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오의 추천으로 요즘 일본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나는 일본 영화는 종종 찾아보면서도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언젠가 다락방 님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호들갑스러움(갑자기 에에? 혼또? 하는....)이 오그라들기도 하고, 여성캐릭터들이 대개 지나치게 귀엽고 여성스러운 면만 강조해서 보고 있으면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일본 드라마는 잘 보지 않는데(하긴 생각해보니 나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한드, 일드, 미드, 영드 다 잘 보지 않는 편이구나), 이 드라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괴물>의 각본을 쓴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이라고 해서 보게 되었다. 드라마 제목은 <그래도 살아간다 それでも、生きてゆく>이다. 2011년 작품이니 꽤 오래전 드라마이다.
총 11화 중 5회까지 봤는데 아직까지는 내가 일본 드라마에서 느끼는 거북스러운 면모들이 없어서 잘 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드라마의 주제가 굉장히 무겁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 초등학생 소녀가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범인은 알고 보니 중학생 소년.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죄책감, 죄의식, 윤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가 더 가볍지 않은 까닭은 가해자, 피해자 당사자의 삶을 그리기보다는 그 주변인들, 즉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쉽지 않은 삶 그 면면을 섬세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뭉뚱그려서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가해자 집안의 아버지, 어머니, 가해자의 두 여동생마다 입장이 다르고 피해자 집안 또한 아버지, 어머니, 피해자의 두 오빠들의 입장이 각각 다르다.
가해자 집안이야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 때문에 부모의 고통이야 말할 수 없이 크리라 짐작이 되는데 피해자 집안은 왜 저마다 죄책감을 끌어안고 사는 것일까?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히로키’(에이타)는 죽은 소녀 아키의 큰오빠이다. 드라마 초반 히로키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흘러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도 후미진 낚시터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세상과 단절한 듯한 삶을 대충대충 이어가고 있다. 제멋대로 자란 머리와 수염(그래도 감춰지지 않는 미모), 아무렇게나 입은 옷. 무엇보다 히로키의 삶이 어딘가 망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아버지와 밥을 먹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아버지는 그래도 볶음밥에 소스를 뿌려 먹는데 히로키는 아버지가 소스를 뿌려주려고 하자 아무 맛도 없을 것 같은 밥을 우걱우걱 퍼먹는다. 스스로 미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장면을 처음 보면 히로키는 소스를 싫어하나보다 생각할 수 있는데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그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잘생긴 외모에도 사귀는 사람 하나 없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도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사랑받으려는 욕구도 스스로 거세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해자도 아닌 피해자의 오빠인데 대체 왜? 싶어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히로키는 여동생 아키가 죽던 날 아키를 돌봐야 할 책임이 있었다. 부모는 저마다 일터로 나갔고 장남 히로키가 어린 동생을 잘 돌봤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19금 에로비디오를 친구와 보려는 계획에만 정신이 팔려 연 날리러 가자는 아키의 부탁을 들은 체 만 체했고 그날 홀로 연을 날리러 나간 동생이 비명횡사한 것이다. 그날 이후 히로키는 동생을 죽인 것은 자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아키와 히로키의 엄마이다. 엄마는 하필이면 그날 평소 딸에게 잘 입히지도 않던 치마를 입혔다. 그 치마 때문에 어린 딸이 범행의 표적이 되어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이라 믿고 있다. 자신이 우려하던 일(성폭행)이 딸에게 실제로 일어났을까 봐 너무나도 무서워서 사건이 일어난 그때부터 1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일’의 진실 여부는 차마 어디에도 묻지 못하고 정상적인 삶을 거의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물론 엄마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망가진 사람은 이 엄마가 아닐까).
