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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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을 완벽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까?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한 권의 책을 읽고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100% 이해하거나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기꺼이 그 글자의 세계로 빠져들어 난독의 어려움을 뚫고서라도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그가 지은 미로를 기꺼이 헤맨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글자가 만든 미로에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거기서 독서의 즐거움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입구도 출구도 모호한 글자 사이사이에 놓인 심연 속을 헤매는 것.

알랭 로브그리예의 <진>은 가히 최고의 난이도로 독자가 텍스트 사이를 헤매도록 만든다. 텍스트가 빚어낸 이 미로는 그다지 길지 않아서 어찌어찌 헤매다 가까스로 출구를 나올 수는 있다. 그런데 가까스로 출구를 나온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곳은 다시 입구이다. 한 번 더 그 입구를 열어보니 어라? 아까와는 또 다른 문이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분명 출구로 향하는 지름길인 것 같은데, 또 다른 입구로 들어가니, 전혀 다른 미로가 펼쳐진다.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가 된 듯도 하고, 미궁 라비린토스에 갇혀버린 미노타우로스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이는 로브그리예가 만든 이 미로에 갇혀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그 심연의 미궁 속에서 지적 유희를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출구를 나와서도 다른 입구를 찾아보려고 기꺼이 뒤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진>은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다. 애초에 이 작품은 로브그리예가 미국의 한 대학교 프랑스어 교수의 요청을 받아, 미국 대학생들을 위해 프랑스어 문법 교육용 텍스트로 쓴 <면접>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여 새로이 펴낸 소설이다. 장을 거듭할수록 프랑스어 문법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형식이라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야기가 반복되는 부분이 종종 있어서 아, 이거 문법 교재로도 꽤 잘 쓰였겠구나 싶어진다.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을 읽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와 시점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예컨대 1장에서는 1인칭 화자가 현재시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6~7장은 3인칭 과거 시점이었다가 1인칭 현재 시점으로 바뀌기도 하고 8장에서는 아예 화자의 성별이 달라져 1인칭 시점으로 말 한다. 원문인 프랑스어로는 더 다양한 시제가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여덟 장에 걸쳐서 프랑스어의 문법 난이도가 규칙적으로 증가하고, 이야기도 문법 활용과 맞물려 전개되는 형태이다.  

아,아니- 골 아프다 시점이 달라지고 시제가 달라지는 문법 교재라니! 골 아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작품은 굉장히 재미있다. 이야기 자체가 미스터리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그래도 큰 줄기만 말해보자면, 각각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과 100쪽 남짓한 타자 원고를 남기고 한 남자, ‘시몽 르쾨르’라는 청년이 파리의 자택에서 사라진다. 그 원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구인광고를 보고 어느 허름한 창고를 찾아가 보스턴 억양의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한 여성을 만난다. 그녀가 바로 ‘진’이다. 여자는 시몽에게 자신의 조직을 위해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시하지만 정작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진의 지시를 따라 임무를 수행하고자 시몽은 파리 북부역으로 향하는데 가는 길에 계속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난데없이 나타난 소년을 따라갔더니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소년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등등 정상적인 스토리 구조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장마다 내용을 달리하면서 펼쳐진다.

진의 지령에 따라 ‘마리’와 ‘장’이라는 이름의 이 두 아이들은 시몽을 이끌고 그를 이리저리 헤매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대체 이 아이들은 누구이며, 진은 또 누구이며, 진이 속한 그 수상한 조직, 그리고 시몽이 맡은 임무는 과연 무엇일까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8장과 에필로그에 이르면 아아아니! 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에 얼이 빠져서 다시 프롤로그부터 돌아가게 된다(이렇게 해서 프랑스어문법 공부를 학생들이 절로 익히게 하려던 것일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로브그리예가 애초부터 독자를 텍스트라는 미로 속에 던져 놓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이 든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높은 망루에서 그 미로를 헤매는 독자들을 내려다보면서 껄껄껄 짓궂게 웃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 앞날개에 있는 바로 그런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진’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신비롭게(양성적으로) 만든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표지를 장식한 인물처럼 진이라는 인물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또는 마네킹인지 로봇인지 모를 모호한 캐릭터이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선글라스를 착용한 인물, 그는 진일까 시몽일까? 시몽이 보기에는 진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진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는 진이 ‘진짜 여자가 아니며, 모건 박사라는 사람이 만든, 아주 완성도 높은 전자장치에 불과하다’(118쪽)고도 한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그는 여성이 되기도 하고 남성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전자장치가 되기도 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




저렇게 웃기 있긔없긔!?



