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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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진짜 환상적이다! SF도 이토록 사람 마음을 울릴 수 있구나. 기억과 언어, 정체성, 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안에는 모두 ‘인간‘이 있다. ‘켄 리우‘ 그의 이름을 마음에 새겨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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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내 옷장에 걸려 있는 옷가지처럼 바로 곁에서 낡은 감수성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새로운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기.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105쪽)


내일 모레는 수전 손택의 생일이다. 손택은 1933년 1월 1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손택의 생일 즈음, 그녀의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 책은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손택의 30~40대, 정확히는 31세부터 47세까지의 일기와 메모를 담고 있다. 보통 서른에서 사십대 후반까지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황금기에 해당한다. 적당히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육체적으로도 활발하며, 한창 일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시기. 실제로 이 시기의 수전 손택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절정기를 누렸다. 손택은 1963년 첫 소설 「은인」을 출간했고, 이듬해 「캠프 관한 단상」을 발표, 본격적으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을 비롯한 평생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그 무렵의 기록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등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전 손택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을 엮은 손택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엮은이의 글에서 재미난 표현을 쓴다. 일기의 첫 권에 해당했던 <다시 태어나다>가 빌둥스로만(Bildungsroman), 즉 일종의 성장 소설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손택이 정력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성년기의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14세 때부터 30세까지의 일기를 담은 <다시 태어나다>에서 손택은 지적, 성적 갈망으로 들끓는 청춘의 방황과 목마름을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써 내려갔다. 데이비드 리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몹시 의식적으로 자아를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창조, 아니 재창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일기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서는 작가로서의 위대한 성공 과정을 그리면서, 그 무렵 어울렸던 각계각층의 작가, 예술가, 지식인과의 만남을 담고 있다. 또한 어린 시절 꿈꾼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여력, 이 모든 걸 얻었음에도 ‘여전히 열렬히 배우는 학도’로서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일기와 두 번째 일기는 어조부터가 크게 다르다. 첫 일기 <다시 태어나다>는 ‘솔직’ ‘진솔’ ‘뜨거움’ 그 자체다. 그 무엇에도 여과되지 않은 청춘의 날것 그대로 생생함이 베어 있다면 두 번째 일기는 날것의 감정보다는 담담한 독서 목록과 인용문, 관조적인 여행기들과 정치적 단상들이 주를 이루며 일종의 응축된 사유의 아포리즘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조는 변했을지언정 10대에서 20대 내내 뜨겁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은 여전하다. 손택은 서른이 넘어서도 치열하리만치 읽고 쓰고 보고 듣고 감상한다. 책, 영화, 회화, 음악, 오페라, 연극 등 온갖 문화예술에 대한 열의와 갈망은 이 두 번째 일기에서도 그칠 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한 것들이 그녀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리고 그것들을 한 지식인으로서, 또 사상가로서 생각하고 투쟁하고 향유하는 성숙한 어른의 일상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독서와 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취향과 사유의 깊이는 수전 손택의 글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흐뭇하게 볼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아름다운 단조로움이다-스탕달, 바흐(그러나 셰익스피어는 다르지) / 팝 아트: 오로지 부유한 사회에서만 가능한 예술. 그래야 아이러니한 소비를 즐길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영국에 팝 아트가 있는 거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없다. 그곳에는 여전히 소비가 너무 진지하니까(스페인에서 회화는 추상이 아니면 사회적 시위의 리얼리즘이다) / 죽음=철저히 사람 머릿속에 있음. 삶=세계 / “나”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 권리는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내가 겪은 가장 심오한 체험은 질책보다는, 무관심이다. / 모든 행위는 타협이다(사람이 원하는 것+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타협)/ 자신감-인간에 대한 한 가지 요점은 인간이 ‘결코’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언제나 믿음직하고, 매력적이고, 친절하고 기타 등등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경험’을 그에 대해 ‘알게’ 되는 사실로 상쇄할 수 없다는 말이다.

