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의 의식 대산세계문학총서 143
이탈로 스베보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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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자신의 병을 성찰하다가 세계의 병으로 자아를 확대하는 제노. 위기와 포기를 거듭하고,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질병과 삶의 닮은 점을 포착하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신분석적으로 그리면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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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7-1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읽었습니다만, 좀 오래 전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게 아마 중역본이었던 듯합니다.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반면, 읽은지 좀 됐다고 하더라도 지금 전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틀림없이 제가 돌머리란 증거일 겁니다. ㅠㅠ

잠자냥 2018-07-12 09:55   좋아요 0 | URL
ㅋㅋ 아마도 스토리 자체는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나 설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ㅋㅋㅋ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다르’는 피할 수 없는 이름이다. 영화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 또한 고다르의 작품을 여러 편 보았다. 고다르의 이름을 내게 각인시켜 준 사람은 수잔 손택이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와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Styles of Radical Will>에서 여러 차례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 손택에게 고다르는 열광의 대상이었다. 손택은 고다르를 이렇게 말한다.


예술적 발전이 훨씬 개인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못한 대부분의 영화감독과는 달리, 고다르의 작품은 전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결국에는 전면을 다 보아야만 한다. 고다르의 예술이 갖는 가장 현대적인 한 가지 국면은 그의 작품 하나하나의 가치가 좀 더 큰 기획, 필생의 역작 한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고다르」, 226쪽)


왜 고다르를 브레송과는 달리 문화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그리고 브레송과 같이 현대 대예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분출, 극명한 모험정신, 철두철미하게 상업화되어 버린 종합예술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의 이상야릇한 개인주의에 있다. 그러나 고다르가 단순 지적인 우상 파괴자는 아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영화를 파괴하는 '파괴자'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고다르」, 228쪽)


한때 나는 고다르보다 수잔 손택이라는 이름에 더 열광했었다. 그녀의 자유롭고도 깊은 사유와 글쓰기 스타일에 완전히 반했었다. 손택이 고다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손택이 그토록 열광했던 대상인 고다르에게까지 나의 관심이 확장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가 찬탄하는 고다르에게는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녀의 글을 읽었고, 보고 난 뒤에도 그녀의 글을 읽는다. 고다르의 영화는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중 한 작품이 바로 「그녀의 생을 살다 Vivre sa vie」이다. 손택 또한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녀는 이 작품을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생을 살다」는 완벽한 영화로 보인다. 이 영화는 고귀하면서도 복잡한 그 무언가를 제시하고자 했으며,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고다르는 아마도 ‘철학적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그 임무에 걸맞은 지적 능력과 재량을 소유한 오늘날의 유일한 영화감독일 것이다. (....) 고다르는 사상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사상을 표현할 수 있을 새로운 영화 언어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최초의 감독이다. 그는 이 발견을 「작은 병정」, 「그녀의 생을 살다」, 「기관총 부대」, 「경멸」, 「결혼한 여인」, 「알파빌」 같은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 내 생각에는 「그녀의 생을 살다」가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10쪽)


손택처럼 내가 고다르의 영화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처럼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의 생을 살다」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뜻밖에도 많은 것을 남긴다.





70년대나 8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면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들이 많았다.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여자들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영화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 스스로 ‘몸을 팔면서’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게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 류는 주로 그런 내용을 다루며 이런 영화들을 일컬어 ‘호스티스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는 어쩌면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무척이나 다르다.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들이 관객이 주인공인 ‘영자’에 완벽하게 감정이입하거나 혹은 영화에 푹 빠져서 불쌍한 ‘영자’의 삶을 보며 눈물 콧물 흘리게 한다면 「그녀의 생을 살다」는 철저하게 주인공 ‘나나’의 삶을 관객이 그저 바라보게만 한다.


‘나나의 인생 12장’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총 12장으로 이루어진다. 나나의 삶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지 않는다. 제1장부터 불친절하다. 나나와 한 남자의 뒤통수가 나오는 장면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나나와 그 남자의 관계, 나나의 현재 상태 등을 유추해야만 한다. 마치 카페에서 전혀 모르는 남녀의 대화를 우연히 들으며 그들의 관계와 현재의 상태를 대충 그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도 피상적인 모습에 그치고 마는지 모른다.