이 이야기 속의 텍스트들이 빚어내는 미로 또한 실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잇달아 발생하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들. 수수께끼에서 수수께끼로 진행하면서 해결책은 마지막에 가서야 발견하지만 그것이 정말 해답인지, 진실인지 독자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이런 현실 모두가 시몽에게는 부조리하게만 보인다. 그는 ‘모사된 현실 어딘가에 정확한 의미가 존재하리라’(76쪽)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어디에도 정확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몽은 ‘지나치는 장소들이나 마주치는 사람들과 관련한 가공의 이야기들을 되는대로 꾸며대느라 부단히’(108쪽) 애를 쓴다. ‘그러다가도 문득 자기도 확실하게는 잘 모르는 이상하고 복잡한 길을 택하도록 유도’(108쪽)하기도 한다. 이때의 시몽은 저 알랭 로브그리예로도 읽힌다. 누보로망의 새로운 소설쓰기를 시도했던 로브그리예, 그 자신의 생각이 시몽에게 투영된 것은 아닐까.

일찍이 로브그리예는 소설은 시대와 마찬가지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거나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시도를 단념하고 소설성이란 허구를 포기해야 한다”고. 소설성이란 무엇인가?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고 인물들은 그 스토리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러나 누보로망은 기존의 소설에서 작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바로 그 전지전능함에 대한 반기이기도 했다. 로브그리예가 보기에 그런 작품 속 작가들은 일관된 스토리 연결을 위해 인물의 심리를 조작하기도 했고 윤리나 사상으로 장식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소설과 달리 현실은 그런 논리로만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승전결이기보다는 기승승승승전이거나 기승전전전이기도 하고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끝나고 나서도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또 다음 날을 살아가기도 한다. 현실이 언제나 드라마가 되지는 않는다. 어디에도 완벽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상상으로 재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현실의 모사인 텍스트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쓰는 나’와 ‘읽는 나’는 또 누구인가? 완벽하게 자기를-진실을 아는 인간이 존재하는가? 의미 부여 이전에 그저 인간도 사물도 존재할 뿐이다. 행동이나 사물이 무엇이기 이전에 존재 자체로 이미 ‘그곳’에 있기. 인간(작가)의 시선 중심의 의미 부여에 대한 반기. <진>은 그런 로브그리예의 짓궂음과 삐딱함이 절정을 이룬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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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12-11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자냥 오별!
리뷰는 나중에 읽으려고요~~

잠자냥 2023-12-11 11:54   좋아요 0 | URL
<진>은 짧지만 일단 두 번 읽었습니다!
몇 년 뒤에 한 번 더 읽기로-

다락방 2023-12-11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 되게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이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은 잠자냥 님이기에 느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쩐지 저는 그 즐거움 못느끼고 어려워!! 할 것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3-12-11 12:13   좋아요 0 | URL
<질투>보다는 낫다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다락방은 아 왜, 뭐야 던져버릴지도 ㅋㅋㅋ

독서괭 2023-12-1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로에서 헤매는데 재밌다고요??? 아주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작가 할부지 개구진 미소가 호감 가네요 ㅎㅎ 프랑스어 문법이라니.. 그걸 번역했는데도 재밌다니? 신기합니다.

잠자냥 2023-12-11 14:04   좋아요 1 | URL
김녕미로공원 가보신 적 있어요? 거기 가면 사람들이 엄청 즐거워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괭 님도 미로에 빠져보아요~ ㅋㅋ

독서괭 2023-12-11 14:25   좋아요 1 | URL
제주도에 있는 거죠? 거긴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로 가서 헤매보긴 했어요. 재밌더군요 ㅋㅋㅋ

건수하 2023-12-1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쏭달쏭한게... 궁금하네요. 읽어도 재밌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잠자냥님의 글은 재밌습니다 :)

잠자냥 2023-12-11 17:39   좋아요 0 | URL
호불호가 있을 듯합니다!

Falstaff 2023-12-11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로브그리예처럼 웃기..... 없습니다.
아무리 자냥 님의 찬란한 수사라 해도 기본이 로브그리예인 것을, 그걸 어쩌겠습니까. 하여간 저도 로브그리예라는 사람 하나로 지금 관심 촉발입니다. 한 가지 의심은 비밀댓글로. ㅋㅋㅋㅋ

잠자냥 2023-12-11 17:4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맞습니다. 로브그리예가 쓴 걸 감안해야 합니다. 폴스타프 님은 재미있게 읽으실 듯.

2023-12-11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하수 2023-12-11 17:07   좋아요 1 | URL
저 조금 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읽었는데 거기에 구보 씨가 다방에서 팔스타프의 아리아 듣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때 팔스타프님 생각났는데 말입니다. ㅎㅎㅎㅎㅎ

전 프랑스 소설이 어렵던데요. 읽으면서 매번 역시 내 취향 아니야 이러는데
또 읽고 또 읽고 그러거든요. 이웃님들께 낚여서요^^
잠자냥 님 리뷰 읽고나면 다시 또 읽고 싶잖아요???
아... 다들 왜 이리 멋지신지...!