회화는 오브제다. 음악은 퍼포먼스다. 그러나 책은 암호다. 그건 생각들+이미지들로 옮겨 쓰여야 한다. / 19세기는 퇴행하는 음악으로 가득하다(즉 베토벤 이후면서도 후기 베토벤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 그럼에도 대단한 발전을 이른다. -예. 슈베르트-슈베르트는 생전에 실질적으로 ‘선율’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베르트의 후계자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 슈트라우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는 건 마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사진이 예술인가? 아니면 그냥 영화의 사생아, 혹은 사산아인가?


위와 같은 구절들이 매 페이지마다 쏟아지는 이 책은 읽는 내내 곳곳에 밑줄을 치며 그 사유에 감탄하고 잠시 멈춰서 그 문장을 곱씹게 된다. 이런 번득이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실연으로 상심한 손택을 만날 수도 있다. 첫 번째 일기를 통해 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으나 그럼에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잘 유지하는 법에 서툴렀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인과의 관계에서 힘들어 하던 그녀의 모습은 서른을 넘어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불처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잃고 극심하게 고통받는다. 끊임없이 사랑하듯이 글쓰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 내 글의 ‘얄팍함’. 문장 하나하나가 취약하다. 너무 건축적이고, 너무 만연체고’라는 구절에서는 새로운 글쓰기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위대한 작가도 혼자서는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손택이 자신을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타인의 일기를 남몰래 엿보는 쾌감(?)까지 느껴진다.

손택은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키가 크다 / 저혈압 / 잠이 아주 모자란다. / 순수 정제 설탕이 갑자기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 술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 / 단백질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식성 / 아주 튼튼한 위장-역류성 식도염, 변비 따위는 없다. / 높은 곳을 좋아한다. / 기형적인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한다.(관음증) / 이빨을 잘근잘근 깨물어 씹는다. / 이 갈기 / 프릴뢰즈(Frileuse,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고, 추위에 아주 약하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38쪽)

읽어야 할 책, 읽은 책, 들어야 할 음반, 본 영화, 볼 영화 목록 등이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는 빼곡하다. 그 리스트를 따로 적어서 갖고 다니면서 손택이 보고 듣고 읽은 영화, 음악, 책들을 모조리 따라서 누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손택이 문학이나 책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동공이 커진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들에 나오는 강박적 시선은 (억압된) 에로틱 의식이다. / 가장 위대한 주제: 자아의 초월을 추구하는 자아(<미들마치>, <전쟁과 평화>) / 카프카 “진지한” 문학 최후의 스토리텔러. 거기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들 헤매고 있다(그저 그를 모방할 뿐)’ ‘일 년(13살 때)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언제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죽는 게 너무나 두려웠고- 오로지 그 책에서만 어떤 위로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죽는 순간 만질 수 있게 언제나 갖고 다니고 싶었다.’


영어로 쓰인 최후의 훌륭한 소설들
포드 매덕스 포드, <훌륭한 병사>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밤은 부드러워>
E.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윌리엄 포크너, <팔월의 빛>

과도기적 소설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듀나 반즈, <나이트우드>
이탈로 스베보, <제노의 고백>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너대니얼 웨스트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145~146쪽)



이런 구절들을 보면 아주 오래 전에 읽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명상록>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영어로 쓰인 최후의 훌륭한 소설들’ 목록에서 이미 내가 읽은 책 제목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져 슬며시 웃게 된다. 아, 올해는 포크너를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의 두 번째 일기는 이제 서른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도 어떤 목록들과 사유의 흔적이 나타날지 기대가 된다. 아마도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며 투쟁하는 손택의 모습이 그려지리라. 손택은 말한다. ‘내 흥미를 끄는 유일한 변신은 철저한 변신이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난 ‘모든 걸’ 바꿔 놓을 사람이나 예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원한다.’고. 그토록 뜨겁게 매 순간 읽고 보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기에 오늘날의 그녀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손택의 글과 날카로운 지성,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에는 아낌없이 몸을 던져 행동하며 살고자 노력했던 모습을 사랑한 이들이라면 이 일기는 여전히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앞으로 출간될 마지막 일기 또한.



















