복음의 의미를 추척하고 복원한다. 땅의 시각은 복음의 개인적․인격적 측면을 다루고(1부), 하늘의 시각은 복음의 보편적․우주적 측면을 다룬다(2부). 로마서 8장 22-23절은 이러한 복음의 두 가지 관점을 충족시킨다. 즉 복음은 ‘타락한 모든 피조물이 경험하는 갈망의 충족’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유일하게 창조된 인류가 지닌 갈망의 충족’이다. 저자는 이 두 관점의 균형을 강조하되 어느 한쪽으로 쏠릴 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3부). 결국 “완전한 복음”(The Explicit Gospel)의 핵심은 축소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복음에 있으며, 복음을 추상적인 언어로 추정하는 것이 아닌 분명하게(explicit) 선포하고 드러내는 삶의 자리에 있다.

미국 복음주의를 이끄는 차세대 설교자답게, 챈들러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간결하되 강단 있게 전달된다(공저자인 작가이자 목사인 제라드 윌슨의 공로인지도 모른다). 100여 명 남짓의 교인이었던 빌리지교회는 2002년 챈들러가 부임한 후 수년 만에 성도 1만 명의 멀티사이트 교회로 성장하였고, 챈들러는 2009년 뇌종양 3기 진단을 받았으나 이듬해 완치하였다. 현재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죽음에 직면했던 경험 때문일까. 복음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사뭇 비장하다.


칼빈주의 신학에 충실한 논증은 과도한 확신에 휩싸여 서둘러 전개되는 것 같고(무엇보다 우리는 의심할 자유가 있지 않은가! 이 부분에서 같은 칼빈주의자인 제임스 K. A. 스미스의 사려 깊은 논증이 그립다), 일부 냉소적인 단정과 현실을 살아가는 ‘복음적 삶’에 대한 관찰이 다소 피상적이라는 점은 아쉽다. 복음은 레토릭 없이도 충분히 완벽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숱한 레토릭을 붙여도 부족한 것이 삶의 온갖 양태인 까닭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 삶과 교회의 현실이 위태로울 때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는 것과 ‘복음’에 대해 이 정도로 좋은 책이 주어져있다는 것 또한 ‘기쁜 소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 문제는 ‘완전한 복음’을 대하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희망이자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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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에로티시즘
차정식 지음 / 꽃자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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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2013년 6월호)_“독서선집”



황홀한 에로티시즘의 계절이 왔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차정식 지음│꽃자리│2013)



성서를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것은 어김없이 아가서였다. 노골적이고 관능적인 언어들은 과감했다. 텍스트에 당황해서 펴든 주석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알레고리, 훗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에 대한 예표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해설했다. 텍스트에서 한껏 자극받은 충만한 설렘은, 그만 한풀 꺾이고 만다. 그런데 요즘, 신학적 인문학의 통전적 맥락에서 생동하고 약진하는 언어로 나를 흥분시키는 신학자 차정식은, 그런 주석들을 ‘아가에 대한 산만한 말들’이란 표현으로 제압한다. 최근 출간된 그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외람되고 위태롭다. 성서를 둘러싼 전통의 금기와 세속적 욕망의 은밀함은, 이 책의 도처에서 탄로나거나 새로운 통찰로 대체된다. 저자의 육감적 언어는 황홀하며, 간혹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탐한다. 저자의 도발은, 가히 그 자체로 에로티시즘적 탐사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히브리 서사와 헬라적 신화 전승에서의 에로스 개념의 차이부터 살핀다. 먼저 플라톤이 기록한 에로스 신화는 '태초에 자웅동체로 존재했던 인간을 제우스신이 반으로 갈라놓았다'. 절반으로 갈라진 인간의 한쪽은 남성으로, 다른 한쪽은 여성으로 분립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인간은 상실한 반쪽을 갈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헬라적 맥락에서 에로스의 정점은 곧 결핍의 극복, 충만의 완성'이다.


이에 반해 성서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흙을 취해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람 '아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처하는 아담을 보시고, 그를 돕는 짝 '하와'를 지어주었다. '아담이 결핍된 존재라서가 아니라 홀몸이라는 이유가 또 다른 인간 창조의 사유'였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보다 소중한 존재로 서로를 마음껏 탐했을 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예찬과 감탄의 언어에 묻어나는 에로스의 향연은,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사랑하는 둘은 한 몸을 이룬다. 남자와 여자는 '낯선 타자 속에서 익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익숙한 타사 속의 나를 낯설게' 수용한다.