좀 전에 보였는데 비댓으로...

Falstaff 2023-12-11 17:16   좋아요 1 | URL
아오, 공개 시간이 약 10초 정도였는데 그 사이에 보셨다는 말씀이지요? ㅎㅎㅎㅎ

2023-12-11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하수 2023-12-11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 따를 듯 합니다만!!

전 자신이 없네요.
이번엔 안 낚일 수 있겠어요~~
리뷰만 즐겁게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3-12-11 17:42   좋아요 1 | URL
으음. 이건 제가 낚지 않겠습니다. 이웃 끊고 싶어지실지도.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12-11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잠자냥님한테 또 낚여야 하나요. 어려운데 재밌다라니... 작가님 외모를 보고 가수 나훈아가 생각났습니다...

잠자냥 2023-12-12 10:28   좋아요 1 | URL
ㅋㅋㅋ 낚이지 마세요. 이 책은 함부로 낚이면 저랑 이웃 끊을지도...ㅋㅋㅋㅋㅋㅋ
나훈아 아, 그러고 보니 약간? ㅋㅋㅋㅋ

자목련 2023-12-14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리뷰가 소설을 멋지게 해설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잠자냥 2023-12-14 16:50   좋아요 0 | URL
나중에 또 읽으면 또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은오 2023-12-17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잠자냥님이라는 미로를 헤매고 있어서 이미 힘드므로...... 패스!!!!!

잠자냥 2023-12-17 08:03   좋아요 1 | URL
그 미로는 사방 개방형이라 어디로든
나갈 수 있습니다.

은오 2023-12-17 08:16   좋아요 0 | URL
발이 묶였습니다.

잠자냥 2023-12-17 08:19   좋아요 0 | URL
자 여기 도끼가…

은오 2023-12-17 08:21   좋아요 0 | URL
결혼으로만 풀리는 밧줄이래요ㅋ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 혼술에서 중독까지, 결핍과 갈망을 품은 술의 맨얼굴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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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 대해 이렇게 솔직대범명석하게 쓸 수 있다니.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예민/소심/스트레스/불안/약간의 강박적 성격이 알코올의 보호막 안으로 계속 숨게 만드는 걸까…’별을 마시는 기분이다’-지난주에도 내내 별을 마셨는데 과연 끊을 수 있을까. 헌데 냅의 글은 도리어 별을 불러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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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2-10 23: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냅 언니 진짜 짱이죠? ㅠㅠㅠㅠ 🥹💕
도리어 별을 불러일으키는거 진짜요.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드링킹 읽고 술땡겼다고 했을때 드링킹 읽고 술이 땡긴다고요?! 하시는 댓글이 있었는데.... 땡기지 않습니까 진짜.. ㅋㅋㅋㅋㅋ 땡기더라고요..

잠자냥님 이제 저와의 미래를 위해 본격적으로 금주를 결심하신 건가요?!

잠자냥 2023-12-10 23:53   좋아요 3 | URL
휴… 이 별 저 별 다 마시고 싶어짐…. 코냑…. 음… 보드카는 별로지만… 데킬라도… 그만 해! ㅋㅋㅋㅋㅋ ㅠㅠ

ㅇㅇ

은오 2023-12-11 05:41   좋아요 1 | URL
👏👏👏👏👏 >_<❤️

새파랑 2023-12-1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술이 땡기는 책이네요. 전 이미 유혹에 넘어가서 그냥 안읽어도 될듯...

잠자냥 2023-12-11 00:28   좋아요 2 | URL
술파랑 읽고 싶은 책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ㅋㅋㅋㅋㅋ

<밤은 부드러워 마셔>라는 책도 최근 나왔던데 한번 읽어보시죠! ㅋㅋㅋ

새파랑 2023-12-11 06:39   좋아요 0 | URL
그냥 제목이 왠지 저의 추천책같아서 ㅋㅋㅋ

다락방 2023-12-11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읽다가 몇 장 못읽고 팔아버렸거든요. 술을 너무 마시고 싶어하는 욕망이라 해야 하나, 초반에 그런 묘사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음, 좀 짜증이 났어요. 그렇지만 이제 다시 읽어볼까요..

