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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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세조도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달랐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인 만큼 왕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가 사라졌다. 세조의 집권을 도왔다는 공로만 두고두고 우려먹으며50년 동안 버텨온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 약발은 완전히 떨어졌고,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실체마저 거의 사라졌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비정통적인 왕위 계승이 있을 때는 이렇게 새로 공신 세력이 생겨나는 현상을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세조가 창건한 원각사
圓覺寺
가 헐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로 선박을 건조한 것은 불교 탄압의 정점이다. 그 때문에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인 지금 서울 도심의 탑골공원

오늘날의 대학교나 대학원보다도 한 급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를 오늘날 사법고시에 비유한다면 성균관은 고시 합격생들을 교육하는 사법연수원에 해당한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우선 사마시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주도한 공신 세력은 당연히 단경왕후의 복위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대사간
大司諫(사간원의 책임자)이행
李荇(1478~1534)은 복위론을 주장한 박상
朴祥(1474~1530)과 김정
金淨(1486~1521)을 유배시켰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조광조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을 제기했다.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사간원은 비록 관청이지만 민간의 언론이 없던 시절에 유일한 언론기관이었다), 이행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시킨 것은 언로를 막은 커다란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중종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의 주장을 더욱이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전까지는 유학 이념이 사회와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삼촌─조카 사이인 예종과 성종이 자매를 비로 얻은 것이나 형제간인 연산군과 중종이 각각 신수근의 누이와 딸을 비로 얻은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조차 유교적 예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광조의 개혁은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 사회에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향약은 처음부터 성리학 이념을 향촌 사회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만들어진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나쁜 일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이웃끼리 서로 예의로써 대하고[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이것이 향약의4대 강령이다. 취지 자체는 좋지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어야 할 도덕을 관 주도의 인위적 캠페인으로 집행하려 한 것은 유학 국가만이 가능한 발상이었다.

성리학을 생활의 영역까지 관철시키려 한 조광조의 발상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관이 시민사회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게 그렇다. 더욱이 그 뿌리에는 시민사회를 관이 지배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편하려는 불순한 의도도 있었다.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캠페인도 근본을 따져보면 유학 이념에 따른 정치 공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인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보다 천거제를 중시한 것은 사림파의 전통이었다. 그 문헌적 근거는 《대학(大學)》에 있다. 제가(齊家)와 치국(治國)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강조되는 수신(修身)에 철저한 인재를 뽑으려면 시험을 치르는 것보다는 평소에 언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더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1519년에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
賢良科
다. 국가를 위해 일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천거해 관직에 등용시킨다는 현량과

인물 추천제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 쉽다는 점이다(적어도 시험을 치러 성적순으로 인물을 선발하는 과거제보다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과연 조광조가 현량과를 도입한 의도는 곧 드러난다. 그는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바 있던 박상과 김정은 물론 김식
金湜(1482~1520), 안처겸
安處謙(1486~1521)삼 형제 등 소장파 성균관 유생들을 천거해 요직에 임명했다.

존경 받는 원로 정승들까지 반대파로 돌아선 것은 조광조를 위해서나 개혁을 위해서나 좋지 않았다. 결국 그런 불찰이 조광조의 개혁을 불발시키게 된다.

일단 조광조는 선제공격을 가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반정공신들 가운데 자격 미달인 자가 많다는 상소를 올린 게 먹혀든 것이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태조 때의 개국공신들도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공신들의 수가 너무 많다."라는 개혁파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조광조 일파의 주장이 채택되면서76명의 공신들이 자격을 박탈당하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공신전과 노비 들이 몰수되었다.