  

유대계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애무'의 개념 속에 조형한 대로,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성적인 교감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나아가 서로의 몸을 더듬고 느끼며 뭔가를 탐색하는 교호 작용을 통해, 거기서 토해내는 신음과 탄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영원하지 않고 결국 죽음을 향해 퇴락해간다는 감추어진 진리를 서서히 예감한다. 그것을 신비로 느끼며 '타자화 된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 곧 '애무'인 것이다.(23쪽)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의 몸짓인 '애무'는, 그 절정의 순간 성기의 합일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 절정은 곧 '공허한 욕망의 허구렁'을 직면한다.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에로스의 숙고가 뒤따른다. 에로스의 욕망을 온갖 금기에서 해방시키되, 타자를 향한 갈망과 자아에 대한 겸손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인문학적 성찰을 다지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목표일 것이다.


왜곡된 에로스의 통념 너머


이 책은 성서에 기록된 에로스 서사를 뒤따르며, 왜곡된 통념을 깨뜨린다. 근친상간, 천박한 매음, 경계를 넘는 탐욕적 에로스 등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와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을 극복할 대상으로 산정한다. 


또한 저자는 전통적 해석사에서 오랜 통념으로 자리잡은 금기에도 도전한다.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적 에로티시즘이 있는 것이지, 에로티시즘 그 자체로 천박한 것이 아니다. 허락되지 않은 존재를 탐하는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이 있는 것이지, 욕망 그 자체는 우리 존재의 태고적 갈망에 가깝다. 저자는 이 책을 기술하는 언어의 방식부터, 에로티시즘적 미학의 절정에 도달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금욕의 대상이었던 에로티시즘적 언어를 해방시키고, 금기의 영역에 도전하여 충만한 해석의 지평을 연다.  


에로티시즘은 다분히 욕체적인 합일을 추구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룻과 보아스의 곡진한 서사는, 남녀간의 뜨겁고 충만한 에로티시즘을 전제하고 있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당대의 관습을 아우르되 시대의 소명까지 조망하는 데까지 전진한다. 늙은 다윗의 몸종으로 침상을 지켰던 아비삭의 에로틱한 육체는, 끝내 경계의 탐욕을 견지하며 격조있는 침묵으로 '동정녀의 존재 미학'을 사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로티시즘의 절정은 예수와 '값비싼 향유(香油)'를 바친 한 여인과의 서사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여인의 에로티시즘적 갈망과 헌신을 향유(享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할 것을 선언한다. 예수와 여인의 합일은, 사회정의에 대한 피상적 통념이나 엄숙하고 상투적인 에로티시즘을 극복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정점을 보여준다.


에로스의 핵심은 무엇보다 합일의 정념을 지향한다. 에로티시즘은 그 합일을 훼방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이르는 모든 부정적 스캔들을 혁파하는 해체의 에너지다.(250쪽)


저자 차정식은 성서적 본질과 인류의 실존적 현상의 간극에서 바특한 탐구를 수행한다. 본질에 근거하지 아니한 전통과 통념들은 그 앞에서 처참하다.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은 결국 허물어지고 합치의 지경에 이른다.


'그 매개는 대체로 몸'이나,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더 크고 더 깊은 사유까지 탐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저자로 인해, 성서의 황홀한 에로티시즘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태초의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 듯 하다. 서로의 존재를 마음껏 탐하고 충만한 합일에 이르렀던 아담과 하와의 에로스 서사일 것이다. 그 에로티시즘은 가장 아름다운 봄날의 화사함과 닮았다. 이제, 우리도 에로티시즘을 품고 열망하며 실행할 충만한 계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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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진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주제는 '물질에 관한 추천도서'였고 독자 대상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가장 큰 비중으로 양낙흥 교수의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를 추천했습니다. 저는 사실, IVP에 있을 때부터 이 책에 대한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물론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특히 이 책은 2012년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국내부분 우수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세계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으론 '적당'할 듯 싶었습니다. 다만 저의 사적 불만을, 다른 두 권의 책으로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자끄 엘륄과 김찬호의 책입니다. 서평에선 적은 비중으로 소개했지만, 저의 '사심'은 이 책들에 좀 더 있답니다.


