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많이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고, 쓰고 싶어지니 책을 읽을 때 ‘쓰는 관점’에서 보게 된다.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쓰는’ 눈으로 살펴보기에 좋다. 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한강의「작별」을 읽다가 나는 먼저 무릎을 친다.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일찍이 카프카는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는 인물을 생각해냈고, 한강은 거리에서 깜빡 졸았는데, 눈사람이 되고 마는 사람을 창조했다. 물론 벌레가 되고 눈사람이 된다는 아이디어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먼저 고개를 쳐든다.


더욱이「작별」은 어찌나 슬픈지. 눈사람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삶, 그 소멸해 가는 삶이, 다가오는 죽음이, 그로인한 세상 모든 것과의 이별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에 더욱 마음을 흔든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로 시작하는「작별」은 아들과 연인을 두고 이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한 여인의 삶이 안타깝고 슬퍼서 처음에는 눈물이 나지만, 그 슬픔의 근원을 헤아리다 보면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눈사람과도 같은 건 아닐까 싶어서 문득 한없이 쓸쓸해진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눈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눈사람’과도 같은 존재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날 문자로 사직 통고를 받은 그녀. 그런데도 그녀는 문자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출근한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뜻밖의 실직 앞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갈 날을 헤아리며 ‘자신의 삶에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지 궁금’해한다. 눈사람이 되었을 때나 사람일 때나 똑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다. 오직 그녀 스스로 ‘최악의 가능성들’에 대비해야 한다. 해고당한 뒤 회사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눈 내리는 날 아이들이 신나게 눈사람을 만들어놓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린 뒤 골목 어귀에 쓸쓸하게 선 채로 곧 잊히고 마는, 그러다 볕이라도 들면 녹아서 사라지고 마는 눈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현수’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그만 둔 뒤 받지 못한 월급을 받기 위해 사장 방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 사장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도 현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그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는 회사에 나타나 ‘마치 낯익은 정물이 된 것처럼 사장의 방 앞에 앉아’ 있다. 그녀는 현수를 지켜보면서 나무늘보의 발톱을 떠올리지만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서, 해고당한 뒤의 그녀처럼 어느 응달진 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눈사람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녹고 말, 곧 소멸해버리고 말 존재들. 겨우내 가까스로 존재하지만 봄이 오면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듯이 마땅히 사라지고 말 존재들.


그녀의 아들은 온기에 녹고 마는 엄마를 위해 냉동고 같은 곳에 들어가면 어떨까 제안한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어쩌면 이미 냉동고와도 같은 게 아닐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아주 커다란 냉동고. 그래서 눈사람처럼 곧 사라질 존재들이 겨우겨우 녹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차피 이 세계는 냉동고이므로 눈사람과도 같은 이 냉동고 속 사람들은 하루하루 입자가 서서히 빠져나가서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본다. 


그런 차디찬 곳이므로 이 세계에서 온기는 치명적이다. 따스함을 지닌 사람 또한 그렇다. 다른 이들이 모두 외면한 현수에게 그녀만이 말을 건넨다. 그녀는 그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고, 그 냉정한 세계에서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온기가 이제는 그녀를 부스러뜨리고 있다. 타인을 껴안는 것도 위험하고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된다. 심장이 세차게 뛸수록 그 언저리가 녹아든다. 따뜻함이, 온기가 그녀 존재의 소멸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따뜻한 사람이 살아남기에 힘든 공간임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차가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단호하게 몸속으로 파고들 냉기가 필요’할 뿐이다. ‘늑골과 심장의 중심까지 단단히 얼려 어떤 것도 더 부스러지지 않게 할 한파가 필요’할 뿐이다. 


아들을 생각한다면 살아남고 싶기도 하련만, 뜻밖에도 그녀는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게 피곤하다고, 지쳐버렸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렇듯「작별」은 냉동고와도 같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눈사람처럼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조금씩 부서져 가고 있기에 서로 온기를 나누는 일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프카의 <변신>이 노동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면 한강의「작별」은 눈사람처럼 쓸쓸히 소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함께 온기를 나눌수록 살아남기 힘든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전하는 듯하다. 때문에 그저 눈사람이 된 엄마와 아들, 눈사람이 된 연인과 헤어지는 남자. 그들의 작별만을 눈여겨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그칠 수만은 없다. 


