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감독 중에 루이스 부뉴엘이 있다. 부뉴엘의 영화 중 <어느 하녀의 일기>는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를 원작으로 한다. 사실 이 책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보다 레아 세이두 주연의 동명 영화에 힘입어 (국내에는) 더 잘 알려진 것 같다. 영화가 개봉했던 2015년에야 원작이 번역되어 출간된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원작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무려 3번이나 된다. 장 르누아르(1946)와 루이스 부뉴엘(1964)에 이어 레아 세이두 주연, 브누와 자코 감독 작품(2015)에 이르기까지.


2015년 작 <어느 하녀의 일기>가 평가에서는 가장 박한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레아 세아두가 셀레스틴 역을 맡았음에도 이 2015년 작에는 크게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앞선 두 영화에 비해 원작에 가장 충실하다고 하니, 조금 궁금해진다. 이 작품을 보기에 앞서, 원작인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를 읽어보는 게 좋겠지. 보통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면 영화가 원작을 망치는 일이 더 흔한데, 루이스 부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물론, 내가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라 100%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루이스 부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때는 1930년대 프랑스. 영화가 시작하면 도회적인 느낌의 예쁘장한 한 여자가 어느 역에 내린다. 그녀의 이름은 셀레스틴(잔느 모로). 파리에서 온 이 여인은 시골의 한 대저택에 하녀로 고용된 참이다. 그녀를 마중 나온 남자는 그 집의 하인인 조제프. 그는 처음 보는 셀레스틴에게 ‘내숭이나 떤다’며 상당히 퉁명스럽고 무례하게 군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한참 시골길을 달려 드디어 저택에 도착한다. 그 저택에는 집주인 ‘라부르’와 그의 딸 ‘몽테일 부인’ 그리고 사위인 ‘몽테일’이 기거하고 있다. 그밖에도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과 일꾼 조제프가 이 집안의 주요 구성원이다. 셀레스틴은 저택에 도착한 첫날부터 신경질적인 몽테일 부인과 그녀의 탐욕스러운 남편, 점잖아 보이지만 실은 기이한(?) 취미를 갖고 있는 라부르를 만나보며 당혹해한다. 게다가 자신을 시종일관 퉁명스럽게 대하는 조제프에, 몽테일과 사이가 좋지 않아 담장 너머로 쉴 새 없이 쓰레기를 던지는 이웃의 퇴역군인까지. 그녀는 이 저택에서 견뎌나가는 일이 사뭇 걱정스럽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의 기벽이 하나씩 드러난다. 몽테일 부인을 비롯하여 여자들도 어딘가 좀 이상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누가 더 찌질한지 서로 내기라도 하듯 흉한 모습을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 점잖기만 한 라부르 노인은 딸 몰래 ‘페티쉬’에 심취했고 사위인 몽테일은 사냥광에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 치마만 둘렀다면 침을 질질 흘린다. 그는 이 집안에서 일하는 모든 여자들을 임신시킬 기세다. 하인 조제프 또한 만만치 않다. 어린 소녀를 향해 건전하지 못한 눈빛을 보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이런 사정이니 이 남자들이 미모의 셀레스틴에게 뜨거운 욕망의 시선을 보내는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한술 더 떠 이웃의 퇴역군인까지 셀레스틴에게 추파를 던진다. 셀레스틴은 이런 남자들의 욕망을 간파하고 그들을 서서히 조종하기 시작한다.

브뉴엘의 작품 속 상류층은 점잖은 외양과는 달리 마음속은 불건전한 욕망으로 가득하다. <어느 하녀의 일기>에 나오는 이들도 대부분이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도덕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의 모습이 계급을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하인 조제프는 극우 파시스트로 입만 열면 유태인을 모조리 쏴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뿐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그의 방은 신에 대한 열렬한 믿음을 뽐내기라도 하듯 온갖 종교적인 장치로 가득하다. 그러나 어린 소녀를 향한 그 끈적끈적한 시선은 어찌할 것인가?