잠자냥 2023-12-11 09:42   좋아요 1 | URL
ㅎㅎ 저는 이 책 하고 <욕구들>이 <명랑한 은둔자>보다는 좋았어요. 이 사람은 참 외로움과 인정욕구가 자기 통제로 발현해서 온갖 중독으로 자기를 몰아갔구나... 싶다가도 그럼 나는 뭐지? 돌아보게도 되고. 정신분석하는 부모랑 산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근데 이 책 읽으면 다락방 님 와인 너무 땡길 거 같아서 위험합니다...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2-1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고 너무 극단까지 치닫는 냅에 질려서 다른 책 더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들더라고요...
너무 강렬합니다.

잠자냥 2023-12-11 10:04   좋아요 1 | URL
전 좀 이해가 가더라고요. <욕구들> 읽을 때도 이 사람은 부모가 일차적 원인이 아닐까 싶은 지점이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니 더 그런 확신이... 대단한 부모(지만 서로 애정 없는 사이)에 쌍둥이이지만 자기와는 다르게 평범&똑똑하게 잘 살아가는 자매... 거기에 늘 자식 정신분석하듯이 쳐다보는 아버지라니... 어휴. 억압과 인정욕구가 장난 아니었을 거 같긴 합니다.

필로소픽 2023-12-12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을 때 제가 표현못한 제 마음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기분었어요. 캐럴라인 냅 저자님 책 3권을 사서 읽었는데 그 중 이 책은 그냥 제 일기 같은 느낌이었어요.

잠자냥 2023-12-12 14:27   좋아요 0 | URL
네, 꼭 알코올 중독이 아니더라도 중독에 빠져본 사람들이라면 ..... 자기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 같아요.
 
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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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장애인 여성의 논픽션인지 픽션인지 경계가 모호한 소설. 해보고 싶은 게 생식이라는 것을 내가 이해하긴 어렵지만 이 또한 비장애인의 오만함일지도. 종이책 읽기가 ‘마치스모’일 수 있다는 지적은 엄청난 깨달음을 준다. 위악과 독설 냉소는 좀 불편한데…이조차도 비장애인의 오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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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09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고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종이책 부분은 공감이 되는데, 생식 부분은…. 하고 싶으면 다 해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잠자냥 2023-12-09 17:56   좋아요 2 | URL
성욕 충만한 장애여성이 장애 때문에 평생 성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다면 성욕도 여성에게는 궁극의(?) 생식욕으로 해소해보겠다…. 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저 스스로 생식욕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라 그 부분은 공감/이해가 어렵더라고요. 우생학적으로 장애인에게 불임과 낙태를 강요한 사회에 대한 조롱/반기로도 읽히고…

건수하 2023-12-09 18:29   좋아요 0 | URL
네 반발심이라면 이해해볼 만도…

청아 2023-12-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궁금했는데 잠자냥님 읽으셨군요. <에이스>읽은 덕분인지 처음에 느꼈던 불편함이 말씀하신대로 비장애인의 오만함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찜!

잠자냥 2023-12-09 23:00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비장애인의 오만함을 제대로 찔러주더라고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성이 진짜 저렇게 디폴트로 중요한 욕구라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더 강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은오 2023-12-10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었읍니다.
3별입니다.
저는 주인공의 생식에 대한 소망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그냥.. 내용의 빈약함때문에 실망.. 너무 기대에 비해 별 게 없더군요ㅜ

잠자냥 2023-12-10 20:47   좋아요 1 | URL
4별은 줄 줄 ㅋㅋㅋ 소재의 참신성(?)땜에?! ㅋㅋㅋㅋ 난 문장이 일단 너무… 음 아쿠타가와상은 가끔 너무 센세이션한 거 때문에 상 주는 거 같기도… 대표 사례 <게르마늄 라디오>….

은오 2023-12-11 05:46   좋아요 0 | URL
엇 문장 어떤 느낌이에요?! 전 읽으면서 문장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못받았는데 궁금해요!!
게르마늄 라디오 대충 보고 왔는데 어질어질....;;

잠자냥 2023-12-11 07:08   좋아요 1 | URL
아침부터 그걸 왜 봐 ㅋㅋㅋㅋㅋ
문장이 후졌습니다. 문장미 같은 거 1도 없는….

은오 2023-12-11 17:5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후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웹소설 같다고 생각한게 문장 때문이었는지도...

잠자냥 2023-12-11 19:13   좋아요 1 | URL
작품 그 안에 웹소설도 있기는 했으나… 본 작품과 소설 속 소설 문장 차이가 거의 없고…;;

은오 2023-12-11 20: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아 맞아요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2-11 21:13   좋아요 1 | URL
잠을 깨시오

은오 2023-12-12 05:24   좋아요 0 | URL
해롱헤롱 ~_~

잠자냥 2023-12-12 06:10   좋아요 1 | URL
(커피) 두 잔 사!
 
