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여름 1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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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그런 소설이려니 했는데, 읽으면서 홀딱 반했다. 첫사랑, 장난처럼 다가온 그 다음 사랑 또는 우정, 그리고 아, 진짜 사랑인가 싶은 순간의 그 처절한 배신. 나도 모르게 설레고 긴장하고 낄낄 웃다가 눈물까지 난다. 절대 세상에 지지마, 캐머런! 응원하고 싶어진다. 얼른 2권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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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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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축축 처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책도 별 재미가 없다. 습관처럼 읽고는 있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감동어린 이야기가 책 속에 펼쳐져도, 그건 그저 책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만 같다. 기분이 처지는 날에는 인생 자체에 회의가 밀려온다. 어차피 이렇게 천천히 늙어가며 죽어서 무덤으로 갈 인생,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삶의 의미를 모르겠는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

아룬다티 로이, 그 이름만 보고 이 책을 사두었다. 그이의 신간 소식, 그것도 소설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컸다. 사두고 몇 주 그냥 두었던 책을 손에 들고 몇 장 읽어 나가는데, 온갖 고민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잊힌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 요즘은 책도 재미없네’했던 생각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다잡고 이 작품을 읽게 된다. 그저 이렇게 재미있다고만 느끼며 흘려보낼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고, 그 어느 순간 아, 정말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이…….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첫 장부터 의미심장하다. <지복의 성자>를 다 읽은 이라면 대부분은 처음 두세 쪽이 얼마나 잘 쓰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서커스 없는 광대, 궁전 없는 여왕이라고 헐뜯을 때에도 그 상처가 그녀의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불어가게 했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음악을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로 삼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곧 그녀의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영어를 아는 한 남자가 그녀 이름을 거꾸로 하면 ‘마즈누Majnu’가 된다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영어에도 라일라와 마즈누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서 마즈누는 로미오, 라일라는 줄리엣이라고 그녀에게 알려준다.
 
다음에 만났을 때 영어를 아는 남자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말한다. 그녀 이름을 거꾸로 쓰면 ‘무즈나Mujna’가 되고 그건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난 다 되니까요. 난 로미와 줄리이고, 라일라와 마즈누죠. 그리고 무즈나도 돼요. 안 될 게 뭐예요? 내 이름이 안줌이라고 누가 그래요? 난 안줌이 아니라 안주만(모임 집합이라는 뜻)이에요. 난 메필(음악과 춤이 있는 소규모 연회)에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임.”(13~14쪽)이라고 말한다.

그녀 이름에 얽힌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지복의 성자>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단 몇 문장에 압축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감탄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 이름에 얽힌 말들이 그냥 흘릴 수 없으리라는 걸 예감했다고나 해야 할까.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아가며 궁전 없는 왕비, 서커스 없는 광대이며, 로미오가 될 수도 있고 줄리엣이 될 수도 있는 사람,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속삭임으로 자신의 상처를 바람에 씻겨낸 사람, 그녀의 이름은 ‘안줌’이다. 그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자 아무도 아닌 사람. 그녀는 자신을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

의문은 곧 풀린다. 안줌은 이른바 ‘히즈라’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동시에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제3의 성. 힌두어로 그런 이들을 ‘히즈라’라 부른다. 안줌은 인도의 올드델리에서 칭기즈칸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무슬림의 넷째 아이로 태어난다. 아들의 탄생 소식을 접한 안줌의 부모는 더할 수 없이 행복감에 젖는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안줌의 엄마는 아들의 남성 성기 아래 여성 성기가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갖고 싶었던 안줌의 아버지는 아들의 여성적인 성향 따위는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으며 아들 안줌, 그러니까 그녀의 어린 시절 이름인 ‘아프타브’를 아들로 키우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아프타브는 아버지가 칭기즈칸처럼 용사였던 선조들이 전장에서 보인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오히려 칭기즈칸이 아름다운 아내 보르테 카툰과 결혼하게 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칭기즈칸 같은 용사보다는 보르테 카툰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다가 우연히 시장에서 여장을 한 히즈라를 보고 그녀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마침내 열다섯 살에 아프타브는 그의 가족이 수세기 동안 살아온 터전에서 겨우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꿈의 집’이라는 의미의 콰브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안줌은 남성 성기를 제거하고 호르몬제를 복용하면서 자신이 꿈꾸던 ‘여성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몇 년이 흘러 안줌은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히즈라가 된다. 영화제작자들이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고 했고, NGO단체들도 그녀를 독점하려 한다.