카페의 대화를 통해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나나는 ‘폴’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남자친구인가? 하려는 찰나 이 남자는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떠나려는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다. 나나의 꿈이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계속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나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드러내고(그러나 무슨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는지는 또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나나는 매춘부의 길을 택하게 된다. 매춘부가 된 나나는 그렇다면 불행할까? 행복할까? 이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매춘부가 된 나나가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괴롭게 피하는 모습을 보면 매춘을 그녀가 그렇게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카페에서 포주에게 자신이 매춘부가 되길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구구절절 쓰는 장면을 보면 나나에게 있어 ‘매춘’이란 어떻게 보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살아가기’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포주에게 쓰는 편지에 자신의 몸매를 설명하기 위해 카페에서 일어나 한 뼘 한 뼘 키를 재는 나나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 또한 매춘에 대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판단을 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나나가 내린 선택에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슬픔은 질퍽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매우 건조한 슬픔이다.


매춘부의 삶을 살기 시작한 나나는 돈을 벌고 젊은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가끔 궁금해 한다. ‘내 삶이 정말 행복한가?’ 그렇지만 그에 대해서도 딱히 어떤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나나의 움직임, 친구 이베트 혹은 낯선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냥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나나의 태도. 그러니까 사실 그 누구도 ‘나나’의 선택과 ‘나나’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졸라의 「나나」와 이름이 같은 ‘나나’- 어쩌면 이 이름 안에서 관객은 ‘나나’의 삶을 대강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에밀졸라의 '나나'처럼 고다르의 ‘나나’ 역시 결국 거리의 여자로 살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여기서 ‘비참’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다.


영화는 줄곧 건조한 카메라를 통해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관객이 섣불리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게 하며 나나 역시 ‘내 삶은 내 책임이야’라는 조금은 당돌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과연 나나는 그저 그녀의 삶을 살아갔을 뿐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은 육체뿐인 여자가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린 매춘이라는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강요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포주들이 하나의 ‘물건’처럼 ‘나나’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Vivre sa vie’라는 영화 제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으로 슬프게 다가온다.


한편, 손택은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그려진 매춘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우리는 나나가 옷 벗는 장면을 본다. 영화는 나나가 자신의 '겉', 즉 이전의 정체를 벗어던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몇몇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창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 그러나 고다르의 관심사는 매춘의 심리학도, 사회학도 아니다. 그는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분리되는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매춘을 가장 급진적인 은유로 택한 것이다. 인생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가혹한 시험 무대로서.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04쪽)


고다르는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다룬 이 영화-에세이의 좌우명을 몽테뉴에게서 따왔다. "우리는 자신을 타인에게 빌려주며, 자신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물론, 창녀의 삶은 자기를 남에게 빌려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가장 극단적인 은유일 것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06쪽)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만든 고다르는 「그녀의 생을 살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해석에 반대한다>의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맨 뒤에는 부록으로 「그녀의 생을 살다」가 파리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고다르가 직접 작성했던 광고문구가 실려 있다. 이 문구를 보는 것 또한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손택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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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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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4개월 만에 글(창작)을 썼다. 비록 더 오랜 퇴고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한동안 멈췄던 글쓰기에 다시 불을 지펴준 고마운 책.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75쪽). 글을 썼으므로 행복한 나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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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3번 &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3번 (+한글자막 DV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피녹 (Trevor Pi / 유니버설(Universal)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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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온유하고 따스한, 천천히 스미는 사랑이 있다면 한편으로는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뜨거운 사랑도 있다. 이제까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이 주로 전자의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면, 소콜로프의 연주는 후자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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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병 환자 창비세계문학 59
몰리에르 지음, 정연복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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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의 희곡을 읽다 보면, 한바탕 마당놀이를 감상한 기분이 든다. 웃음 속에 풍자와 조롱 해학이 넘친다. 몰리에르가 창조한 인물들은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의 인물들을 꽤 닮았다. 신분이나 지위는 높지만 어떤 한 가지를 욕망하느라 주변은 돌볼 틈도 없이, 그 하나에만 몰두해서 어리석음의 늪에 빠지고 마는 인물들(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 상상병 환자」의 ‘아르강’ 등)과 그런 인물을 통해 자기 잇속을 차리는 또 다른 인물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 어리석은 인물을 교화하고자 애쓰는 인물들이 나와 한바탕 난장을 이룬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읽다 보면, 그 어리석은 인물이 주된 풍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을 이용해서 더 큰 이득을 챙기는 당대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상병 환자』에는부르주아 귀족」, 스까뺑의 간계」, 상상병 환자」 세 작품이 실려 있다.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은 돈만 많은 부르주아로 진짜 귀족이 되기를 열망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넘치는 돈으로 ‘귀족’ 신분에 다가가고자 애쓴다. 귀족 같은 옷차림은 물론, 온갖 예술과 문화 수업을 받는다. 음악은 물론, 검술, 무용에 철학까지. 그의 하루는 귀족 따라잡기에 정신없이 바쁘다. 하다못해 하나뿐인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일차적으로 이 작품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국인 ‘주르댕’이라는 인물을 풍자한다.