그나저나 판형이 조금 달라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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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19-01-1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혈압인거랑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고, 추위에 아주 약하다는 건 저랑 비슷하네요. (그러나 여름을 좋아하는 저도 한국의 작년 여름은 죽을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여름 중 택하라면 주저없이 여름이긴 해요.)
프릴뢰즈라는 단어 신기해서 찾아봤어요. 이런 여자를 칭하는 단어도 있다니 신기하네요!
판형 달라지는거 전에 있던 판형 가지고 있으면 책꽂이 꽂을때 좀 짜증나던데.
딴 얘기지만 저는 가끔 그런 생각해요. A4 용지마냥 책도 정한 사이즈가 있어서 모든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이 어느 정도는 분류가 됐으면 좋겠단 생각...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ㅋㅋ (왠지 독일 같은 나라는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 들기도 하네요. )

수전손택 이라는 인물 저는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는데 잠자냥님 덕분에 알게 됐어요.
월요일에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1-14 14:25   좋아요 1 | URL
저혈압, 여름... 등등 하하하. 손택의 일기가 케이 님도 돌아보게 했군요! ㅎㅎ
저도 이번에 이 책 사고 나서 첫 번째 일기집 꺼내보고 당황했어요. 디자인만 보고는 판형 똑같을 줄 알았는데 ㅠ_ㅠ 나란히 꽂아두면 이상한 모양이 되는;;; 에휴. 심지어 본문 글자 크기도 좀 달라졌더라고요. ㅠ_ㅠ 그래도 이후 출판사가 열악한(왠지 열악한느낌이에요) 환경 속에서도 수전 손택 책 계속 꾸준히 내주니까 참기로 했어요.;; 이러다 마지막 일기 판형은 또 다르게 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ㅋㅋㅋㅋ

수전 손택 읽어보시면 아마 그 매력적인 글쓰기와 지적 사유에 푹 빠지게 되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처음 읽기에는 <타인의 고통> 이나 <사진에 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 등이 상대적으로 다른 책보다는 수월하실 거라고 생각되네요. <해석에 반대한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강조해야 할 것>등은 주로 책, 영화, 회화, 오페라, 연극 비평에세이라 그녀가 다루고 있는 원 텍스트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좀 재미없을 수 있거든요.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나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처럼 소설/희곡 작품도 있는데요. 손택 자신은 소설가로 불리기를 가장 원했지만, 제가 보기에 손택은 소설(문학작품)보다는 에세이 쓰는 재주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9-01-1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나서 중고서점에서 손택을
책을 검색 중입니다 :>

그런데 다들 사가셨는지 당최 보이질
않네요... 아까비 -

집에 쟁여둔 책을 읽어야 하나 봅니다.

잠자냥 2019-01-14 18:13   좋아요 0 | URL
손택 책은 중고 서점에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 책을 사서 읽은 분들이 팬심 가득한 이들이라 잘 내놓지 않는 게 아닐까 싶네요. 책값도 비싼 편이라 중고로 나와도 크게 싼 느낌도 들지 않더라고요. ㅎㅎ 암튼 조만간 발견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복수는 나의 것 주식회사 로알드 달 탄생 100주년 기념 컬렉션 5
로알드 달 지음, 이원경 옮김 / 베틀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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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머러스함과 기막힌 반전, 도무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그 속에서 성욕, 소유욕, 명예욕 등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낱낱이 까발린다. 여기 실린 9편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 그동안 로알드 달 작품을 많이 접했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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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1-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 지금은 절판된 로알드 달의 단편 시리즈들 엄청 좋아했어요. 그 중에 ‘카티나‘ 라는 소설 읽고 정말 미친듯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뒤로 로알드 달의 장편도 찾아 읽었지만, 장편은 너무 아니어서 조금 실망했답니다.

