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교회 대한민국 권력 비판 3부작
김진호 외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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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흥미진진하게(그러나 열 받아가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 왜 태극기집회에 십자가와 성조기가 등장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한국 개신교는 어쩌다가 이땅의 민주주의가 퇴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적폐 세력이 되었는지도. 1장(강남순)과 3장(한홍구)이 특히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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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글은 아프다. 서걱서걱 부서질 듯 건조하기만 한데 당신의 글은 왜 그다지도 아픈가? 당신의 글은 투박하고 거칠다. 때로는 초등학생이 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당신의 글은 한없이 아프고 참혹하리만치 어두운데도 계속 찾아 읽게 된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인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어제> <아무튼>과 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들던 생각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 작품에 왜 그렇게 마니아층이 형성되었는지도 이해할 만했다. 그 책을 읽은 뒤로 나 또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은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가장 긴 편으로 나머지는 대부분 단편 모음집이거나, 장편이라고 해도 그 분량이 매우 짧다. 그의 글을 마음껏 읽고 싶다는,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던 참에 <문맹>을 읽게 되었다. <문맹> 또한 매우 짧다. 때문에 읽고 난 뒤에도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빚어낸 문장 속에서 한없이 헤엄치고 싶은, 문장 위를 계속 떠다니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삶과 아픔, 그 안에서 비롯된 쓰기와 읽기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의 글이 왜 그토록 아픈지, 그리고 때로는 초등학생이 쓴 듯한 문장임에도 왜 그토록 아름다운 울림을 주는지.



나는 읽는다. 그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 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네 살이다. 전쟁이 막 시작됐다. (9쪽)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 병 아닌 병에 걸린다. 독서라는 불치의 병. ‘아주 어린 나이에, 알아챌 새도 없이, 완전히 우연한 방식으로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아고타 크리스토프 또한 그 병으로 인해 비난이나 경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의 독서 병은 대개의 경우 비난이나 경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매일 읽기만 해.”
 “쟤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저건 소일거리 중에서도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야.”
 “저건 게으른 거지.”
그리고 특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쟤는 ......을 하는 대신에 읽기만 해.” (13쪽)


독서라는 이 불치의 병에 걸린 이들은 또한 거의가 무언가를 끼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병 까지 더불어 얻게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예외는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이때부터 서서히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안식이자 위로가 된다.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린 동생을 놀리는 거짓말을 지어내서는 동생을 울리곤 한다. 열네 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의 글쓰기는 더욱 내밀해지고, 고통을 어루만지는 이 세상의 가장 큰 위로가 된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34쪽).



침묵이 강요된 이 시간 동안, 나는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을 쓰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아무도 읽지 못하게끔 비밀 문자를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일기에 나의 불행 나의 고통, 나의 슬픔, 나를 밤마다 침대에서 소리 죽여 울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적는다. 나는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이제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의 집을 잃었기 때문에 슬프다. 무엇보다 나는 자유를 잃었기 때문에 슬프다. (32쪽)


조국인 헝가리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의 글은 어떤 색채를 지니게 되었을까? 헝가리에서 살아갔더라도 아마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으리라. 그런데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게 되면서 그의 글은 분명 한없이 어두워진다. 헝가리에서 모국어로 글을 썼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82쪽)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자신이 확신하듯이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그는 글을 썼으리라.

조국을 떠난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에 비밀 작문 노트뿐만 아니라 처음 쓴 시들도 놓고 왔으며 그곳에 ‘오빠와 남동생을, 부모님을, 미리 알려주지도 못하고 잘 있으라거나 또 보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두고’ 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1956년 11월 말의 어느 날,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그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89~90쪽)


그 뒤로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는 삶,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그런 삶이 스위스에서 시작된다. 너무 안전해서 오히려 서글픈 삶. 그런 삶 속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시계 공장에 나가 일하면서 시를 쓴다. 그런 생활에서 나오는 글들이라면 무미건조하고 거칠며 투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그 글에는 뭔가를 간절히 그리는, 노스탤지어가 한없이 묻어나오는 애잔한 슬픔이 새겨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실과 어머니의 부엌에서 느꼈던 그 냄새들이 한없이 그리워는 그런 글.