권여선의「희박한 마음」과 김혜진의「동네 사람」, 정이현의「언니」도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한국 문학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을 다룬 퀴어 문학이 여럿 선을 보이고 있다.「희박한 마음」과「동네 사람」에도 그런 커플이 등장한다. 단 한 번도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희박한 마음」의 데런과 디엔,「동네 사람」의 ‘나’와 ‘너’는 누가 보기에도 동성커플이다.「동네 사람」에는 그런 커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과 지나친 호기심이 오싹하고도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폭력은「희박한 마음」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데런과 디엔에게 담배(사실은 그들의 사랑)를 끄라고 명령하는 낯선 남자의 존재가 그러하다. 그와는 조금 다른 종류이기는 하지만 커플 내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심리적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인 그녀들은 다수인 그들에 비해, 또 약자는 강자에 비해 눈사람처럼 서서히 부셔져갈 존재임이 틀림없다. 교수에게 착취당하고 결국 그 이유로 배제당한 채 우두커니 교정 한 구석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는 ‘인회’(「언니」)의 모습에서도 또 다른 눈사람의 모습을 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나 또한 눈사람일 뿐이야 입자가 서서히 빠져나가서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단지 이 세계가 너무나 가혹하고 차디찬 냉동고이기 때문에 날마다 조금씩 녹아가고 있는 걸 모를 뿐이지. 오늘 내가 사는 곳은 어떤 세계인가. 책을 덮을 때는 쓸쓸한 마음이 든다. 이런 세상에서 바스라지지 않으려면 나만의 ‘벙커’가 필요하다. ‘인회’의 엄마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안온하게 숨이라도 쉴 수 있는 작은 공간. 문학은, 그리고 한강의「작별」같은 작품은 이 세계에서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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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3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사람이라 상상력이 역시 대단한 한강입니다~

잠자냥 2018-12-30 22:53   좋아요 0 | URL
그렇죠? ㅎㅎ 기회가 되면 언제 읽어보세요..

목나무 2018-12-30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시 쓰는 눈으로 글을 읽고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한강의 최근 단편 기대가 되네요. 쓰고픈 마음에 불을 지르는 그런 글 많이 만나고싶어요

잠자냥 2018-12-30 23:02   좋아요 1 | URL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좋은 글을 읽다 보면, 기가 팍 꺾이는 단점도 있지요. 하하하. 그래도 계속 읽어야겠죠? ㅎㅎ

목나무 2018-12-30 23:04   좋아요 1 | URL
그럼요. 읽는 이에게 새로운 눈과 의욕이 생겨날지어니. ㅎㅎ
새해에도 좋은글 추천 많이 해주셔야해요. ^.~
 
고흐의 편지 1 펭귄클래식 112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정진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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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함과 자기 그림이 단 한장도 팔리지 않는 고통 속에서 그런 예술을 이룩해낸 고흐도 고흐지만, 이 책을 읽으면 테오와 그의 아내 요한나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테오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 고흐의 편지를 정리했던 요한나처럼 나 또한 고흐보다 테오 반 고흐 그가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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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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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사둔 이 단편집을 왜 이제야 읽었을까! 진작 읽었더라면 올해 내내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었을 텐데! 체호프와 모파상을 절묘하게 섞은 듯한 그의 단편. ‘유모’와 ‘침묵 속에서’ 단 두 작품만으로도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그가 쓴 단편 250편을 모두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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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30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낚인다. ㅜㅜ

잠자냥 2018-12-30 10:34   좋아요 1 | URL
낚여보세요! ㅎㅎ 전 이미 이 작가 다른 책 장바구니에 잔뜩 넣어두었습니다!

목나무 2018-12-30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낚였다. ㅋㅋㅋ
잠자냥님 덕분에 조용히 숨어있던 명저들 알게 되는 기쁨이 쏠쏠합니다. ㅎㅎ

잠자냥 2018-12-30 16:46   좋아요 1 | URL
한 사람이라도 더 좋은 책을 알게 된다는 게 또다른 재미네요. ㅎㅎ
 
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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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만큼이나 유명해진 맨부커상. <아름다움의 선>은 2004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이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일간지들은 일제히 그 소식을 대서특필했단다. ‘게이소설이 맨부커상을 수상하다’, ‘영국 게이들의 삶 이야기가 최고의 문학상을 받다’ 등등.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 된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역겨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 게이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을 읽으면서 역겹다니! 이런 호모포비아적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흥분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역겨움은 주인공인 게이 청년 닉의 사랑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그가 속한 영국 상류층의 속물스러움과 허위와 가식,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했지만 그 속은 저열하기 짝이 없는, 비열한 민낯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데에서 기인한다.