현량과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있었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는 내친 김에 궁지에 몰린 훈구파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주먹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중종은 자신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만큼 공신의 자질론을 앞세운 개혁파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에서는 군주지만 황제의 책봉을 받으므로 황제에게는 신하(제후)의 신분이다. 황제를 받들어 모신다는 점에서는 국왕도 사대부와 같은 처지다(이것을 사대부들은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천자 앞에서는 누구나 같다."라고 말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천하의 주인은 오직 천자 하나뿐이므로 사대부는 천자를 제외한 모두?조선 왕도 포함된다?를 탄핵할 수 있다. 조선 사대부들의 이런 군주관은 17세기에 중국 대륙을 ‘오랑캐’인 만주족이 정복할 때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그런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그는 그의 개혁을 처음부터 충실하게 지지해주었던 가장 중요한 후원자를 잃게 된다.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는 중종이라 해도, "학문이 고명해지면 다른 일은 자연히 노력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것"이라면서 학문의 지극한 경지에 오르도록 하라는 조광조의 말에 거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광조와 김정 등 개혁 주도 세력은 유배되었다가 곧 사약을 받았다. 촉망받던 소장학자 김식은 유배지에서 군신천세의
君臣千歲義(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영원하다)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를 짓고 자결했다. 물론 그 밖에도 수십 명이 옥사하고 파직당했다. 이해가 기묘년이기에 이 사건을 기묘사화
己卯士禍

원래 만주는 중국의 영향권 바깥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 제국밖에 없었다.

실제로 얼마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비변사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했다.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은 이순신의 수군을 제외하면 거의 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군제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했다. 군역을 면하게 해주는 대신 베를 받던 관행(당시 베는 현금이었다)이 방군수포제
放軍收布制
라는 정식 제도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돈을 주고 국방의 의무를 면제하는 게 합법화된 격이다.
그랬으니 당시 조선의 국방력이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차라리 세조처럼 칼을 앞세워 정변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편이 더 솔직하고 ‘건강’했다. 물론 그것도 조선이 왕국이던 조선 초기이기에 가능했지만). 연극처럼 허구적인 반역이라는 점에서 조선의 사화들을 일종의 ‘반역극’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가히 모함의 전성시대

조선 중기의 4대 사화로 불리는 무오년, 갑자년, 기묘년, 을사년의 사화에서 앞의 두 사화는 연산군이 일으킨 것이지만, 중종과 명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사대부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그녀는 즉각 대윤의 일당을 잡아들이고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윤임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되고 유배된 이 사건은 을사사화
乙巳士禍
라고 불린다

대자보는 조선의 병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었지만, 윤원형은 오히려 그것을 을사사화가 불충분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그래서 봉성군을 비롯해 수십 명의 반대파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작은 사화가 또다시 벌어졌다. 이 사건을 정미사화
丁未士禍

사화를 일으켜 공신이 된 자들은 과거 훈구파만큼의 경륜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아무래도 대세는 사림파를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현역 군부가 부패하면 사관학교가 상대적으로 청렴해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 특히 사림의 뜻있는 유생들은 혼탁한 중앙 정치를 버리고 낙향해 전국 각지에서 서원
書院
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이들이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사실 이량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仁順王后
의 외삼촌이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보지 않아도 뻔했다(자신의 외삼촌을 제거하기 위해 처외삼촌을 기용한 격이다).

흔히 말하는 ‘관군’은 오늘날로 치면 군대가 아니라 경찰력에 불과하다. 당시 조선에는 변방을 지키는 비변사 이외에 특별한 군 조직이 없었다

삼포왜란에 놀라 비변사
備邊司
라는 군사 기구를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국방을 전담하는 정규군 조직

덕흥군 자신도 한창 젊은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새 직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덕흥군은 나중에 죽은 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격상된다. 이것이 대원군이라는 직함의 시작이다. 즉 대원군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닌 상황에서 아들이 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그 왕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직함이다.

이성계의 역성 쿠데타에 반대한 윤이와 이초는 명 황실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보고했다. 정치적으로 신진 사대부의 대표인 이성계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이인임은 성주 이씨고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말도 안 되는 보고였지만

당시 명은 조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므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무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의 사관은 주원장의 치세를 기록한 《태조실록》에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올려버렸다.
가뜩이나 신생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문제로 부심하고 있었던 이성계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때마침 조선에 온 명 사신에게 사실을 수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이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청사를 보냈다. 하지만 명은 태조의 유훈이 실린 《대명회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서 약을 올렸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좀 거친 용어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되게 포장하면 붕당정치
朋黨政治
다.

국왕을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졌다. 이념에서도 전 사회가 성리학으로 완전히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들 간의 권력 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시시콜콜하게 말꼬리나 잡으며 박 터지게 싸운 경우는 없다.

권신 이량을 축출하는 데 공이 컸던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동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사림의 세상에서는 왕실 외척이라는 게 오히려 단점이었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대부들 간에 명망이 높았고 선후배 관계도 좋았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였다.