얼핏 보기에, 비록 ‘땜질된 몸’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안줌은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그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면 나름 행복한 인생일 것 같다. 그러나 삶이 늘 그렇듯이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콰브가에서 삼십년 넘게 살던 그녀가 마흔 여섯이라는 나이에 문득 그곳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두니야(세상)로 돌아가서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되고 싶다고……. 어쩌면 안줌은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녀 앞에 우연히 한 아이가 나타난다. 사원 계단에서 울고 있는 세살쯤 된 아이 ‘자이나브’를 발견하고 안줌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아이의 엄마가 된다. 자이나브는 안줌의 유일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엄마가 되고 싶다던 소망도 이뤄졌는데, 안줌은 왜 무덤가에서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으로 태어난 안줌, 그리고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재탄생, 그녀가 꿈꾸던 엄마로서의 삶의 시작 등등은 이 작품의 초반에 해당한다. 앞으로 안줌이 만나게 될 다양한 사람들과 그녀와 얽히는 ‘틸로’라는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까지 교차하면 <지복의 성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인도 사회의 축소판으로, 그들의 삶을 통해 그 세계가 지닌 온갖 모순과 고통, 처참한 현실을 더 없이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책을 읽는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구라자트 학살, 카슈미르 분쟁 등을 검색해봤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카스트제도, 빈부격차 등등 얼핏 알고만 있던 인도의 복잡한 현실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 안줌의 처지는 어떻게 보면 그 몸 자체로 인도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힌두교 안의 이슬람, 인도 안의 이슬람교도, 또는 카슈미르인. 그 모든 것들이 그 한 몸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과연 끝이 날 수 없는 것일까? 신이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 보기 위해 히즈라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히즈라와 같은 인도는 정녕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여기서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결국엔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39쪽)


구라자트 학살을 몸소 겪고, 그 충격으로 콰브가를 떠나 공동묘지에서 폐인처럼 살던 안줌, 나무처럼 살아가던 그녀의 변화에서 그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안줌은 슬픔에서 벗어나 무덤들 사이에 방을 꾸며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의 ‘잔나트’. 죽은 이들이 사는 공간인 묘지가 삶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곳은 안줌만이 아니라 모든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된다.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다. 게다가 매춘부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 받아주지 않는 여자의 시신을 목욕시켜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곳은 게스트하우스 겸 장례식장도 된다. 산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까지 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지켜보노라면 이곳이 무덤인지, 저곳- 그러니까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고 계급과 그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저 인도의 ‘두니야’가 무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 ‘두니야’에 비하면 ‘만신창이가 된 묘지의 천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피수호자들을 보살피며, 두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어 이승의 영혼들과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처럼 어울릴 수 있게’ 해준 이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는 진정으로 축복받은 천국 같은 공간이 아닐까. 그래서 이곳에서는 ‘왠지 모든 게 조금은 더 견디기 쉬워’진다’(522쪽)