닉은 이제 막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학벌 좋고 집안도 좋은, 상류층 게이의 러브스토리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이 예상과 다르다. 사실, 닉의 집안은 아주 평범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흔해빠진 부모의 흔해빠진 아들’일 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상류층에 진입했을까? <아름다움의 선>은 상류층에 머물면서도 거기에 속하지 않은 주인공 ‘닉’의 부유하는 듯한, 겉돌 수밖에 없는 위치와 시선이 작품을 밀도 있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닉이 만일 완벽한 상류층이었다면 이 작품은 영국 상류사회의 위선과 허위, 가식을 그토록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파헤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쯤 깊이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그 일원은 될 수 없는, 되고 싶어도 절대 될 수 없는 위치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를 둔 관찰자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

마거릿 대처가 재집권에 성공한 1983년 여름, 옥스퍼드를 졸업한 닉 게스트는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그의 옥스퍼드 동기이자 짝사랑의 대상인 토비 페든의 집에 ‘게스트’로 머물게 된다. 친구 집에서 하숙을 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하필이면 이 친구 집이 정계와 재계 인사들이 안방처럼 드나드는 그야말로 상류층 집안인 것이다. 노팅힐의 부유한 저택에 사는 토비의 아버지 제럴드는 전도유망한 보수당 초선의원이며, 어머니 레이철은 부유한 은행가 가문 출신이다. 이 집안의 한 가지 골칫거리라면 조울증을 앓고 있는 토비의 여동생 캐서린 정도랄까. 그런 집안에서 네 집처럼 생각하라면서 덜커덕 방 한 칸을 닉에게 내준 것이다.

남몰래 짝사랑해온 토비와 한집에 산다니! 그것만으로도 황홀할 텐데,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이 닉에게 덤으로 주어진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류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회에 젖어 들어가게 된다. 토비의 가족은 너그럽고도 자연스러운 태도로 닉을 친구이자 가족처럼 흔쾌히 받아들인다. 제럴드나 레이철, 토비가 집을 비울 때는 닉이 캐서린의 보호자겸 친구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캐서린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닉의 정체성을 알고 있다. 그가 블라인드 데이트를 나가기 전에 상대의 사진과 편지를 보여주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정도로 닉의 성적기호 앞에 그녀는 허물이 없다.

1983년 대처 시절이 호황기를 누리듯, 닉의 인생 또한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는 페든 가의 일원으로 상류층 인사들의 파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그들처럼’ 지내고, 토비를 비롯해 남몰래 동경하던 옥스퍼드 동기들과 친밀하게 교류한다. 또 그 해에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 ‘리오’도 만난다. 그들은 만난 첫날부터 섹스를 한다. 둘이 마땅히 사랑을 나눌 공간이 없기에 공원 한구석에서 말이다. 정신없이 사랑에 빠지는 닉과 리오. 그들에게는 절실하게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리오의 집은 철저하게 호모포비아적인 어머니가 두 눈 부릅뜨고 계시며, 닉은 방 한 칸을 빌려 쓰고 있는 하숙생일 뿐이다. 어찌하랴? 뜻밖에도 이 관대하시며 한없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신 페든 가의 제럴드와 레이철은 닉의 연애 상대가 남자, 그것도 흑인이라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집으로 언제든 데리고 와도 좋다고 허락하신다. 오, 놀라워라!

그 전까지 닉은 자신의 정체성을 들킬까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했다. 소년 남창과 재규어에 있던 걸 들켜서 사임한 외무부 차관의 스캔들을 페든 가 일원을 비롯해 상류층 사람들이 화제 삼아 이야기할 때는 ‘갑자기 스스로를 의식하며 마치 재규어에서 발각된 것이 자신이라도 되는 듯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동성애가 화제에 오르면 종종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페든 집안의 너그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무심히 나왔을지 모르는 말-그냥 감수하면 되는 간접적인 모욕이나 그저 그렇게 웃어넘길 만한 농담’에도 그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그 때문에 닉은 때때로 외로웠으며 자신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런데 이제, 연인을 집에 데려올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세상인가!