문헌학, 극소 채석장 시리즈
베르너 하마허 지음, 조효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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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가라앉을 뿐” 문헌학은 그 세계를 파낸다. 언어의 필리아- 사랑, 흠모, 감격의 경험으로서의 문헌학. 하나의 학문에 관해 이토록 치열한 사유로 이렇게나 아름다운 단상들을 남길 수 있다니. 언어와 문헌학에 관해 절로 사랑이 샘솟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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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09 1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제 잠자냥님 백자평 보면 자동으로 은오님의 댓글을 예상해보게 되는군요 ㅋㅋㅋ

잠자냥 2023-12-09 10:54   좋아요 2 | URL
서동 아니 은동요 작전 성공인가

2023-12-0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9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FLAKSUIT 2023-12-09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드려요

은오 2023-12-10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엥? 제가 잠자냥님에 대해 쓴 줄;;

잠필리아 - 사랑, 흠모, 감격의 경험으로서의 잠자냥님.
오늘도 절로 샘솟는 사랑,, 그만 샘솟거라 너무 사랑해서 힘들구나,,

잠자냥 2023-12-10 20: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잠을 깨시오. 공부가 힘들긴 하구나…..

은오 2023-12-11 05:47   좋아요 1 | URL
근데 공부보다 잠자냥님이 절 더 힘들게하십니다

잠자냥 2023-12-11 07:06   좋아요 2 | URL
강하게 키워야지!
 

은오에게 자극받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이틀 만에 다 읽어버린 어젯밤. 뜻하지 않은 생각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추억 상념 기억..... 이런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다. 흘러간 어떤 추억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스쳐지나갔다. 책을 펼친 첫날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옛 추억에 잠겼는데, 바로 이 책 29쪽에 나오는 어떤 노래 때문이었다.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1980년대 민중가요.

아놔...... 책 읽다 말고 나는 왜 이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이 노래를 대학생 시절 참 많이도 불렀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하게 부를 수 있다(이 노래가 직접 들어보고 싶은 사람은 잠자냥에게 전화하세요. 불러드리리다ㅋㅋㅋㅋ).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더 이상 벼랑 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버리고 참아 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 해방 노동 해방



노래는 기억을, 추억을 일으킨다. 정희진 선생님은 이 노래를 80년대 민중가요라고 소개하면서 이 노래가 어떤 맥락에서 불렸는지, 가사의 한계는 무엇인지 등을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신다. 나는 90년대 학번이니 그 이후 세대인데, 그 이후로도 이 노래는 학교에서 많이 불렸다. 주로 총여학생회에서. 나도 그 공간에서 처음 이 노래를 접했고, 그때 좋아했던 선배들-언니들이 이 노래를 너무나 사랑했었다. 술자리에서는 이 노래가 뭐랄까 애국가 같은 존재? 아니야, 아니야... 가장 사랑받는, 단골 레퍼토리였다.