잠자냥 2019-01-17 14:29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절판된 판본으로 열심히 읽었답니다. ㅎㅎ 지금도 집에 있어요. 전 로알드 달 장편은 시도해 본 적이 없는데 다행이군요. ㅋㅋㅋ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랍니다~ 다시 또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듯. ㅎㅎ
 
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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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델로의 단편은 영화를 보는 듯하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한 편 한 편 읽노라면 눈앞에서 생생한 캐릭터들이 잔뜩 나오는 이탈리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등장인물은 주로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소박한 이들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안타깝고 연민 가득한 그런 영화 말이다. <어느 하루>를 다 읽고 나면 왜 그의 작품에서 영화 같은 느낌을 받는지 곧 깨닫게 된다. 극작가로 널리 알려진 피란델로는 생전에 250여 편에 이르는 단편소설을 남겼다. 그 가운데 <어느 하루>에 실린 9편은 모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라고 한다. 아하, 비밀이 거기 있었구나! 더욱이 그의 유명한 희곡 중에는 단편소설을 개작한 작품이 많단다.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다. 피란델로의 머릿속에서 단편 소설은 애초부터 하나의 영상처럼 그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희곡작품으로 개작하기에도, 영화로 만들기에도 좋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어느 하루>의 첫 번째 단편인 ‘미차로의 까마귀’를 읽었을 때는 루이지 피란델로의 매력을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어느 양치기가 절벽에서 까마귀 한 마리를 붙잡아 마을로 데려오면서 시작한다. 정작 잡아온 까마귀로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양치기는 기념으로 방울을 달아준 뒤 까마귀를 풀어준다. 방울을 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까마귀. 그런데 이 녀석은 방울 소리를 내면서 하필이면 어느 농부의 빵을 훔쳐 먹는다. 그러려니 하면 그만일 것을, 이 농부는 까마귀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까마귀에게 자기 뜻대로 한방 멋지게 먹였을까? 이 이야기는 다분히 우화적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하면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갔다(그리고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나면 이 작품이 왜 서두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또 다른 아들’을 읽으면서 나는 피란델로의 세계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아,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어! 조금씩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노파 마라그라치아는 아들 둘이 아메리카로 떠난 뒤 혼자 부랑자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라면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인데, 글을 모르는 그녀는 마을의 과부 닌파로사에게 늘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토록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도 떠난 아들들로부터는 답장 한 번 없다. 그래도 노파는 오늘도 닌파로사에게 편지를 부탁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편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다! 어찌된 일일까? 편지의 비밀과 함께 이 노파의 굴곡진 삶이 드러나면서 뜻밖에도 커다란 비통함을 마주하게 된다. 진실을 알고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노파의 모습에서 인간은 어쩌면 비참한 현실에서도 꿈꾸기를 멈추지 못하는 존재는 아닐까 숙연해지기도 한다. 


세 번째 작품인 ‘달의 저주’는 자신을 늑대 인간이라 믿는 농부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와 결혼한 신부의 이야기로, 첫 번째 작품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또 다른 아들’과는 더더욱 다르다. 알고 보니 피란델로는 소설 속 공간에 따라 크게 ‘시칠리아 이야기’와 ‘로마 이야기’ 두 가지를 썼는데,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주로 고풍스럽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미신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감이나 현대의 비극을 초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단다. ‘달의 저주’는 그야말로 토속적이면서도 미신적인 세계를 담으면서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날카롭게, 그러나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달의 저주’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인 표제작 ‘어느 하루’도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매우 짧은 분량인데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실수였는지 몰라도, 돌연 누군가에 의해 잠에서 깬 나는 어느 간이역에 멈춰 선 기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한밤중이고, 내 수중엔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루’. 94쪽)