아버지의 교실에서는 분필, 잉크, 종이, 고요함, 침묵, 눈(雪)의 냄새가, 여름에도 풍긴다. 어머니의 넓은 부엌에서는 도살된 짐승, 삶은 고기, 우유, 잼, 빵, 젖은 빨래, 아기의 오줌, 부산함, 시끄러움, 여름 열기의 냄새가, 겨울에도 난다. (19쪽)


뜻하지 않게 조국을 떠나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나라의 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살아간 사람.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53쪽)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이 언어가 그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97쪽)

망명자로서의 경험과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날카로운 펜으로 건조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그 자신이 당한 시련과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어제>처럼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절망적이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이 그러했기에 그 세계관이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됐으리라. 그런데도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있다. 그가 쓴 글들이 한없이 매력적인 까닭은 바로 그 단순하고 명징한 언어로 삶의 고통을, 그 진실을 전하기 때문이 아닐까. <문맹>에는 그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읽기와 쓰기, 망명자로서의 삶의 기록이 또 한 번 진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글은 또 한 번 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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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30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30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30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0-1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잠자냥님 굿뜨!!!!

잠자냥 2018-10-11 10:59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제 서재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관련 글을 읽으셨나 봅니다. ㅎㅎ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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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에도 슬럼프가 있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내가 그랬다. 책을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읽기는 읽는데, 뭘 읽어도 그다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다른 때 읽었다면 분명 무척 좋았을 작품도 심드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뭔가를 읽고 글로 남겨두는 일도 시들해졌다. 그나마 최소한의 기록을 위해서 짧게 끼적대는 정도랄까.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거의 한 달 넘게 그랬던 것 같다.

그때 토니 모리슨의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를 읽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지난 봄 사두고는 과연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 없었던 이 책.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 이 무덤덤한 독서 생활에서 조금 벗어날까 싶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새로운 작품’ 그렇다. 고백하건데, 나는 토리 모리슨의 작품을 이제야 처음 읽는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인데도 토니 모리슨 그 이름과는 인연이 쉽사리 닿지 않았다.

책꽂이에 토니 모리슨의 작품이 몇 권 있는데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는 읽을 작가 정도로만 생각했다. 흑인 문제, 그러니까 인종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뻔한(?) 전개와 예측 가능한 내용이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편견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그래도 왠지 죽기 전에는 꼭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책은 사두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참 재미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2015년에 발표된, 토니 모리슨의 가장 최신작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작가가 쓴 가장 최신작. 그것도 토니 모리슨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21세기를 배경으로 한단다. 그런 작품으로 나는 처음 토니 모리슨을 만난 것이다.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내가 하는 말에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홀딱 반했다. 첫 페이지부터 완전히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흑인의 삶, 그러니까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그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일단 문장이 감각적이다. 쉽게 읽히고 몰입도가 대단하다. 화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이라 그런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 같다. 화자 또한 여럿이다. ‘스위트니스’, ‘브라이드’, ‘브루클린’, ‘소피아’, ‘레인’ 등등. 물론 그 가운데 주요 화자는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로 둘은 모녀 사이이다. 그런데 어쩐지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스위트니스는 딸인 브라이드를 낳고 경악한다. 아이는 정말로 새카맸다. 한밤중 같은 검은색. 스위트니스 자신은 피부색도 연하고 머리도 그다지 곱슬거리지 않는데, 자신의 딸은 그와 달리 완벽하게 ‘검은’ 것이다. 자신도 흑인이면서 연한 피부 빛깔 때문에 흑인임을 그다지 인식하지 않고 살던 그 앞에 검은 핏덩어리가 태어났고, 그런 아이를 보자 그녀는 미쳐버릴 지경이 된다. 실제로 잠깐 미치기도 해서 ‘한 번-겨우 몇 초였지만- 아이 얼굴에 담요를 대고 누르는’(16쪽) 행동까지 하게 된다. 브라이드는 ‘끔찍한 색으로 태어’났으며 그 때문에 브라이드의 아버지마저 아내와 딸을 버린 채 떠나고 만다. 그토록 까만 아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받은 자식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 두 모녀 사이가 순탄할 리는 없다. 아마도 이렇게 엄마에게 상처 받으며 자란 딸 브라이드가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 온갖 풍파에 시달리며 가정과 사회에서 이중으로 고통 받는 삶을 사는가 보구나…. 라고 예상할 즈음,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성인이 된 브라이드는 자신의 검은 피부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고 있다. 뜻밖의 전개인데, 이보다 더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뜻밖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의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 행위 같아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브라이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은 그녀가 검다고 손가락질 한 사회가 아니라 그녀가 검다고 만지기조차 꺼려했던 그녀의 엄마, 같은 흑인인(그렇지만 연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지닌) 스위트니스, 바로 그녀가 아닐까. 엄마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그런 엄마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서 엄마를 위해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 브라이드. 그리고 그 일은 그녀 인생 전반에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된다.