총여학생회는 내가 대학 시절 도서관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사랑하던 공간이었다. 총여학생회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생각날 수밖에 없는 선배-언니 두 사람이 있다. 어젯밤에는 그 두 사람이 너무 보고 싶고 궁금해서 그들 생각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 한 사람은 P이다. P선배는 내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반한 사람이었다. 신입생인 나는 입학 전에 강의실을 찾아서 뭔가를 써서 내야만 했는데, 좀 늦게 학교에 도착했고, 다른 아이들은 다들 이미 제출하고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조교도 안 보이고 나 혼자 책상에 앉아 끙끙대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도와줄까요?”하면서 다가왔다. 그게 P선배였다. 선배의 도움으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와 같이 잠깐 걷던 그때 선배가 말했다. “국문과 92학번 P에요. 저는 과방보다는 주로 저기에 있어요.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와요.” 그러면서 어딘가를 가리켰는데 그곳은 유리창에 크게 ‘총여학생회’라고 쓰여 있었다. 대학을 가면 총학생회니 뭐니 데모할 생각 꿈도 꾸지 말라던 엄빠의 엄포를 들었던 나는 저기도 그 비슷한 공간인가보다 싶어서 “네....”하고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아마도 내가 저곳을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하지만 저 사람은 참 멋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총여학생회를 제 발로 찾아갔을 리는 없고, P선배와의 만남은 그 이후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지금보다 더 술을 잘 마시던 나는 동기들이 하나둘 술에 쓰러지던 순간에도 멀쩡한 정신으로 선배들이 먹이는 술을 받아먹었는데 그래도 어느 순간 술에 조금 취했는지 깐죽대는 도발적인 질문들을 했는데 그게 선배들 눈에는 귀여워 보였나 보다. H라는 이름의 한 남자 선배가 내 앞에 턱 앉더니 “얘는 내가 찜했다!”라면서 술잔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관심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시절 나는 소년 같은 외모에 크고 헐렁한 옷을 입고 다녀서(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는 바로 그 패션) 남학생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었다. 오티 때를 비롯해서 신입생들이 잔뜩 모이는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고학년 선배들이 간만에 똘똘한 남자애 들어왔다고 좋아하면서 내 앞에 왔다가....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선배는 저놈은 왜 늘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놀고 있지? 좀 괘씸하다고 생각했다고도. 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 H선배도 나중에 털어놓기를 니가 남잔 줄 알고 잘 키워보려고 했는데 아쉬웠다....만 그래도 키워보고 싶다! 뭐 이런 소리를 했었다. 그 시절 신입생을 ‘키운다’는 것은 운동권들이 포섭해서 의식화/세뇌/가스라이팅을 하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아무튼 이 H선배가 주는 술을 받아먹고 있는데 그때 P가 나타난 것이다. 둘은 92학번 동기라서 서로 말을 놓았는데, P선배가 “H야, 벌써 작업 들어갔냐, 얘는 내가 찜했는데!”라면서 쓱 내 앞에 앉았다. H선배는 볼멘소리로 “총여로 좀 그만 데려가. 과에도 애들 좀 남기자!” 뭐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사람은 친해서 그 이후로도 나를 포함해서 셋이 술을 마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되어서 나는 P선배에게 이끌려 총여학생회를 제집 드나들 듯(아니 집보다 더 자주....있었다. 이곳을 알고 나서부터 집에 안 들어가기 시작 -_-)이 하게 되었다. P선배는 그때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장이었는데, 그곳에는 P선배 말고도 내 눈을 사로잡은 또 멋진 언니가 있었으니 경제학과 93학번으로 그때 선전부장을 맡고 있던 K선배였다. 이 사람은 귀엽게 생겼는데 재미나고 웃기고 근데 또 똑똑하고 마음도 넉넉해서 푸근하고 진짜 이 선배도 너무 사랑했다. K선배가 나를 선전부 차장에 임명하면서부터 P와 K 두 사람과 총여를 비롯해 학교 근처에서 술을 먹는 날이 잦아졌다. K선배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딸들아 일어나라’였다.

두 사람이 “너 이 책 읽어봤니? 한번 읽어보지 않을래?” 하고 권했던 책 중에 하나가 안일순의 <뺏벌>이다. 나에게 <뺏벌>을 쥐어준 그 두 사람. 총여학생회에서 그렇게 나는 두 사람이 알려주는 새로운 세계로 쑥쑥 빠져 들어갔고, 그 두 사람이 스무 살의 내게 끼쳤던 영향은 돌아보니 참 지대했다. 술이면 술, 책이면 책, 게다가 내가 이 두 사람을 얼마나 동경했던지,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는 것도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 생각하면서 나도 멋있게 피워봐야지! 술을 마시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뒤따라온 P선배가 이눔아 너는 안 피우는 게 더 멋있다, 해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겠군! 생각하기도 했다. 셋이서 술을 마시던 어느 날은 새로운 두 언니들이 술자리에 오기도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꽤 예뻤었다. 저 사람 되게 예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K선배가 둘을 소개하면서 둘이 연인이라고 해서 앗........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앗! 인생 최초 레즈커플 목격! 이런 촌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 잠시 떠올렸다가 저 멀리 치워버리기도 했다). K선배가 굳이 그 이야기를 한 것은 나의 학습(?) 능력을 높이 샀던지 LGBT의 세계로 인도는 아니고, 그런 세상에 대한 공부를 시켜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90년대에는 학교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총여학생회가 있었고(물론 여대는 그냥 총학생회), 각 대학에서 LGBT 성소수자 동아리가 속속 발족하기도 했다. 집회나 시위에 나가면 무지개깃발이 각 학교 깃발들과 함께 휘날리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총여학생회는 물론, 성소수자동아리를 향해서 혐오를 발산하는 것 자체가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는 하면 안 되는, 마음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졌었다. 그러고 보면 집게손가락발작 이대남들 징징거림/떼쓰기/역차별 운운에 총여학생회가 하나둘 대학에서 자취를 감추고 혐오할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외치는 자들이 넘쳐나는 현재가 그때보다 더 퇴보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려나.