정여립
鄭汝立(1546~15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였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이이를 배반한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 아픈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정여립은 곧 서인들에게 밀려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정여립은 고향에서의 영향력을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측근들로 대동계
大同契
라는 일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매달 한 차례씩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지역의 유지라는 신분을 넘어 정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치 공작으로 나아갔다. 승려들과 규합해 전주에서 장차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둥, 목자
木子
가 망하고 전읍
奠邑
이 흥할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민간에 퍼뜨린 것이다(‘木子’는 ‘李’이고 ‘奠邑’은 ‘鄭’이므로―邑은?과 같다?그 소문은 이씨가 망하고 정씨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 초기부터 《정감록(鄭鑑錄)》이 나돌았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이 책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등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은유와 파자(破字)를 많이 써가면서 장차 정씨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하리라는 내용

정철
鄭澈(1536~1593)은 이 사건을 특별히 담당하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동인의 우두머리인 이발
李潑(1544~1589)을 비롯해 수십 명의 동인 측 사대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유배시키며 오랜만에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지만, 역모가 사건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규모 옥사가 빚어졌으니, 역시 ‘말만의 역모’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앞서의 사화들과 궤를 같이한다. 다만 사화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대부들 간에 사적인 친분 관계(당파)조차 쉽게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서 동인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고 말았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
建儲(‘儲’란 세자를 뜻한다)문제라고 불리는 사건인데, 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였다.

정철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차라리 그것을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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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알코올 열린책들 세계문학 12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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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어느 해가 생각난다
그해 사월 어느 새벽
사랑스러운 내 기쁨을 노래했지
일 년 중에도 사랑의 계절에
씩씩한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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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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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호방함도 대단하지만 그런 말을 이성계가 용납했을 정도면 당시 정도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도전이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가 건국될 때처럼 분열되어 있던 나라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쿠데타로 이룬 새 나라였다. 그러므로 정통성의 문제는 오로지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인 정도전이, 비록 계획으로만 그쳤지만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이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연 나중에 이 책은 세조 때 본격적인 국가 운영 지침서인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다.

《조선경국전》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서론에서 강조되는 ‘인

’의 정치다. 공자는 주나라 시대에 생겨난 조상숭배와 사직을 뜻하는예

의 개념에 국가와 사회 조직의 원리인 인을 더해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창시했다(맹자도 역시 인에 의한 왕도
王道정치를 주장한 바 있다).
정도전이 국가 경영(경국)의 원리로 인을 내세운 것은 곧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유교 국가의 왕은 사직에 충실하면 될 뿐 실무를 담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 경영의 실무는 과거제로 뽑은 관료들이 담당한다. 그래서 정도전은 관료들의 수장인 재상이 통치의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국왕은 상징적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고, 실제 정치와 행정은 재상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천자를 보좌하는 전형적인 유교 정치의 밑그림이며, 주자학(성리학)을 정립한 주희
朱熹(1130~1200)의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제시한 조선 건국의 이념은 명확해진다. 그는 옛 주나라의 예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조선을 유교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인 동기로, 정도전은 이성계가 국왕이지만 조선의 기획자인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을 상징 권력으로 치부하고 관료가 실무를 담당하는 체제가 가장 바람직스럽다.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

‘심기리(心氣理)’의 심은 불교, 기는 도교, 리는 유교를 뜻한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경을 이용해 도교를 비판하고 노장사상을 이용해 불교를 비판하면서 결국 리를 본질로 하는 유교만이 최선의 이념이라고 찬양한다. 또한 《불씨잡변》에서는 논의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 철학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을 공박하면서 불교를 숭상한 고려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치달았는지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주장한 점이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도전에 따르면 자비는 무차별한 박애주의이므로 오히려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개념이다. 그 근거는 분명하다. 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개념이지만 유학의 인은 원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가리키는 개념이니까.

건국자가 죽고 난 다음에 왕위 계승전이 벌어진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개국 초기 증후군은 이성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에 터져 나왔다.