리오가 거침없이 닉을 찾는 전화를 걸었을 때 제럴드는 순간적으로 ‘동성애자 사이의 실제 통화를 마주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곧 다정하게 전화를 바꾸어줬으며, 레이철은 또 레이철대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은 여기가 닉의 집”이라면서 언제든 리오를 초대하라고 말한다. 실제로 제럴드의 식구들이 집을 비우던 날 드디어, 마침내 닉은 리오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때 리오는 문 앞에서 서성이며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집에 동성애자가 있어도 상관없는 건가? 저 귀족 분들 말이야.”
“물론 전혀.” 닉이 말했다. “절대로 괜찮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대놓고 말만 안하면’이라고 캐서린이 단서를 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느 정도 과장해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도 동성애자 친구들 많아. 사실 너를 데려와도 좋다고 하던걸, 달링.”
“아.” 리오가 레이철에 버금갈 미묘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름다움의 선>, 243쪽)


리오는 그렇게 닉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집은 절대로 아닌, 그의 방으로 들어서고 그날 그들은 뜨겁게 사랑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1983년의 어느 밤이 저물어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1986년과 1987년으로 이어진다. 닉 게스트는 레이철이 말했듯이 페든 가를 그의 집처럼 여기면서 실제 가족의 한 사람처럼 1986년과 87년에도 행복하게 잘 살아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작품은 소설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1986년의 닉은 한층 더 상류사회에 젖어 들어있다. 가난한 유색인 애인 리오가 아닌 레바논 출신 부유한 사업가의 귀염둥이 외아들 와니로 갈아탔고, 그가 주는 물질적, 성적 쾌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1986년의 닉 게스트는 그야 말로 성(性)과 코카인, 돈이 주는 안락함에서 비롯된 방종과 탕진으로 이어진 삶을 살아간다.

<아름다움의 선>은 1983년과 1986년, 1, 2부로 나뉜 이야기들이 너무 섬세하고 길게 이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진다. 무분별한 성적 난교와 상류층의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속물적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걸까? 가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들은 1987년, 3부를 위해 마련된 장치였음을 곧 알게 된다. 그렇게 써졌어야만 했다. 1,2부의 이야기들이 촘촘히 모아져서 3부에서 드디어 폭발하는데, 가히 탄성을 자아낼 정도이다. 그러니 만일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1,2부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꾹 참고 읽어나가시라. 그리하면 마침내 3부에서 보상을 받게 될 터이니.

그렇다고 1부와 2부의 이야기들이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내부자도 아닌, 그렇다고 외부자도 아닌 닉 게스트의 어정쩡하지만 관찰자일 수밖에 없는 시선으로 그려지는 상류층 이야기들은 진저리가 날만큼 사실적이며, 닉의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 그 틈바구니에서 묘사되는 그 자신의 정체성의 혼돈, 게이라는 정체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 뜻밖의 커밍아웃과 얼마쯤의 안도감, 상대 때문에 숨겨야만 하는 사랑과 연애,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아마도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가 게이로 살면서 느끼고 겪었을 일들이 고스란히 닉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안 해도 되면 좋겠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한 사람에게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와니가 말했다. “그냥 <텔레그래프>에 전면 광고를 하고 말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렇게 함께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한 번도 동성애자가 아닌 척한 적 없어. 그러고 있는 건 너지. 지금은 1986년이야. 세상이 달라졌다고.”
“그래, 동성애자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지.” (<아름다움의 선>, 347쪽)


공포는 마약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수상하게 가까워 보인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이 잠겼다는 사실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특히 의심스러운 일이었고. (<아름다움의 선>, 349쪽)


닉 게스트는 ‘그들’의 말처럼 정말로 진짜 가족을 가질 수 없었기에 제럴드 가족에게 ‘기생’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애초에 하숙생 신분으로 그 안락한 삶에 ‘기생’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1983년의 닉, 리오를 사랑하던 그는 그래도 순수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는 페든 가와 거리를 둘 줄 알아 보였다. 그러나 1986년의 닉은 완전히 그 사회에 젖어들어 그들과 함께 거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런데, 비극은 ‘그들’은 결코 닉을 ‘하나’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과 달리 ‘아름다움의 선’을 제대로 보고 음미할 줄 아는 그였지만, 그 재능을 자기 스스로 갉아먹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아름다운 한 시대는 저물어 가고, 이제 그의 앞에 놓인 삶은 ‘현실’ 그 자체이다. 그는 어쨌든 앞으로 살아남아야 할 터이고, 페든 가에서의 한 시절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든 쓰디쓴 약, 성장통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길모퉁이도 눈여겨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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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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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수상작인 한강의 ‘작별‘이 다른 작품에 비해 월등히 좋아서 나머지 작품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 단점이 있다. 이런 수상 모음집의 장점이라면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점인데 김혜진 <동네 사람>이 그런 작품 중 하나. 그리고 정지돈 작품은 여전히 비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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