그 여름에 P선배가 물었다. “너 여름방학 때 뭐할 거니?” H선배가 농활 가자고 해서 농활 갈 거 같다고 대답했더니 “거기 말고 나랑 다른 데 가자”한다. 다른 데 어디요? 물었더니 P선배가 말했다. “기활”- “기활이요?” 선배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어 그게... 너 밖에 대자보에 붙은 사진 봤지?”하고 묻는다. 그 사진이 바로 윤금이 씨 사진이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의 ‘부록’에는 기지촌 여성과 윤금이 씨 사건이 주로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운동권 내부에서도 윤금이 씨 사진을 공개하느냐 마느냐로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 사진을 보게 된 것은 ‘공개하자’로 결론이 났고 그 이후였기 때문에 아무런 여과 없이 그 적나라한 사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캠퍼스 곳곳에 그 사진이 대자보와 함께 붙어 있었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때 주로 구호는 ‘반미자주/한미SOFA 개정/양키고홈/미군범죄 국내처벌’과 같았다. 그 어디에서도 윤금이 씨 사건을 성매매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한 관점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미국(외세)에 유린당한 민족의 딸 윤금이’가 그때의 기조였다.

지금까지도 내가 본 가장 충격적인 사진이다. 그렇게 적나라하고 끔찍한 사진은 그 이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스무 살의 나는 그 사진 앞에서, 대자보 앞에서 말문이 막힌 채 선전선동을 하려고 이런 사진을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이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그런데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아니 할 수 없다고? 저게 성(性)인가? 섹스가 저런 것인가? 저런 게 인간의 성욕/성본능이라면 안 하고 살겠다 진짜 끔찍하다… 별별 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지난 호 <정희진의 공부>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조현철 감독이 자신이 이 사진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문이 조금 막히던 그 지점을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조현철 감독은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그 사진을 봤을 텐데.......

P선배는 그 사진 속 윤금이 씨 같은 여성들- 그러니까 기지촌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 활동을 기활이라고 한다면서 그때 처음 나에게 ‘두레방’을 알려주었다. 멀지 않아, 동두천에 가는 거야, 그런데 부모님들이 알면 싫어하실 수도 있어.... 말없이 오면 안 돼. 그런 말들. 두려움. 내 마음속에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농활은 보람과 낭만,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는데 기활은 ‘두려움’이라는 단어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감정이 없었다. 그래도 P선배와 K선배가 간다고 하니까 이쪽이 더 따라가고 싶어서 순진했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엄마 나 방학 때 기활 갔다 와도 돼?” 하고 물었다. 기활이 뭐냐? 묻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했더니....... 화들짝 놀란 엄마가 “미쳤어!” 한다. 절대 가지 마, 동두천하고 이태원 그쪽은 가면 안 돼! 얘가 미쳤나봐....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뭘 한다고 할 때 반대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때는 극렬하게 반대를 하신 것이다. 농활도 못 가게 한다고 해서는 겨우 허락받고 나는 그해 여름 결국 기활 대신 농활을 떠났다.......

그때 내가 기활을 따라갔다면 어떤 경험을 했을까. 확실한 건 P선배도 K선배도 기활을 다녀오면 얼굴이 잔뜩 어두워져서 술을 유난히 더 많이 마셨다는 것이다. 두레방에서 만든 빵을 총여에서 잔뜩 가져와서 판매를 한 적도 있는데 판매는 거의 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언급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총여에서 다 껴안고 우리끼리 나눠먹거나 그냥 먹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도 빵을 잔뜩 집에 가져왔더니 엄마가 웬 빵이냐고 물었고 기지촌 여성들이 만든 빵이라고 했더니(야 거짓말을 좀 해봐....) 엄마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먹지 않은 기억이 난다. 그때도 나는 내 부모의 모순을 목격했다. 거지가 마당에 들어와서 밥 좀 달라고 했을 때 라면까지 끓여주던 엄마가 기지촌 여성이 전업하기 위해 만든 빵은 더럽다고 먹지 않다니.... 내 기준에는 그때 그 거지가 더럽다면 더 더러운데 엄마에게는 저 빵이 더 더럽구나..... 엄마도 여자인데. 엄마가 갖다버리라던 그 빵은 나랑 동생들이 다 먹어치워 버렸다.

두 선배도 기활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심정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했고 어느 날은 두레방 활동가 언니들하고 말다툼이 있었다고도 했다. 너희들은 대학생이지 않느냐 여기 사람들하곤 다른 존재다. 너희들이 그 알량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와서 뭔가를 채우고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이게 삶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말이 너무나 맞는 말이어서, 자신들의 운동이 대체 뭘 위한 운동인가 회의감을 많이 느낀 것 같다. 아마 나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딸들아 일어나라, 기지촌 활동, 윤금이 씨, 두레방 빵…. 그리고 그 두 사람, P와 K언니.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렇게 뜻밖의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P선배는 그 이후 내가 서른 초반, 선배가 삼십 대 중반이던 시절 연락이 닿아 안국동 어느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신 기억이 있다. 그때도 선배는 어느 여성 단체에서 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사랑한 선배답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필리핀 여성과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필리핀으로 떠난 것까지는 알고 있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다. 보고 싶다 엄청 많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셋이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다가 ‘딸들아 일어나라’를 불러보고 싶다. 그러면 이제는 어디선가 돌이 날아오거나 너 페미냐? 칼이 날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스무 살의 나에게 그 두 사람이 일깨워준 세상은 나를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정희진으로, 그리고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계속 이끌어 준 것이다...