무릇 새 왕조는 이른바 ‘개국 초기 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게 마련이다. 건국자의 특권과 권위는 보장되지만 건국자가 물러난 뒤에는 그 특권과 권위가 특정한 개인에게 순탄하게 상속되기 어렵다는 증상, 요컨대 후계 문제가 바로 그것

왕위 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나, 아니었나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에서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
李芳蕃(1381~13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었다. 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이성계는 처가의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고자 방번을 낙점했을 것이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 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
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군사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공신들은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했으므로1392년8월에 드디어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댕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정도전이었다.

8월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 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꿈꾼 사대부 국가는 100여 년 뒤에 현실화된다.

왕위 계승은 왕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정몽주와 정도전을 살해한 방원을 추대했다. 그러나 아직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이방과
李芳果(1357~1419)에게 양보했다

(이성계도 고려를 무너뜨릴 때 그랬듯이, 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 법이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어린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한반도의 경우는 중국보다 시기적으로 한 왕조씩 뒤처진다. 즉 통일신라는 중국의 한 제국처럼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당 제국처럼 과거제를 도입했으면서도 귀족과 호족 들이 중앙 정치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의 송과 비교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실제로 건국 초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은 본격적인 사대부 왕국으로 탈바꿈해 송 대처럼 망국적인 당쟁에 시달리게 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맨 먼저 할 일은 두 번 다시 그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
를 의정부
議政府
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제각기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 삼군부
三軍府
를 설치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의 노력은 비정하다 할 만큼 철저했다. 그의 쿠데타에 일등공신으로 기여한 처남 민무구
閔無咎
의4형제를 죽인 일이나 심복인 이숙번
李叔蕃
을 유배 보낸 것은 단순한 토사구팽의 차원을 넘어 명백한 숙청이었다. 그 덕분에 재위 몇 년 만에 그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만한 사대부나 관료 세력은 씨가 말라버렸다. 이제 사대부는 국왕의 충실한 관료가 되거나 순수한 사림
士林

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림이라는 말은 고려 말에 처음 사용되었는데, 조선 초까지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는 의미였다. 즉 관리로 임용되지 않았거나 그럴 의사가 없는 유학자인데, 지금으로 치면 순수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본격적인 사대부 국가가 되는 16세기부터 사림은 제도권 바깥에 있으면서(즉 신분상으로는 관리가 아니면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므로 왕조 교체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왕조 교체가 일정한 유형처럼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건국된 왕조는 새 토지제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까지는 대체로 잘나간다. 그러나 그 제도가 수명을 다하는 중기 무렵부터 제도의 모순이 노출되면서 경제가 붕괴한다.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죽어도 봉급으로 받은 토지가 국가에 반납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결과로 고려는 중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주들이 토지 겸병에 나서면서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과전법을 만든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는 그간의 오랜 관행으로 사실상 사유화된 토지를 다시 수조권만 재분배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을 뿐이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만을 허용하는 제도

따라서 과전법도 전시과의 결함을 그대로 노출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시과나 과전법에서 모두 세습을 인정한 토지는 공신전(功臣田)이다. 호족들의 지원으로 통일을 이룬 왕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성계 역시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그의 아들들도 포함된다)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공신전은 수조권과 무관하게 사전으로 취급되어 세습될 수 있었다. 이런 예외 조항이 있는 한 아무리 엄격한 토지제도라도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태종은 원래 면세의 특혜까지 누렸던 공신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으로 전환했지만 공신전의 세습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재정의 목표는 국가가 재산을 그러모으는 데 있지 않다. 국가는 거두어들인 재정 수입에 맞게 재정 지출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사회 간접 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이므로 국가의 재정 지출 가운데 으뜸은 단연 관리들의 봉급이었다

태종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것이다.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

양녕은 왕위에 관심이 없어 아버지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청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땠든 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무백관’이 세자의 교체까지 건의하고 그 뜻을 관철시킬 만큼 발언권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적 역량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여건 또한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즉위하던 때와 달리 왕위 계승과 관련된 잡음이 전혀 없는 상태로 출발했다는 게 최대의 강점이었다(여기에는 아버지와 형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개국공신이 없다는 것도 좋은 환경이었다. 정도전을 위시해 조준, 권근 등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따라서 발언권이 큰)공신들은 제거되거나 죽었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이 즉위 초에 권력 안정으로 부심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본연의 업무인 통치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해도 모든 일을 혼자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현전
集賢殿
을 활성화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그런 실용서까지도 유학자들이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서 말하는 유학이란 특정한 ‘학문 분과’가 아니었다. 유학은 학문의 특정한 과목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서양에 비유하면 중세의 신학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농사법과 의학, 약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실용적 학문

동양의 전통에 따르면 원래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인쇄술이 개발되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찍어서 서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전통에 맞서 세종은, 비록 농서나 의약서 같은 실용서에 국한되었지만 서적을 민간에 널리 보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혁신적인 군주였다.

