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서재’라는 공간에 대한 로망이 누구나 있으리라. 그 글쓰기가 꼭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끼적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방해도 없이 끼적댈 수 있는, 그런 공간을 갖고 싶지 않을까? 나 또한 그렇다. 지금 내 방은 완벽하게 ‘서재’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양쪽 벽으로 책꽂이가 가득하고 그 가운데 창을 바라보며 책상이 하나 놓여 있다. 창밖으로는 하늘이 보인다. 창을 열고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노라면 고양이가 턱하니 올라와 창틀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런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이윽고 노트북 위에 앉거나, 내가 무언가를 쓰고 있는 종이 위에 철퍼덕 배를 깔고 엎드려 버린다. 


질 크레멘츠의 <작가의 책상>에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 에이미 탄의 책상 위에는 고양이 대신 요크셔테리어로 보이는 강아지 한 마리가 떡하니 올라와 있다.  윌리 모리스의 서재에는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제풀에 지쳐 식빵 굽는 자세로 잠들어 있다. 아마도 집사인 윌리 모리스가 놀아주지 않자 눈을 감아버린 것 같다. 다른 작가의 서재에서도 고양이와 개의 모습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스티븐 킹의 책상 아래에는 웰시코기 녀석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반려동물이 아닌 젖먹이 아기가 바닥에 누워 한가롭게 젖병을 빨고 있는 경우도 있다.


포토저널리스트이자 작가들의 초상사진가로 잘 알려진 질 크레멘츠는 커트 보니것의 아내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맨발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작업 중인 커트 보니것의 모습은 이 책에 실린 다른 작가의 사진보다도 한결 편안해 보인다. 생활그대로의 모습이랄까.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작가들의 책상을 엿보고 싶다는, 그리고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 작업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책상>과 비슷한 책으로 <글쓰는 여자의 공간>이 있다. 이 책은 여성 작가로 그 대상을 한정했으며 ‘작가의 책상’이 아닌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책상이나 서재만이 아니라 그들이 주로 글을 쓰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의 책상>이 ‘책상’과 ‘작가’ 사진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글쓰는 여자의 공간>은 좀 더 폭넓은 공간을 다루고 있다고나 할까. <글쓰는 여자의 공간>에서는 주변 디테일이나 책상, 서재 등의 분위기를 보면 그녀가 어떤 작업 환경이나 생활환경에 있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환경, 즉 작가가 사는 곳, 주변 풍경, 작업 공간, 책상 등 모든 요소들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며, 어떤 경우에는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두 책 모두 사진과 함께 작가들의 글에 대한 생각, 창작방식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작가의 책상>을 보면 서재나 책상은 한 작가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서재나 책상이 어지럽게 흩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깔끔하게 치워진 사람도 있고, 벽에 무언가를 정신없이 붙여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림이나 사진 등으로 그것을 제한한 작가들도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반려동물이 함께 하는 경우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쪽도 있다. 잠옷 바람으로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고 글을 쓰는 이도 있다. 존 치버는 후자에 속할 듯한데, 사진 속에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꽁초와 대비를 이룬다. 무엇보다 넓은 창은 필수인 것 같다. 서서 글을 쓰는 작가도 이따금 보인다.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헤밍웨이도 종종 서서 글을 쓴다고 읽은 기억이(사진으로도 본 기억이) 난다. 오랜 시간 앉아있으면 허리도 아프고,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가니,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내 서재 로망이 구체적으로 정리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글쓰기 공간은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한 장의 사진. 즉, 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집필 공간과 거의 비슷하다. 이곳은 서재가 아니다. 책도 없고 오로지 책상 하나와 글쓰기를 위해 필요한 도구- 그러니까 종이나 펜 또는 컴퓨터(타자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그리고 누구도 없다. 컴퓨터 또한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아야 한다. 열린 창으로 사진처럼 호수 또는 바다가 보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초록으로 뒤덮였거나 하늘이 보여도 좋다. 절대적인 고독의 공간. 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책상이 그렇다. 오직 글과 작가만이 존재한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하다. 물론 이때 책이 잔뜩 쌓인 ‘서재’는 어딘가에 따로 있어야 한다.


 

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책상, <작가의 책상> 중




크리스타 볼프의 서재, <글쓰는 여자의 공간> 중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공간을 꿈꾸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으니 서재와 책상이 함께 있는 정도로 로망을 다시 수정해본다면, <글쓰는 여자의 공간>속 크리스타 볼프의 서재처럼 책으로 가득한 공간도 좋을 것 같다. 책상은 널찍하면 좋겠지만 책상 위는 깨끗하길 바라고, 창을 향하면 좋겠다. 수잔 손택의 책상은 널찍해서 탐이 난다. 그런데 그 위의 전화기는 사절이다. 그렇지만 손택에게 전화기는 필수였으리라. 글쓰기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에도 미칠 듯한 흥미를 느끼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소통하기를 즐겼던 그녀이니까 말이다. 요즘 읽고 있는, 작가들의 인터뷰집인 <오리지널 마인드>에서 수전 손택은 글쓰기를 이렇게 말한다. 