이 드라마는 피해자의 오빠인 히로키와 가해자의 여동생인 후타바가 우연히 만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히로키는 혼자 낚시터를 찾아온 후타바가 자살하려고 온 사람인 줄 알고 그녀가 죽지 않게 신경 쓰다 보니 자꾸만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 처음 본 사람임에도 여동생의 비참한 죽음을 털어놓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임에도 서로 닮은꼴-그러니까 이십대 중반을 넘도록 뭐랄까 인생에서 축제다운 축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즐겨본 적이 없는 듯한 그 묘한 분위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둘은 점점 가까워져간다. 대부분의 시청자가 히로키와 후타바 사이에 호감이 있고 서로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 사랑이 싹틀 수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그 엄연한 사실이 둘 사이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 중반인 5회까지는 히로키와 후타바 사이에 손을 잡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마음이 그려진다. 이 마음은 더 커지면 커지지 줄어들지는 않을 텐데 드라마가 끝날 무렵에 이 두 사람은 연인이 될까? 이 작품 분위기상 부부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실제로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는 일이 가능할까? 글쎄... 나는 좀 회의적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커진다 하더라도 결국 서로의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심연을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완벽하게 거둬들일 수 있을까.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크게 자리 잡은 죄의식, 죄책감, 한 사건에 대한 저마다 다른 윤리적 판단과 입장은 쉽게 무너뜨리기 어려울 것이다. 서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또 다른 한편으로 <그래도 살아간다>라는 제목은 이 작품 1회에서 잠깐 등장하고 죽임당하는 어린 소녀 아키의 짧은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플랜더스의 개>를 인상 깊게 읽은 아키는 어느 날 오빠 히로키에게 묻는다. 네로는 그렇게 어린 시절 내내 온갖 고생을 하며 구박 속에 살다 끝끝내 죽고 마는데 그런 네로의 인생도 태어나길 잘한 것이냐고 묻는다. 아이의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어린 히로키에게도 그리고 성인이 된 히로키에게도 여전히 무겁게 다가온다. 태어나 죽기까지 아주 짧은 생애동안 삶이 온통 비극적인 일들의 점철이라면, 간혹 소소한 기쁜 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탄생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네로는 마지막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루벤스의 그림을 본다. 그러나 곧 얼어 죽는다. 이 삶을 과연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도 쉽게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키의 삶도 그렇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짧은 생애 동안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았으므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드라마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까닭은 어젯밤 늦게 읽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의 <문門> 때문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연휴 막바지에 문득 쓸쓸해져서인지 우울해져서인지 늦은 밤에 읽고 싶어 책을 펼쳤다. 책을 덮고 <그래도 살아간다>의 몇몇 인물들과 <문>의 부부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이 겹쳐져서 생각이 꼬리를 무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물론 <문>의 소스케와 오요네의 삶에 저토록 큰 비극-누군가가 살해당하고 살인을 저지르는-은 없다. 그러나 이 두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데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일로 인해 세상과 유리된 채 둘만의 삶을 조용히 이어 나간다. 결혼한 지 꽤 되었는데도 둘 사이에는 아이도 없이, 찾아오는 이들도 사회적인 친분이나 교류도 없이 절벽 아래의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셋집에서 하루하루가 흐른다. 그런 두 사람의 생은 이 작품의 표현에 따르자면 “세상의 햇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추위에 서로 껴안아 몸을 녹이는 식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노부부도 아니고, 나이도 아직 젊은데 다 늙어버린 노인처럼 삶에 어떤 강렬한 욕망이나 의지를 잃어버린 듯, 아내와 남편만을 의지하면서 이토록 음울하게 살아가는 이 두 부부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문>의 소스케와 오요네는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 죄의식- 둘의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었다는 그 윤리적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하는 부부답게 웃고 행복하게 살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부는 스스로 세상과 단절된 채 세상의 온갖 냉대와 멸시도 견딘다. 그런데 과연 이 삶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들이 삶에도 봄이, 햇볕이 잠깐은 들지만 겨울은 또 오고 말 것이라는 체념이 소스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어 이 두 사람은 세상을 향한 문을 힘차게 두드려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문을 닫아걸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살아간다. 이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태어나길 잘한 생인 것일까. 이들의 이 비탈진 집에 완벽하게 볕이 드는 날이 과연 있을까?
<문>보다 조금 먼저 읽은 책 <철학의 위안>에서 알랭 드 보통은 쇼펜하우어를 끌어와 사랑이 인간의 생을 지배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가 인간 종(種)의 존속을 위해서 작용하고 그 때문에 사랑이 인간의 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도,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도 번식욕으로만 풀이한 쇼펜하우어의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기는 한다. 얼마나 강렬한 생에 대한 욕망인지 때로는 <문>의 소스케와 오요네처럼 자기들만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타인 삶을 짓밟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형벌처럼 가혹한 생이다. 사랑으로 선택한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고 세상의 모든 추위를 내내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 사랑은 네로에게 있어 루벤스 그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태어났으므로 루벤스 그림을 볼 수 있었고 그러니까 태어나길 잘했다고, 그래도 세상의 냉대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으니까 태어나길 잘했다고, 가혹한 운명이지만 죄책감을 덜어주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줄 존재를 만날 수 있으니까, 만났으니까 그래서 사랑할 수 있으니까 태어나길 잘했다고, 그러니까 그래도 살아간다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잠 못 드는 밤 이들의 마음속을 하염없이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