물질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 (양낙흥 지음|IVP 펴냄|2012년 6월)
하나님이냐 돈이냐 (자끄 엘륄 지음|양명수 옮김|대장간 펴냄|개정2판, 2010년 5월)
돈의 인문학 (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2011년 1월)


요즘 나의 고민은 욕망의 문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이며 더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바둥대는 욕망도 있다. 옳지 않은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있고, 살아남기 위한 욕망 앞에서 잠시 모른 척하는 가치가 있다. 지금 내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이, 그 욕망에 우리의 삶이 압도되는 순간, 우리 존재에 존엄을 부여하던 가치의 몰락을 경험한다. 가치가 몰락할 때 우리 존재는 비루하다.

욕망의 대척점에 가치가 있다. 가치란 우리 존재의 쓸모를 결정짓는 그 무엇이며, 삶의 목표가 되는 그 어떤 의미로 정의된다. 성서는 가치와 욕망의 문제를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한다. 성서는 '부(富), 돈, 재물'이란 뜻을 가진 맘몬을 ‘우상’으로 정의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를 수용하는 선한 욕망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간혹 그런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현실 속에서 가치와 욕망의 문제는 혼재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여린 마음은, 그것을 쉬이 구별하기 힘들다(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하지 '않는' 것인지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이때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 있다. 2012년 출간된 양낙흥 교수의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IVP)를 첫 번째로 권하고 싶다. 2000년대 들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청부론-청빈론’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두 논쟁 모두, 저마다의 이름은 퇴색했으나 그 명분과 논점은 여전히 타협하지 않고, 그 진영에 머물러 있다. '깨끗한 부자'로 표현되는 청부론은, 부의 윤리적 획득과 이웃을 위한 선행을 강조한다. 반면 청빈론은 자발적 영성적 가난을 추구하며 단순한 삶과 나눔을 강조한다.


이 책은 청부론과 청빈론 모두 좋은 동기에서 시작한 담론이며 성경적 요소가 ‘일부’ 있으나, 심각한 위험성 또한 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청부론은 번영신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칫 번영신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청빈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부를 일체 부인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번영신학이 한국교회의 몰락을 야기한 주된 원인이라고 강고한 어조로 비판하되, 금욕적 청빈론이 아닌 향유하는 청빈적 삶을 강조한다(번영신학의 위험성에 대해선 행크 해네그래프의 <바벨탑에 갇힌 복음>을 보라).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텍스트를 인용하여 '누림은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는 축제 혹은 잔치의 순간이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은 때로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부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시고 그들의 집에서 잔치를 즐기셨다. 물론 누림의 권리보다 우선되는 것은 절제의 미덕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권면했다.

이 책의 부제는 '성경에서 찾은 자족, 향유, 나눔의 원리'다. 대체로 유익하고 일독할 만한 '좋은 책'이다. 허나 한 가지 아쉬운 점과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감히 비판해본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주된 텍스트는 성경 외에 주로 개혁주의적 칼빈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 아마 숱한 반론은 그 논거에서 시작할 것이다. 
  부족한 점은, 좀 더 거시적 안목에서 물질 세계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학자는 목회적 상황을, 목회자는 성도가 처한 현실적 정황을 보다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결국 기독교인의 실존은 교회를 거점으로 하되, 현실에 거한다. 교회가 아닌 현실에서 그 실존의 고뇌는 갈음된다. 결국 세상이 문제다!

다음 두 권의 책을 더불어 읽기를 권한다. 하나는 자끄 엘륄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다. 엘륄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의 핵심에 가난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돈(맘몬)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 권세의 속성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금욕의 삶으로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어 그것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세상의 공고하고 폭력적인 체제’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찬호 교수의 <돈의 인문학>(문학과지성사)을 권한다. '돈은 개인과 사회를 묶어주는 사회 시스템'이다. 돈은 '외부 세계에 있는 객관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과 존재에 심층적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다. 현대에 이르러 돈의 권력은 점점 막강해진다. 이 책은, 돈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고,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인문학, 즉 인간다움의 가치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함의로 주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돈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궁금하다면, 이 책 다음으론 당신의 욕망을 읽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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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과잉 사회 - 지워져버린 소녀들의 진실과 도래할 인류의 재앙
마라 비슨달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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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아이는 인류의 희망이다

[서평] <남성 과잉 사회>(마라 비슨달 지음|박우정 옮김|현암사 펴냄 |2013년 4월|1만8000원)