스위트니스와 브라이드 두 모녀 말고도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브라이드의 남자 친구인 부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부커 또한 처음에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의 숨겨진 상처가 드러나고 그 상처가 어떻게 브라이드의 삶과 얽히게 되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그 상처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또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치유하게 되는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브라이드 말고도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아이들의 피부 색깔은 상관없다. 그저 어리고 약하고 힘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어떤 의미로든 평생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새 생명, 아이는 또 태어난다. 이 책의 거의 끝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 새로운 삶, 악이나 병에 면역이 된, 납치, 구타, 강간, 인종차별, 모욕, 상처, 자기혐오, 방기로부터 보호받는, 오류가 없는, 오직 선(善) 뿐인, 노여움은 빠진.’ (237쪽). 그런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241쪽)라고 끝맺는 이 작품. 아마도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희망과 바람이 여실하게 담긴 구절이 아닐까.

이 작품은 상처투성이 인간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으로 끝난다. 물론 그렇다고 대책 없이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모두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도 볼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작게나마 치유 받는다. 브라이드 그녀 자신이 ‘레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검은 여인 브라이드를 보고 싶어 하는 ‘레인’이 나중에 정말 브라이드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끝끝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레인은 브라이드를 아마도 평생 기억하리라. 가슴으로.


새카맣게 검다는 것, 한밤중처럼 검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흑인이 언제나 피해자만은 아니며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하느님 이 아이를 도와주소서>는 평생 이 문제에 천착해온 작가가 그 나이 즈음에만 쓸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너른 시선으로. 뒤늦게 만났지만 지금 만났기에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토니 모리슨. 나는 이제 그녀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책꽂이에 하나씩 하나씩 그녀의 작품이 들어서게 되리라.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가 부러울 것이다. 이런 기분은 진심으로 책읽기만이 줄 수 있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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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6-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요즘 뜸하실까.... 하는 찰나에 이 글을 읽습니다. ㅎㅎ
저도 잊지 말고 꼭 읽어봐야겠네요.

잠자냥 2018-06-12 15:53   좋아요 0 | URL
예 요즘 많이 뜸했지요? ㅎㅎ
저도 이달의 페이퍼로 뽑히신 폴스타프 님의 ‘미국 흑인 여성 작가‘에서 몇 권 읽어볼 요량으로 따로 적어두었답니다. ㅎㅎ

sslmo 2018-06-1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뜸하시다 싶어 들락거렸는데, 저와 비슷한 지병(?)이 있으셨군요~^^
저는 토니모리슨이 쉽지 않던데 정영목 님이라서 트라이 투 해보려 했었습니다.
이렇게 님의 귀한 리뷰를 읽고보니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꾸벅~(__)

잠자냥 2018-06-12 17:12   좋아요 0 | URL
책 읽는 분들이 다 갖고 있는 지병이 아닐까요? ㅎㅎ
이 책은 번역도 그렇지만, 문장이 잘 읽힐 거예요.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책 부피도 부담스럽지 않고요. ㅎㅎ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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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관계, 그 안에서 상처 받고 상처 주고 때로는 구원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짧지만 묵직하고 강렬하다. 우리는 이런 작품을 ‘마스터피스’라고 부른다. 말이 필요없는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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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조 퀴넌 지음,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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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지은이에 대한 호감이 있었다면 이 책 읽기가 더 즐거웠을 텐데, 이 책 지은이는 좀.... 글만 봐도 비호감형이다. 책만 많이 읽었지 인간은 되지 못한 느낌이랄까. 몇몇 구절은 공감가지만,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이렇게 편협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하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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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7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