한때 안줌의 엄마가 어린 아들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의지했던 신, 그리고 이제는 안줌이 섬기는 지복의 신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페르시아 출신의 성인(聖人)이다. 그는 일생의 사랑을 찾아 인도 델리로 온 뒤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소년을 향한 사랑의 시를 읊는다.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인 그. 그 신의 모습에서 어느덧 안줌의 모습이 떠오른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그 모든 ‘정상’을 벗어난 이들을 산 자와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온 마음으로 껴안는 안줌. 그녀가 바로 21세기 지복의 신 ‘사르마드’가 아닐까. 하나의 종교, 하나의 성별만을 고집하는 경직된 인도에 이 안줌 같은 존재야 말로 답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고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안줌의 포용성 안에 인도의 또 하나의 상처라고도 할 수 있는 ‘우다야’같은 아기도 새로운 해가 떠오르듯이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지복의 성자>는 내게 ‘잔나트 게스트하우스’같은 존재가 되었다. 삶에 조금 지쳤을 때 안줌 같은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껴안아주고 괜찮다고 토닥여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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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저도 지금 책장에서 대기중입니다. 이 글 읽으니 기대 만빵입니다!

잠자냥 2020-03-18 14:25   좋아요 0 | URL
으앗, 이 글은 책 다 읽고 읽으시지... ㅎㅎㅎ 아무튼 아룬다티 로이는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 같습니다.

다락방 2020-03-18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읽는 중입니다, 잠자냥 님!!

잠자냥 2020-03-18 14:26   좋아요 0 | URL
오, 현명하게 이 글은 안 읽으셨겠지요? ㅎㅎㅎ 책 재미나게 읽으세요.

다락방 2020-03-18 14:43   좋아요 0 | URL
제가 딱히 현명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만?
잠자냥 님 리뷰를 제가 어떻게 안읽겠습니까. 다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0-03-18 14:51   좋아요 0 | URL
오... 이런 제 글을 안 읽고 책을 읽으셨다면 더 재미나게 읽으실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치만 제가 이 글에 쓰지 않은 이야기도 훨~~~씬 많으니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ㅎㅎㅎ

다락방 2020-03-18 14:59   좋아요 1 | URL
네, 잠자냥 님 리뷰에 있는 이야기는 이미 제가 다 읽은 이야기들이더라고요. 뭐, 그게 아니어도 저는 괜찮습니다만. 으하하하하하하하하.
 
광기와 치유의 책
레지나 오멜버니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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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기와 치유의 책>의 작가 ‘레지나 오멜버니’의 이름은 처음 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까닭은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의사로 일하며 의학서를 집필하던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흔치 않던 시대, 특히 의술을 펼치는 여성은 마녀로 몰리던 시대에 두려움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의사 가브리엘라의 이야기’라는 이 책의 소개 문장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정작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 실망해서 100자평도 가혹하게(?) 남겼다. 알라딘 평가에 별 셋을 줬는데 그랬더니 이 책의 평점은 6점으로 나오더라? 나만 100자평을 남겨서 그런 것 같다. 사실 6점까지는 아닌데... 이 책에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점은 ‘여성이 사회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시대에 의사로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가브리엘라’ 그녀의 당찬 모습을 바란 것이다. 그래, 정말 그녀는 ‘두려움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진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계속 걸어, 걷고 또 걸어...... 아빠 찾아 삼만리야.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휴.... 얘 또 걷고 있네, 그만 좀 걷고 뭔가 환자를 돌보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16세기 말 베네치아, 가브리엘라는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여성 의사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환자들을 돌봤고 대학에서 정식으로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 무렵 여성의 결혼 적령기라는 열여섯 살을 훌쩍 넘어 서른 살이 되었지만, 연애나 결혼과는 담을 쌓고 스스로 ‘의사라는 직업과 결혼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오직 아버지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질병백과>라는 책을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편지 한 장만 딸랑 남긴 채 집을 나가버리고 10년 째 종적을 감춘다. 그 뒤로 간간이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하지만 2년 전부터 그마저도 끊긴다. 그렇다면 가브리엘라 혼자 이 마을에서 의사 노릇하면서 지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텐데, 그게 불가능하다. 마을의 의사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에서는 멘토인 아버지 없이는 ‘여자’인 가브리엘라에게 의사로서의 회원 자격을 더 이상 유지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해 온다. 이것도 너무 오래 봐준 것이라고, 알다시피, 여의사는 아예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가브리엘라는 당연히 길드에 항의한다. 지금까지 자기가 돌보던 환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자기의 여자 환자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길드에서는 남자 의사들이 돌보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거기에 가브리엘라는 ‘여자들은 대게 여자 의사를 선호한다’고, ‘아무리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해도 쓸 데 없이 캐묻기 좋아하는 남자 의사보다 여자 의사가 진찰해주길’(26쪽) 원한다고 항명한다. 그러나 길드는 꿈쩍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떠난 뒤 길드는 가브리엘라에게 여자 환자만 진료하도록 제한을 두더니 이윽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의사협회에서 제명해버린 것이다. 이런 가브리엘라에게 선택권은 없다. 의사로서 다시 환자들을 돌보려면 아버지를 찾아서 집으로 모셔와야만 한다.