저는 글쓰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내가 아닌 바깥의 것들을 관찰하고, 주목하고 더욱 강렬한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전부 사실이긴 하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과정은 무척 고독합니다. 괜찮은 글을 만들어 내려면 쓰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쓰면서 수천 시간 동안 방 안에 혼자 있어야 하지요. 가장 강렬하고 고립된 경험이지요. 조종사이자 유일한 승객으로 혼자 우주선에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저 역시 글쓰기에 대해서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척 흥미가 당기는 다른 모든 것들을 멀리해야 했다는 점이 아쉬워요. 연극과 공연 예술은 우선 협업이기 때문에 정말 즐겁습니다.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서 뭔가를 만드는 것은 정말 큰 즐거움입니다. (<오리지널 마인드>, 278~279쪽)


<작가의 책상> 서문에서 존 업다이크는 ‘책상은 개념을 낳는 순결한 침대’라고 했다. <작가의 책상> 속 사진들은 하나 같이 그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쓰며 ‘개념을 낳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책상은 단순히 가구가 아니라, 작가의 머릿속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노라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책상 자체, 책상은 어떠어떠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런 공간에서 탄생하는 이야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책상은 주인의 머릿속을 그래서 자연스레 닮아가는 게 아닐까. 


<글쓰는 여자의 공간>에서 엘케 하이덴라이히는 과거에 여자들이 글을 쓰는 곳은 아마도 부엌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부엌에서 틈틈이 글을 써서 작가가 된 사례도 많다. 아이를 낳은 뒤에야 글을 썼다는 토니 모리슨처럼 육아를 병행하면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서재’ 또는 ‘자기만의 책상’을 따로 두지 않고도 틈틈이 여기저기 앉은 자리에서 글을 쓰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 사실은 왠지 더 감동적이다. 이 책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레이먼드 카버는 아이들을 피해 자신의 차안에 들어가 글을 썼다고도 하지 않는가. 반면 카페처럼 공공장소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삼으며 글을 쓴 작가도 보인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 대표적인 예로, 그녀는 일생 동안 모든 가정사를 거부했다. 가사야말로 여자들의 자유와 삶, 글쓰기를 방해하는 덫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 모두는 어떤 공간에서든 썼다. ‘썼다’는 사실에 그 모든 위대함이 있다. <작가의 책상> 속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말은 글쓰기라는 그 고독한 작업에 대한 거의 모든 ‘정수’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앤 페트리의 말과도 통한다. 그들의 말을 되새기면서 다시 내방을 둘러본다. 서재 로망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 틈틈이 놀아달라고 방해하면서 좀 쉬라고 충고하는 고양이도 있고 말이다. 응? 쉬라고? 난 요즘 더위 핑계로 너무 누워서 책만 읽었다. 이제 서늘한 바람도 제법 분다. 책상에 좀 앉자.


어떤 작가들은 저 멀리 외딴 섬으로 가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글쎄 그런 식으로 방해를 벗어나려면 달나라쯤은 가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 정작 글쓰기를 가로막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방해를 받는 것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며, 글 또한 멈춤과 진행을 반복해가며 써나가는 편이 유용할 수 있다. 사람은 쉬는 동안, 혹은 덜 중요한 무언가로 인해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에 자신의 관점이 바뀌거나 시야가 넓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작가의 책상>, 103쪽)


글을 쓰기 위해 어디에 앉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그냥 어디든 앉아서 쓰는 거야. (앤 페트리, <작가의 책상>,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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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상
질 크레멘츠 지음, 박현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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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상과 작업실(또는 서재)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한 책. 더불어 그들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책상은 대부분 작가 자신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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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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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제목을 왜 하필이면 <19호실로 가다>로 선택했는지는 이 책 맨 끝에 실린 단편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나면 명확해진다. 이 단편집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녹록지 않은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19호실로 가다’는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삶을 단연코 압도적으로 묘사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데다가 찌질함까지 두루 갖춘 한 남자로 인해 24시간 가까이 괴롭힘 당하는 바버라의 모습을 보며 분개했다. 이 작품에서는 그래도 그 거머리 같은 남자가 여자에게 스쳐지나가는 인물일 뿐이기에 하루만 참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그 찌질이 ‘그레이엄’이 망신 아닌 망신을 톡톡히 당하면서 끝나는 설정이라 나름 통쾌하기도 했다. ‘옥상 위의 여자’나 ‘남자와 남자 사이’ 같은 단편도 남자들로 인해 인생이, 또는 삶의 한 순간이 일그러지는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 작품들은 나름대로 여자가 남성들을 무시하거나(‘옥상 위의 여자’), 한 남자로 얽혀서 때로는 적이었을지도 모를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면서 한 순간일지 몰라도 상처를 극복하는(‘남자와 남자 사이)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작품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인 ‘19호실로 가다’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19호실로 가다>는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서서히, 이 지구에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온전하게, 인간으로 홀로서기가 얼마나 부단히도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맨 마지막 작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다. ‘19호실로 가다’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행복한 한 쌍이 등장한다. ‘수전과 매슈’ 그들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운데 결혼한다. 둘 다 벌이가 좋은 직장을 가진 덕분에 금세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자식들마저 골고루(아들, 딸에 이어 아들딸 쌍둥이까지!) 낳을 정도로 정말로 흠잡을 데 없이 그들의 결혼 생활은 잘 굴러간다. 정원이 딸린 커다란 집과 네 아이. 파출부, 친구, 자동차, 사랑 등등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어쩐지 미리 ‘예상한 그대로’였으며 어쩔 수 없이 단조로운 생활이 된다. 그런 가운데 수전은 차츰 자신의 인생이 사막이 된 것처럼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어쩐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게 되면서 수전은 자신이 결혼하고 임신한 순간부터 말하자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긴’ 인생을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결혼한 뒤로 12년 동안 단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음을,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음을 깨닫고, 드디어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이들도 모두 학교에 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 매슈를 뒷바라지 하는 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집안일 또한 파출부에게 맡기면 된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기만 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수전은 자기가 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사실, 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아이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로서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드디어 주어졌음에도 오히려 집안일을 끊임없이 찾아서 하고 있는 수전의 심리가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왜? 대체, 혼자 있을 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여자는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도 집안일을 하는 거지?’ 이런 심정이랄까. 