이 점에서 서양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세종의 시대, 그러니까 15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지 50년도 못 되어 유럽 전역에 출판사, ­인쇄소가 생기고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일반 민중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모토는 바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인쇄술과 함께 이른바 동양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나침반, 화약 등도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발명되는 데 그쳤으나 서양에서는 발명되거나 도입되자마자 순식간에 민간에 널리 퍼져 실생활에 이용되었다.

1446년9월에 세종은 훈민정음
訓民正音
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열었다.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면서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쓰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어학적으로도 우리말은 교착어이고 중국어는 굴절어다(쉽게 구분하면, 교착어는 어근에 접두사나 접미사 같은 게 자유롭게 붙어서 이루어지는 말이며, 굴절어는 각 낱말의 의미가 고정되고 분리된 성격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문법에서도 차이가 있거니와 무엇보다 글을 통해 완벽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였다.

흔히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창제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한자의 ‘발음기호’도 창제 목적의 하나였을 것이다. 한자가 도입된 삼국시대 초기 이래 1000여 년이 지나면서 한자의 발음이 중국과 많이 달라진 것을 바로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자는 원래 그림에서 출발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추상화되어 기호가 되고 그 기호가 최종적으로 정리된 결과로서 탄생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 알파벳의 원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등이 모두 그렇다. 즉 문자는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지배 집단이 일정한 기간 동안 연구해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또 그 문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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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횡무진 한국사 1 - 단군에서 고려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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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태도가 많이 묻어나오지만 재미있게 잘 봤다.
“사람의 역사”가 아닌 “땅의 역사”를 지향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허영을 채우기 위해 역사를 이용해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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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서희, 윤관, 김부식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해낸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 답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무관이 아닌 문관이다.

1198년 늦봄에 만적은 동료 노비들과 함께 개경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장 연설을 했다. "경계
庚癸(경인년과 계사년의 무신란, 즉1170년 정중부의 난과1173년 김보당의 난을 가리킨다)이래로 천한 노비가 고관대작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신으로서 집권한 자는 경대승과 최충헌을 제외하면 모두 근본 없는 천민 출신이었으니,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무신정권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국가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었다. "저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하급 관리, 양민, 천민까지 하극상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지도는 1170년 무신정권이 성립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보여준다.

최충헌이 왕위 계승보다 더 중시한 것은 실질적 집권자의 계승이었다(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계승보다 바쿠후 정권의 소유자인 쇼군의 계승이 더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교정도감은 무신 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게 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의 일본사에 비유하면 무신 집권자는 바쿠후의 쇼군에 해당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우리 현대사에 비유하면 교정도감은 박정희 정권 시대에 설치된 중앙정보부이고, 교정별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장에 해당한다.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정치인과 관리 들에 대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 기구로 출발한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두루 총괄하게 되었다.

별초란 이름 그대로 ‘특별히[別] 뽑은[招]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있었는데(윤관이 편성한 별무반도 별초의 하나다), 마별초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전까지 고려의 군대 조직은 궁성 경비대와 변방의 진지에 주둔한 군대 이외에 별도로 상비군이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이를테면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모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우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편성한 셈이다

한족 제국이든 이민족 제국이든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하는 왕조는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면 금은 북송을 무너뜨린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대륙 정복을 추진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요처럼 단명한 제국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금은 거란이 랴오둥에 안주한 탓에 크게 뻗지 못했다는 점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도, 막상 북송을 정복하고 중원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성공에 도취해버렸다.