인류의 역사는 대개 남성의 역사였다. 일부 여성의 탁월한 활약이 돋보일 때도 있었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남성은 힘의 우위로 권력을 독점했고, 사실상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했다. 근현대에 이르러 원시적 힘이 아닌, 자본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으나 남성의 시대는 여전히 공고하다. 우리나라는 그 전형적 표본이다.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으나 한국의 여성은 사회적 약자로 존재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비판 대로, '일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남성 문화의 선택 사항일 때가 많다. 남성 본위의 사회는, 윤창중과 같은 '과잉 남성'의 폭력을 일반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로버트 서먼 박사는 남성의 본성을 '군국주의적이며 산업적 탐욕'으로 규정하며 '평화를 지키려는 본성'을 가진 여성의 시대를 염원했다(<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76쪽). 하지만 2012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2011년 <월스트리트 저널> '올해의 책'에 선정된 마라 비슨달의 <남성 과잉 시대>는 그 염원을 아찔하고도 참혹한 전망으로 대체한다. '남성 과잉'이라니, 끔찍하다.

'지워져버린' 소녀들의 끔찍한 진실

인류의 자연적인 출생 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 105명이었다. 독일의 통계학자 요한 페터 쉬스밀히는 "소년들의 무모함, 탈진, 위험한 작업, 전쟁, 항해, 이민 때문에 일어나는 남성의 손실"로 인해 결혼 적령기에 이르러 남녀 성비는 균형을 이룬다고 하였다. 100:105로 시작한 남녀 성비는 성년 즈음 100:100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출생성비는 현대에 이르러 무너지고 있다.


남녀불평등 사회는 '남아 선호'의 문화적 전통을 견인하고, 그 전통은 불평등 사회를 더욱 고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사회에서 남녀 성비의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비율은 유지되었지만, 최근 30년간 태아의 성별을 제어할 수 있는 의학적 기술이 보급되면서 남녀 불평등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온갖 재앙의 위험성을 야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아시아에서 두드러진다.

인도는 저렴한 성 감별 비용과 만연한 낙태로 인해, 점차 여아가 사라지고 있다. 인도의 병원들은 "나중에 50만루피(여성의 결혼 지참금)를 쓰느니 지금 500루피(낙태 가격)를 쓰는 게 낫다"고 광고한다. 중국은 1980년 '한 자녀 정책'이 나오고 1982년 초음파 기계가 보급되자, 남학생이 여학생의 거의 두배가 되었다. 저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친디아(중국과 인도)에 있으니 금융 위기와 같은 전 지구적 재앙이 시작된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구통계학자 크리스토프 길모프가 2005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지난 30여년 동안 초음파와 낙태의 조합으로 아시아에서만 1억6300만명의 여성이 사라졌다". 이는 미국의 전체 여성 인구와 맞먹는 수치다. 저자는 이 현상의 심각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억6천만 명은 미국의 전체 여성 인구수를 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성이 모두 몰살되었다고 상상해보라. 한 나라의 쇼핑몰과 슈퍼마켓, 고속도로, 병원, 회의실과 교실이 남자로만 채워져 있다고 상상해보라. 통근 버스나 지하철, 차를 그려본 뒤 당신 옆의 여성들을 지워보라. 아내와 딸을 지워보라. 혹은 당신 자신을 지워보라. 이렇게 상상하면 문제가 더 잘 와 닿을 것이다.(본문 27쪽)

'인구학적 남성화'의 주된 원인은 "임산부에게 널리 알려진 저렴한 성 감별법(초음파), 그로 인한 낙태 때문"이었다. 주로 아시아 지역의 개발도상국에서 유행했던 인구 조절 캠페인은 성 감별법을 이용한 낙태를 퍼뜨렸는데, 이러한 현상의 배후엔 '미국 정부를 비롯한 서구 주요 기관들의 책략과 협잡'이 있었다.

1968년 폴 에들리히는 광범위한 빈곤, 생태 파괴, 전쟁 등을 예측한 베스트셀러 <인구 폭탄>을 펴냈고, 뒤이어 임박한 사회 붕괴와 지구의 생명 유지 체계의 위험성을 경고한 <생존을 위한 청사진(A Blueprint for Survival)>을 펴냈다. 세계적 차원에서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서구 사회의 위기감은 '인구 조절 프로젝트'를 아시아에 확산시키려 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관련 업계들의 상술은 성 감별 낙태 기술을 아시아로 팔아넘겼다.