이렇게 시작하는 ‘어느 하루’는 기차에서 잠들었다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간이역에서 내던져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꿈과 환상, 정신착란과 환각 등 시공간을 벗어난 주인공이 하루 동안 겪는 기이한 일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는 온갖 일을 겪고 난 뒤 순식간에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항아리’는 가장 많이 알려진 피란델로의 단편 중 하나로, 수많은 버전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졌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발레극으로도 재현됐다고 한다. 익살스럽고 재미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꽤 철학적이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주 돈 롤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귀한 항아리는 마련했는데, 그만 그 항아리가 둘로 쪼개지고 만다. 어쩔 줄 모르던 그는 신통방통한 고무접착제를 발명한 땜장이 디마를 불러와 항아리를 원래대로 고쳐주면 값을 후하게 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만 받았던 디마는 드디어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신나게 항아리를 붙인다. 이윽고 항아리는 감쪽같이 새것처럼 붙는다. 그런데 아뿔싸 이를 어쩌나? 디마는 자신이 항아리 안에 들어간 채 붙이고 만 것이다. 항아리를 깨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디마와 항아리를 절대로 깰 수 없다는 돈 롤로. 이들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 상황에서 돈 롤로에 비해 디마의 체념은 조금 빠른 편인데, ‘디마는 진정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이 별난 사건에 재미를 느꼈고, 이를 불행한 사람들 특유의 슬픈 유쾌함으로 웃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피란델로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나면서 서글픈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의 백미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작품 ‘유모’와 ‘침묵 속에서’이다. 그의 다른 작품은 읽지 않더라도 이 두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모’의 주인공 안니키아 또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유모살이를 하러 떠난다. ‘로마’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작품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그 안에서 이 힘없는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려나간다. 안니키아는 오래전부터 아가씨로 모시던 에르실리아가 막 출산을 하자 그 갓난아이의 유모로 마지못해 고향을 떠난다. 에르실리아는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된 변호사 모리와 결혼했는데, 신혼인데도 그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모리는 사회주의사상의 인도적인 관점에 매료된 상태이지만, 사실 그는 위선적인 부르주아일 뿐이다. 순박한 안니키아를 보고도 ‘그 무지몽매함을 참을 수 없어’하고, ‘노예근성이 이렇게나 깊게 뿌리박힌 시칠리아의 최하층민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는 게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들 뿐이다. 이런 부르주아 인텔리의 위선은 이 작품 끝에 가서 절정에 달하는데, 안니키아의 비극을 앞에 두고도 모리는 방관자적 태도로 멀거니 지켜만 본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비극을 사회주의자 모임 회담 주제로 삼기로 하고는, 기계적으로 글을 쓸 뿐이다. 그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에 분노를 느끼면서 안니키아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게 된다.

  

마지막 작품인 ‘침묵 속에서’는 근면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늘 칭찬받던 소년 ‘체사리노’가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요즘 무슨 일인지 공부에 통 집중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체사리노. 그는 이제껏 아버지를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떤 사람인지 도통 알지 못한다. 집안에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고 어머니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는 종일 어머니 얼굴을 보지 못해 어머니 또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늘 바쁜 어머니. 잠시도 지칠 줄 모르는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한 덕분에 체사리노가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이 소년에게 삶은 고독하고 적막할 뿐이다. 그런데 이 고독하고 적막한 생활일지언정 어머니 곁에서 계속 학교에 다니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갑자기 그에게 기숙사 입학을 제안하고, 체사리노는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어느 날, 기숙사로 전해온 어떤 소식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한껏 상처받기 쉬운 열여덟 체사리노 앞에 닥친 가혹한 인생의 무게에 한숨짓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를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는 인생의 슬픔, 기쁨, 비극이 모두 담겨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끝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193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는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 내 작품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 아홉 편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그의 단편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이 단편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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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단편만 읽고는 아, 이런 우화같은 이야기면 쫌 그런데 하면서 다음 단편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당장 다음 단편들 읽어야겠어요.

잠자냥 2019-01-09 09: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죠? 첫 단편이 조금 읭? 스러운데 다음 단편부터는 괜찮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아니면 아예 마지막 두 단편만 읽으시던가요-

카알벨루치 2019-01-0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시유~피란델로 ㅎㅎ

잠자냥 2019-01-09 09:20   좋아요 1 | URL
재미나게 읽게 되시길 바랍니다! ㅎ
 


지난주에 영화 한편을 봤다. <인생 후르츠>. 사실 이 영화를 내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12월에 개봉했을 때는 완벽하게 관심 밖의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 속 해맑게 웃는 노부부의 모습과 ‘인생 후르츠’라는 제목이 거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백년해로한 노부부의 삶을 중심으로 인생에 대해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어떤 깨달음을 전하려는 진부한 이야기려니 했다. 일본 영화라서 왠지 더 뻔해보였다. 나는 1950~6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에 만들어진 영화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등 현대의 몇몇 감독 작품이 아닌 이상 일본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보게 되지는 않는다. 일본 영화, 드라마 느껴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나 ‘에~?’ 하면서 놀라는, 지나치게 과장된 액션에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 친구에게 영업당해 결국 보게 되었다. 친구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주변 인물 두 사람이 강력하게 이 영화를 추천하니 <인생 후르츠>에 정말 뭐가 있는 게 아닐까 살짝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좋을 것 같다나.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이 영화에 빠지게 한 것일까. 그래, 어디 보자 싶어 팔짱을 끼고 스크린을 주시한다.