음악 선생: 주르댕 씨는 예술에 문외한이고 매사에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데다가 아무 때나 박수 치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갑은 잘 열어요. 그분은 돈으로 칭찬합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를 소개한 그 알량한 귀족보다 무식한 부르주아가 우리에게는 백배 낫지요. (부르주아 귀족」, 11쪽)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어리석지만 결코 해롭지는 않은(주르댕은 그의 욕망에 충실할 뿐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주인공에 비해 그 곁을 맴도는, 선함을 가장한 인물들은 오히려 해롭기 짝이 없다. 주르댕 곁에서 잇속을 챙기기 바쁜 철학 선생 및 음악, 무용, 검술 선생들을 보라. 그들은 겉으로는 예술과 철학에 밝은, 지식인과 교양을 갖춘 척하는 인물들이지만 사실 주르댕의 주머니만을 노릴 뿐이며, 그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의 직업이 우수하다고 언쟁을 벌이는 촌극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부르주아 귀족」에서 가장 사악한, 그리하여 가장 강도 높게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백작 ‘도랑뜨’이다. 그는 주르댕의 하나뿐인 귀족 친구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주르댕으로부터 계속 돈을 빌려간다. 물론 그 돈을 갚을 리는 전무하다. 주르댕 부인의 말처럼 ‘친절을 베풀고 다정하게 대하고는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듯부르주아 귀족」은 주르댕이라는 한 어리석은 인물을 풍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비열한 귀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의 공통점은 등장하는 모든 아버지들이 신분이나, 돈, 종교, 의학에 사로잡혀 가족(특히 자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자식의 강제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억압적인 가부장이 항상 등장하는 것이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스까뺑의 간계」이다. 이 작품에는 자식들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있음에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일방적으로 다른 상대와 결혼을 시키려는 아버지들,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과 얽힌 결혼소동이 한바탕 일어나는데, 이 소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제롱뜨’ 아들의 하인인 ‘스까뺑’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그 스까뺑이라는 개성 넘치는 인물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가 가장 크다. 스까뺑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인물 ‘폴스타프’에 견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스까뺑: 사실 제가 손을 대면 뭐든지 됩니다. 제가 봐도 저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 같아요. 엉뚱하지만 어떨 때는 남이 상상도 못 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다 해결하지요. 사람들은 제 재능을 보고 사기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사기가 아니라 기발한 지혜지요. 제 실력을 따라갈 만한 사람은 못 봤습니다. 이 바닥 최고의 권위자라고 남들도 그러네요. 그런데 무식한 놈들이 저를 잘 몰라요. 그래서 별 일거리는 없습니다. (
스까뺑의 간계」, 124쪽)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이 그렇듯이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눈이 먼 두 아버지 ‘아르강뜨’와 ‘제롱뜨’처럼 뭔가 하나의 욕망에 집착하느라 주변은 모두 잊은 그들을 이용해 스까뺑은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도 하는데, 그 꼴이 왠지 밉살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간계가 성공하기를 바라게 된다고나 할까.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는 기막히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꾀돌이 하인 스까뺑의 입속에서 때로는 통찰력 빛나는 말이 쏟아지기도 한다.