그러다가 나는 곧 깨달았다. 수전은 혼자 있었던 적이, 진실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존재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아무리 집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져봤자, 그 집은 남편과 아이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곳에서 결혼한 주부가 오롯이 혼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애당초 나 같은 사람은 수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수전이 홀로 있고자 애쓰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연민을 넘어서 어느 순간 슬픔이 밀려온다. 수전처럼 일주일에 한 번 방을 빌릴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하는, 그러므로 자기만의 온전한 방 한 칸을, 철저하게 혼자만의 공간을 누릴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떠오른다. 수전의 ‘19호실’ 그 평온의 공간마저 결국은 침범당하고 마는 것에서 분노와 함께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가 글을 쓰려면(온전한 자기만의 사유를 하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전은 결혼과 함께 자기만의 방은커녕 그런 공간을 빌릴 돈조차 갖추지 못한 신세가 되고 만다. 결혼 전에는 광고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한 사람으로 당당히 존재했던 그녀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고, 정원 딸린 집에 살면서 파출부까지 두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기만의 ‘돈’도 ‘방’도 없는 것이다. 집 한곳에 수전의 방. 그러니까 ‘엄마의 방’을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수전의 아이들이 말하듯 ‘엄마의 방’이지 ‘수전의 방’은 아니다. 거기서 과연 그녀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러다가 드디어 찾은 자기만의 방, 19호실- 그 허름한 공간에서 서서히 혼자가 되어가던 수전. 그러나 남편의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공간마저 탄로 나고 더는 어디에서도 ‘철저히 혼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기에 좌절한 그녀가 내린 선택은 무척 마음 아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주변에서는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 그게 ‘독립’이냐고 나는 말리는 편이다. 정말로 독립을 바란다면 혼자 있을 ‘공간'을 만들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비혼 여성이 독립해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부모의 반대를 비롯하여,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막상 그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심리적, 정신적, 또는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를 향한 온갖 위험에 대한 공포) 선뜻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결혼’이라는 전혀 독립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고야 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이 짧은 생에서 단 한순간도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살다 죽게 되는 삶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부모의 우산 아래서 남편의 우산 아래로 편입될 뿐이다. 인간이 그렇게 평생 단 하루도 철저하게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런데도, 많은 여성의 삶은 수전의 ‘19호실’ 같은 공간조차 얻지 못한 채 끝이 나고야 만다. ‘성인 두 사람이 단 1초도 서로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 굴욕적’(‘한 남자와 두 여자’, 123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딸이었다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다시 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남자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여자라는 성(性)을 잃어버린’(‘남자와 남자 사이’, 227쪽) 채 ‘하루에 18시간씩 남자들의 포부를 지지해주면서 살아가게’(‘남자와 남자 사이’, 234쪽)된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19호실로 가다’. 305쪽) 공간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랑도, 결혼도, 가정도, 일도. 인간에게 혼자 있을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19호실로 가다>는 쓸쓸하게 묻는다. 수전처럼 자기만의 ‘방’을 갖고자 안간힘을 쓰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기에, 그런데도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는 책을 덮고도 씁쓸한 마음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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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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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마을로 모여든 사람들. 곧 일어나는 살인 사건. 알고 보니 저마다 나름의 살인 동기는 있고... 일견 무능력해 보이는 주인공 맥베스 순경. 점점 밝혀지는 비밀 등등 추리 소설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쉽게 범인을 알아차릴 수 있는 싱거운 이야기지만 이 시리즈의 매력은 거기에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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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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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간다는 것. 노년의 고독과 상실감, 쓸쓸함, 그러면서도 그 나름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욕망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꿈과 현실, 죽음과 에로스 사이를 절묘하게 왔다갔다하는 한 편의 긴 서정시와도 같은 작품. 그 사이사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인간 군상의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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