P.S 이 책을 내게 선물해준 은오는 이곳에서 이 언니 저 언니들에게 좋아요, 결혼신청을 남발하고 다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저 시절의 내가 가끔 떠오르기도 한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결혼신청은커녕 “선배, 좋아해요”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 두 사람이 나에게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임을 일깨워준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안다. 은오는 그때의 나에 비하면 훨씬 더 똘똘하고 야무진 것 같다. 알라딘 서재 이곳이 총여학생회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언니들의 닮은 듯 다른 생각과 개성을 쭉쭉 흡수해서 무럭무럭 자라길. 그리고 글 좀 써. 쓰다 보면 당신이 좋아하는 냅과 고닉,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손택 언니의 장점만을 닮은 그런 글이 나오지 않을까....? (아 물론 시험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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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09 23:09   좋아요 2 | URL
<몫>은 검색해 보니 최은영 작가 단편인가 봅니다. 저는 최은영이 아니고 ㅎㅎ 그런 단편을 쓴 적이 없네요. ㅎㅎ 단편을 쓴다해도 이걸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ㅎㅎ 고대도 학생운동을 열렬히 하던 학교이긴한데…. 최은영 작가 학번쯤이라면 운동은 이미 소멸했을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023-12-10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0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12-11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이제야 정독했네요. 옆지기는 등록금 투쟁 같은 건 해본 적 있다는데 제가 대학 입학했을 때는 앞선 운동권 데모들 뿐 아니라 그런 등록금 투쟁들도 없어졌을 때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답니다. 아무래도 저는 공학을 전공해서였기도 했고 여자 선배들 자체가 귀했습니다. 맨날 남자 선배들만 계속 달라붙어서 짜증났던 기억이ㅋㅋㅋ
잠자냥님의 이런 경험이 부럽고 멋진 선배들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 선배들을 만나실 수 있다면 그 후기가 궁금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건수하 2023-12-11 17:20   좋아요 1 | URL
등록금 투쟁은 꽤 나중까지도 있지 않았던가요...? 화가님 제 생각보다 많이 젊으신가 봅니다.
그동안 오해해서 죄송... ==33

거리의화가 2023-12-11 17:30   좋아요 1 | URL
등록금 투쟁이 소소하게 있긴 했을텐데 4년제 대학이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등록금 비용은 낮아서인지 큰 투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등록금도 저는 힘들게 내며 다니긴 했지만요.

잠자냥 2023-12-11 17: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건수하 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등록금투쟁은 2000년대 학번들도 하긴 하더군요(제 동생들에게 전해들음). 맨날 남자 선배들이 달라붙은 이야기 좀 해주세요.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12-11 17:39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저도 사실 등록금투쟁에 참여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사실 막연히 학생운동은 이념적인 것이라 생각했던지라 좀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랬던 제가 너무 삶을 몰랐다고 생각하지만..

거리의화가 2023-12-11 17:41   좋아요 1 | URL
ㅋㅋ 남자 선배들하고 하는 일은 뻔하지 않나요. 말술 잔치죠뭐! 자기들 술 먹는데 왜 맨날 나를 불러대는건지... 저는 집안이 엄해서 대학 때 처음 들어가서 술을 먹었는데 선배들이 몇 번 먹여보더니 ‘이 놈 봐라!‘ 하면서 저를 그다음부터 끌고 다녔다는! 대학 때는 술과 알바 밖에 기억나는 게 없어요ㅠㅠㅋㅋㅋ

건수하 2023-12-11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 여기에 댓글을 안 달았었네요... 윤금이 씨 사건 사진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도 화가님이 위에 쓰신 것처럼 여성 선배도 별로 없고 운동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때라...
친분이 있는 선배는 다 NL 계열인데 그쪽은 성향상 안 맞았었네요.
잠자냥님 후배들도 엄청 따랐겠는데요.

희진샘 책이 궁금해집니다. 올해 안에 펼 수 있을 것인가...

잠자냥 2023-12-11 17:38   좋아요 2 | URL
ㅋㅋ 저희 학교가 그 NL이었습니다. 희진쌤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심(기활 자체가 NL학교 위주로 이뤄졌다고) 물론 저도 제 개인 성향은 PD쪽이긴 했습니다.

올해 안에 펼칠 것인가 건수하!?

건수하 2023-12-12 15:46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북토크 가려면 그 전에 펴긴 해야겠는데요....샘에 대한 예의상...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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