스까뺑: 아가씨, 원, 그런 말씀을. 아무 문제없는 사랑은 지루한 고요함입니다. 남녀 간에 아무리 완벽하게 행복하다 해도 지겨울 거예요. 삶에는 기복이 있어야 해요. 원하는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더 열정이 생기고 즐거움이 배가되지요. (
스까뺑의 간계」, 169쪽)


스까뺑은 결국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서 다 죽어가는(이마저도 연극인 것 같지만) 상황에서도 ‘저는요, 식탁 끄트머리에 데려다주세요. 거기서 제 인생의 최후를 맛보겠습니다.’라며 끝까지 웃음을 주는 강렬한 캐릭터이다. 한동안은 스까뺑의 이런 모습을 잊기 힘들 것 같다.

상상병 환자」는 몰리에르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부르주아 귀족」이나「스까뺑의 간계」에서 다룬 내용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어딘가 자신이 항상 아프다고 여기는 ‘상상병 환자’ ‘아르강’은 귀족이 되고픈 주르댕처럼 ‘건강한 삶’을 늘 바라지만 그는 결국 언제나 아픈 존재이다(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건강을 돌봐줄 의사를 항상 곁에 두기 위해 딸을 의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욕망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모습은스까뺑의 간계」의 두 아버지들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아르강을 풍자하는 인물로는 하녀인 뚜아네뜨가 있다. 그녀는 하인 신분인 스까뺑 주인과 그 아들을 조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맡는다. 몰리에르의 희곡에서는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오히려 더 약삭빠르게 자신들의 주인을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뚜아네뜨: 혈색이 좋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리는 늘 혈색이 안 좋으세요. 그러니 나리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례한 사람들이지요. 지금처럼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요.
아르강: 얘 말이 맞소.
뚜아네뜨: 나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걸으시고, 주무시고, 드시고 하시지만, 그래도 아주 위중한 상태이시지요.  (상상병 환자」, 255쪽)


이 작품 또한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런 어리석은 인물을 이용해 또다시 자기 잇속을 차리는 인물-이 작품에서는 ‘의사’-을 더욱 강하게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처방만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 병에도 ‘관장-하제-사혈’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뚜아네뜨는 자기 주인인 아르강뿐만 아니라 의사들을 향해서도 날선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뚜아네뜨: 웃기지도 않네요. 당신들 의사들이 병을 치유해주길 바라다니. 참 엉뚱한 사람들이군요. 의사들이야 치료해주려고 그들 곁에 있는 게 아니지요. 단지 연금을 받고 약을 처방해주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치료가 되고 안 되고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상상병 환자」, 264쪽)


사람들은 비극에서 진한 감동을 얻고는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도 비극이 더 유명하다. 그런데 정말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희극보다 더한 것일까? 몰리에르 또한 처음에는 비극 배우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의 재능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라신의 비극이 귀족 문화의 표현이었다면 몰리에르의 희극은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했다. 그는 그렇게 민중의 친구가 되면서 서서히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상상병 환자」의 베랄드는 이렇게 말한다. “형님은 어떤 연극을 원하시는 거예요? 연극은 별의별 직업을 다 보여주고 있잖아요. 의사든 왕이든 왕자든, 어떤 명망가라도 늘 무대에 등장하지요” 이 말은 몰리에르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몰리에르는 이렇게 희극, 웃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비극에서는 쉽사리 꿈꿀 수 없었던 것, 귀족이나 성직자처럼 신분 높은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거기에서 독자는 비극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몰리에르는 1673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상상병 환자」에서 주인공 아르강 역할을 연기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집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민중에게 웃음을 주고자 했던 그의 최후조차 뭔가 희극적이고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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