칭기즈 칸은 한반도는커녕 중국 대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송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역(중앙아시아)과의 경제적 교류에 일찌감치 주목한 그는 금을 제압하는 선에서 동방 경략을 일단락 짓고 서역 원정에 나섰다. 유목 제국의 우두머리답게 그는 중화 세계에 만족하는 한족의 천자라면 품지도 못할 꿈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예부터 동서 무역의 중추였던 비단길을 장악해 경제 대국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의 호라산(지금의 이란)까지 정복하자 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몽골 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고려 정벌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은 1234년 금의 명맥을 끊었고, 그 이듬해에는 역사적인 유럽 원정을 시작했다. 바투가 이끄는 20만 명의 유럽 원정군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6년 만에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유린하고 서유럽의 관문인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접경지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만 오고타이가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철군하게 된다. 당시 정복의 초점은 당연히 유럽 전선에 있었으므로 몽골에 고려는 정복의 대상이라기보다 후방 다지기의 대상에 불과했다. 실제로 고려 정벌도 몽골 주력군이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할당받은 칭기즈 칸의 동생 오치긴이 주도한 것이었다. 고려가 30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일본의 바쿠후와 고려의 무신 정권은 둘 다 상징 권력(일본 천황과 고려 국왕)과 실제 권력(쇼군과 무신 집권자)이 나뉘는 일종의 ‘이중권력’ 체제였다. 그런데 일본의 쇼군은 고려의 무신 집권자와 달랐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철저히 그늘에만 머물면서 권력의 단물만 빼먹은 데 비해, 일본의 쇼군은 천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나중에 보겠지만 몽골 침략에 맞설 때도 쇼군이 직접 나섰고, 중국 황제가 일본 왕으로 책봉한 대상도 천황이 아닌 쇼군이었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는 국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짓도 서슴지 않았으나, 일본의 쇼군은 천황의 혈통을 대단히 중시한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교토를 방문해 천황에게 문안을 드렸고 국가의 상징으로서 예우했다. 깡패 집단으로 끝난 고려의 무신 정권에 비해 일본의 바쿠후 정권이 훨씬 오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몽골은 고려의 그런 비상식적인 처사가 눈에 거슬렸다. 천도 두 달 뒤인1232년9월에 살리타는 개경으로 환도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강화도 망명 정권은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허망하게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렇게 해서1232년7월부터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중앙정부는 망명 정부로 전락했다.

아무리 고려의 사직과 왕권이 보잘것없다 해도 일국의 왕과 중신들이 국토와 백성들을 버리고 조그만 섬으로 가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장기적으로 대몽 항쟁을 위한 준비였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은 억지 변명에 불과하다. 사실은 훨씬 간단하다.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행한 극약 처방이다.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고 내정까지 좌지우지한다면 국왕까지는 인정한다 해도 그늘의 권력자까지 배려하지는 않을 게 뻔하다. 따라서 최우는 낙동강 오리알이 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최우는 강화도 정부에서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니 개인적으로 천도의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토와 백성들은 그 천도 때문에 다시 한 번 큰 화를 입게 된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3차전으로 고려는 하나의 문화재를 새로 만들었고 다른 한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했고(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졌다.

1251년에 제위에 오른 몽케(재위1251~1259)는 다시 고종의 입조와 개경 환도를 요구했다. 그런데 최우를 계승한 아들 최항(崔沆, ?~1257)은 아버지의 쇠고집을 물려받은 데다 속임수가 능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왕을 강화도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막판에 다른 왕족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에 몽케는 크게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오자 또다시 속임수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강화도 맞은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기는 했으나 같은 속임수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20만6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라고 되어 있다. 무신 집권자가 저지른 무지한 사기극의 대가는 고려 백성들이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장기 집권 가문이 사라진 이상 적어도 터무니없는 대몽 항쟁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는 없었다. 이듬해 고종이 몽골과의 타협으로 태자를 대신 입조시키면서28년에 걸친 무모한 항쟁은 마침내끝났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고려는 전란의 피해를 입기 전에 진작부터 몽골에 대해 확실한 사대 관계를 취했어야 한다.

1270년 원종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했는데,40년 만의 환도를 기념한 것은 경축 행사가 아니라 반란이었다. 반란의 주역은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고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군대, 즉 별초군이다. 창립자이자 총지휘자인 무신 집권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군대는 깡패 조직으로 변했다. 그들이 새로 뽑은 우두머리 배중손
裵仲孫(?~1271)은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 남아 반란을 일으켰다.

흔히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최후까지 항전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망명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게 됨에 따라 실업자가 된 강화도 수비대가 ‘구조 조정’에 반대해서 파업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동병상련의 심정인 고려 백성들이 그들의 반정부 쿠데타를 지지해준 덕분에 그들의 허명이 후대에 과대 포장되었다.