이리하여, 가브리엘라는 유모나 다름없는 ‘올미나’와 그의 남편 ‘로렌초’ 두 사람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은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올미나와 로렌초가 함께한다 하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게다가 약초를 다루거나 의학 지식이 있는 여자는 더 위험하다. 그런 여성은 마녀로 몰아서 처형하는 곳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위험 속에 가브리엘라와 올미나는 남장을 하고 로렌초와 함께 남자 셋이 여행을 하는 것처럼 위장한 채 ‘아빠 찾아 삼만리’를 계속 해나간다. 홍수 때문에 불어난 호수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면서 이탈리아를 지나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거쳐 모로코까지 여행을 이어가지만, 아버지의 흔적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틈틈이 가브리엘라는 <질병백과> 원고를 쓰면서 아버지를 만날 그날만을 간절히 바란다. 과연 아버지를 만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고, 가브리엘라는 의사로 다시 활동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 여성 버전쯤을 기대한 것 같다. 여의사를 인정하지 않은 시대에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소통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훌륭한 의사로 자기만의 길을 당당히 나아간 그런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을. 그런데 이 작품은 의사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와야만 했고, 그 여정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기대에서 일단 어긋났다. 게다가 아버지는 왜 집을 나갔는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버지의 편지에 등장한 사람들을 만나서 아버지 상태를 물어보면 뭔가 병을 앓고 있었고,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 또는 ‘달의 영향을 받아 미쳐가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마저도 조금 생뚱맞다. 한편, 가브리엘라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남편의 이런 증세를 눈치 챈 것 같고, 이런 까닭으로 부부 사이는 냉랭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되어 가브리엘라에게도 그런 증상이 나타나나 조금 기대(?)했는데, 그건 또 아니라서 맥이 빠졌다. 결국 아버지의 실종과 정신병은 가브리엘라가 길을 떠나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설정이 또 실망을 준다.

가브리엘라 어머니 캐릭터도 영 못마땅하다. 아버지가 우울증 환자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신경증을 앓는 여성 같다. 딸과 아버지 사이가 좋은 데 비해 어머니와 가브리엘라는 서로를 못 견뎌 한다. 어머니는 딸에게 “네가 편안한 삶을 누리길 바랄 뿐이야. 가브리엘라, 아이도 낳고, 왜 괜찮은 의사 하나를 골라서 결혼하지 않는 거니? 왜 꼭 네가 의사가 되겠다고 그래?” 말하며 딸이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남편을 의학에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뿐인 딸마저 의학에 미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못마땅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남편이나 딸에 대한 미움이 조금 지나칠 정도이다. 자기의 온갖 불만을 이 두 사람에게 쏟아붓고 있다고나 할까.