영화가 시작하자 반가운 배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 일본의 어느 도시. 흔하디흔한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운데 유독 나무로 우거진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여느 집과 달리 이 집은 마당에 빼곡하게 온갖 채소와 과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 채소들과 나무를 가꾸는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가 이윽고 등장한다. 하루 종일 밭을 일구고 열매를 따고 그렇게 딴 열매와 채소로 온갖 음식을 만드느라 쉴 틈 없이 분주하다.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데 이 노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이 90세와 87세, 둘이 합쳐 177살 고령의 나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60년 이상 함께 하며,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집에 살면서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키우는 노부부.

할아버지 ‘슈이치’는 노란 팻말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와 식물이름을 일일이 적으면서 귀여운 그림과 함께 짧은 문구도 덧붙인다. ‘작은 새들의 옹달샘, 와서 마셔요.’ ‘능소화, 붉은 꽃의 터널을 지나보세요.’ ‘작약, 미인이려나?’ ‘여름밀감, 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등등. 솔직히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팻말에 ‘귀엽네’, 미소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 역시, 오그라들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밭을 일구고 마당을 가꾸는 모습과 함께 키키 키린의 음성으로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그리고 천천히’ 이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서히 열려간다.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는 건축가로 1960년대에 나고야 시 교외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 설계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그는 마을에 숲을 남겨 바람이 통하고 숲이 살아있는, 자연 친화적인 마을을 꿈꾸었지만 자신의 건축 도면대로 도시는 조성되지 않고 개발 논리에 밀려 아파트 숲을 이루게 된다. 이에 낙심한 것일까. 그 뒤로 그는 자신이 하던 일과 거리를 둔다. 1970년대에 고조지 뉴타운 집합주택에 입주했던 슈이치 가족은 5년 뒤에 뉴타운 안에 30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 집마다 한사람씩 숲을 조성한다면 결국 도시 전체가 숲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뉴타운의 민둥산 다카모리 산도 츠바타가 1970년대에 그 지역 초등학교에 제안해서 1만 개의 도토리 묘목을 심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 산은 잘 자란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되었다.

이 부부의 반평생을 9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지켜보노라면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는 이 명확한 자연의 이치가 결국 우리 삶의 이치와도 다르지 않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 무엇을 하든 ‘차근차근, 천천히 스스로’ 이 말 또한 그렇다. 처음에는 허허벌판이던 300평의 땅이 이제는 나무와 풀로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근차근 천천히 그렇게 자라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두 부부의 손으로 조금씩 일군 공간. 뉴타운 조성 시기에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어차피 세상은 다 그렇지’하고 평범한 건축가로 살아갔다면 아마 츠바타 슈이치의 삶은 제대로 열매 맺은 기분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인가 싶기도 하지만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가 없었다면 그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결코 그럴 수 없었으리라. 젊은 시절부터 아내가 뭘 하든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 남편, 그런 남편을 믿고 또 완벽하게 지지하면서 함께 그 길을 간 아내. 이 두 부부의 모습에서 진정한 ‘동반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들이 천천히 차근차근 빚어낸 집과 삶은 말 그대로 ‘보석상자’처럼 빛난다.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는 말 또한 잊히지 않는다. 아마 이 두 사람처럼 산다면, 오래 살수록 인간이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영화는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인생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것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게 한다. 몇몇 장면에서는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울컥 나기도 하는데, 영화를 볼 이들을 위해 그건 비밀.


<인생 후르츠> 앓이 중인 친구는 이 노부부의 삶을 다룬 책 <밭일 1시간, 낮잠 2시간>도 사서 완전히 푹 빠져있던데,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게 되더라. 이제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틈틈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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