삼별초의 난이 고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이유는 백성들 사이에 몽골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컸기 때문이지만 그 밖에도 이유가 더 있다. 당시 백성들은 몽골의 가혹한 징발에 시달렸던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징발이었을까? 바로 쿠빌라이, 즉 원 세조
世祖(재위1260~1294)가 시도한 일본 정벌이다.

●두 차례의 태풍으로 국난을 넘긴 덕분에 당시 일본인들은 그 태풍을 신이 내린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1274년의 위기를 넘기자 호조 도키무네는 "신이 일본을 수호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을 처형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함께 세계 제국 몽골이 정복을 시도했다가 유일하게 실패한 곳으로 기록에 남았다.

삼별초의 난과 일본 원정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모든 뒤풀이가 끝났다. 이제 원에 반대하는 고려 내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일본 정벌 전쟁에 용병으로 징발될 만큼 고려는 원의 완전한 속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원에 가 있던 세자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려로 귀국하더니 독특한 방식으로 슬픔을 달랬다. 아버지가 아끼는 애첩과 그 배후 세력을 모조리 잡아 죽인 것이다. 세자는 어머니가 마흔 살도 못 되어 죽은 탓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었겠지만, 졸지에 아내와 애인을 모두 잃은 충렬왕은 이듬해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원에 있을 때부터 매 사냥에 탐닉했으므로 더욱 왕위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왕위가 보잘것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은 아버지 충렬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고려 역사상, 아니 한반도 역사상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정상적인 왕국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농장을 경제적 기반으로 성장한 세도가들은 이내 정치 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권문세족이라고 불리는 신종 ‘족속’이다.

개국 초기에 호족, 다음에 외척, 그다음에 무신, 또 그다음에 권문세족이 차례로 내정을 좌지우지

신흥 유학인 주자학이 도입되자 충렬왕은 전통적인 국립대학이던 국자감을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주자학은 중화사상에 철학의 옷을 입혀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 전통적인 유학의 이념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천하의 중심은 중화 세계이며, 사방의 이적
夷狄(오랑캐)들이 중화 세계를 중심으로 받들고 사대하는 게 우주의 질서이자 조화다. 주희는 그 중심을 이

로, 주변을 기

로 지칭하면서 화이론을 이기론으로 교묘하게 대체했다. 지금은 기가 승한 시대, 즉 오랑캐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이것은 우주의 질서가 깨진 결과다. 따라서 결국 근본인 이로 돌아갈 것이다.

바야흐로 고려의 권력 구도는 수구 대 진보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지만 당시로서는 진보에 속했다). 인물로 볼 때는 권문세족 대 신진 사대부의 대립이었고,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었다.

최영이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이성계의 쿠데타가 민간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최영이 보기에는, ‘근본’도 없는 홍건적 두목이 세운 나라가 원을 몰아낸 것만 해도 용납할 수 없는데, 고려에 압력까지 가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세운 대응책은 너무도 과감하고 대담했다. 놀랍게도 한반도 북부를 확실히 영토화하는 것을 넘어 내친김에 랴오둥까지 정벌하자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원정이 무리라는 것을 최영이 과연 진짜로 몰랐을까? 당시 최영과 이성계 모두 홍건적과 왜구의 토벌로 이름이 높았으나, 떠오르는 해는 최영보다 스무 살이나 젊은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이미 1383년부터 정도전과 교류하고 있었으므로 최영은 이성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신진 사대부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길지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리한 랴오둥 정벌은 좋은 기회가 된다. 이성계와 정도전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원정을 반대했을 것이다.

무신 정권과 권문세족의 오랜 지배가 끝난 뒤에 전국의 토지는 거의 다 임자가 정해져 있었다. 토지가 부족해 새 관리는커녕 기존의 관리에게조차 봉급을 줄 게 없었다.

기존의 모든 토지 소유관계를 무효화하고 밑그림부터 새로 그려야만 토지제도와 국가 재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었다. 새 나라가 서야만 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무르익었다.

묘청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 그래서 역사에는 이 사건이 묘청의 난이라고 기록되었다. 사실 묘청은 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인종의 마음이 돌아설 여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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