너의 이 광증이, 네가 만날 읽어대는 그 책들, 젊은 여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신체 부위가 버젓이 나오다니!) 책들 때문에 생긴 거라고 내가 믿는 그 광증이 네 분별력을 지워버렸어. 나는 그런 종류의 집착을 전에 네 아버지한테서도 본 적 있단다. 그것 때문에 그이는 자기 연구에 부합하지 않는 거라면 전부 내쳐버렸지. 남자가 그러면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여자가 그러면 흉할 뿐이란다. -가브리엘라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 (185쪽)


우울증을 앓는 아버지와 히스테릭한 어머니, 그리고 이런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삶이 감옥과도 같아,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 딸. 이런 설정은 얼핏 이 가족에 뭔가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하게도 하지만 그마저도 아니어서 허무하다. 히스테리한 어머니의 성격도 가브리엘라가 길을 떠나게 만드는 데 거드는 역할을 할 뿐이다. 거기에 그치고 만다. 게다가 나는 엘렉트라콤플렉스나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비슷한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광기와 치유의 책> 이 작품은 비록 의사인 아버지를 찾아야만 의사로서 다시 활동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는 해도, 가브리엘라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비해 한없이 밀착되어 있다. 그 둘이 아무리 ‘학문’으로 통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굳이 어머니를 그 두 사람과 적대적인 인물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엄마와 딸은 왜 친밀하게 서로를 지지하는 사이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든다.


“여기 사람들은 여자 의사를 곱게 보지 않아요. 당신이 어디 출신이고, 당신 아버지가 누구든 간에요. 그리고 데어 슈피탈은 방문할 수 없어요. 그곳의 돈 많은 의사들이 우리를 겁내거든요. 우리가 아는 게 좀 있잖아요. 근데 뭘 아는 여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121쪽)


위의 인용구절만 보면 다분히 페미니즘적인 시선이다. ‘뭘 아는 여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니, 이 구절만이 아니라, 이 작품 자체가 페미니즘으로 읽힐 수 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금지된 시대에 의사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라니!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곳곳에서 여성주의 시각이 담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떠난 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한 가브리엘라는 요즘 시대로 말하면 탈코르셋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남장을 한 뒤로는 여자 옷의 불편한 점을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보디스와 치마를 안 입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음껏 숨 쉬고 걸을 수 있었다.’ 등등.

그러나, 이 사람 가브리엘라는 모순덩어리이다. 연애와 결혼을 담 쌓고 살더니 여행길에서 만난 남자들하고 너무 금사빠가 아닌가. 조금만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으면 막 설레고 혼자 사랑을 키워나간다. 지금까지 의사라는 직업과 결혼한 셈 쳤다더니, 아버지 찾아 길을 떠나는 바람에 환자 돌볼 일이 별로 없어지니까 이제 연애로 눈이 돌아간 것인가? 그러다가 결국 ‘해미시’라는 남자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결말!!!! 이것은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늙수그레한 교수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일만큼이나 못마땅했다. 의사라는 직업하고 결혼했다더니! 막판에는 해미시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 왜 모든 여자의 행복은 결혼과 아이 낳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놈의 로맨스!! 로맨스!!!! 게다가 너무 웃긴 게 무슨 슈퍼 울트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인지. 가브리엘라와 해미시는 딱 한 번, 그것도 도서관에서(여보세요들!) 짧게 사랑을 나눴을 뿐이데 그때 애가 생긴 게 아닌가........ 내가 뭐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서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니까. 응? 나참.

하여간 작가가 혼돈 속에서 집필했는지 가브리엘라가 혼돈 속에서 걸어갔는지, 의사로서 당당히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가 되다만 이야기, 아니 길은 열심히 ‘걸어가기는’한 이야기. 진짜 열심히 걷고 걸어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를 얻어 돌아온 이야기. 그게 바로 <광기와 치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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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0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고 걸어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를 얻어 돌아온 이야기라니.... 아, 맥빠지네요. 결국 종착지는 남자여야 하는건지...
책에 실망한 잠자냥 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실망이 담긴 리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훗.

잠자냥 2020-03-10 12:50   좋아요 0 | URL
뜨아아.. 조가 늙수그레 교수랑 결혼했을 때 책 집어던진 그럼 심정. ㅎㅎ 물론 조를 아끼듯이 가브리엘라를 아끼지는 않았지만 암튼 참으로 실망스러운 결말이었습니다(아 이거 스포일러 표시했어야 하는데!) 암튼 작가의 데뷔작이라 그러려니 하기로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왜 여성주의 시선을 가장했는지 -_- 고구마 10개 먹은 기분이에요.