남성 과잉은 곧 재앙

인류 역사에서 폭력적인 행동은 단연 남성의 몫이었다. 따라서 남성 과잉은 곧 재앙이다. '남성 과잉 사회'는 '잉여 남성'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독신 남성들은 증가한다. 그들 중 일부는 부적절한 거래로 여성을 '획득'하려 한다. 2008년 한국의 농어촌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남성의 비율은 40%였다. 성비 불균형은 성매매, 신부 수입 등을 '비정상적'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남성 과잉은 사회 전체의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폭력성의 상승을 뜻한다'고 경고한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에게서 훨씬 다량으로 분비되며 특정한 문화 및 환경 요인이 조성될 경우 공격 성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테스토스테론은 폭력 범죄를 조장할 뿐 아니라 반달리즘(vandalism, 문화나 예술을 파괴하려는 경향), 공격성, 모험심, 기본적인 규범 위배 같은 다른 반사회적 행동과도 관련된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게 나온 남성은 장물을 매매하거나 악성 부태를 지거나 교통위반 외의 범죄로 체포되는 경향이 더 많다. 또한 군사 전투에 참여할 가능성도 더 높다.(본문 272-273쪽)

윤창중을 비롯한 기득권 남성의 폭력은 테스토스테론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윤창중을 비롯한 사회적 이슈를 일거에 덮어버린 소위 '일베충'의 여성 비하, 인종차별, 폭력적 성향도 이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경우는 어떠할까.

한국은 1980년대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수)가 109를 넘어섰으며, 1989년 첫째의 성비는 104, 둘째는 113, 셋째는 185, 넷째는 209였다. 아들을 얻기 위해 아이를 계속 낳는 경우, 그만큼의 여아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2007년 한국은 20여년 만에 정상적인 출생 성비를 회복했다. '이전에 성비 불균형이 일어났다가 성별 선택 낙태를 일소한' 세계 유일의 나라가 되었고, 저자를 비롯한 세계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성공을 분석했다.


도시화와 교육의 확대로 인한 남아 선호 사상의 약화가 출생 성비의 균형에 기여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 여성들과 직접 인터뷰하며, 전문가들의 판단을 유보시킨다. 저자는, 한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인구 노령화를 보여주는 '초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 비율이 20% 이상인 사회)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성별에 상관 없이 하나만 낳거나 거의 낳지 않는 저출산 사회가 되면서 겪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한국에서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지위가 열악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여러 인터뷰에서 인용한다. 결국 남녀 불평등 사회는 언제든 다시 '남아 선호'적 경향과 성비 불균형의 사회로 악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화순은 실컷 웃더니 한국 여성들이 10년이나 20년 전보다 처지가 상당히 나아졌다는 생각은 분명 남성이 내 머릿속에 주입시켰을 거라고 말했다. 변화순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평가하기 위한 유엔개발계획의 지표상으로 한국은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지만 여성권한지수는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본문 316쪽)

서울 번화가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소현은 "오늘날에는 체외수정 기술 덕분에 부모들이 여러 유형의 태아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 가능해요"라고 말한다. "부모들은 원하지 않는 태아를 없애달라고 요청하죠. 딸들을 지울 수 있어요. 아들은 남기고요."(본문 332쪽)

'도래할 인류의 재앙'에 맞설 우리의 희망


성감별과 낙태, 그리고 새로운 의학 기술인 PGD(착상 전 유전자 진단)를 이용한 체외수정은 성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저자는 몇 가지 희망의 단초를 모색한다. 일부 생명윤리학자들은 '여성의 권리'와 '그녀가 미래에 낳을 아이의 권리'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접근 방식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즉 부모가 될지를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 일단 부모가 되기로 했다면 그 아이의 성별을 자기 마음대로 형성할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이고 딸이다.
아이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으나 그대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대와 함께 있어도 그대의 소유물이 아니다.
_칼릴 지브란, <아이들에 대하여(On Children)>

저자의 희망은 단출하며, 그 희망이 인류의 오래 욕망에 맞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저자가 예견한 '도래할 인류의 재앙'에 맞설 우리의 그 어떠한 희망도 절박하단 것이다. 어쩌면, 그 '절박함'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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