2020-03-11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03-17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뭐랄까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는
가 봅니다. 잠자냥님의 충실한
리뷰 덕분에 굳이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
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개는 흥미로운데 그놈의 얼토
당토 않은 로맨스가 망친 게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잠자냥 2020-03-18 09: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용두사미입니다. -_-;;
로맨스는 그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데, 아버지 찾아다니면서 이렇다할 사건이 없으니까 지루하고 그렇더라고요...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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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다티 로이 이름만 믿고 산 책이라 이런 내용인 줄 전혀 몰랐다. ‘히즈라(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이야기이자 그녀와 얽힌 수많은 이들, 그리고 인도 이야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하고 너무나도 아름답다. 한마디로 대단하다. 아직 3월이지만 이 책은 내게 올해의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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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1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다 잠시 한눈을 파느라
접어 두었었는데... 다시 집어야
하나요.

잠자냥 2020-03-18 09:27   좋아요 0 | URL
ㅎㅎ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언젠간 읽으시겠지요. ㅎㅎ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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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디테일하게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인간들, 그런 이야기라서 읽고 있으면 좀 짜증이 치민다. 이런 인간들 보려고 문학을 왜 읽고 있지 싶어진달까. 잘 읽히나 쉽게 휘발될 이야기들. 그나마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이 매우 떨어지는 ‘장우’같은 인물이 나오는 ‘다소 낮음’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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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08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로 그럴 것 같아서 이 책을 안읽고 있어요. 그러니까 문학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아서!!

잠자냥 2020-03-08 01:37   좋아요 0 | URL
와우 그런데 무려 18쇄나 찍었더라고요! 저는 사실 창비 굿즈 받으려고 고르고 고르다 되팔기해도 잘 팔릴 책 사서 읽었는데 ㅎㅎㅎ (냄비받침 이쁜 거 주더라고요 ㅋㅋㅋ) 암튼 냄비받침 예쁜 거 받은 거로 만족... 응? ㅋㅋㅋ

봄밤 2020-03-08 0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을 이해하게 하거나 아니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문학의 할 일이라 생각하는데 이건 너무 소모적이기만 한 글인 것 같아서 하나만 읽고 안 읽고 있네요. 무언가 얻어가는 게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잠자냥 2020-03-08 01:39   좋아요 0 | URL
좋아하고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인물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인물들을 보고 대다수가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공감했다고 하니 그 또한 뭔가 씁쓸합니다. ㅎㅎㅎ

케이 2020-03-09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요즘 한국에서 나온 소설을 읽으면 내가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사는 현실부적응자인가 싶어져요. 너무 공감이 안가더라고요. 이 책 하도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길래 볼까 말까 했는데 흠... 고민 좀 해봐야겠네요. (그런데 냄비받침 때문에 책 사신거 왠지 귀엽습니다..ㅋㅋㅋ 냄비받침을 샀더니 책이 따라온 격?)

잠자냥 2020-03-09 14:22   좋아요 2 | URL
아마 이 책 읽으신다면 저처럼 <다소 낮음>이라는 작품이 그나마 마음에 남으실 것 같아요. 이 책에서 가장 계산적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거든요. ㅋㅋㅋㅋ 암튼 이 작품에 그토록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이 그만큼 살기 퍽퍽하다는 증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전 알라딘 적립금 모아놓은 게 있어서 이 책을 냄비받침을 위한 거라 생각하고 그 적립금으로 샀어요. 현금주고 사라고 했다면... 음.... 하하하;;; 이 책은 중고 가격도 높게 책정된 편이라 바로 팔 거고요; 이제 제게 남은 건 냄비받침. ㅋㅋ 이 냄비받침인데 예쁘지 않아요?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03638

케이 2020-03-09 14:37   좋아요 1 | URL
오옷 저 냄비 받침 제가 예전에 사려고 했던 터키에서 만든 코스터랑 문양이 비슷하네요!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