영화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적 타락과 위선을 꼬집어온 루이스 브뉴엘은 하녀 ‘셀레스틴’의 눈을 통해 비단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하층계급까지 포함한 ‘인간’의 위선과 파시스트들이 애국자로 추앙받는 프랑스 사회의 타락을 조롱한다. 브뉴엘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관객은 인간들의 비루한 욕망과 뒤틀린 성적 욕망을 엿보면서 키득키득 웃게 된다. 하녀 셀레스틴이 관객을 대신해 그들의 욕망을 조롱하고 비꼬며 통쾌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쩐지 이 영화의 끝은 씁쓸하다. 영화 말미 셀레스틴이 짓던 공허한 표정이 고스란히 관객의 마음에 감정이입 되는 기분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극우 파시스트들의 세계는 너무나도 견고해서 깨뜨리기 어렵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조금은 허망하다. FIN 자막과 함께 검은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친다. 오직 하늘만이 그런 인간들을 응징할 수 있단 의미일까. 



 루이스 부뉴엘, <어느 하녀의 일기>(1964), 세 가지 버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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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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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가 곧 영화로 개봉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영화 포스터를 보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예전에 짧게 써둔 리뷰를 찾아 읽어보았다. 아, 이런 내용이었지-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 작품 가운데 두 번째로 읽은 책이었다. 처음 읽은 책은, 이언 매큐언의 단편을 모은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었다. 사람들은 <속죄>가 무척 좋다고 하던데 <속죄>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했던 영화 <어톤먼트>가 솔직히 너무 별로여서 읽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던, 그래서 아직까지도 읽지 않았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읽고 나서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이언 매큐언은 인간의 병적인 증세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가 싶었다. '성장'에 두려움을 겪는 주인공을 묘사하거나, 스스로 성장해가면서 자기만의 유년 시절을 파괴하는 인물을 그리는 등 성장통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조금 기괴한 느낌도 든다. 그의 작품은 읽고 나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체실 비치에서>도 그런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 그들은 이제 갓 결혼한 부부이며,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왔다. 그런데 행복으로 가득찬 신혼여행이어야 할 텐데, 그들의 얼굴엔 언뜻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플로렌스는 그녀대로, 에드워드는 그대로 ‘첫날밤’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쪽이 더 심한 듯하다. 연애를 하면서도 에드워드와의 키스나 신체 접촉에 늘 망설이던(혹은 혐오감을 드러내던) 그녀는 드디어 첫날밤이라는 '무시무시한' 일을 치르려니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 한편 에드워드는 1년을 기다려 드디어 플로렌스와 함께 밤을 보낼 그 순간이 왔는데, ‘잘할 수 있을까, 잘해야 할 텐데’라는 부담으로 숨이 막힐 지경.

요즘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첫날밤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생소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는 그럴 법하다. ‘그 시절은 성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공포의 순간은 다가왔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플로렌스가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들은 신혼 첫날밤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들을 퍼부으며 그날 밤으로 헤어지게 된다. 첫날밤에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이런 문제로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을까 좀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단순히 섹스 문제가 아니라 ‘첫날밤’이라는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를 포기하고 달아난 플로렌스와 그런 그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에드워드를 통해 결국 ‘인간이 어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의 어려움, 또는 공포’ 이런 것들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을 두고 무척 아름답다, 서정적이다 이런 칭찬도 많던데,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이언 매큐언은 나랑은 좀 잘 맞지 않는 작가인 듯. 뭐 이런 결론을 내리며 책장을 덮은 기억이 난다.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까? 영화는 어떻게 그려질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지만, 과연 내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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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9-1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음... 잠자냥님 리뷰에 적힌 내용만 봐선 영 제 취향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냥 안 읽어야겠어요. 영화는 궁금해서 나중에 볼 지도 모르겠지만.

잠자냥 2018-09-12 18: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상하게 이언 매큐언은 제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이 책 읽은 뒤로 <토요일>,<암스테르담>, <시멘트 가든>까지는 읽어봤는데...그냥 읽고 나면 기분 나쁘고 뭐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최근에 나온 <넛셀>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볼까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냥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어요. 하하하...

남들은 좋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닥 마음이 가지 않는 작가가 있는데, 이언 매큐언하고 필립 로스가 저는 영.... ㅎㅎ

영화 <어톤먼트> 보셨어요? 그 영화도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저는 그 영화의 진짜 주인공 ‘브라이오니‘(저는 광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ㅋㅋㅋ) 캐릭터가 너무 싫어서;; 도저히 감정 이입이 안 되더라고요. 원작인 <속죄>는 안 읽어봤지만 캐릭터를 그렇게 생생하게 만든 게 이언 매큐언의 장점이라면 장점일까요? ㅎㅎㅎ

케이 2018-09-12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질투에 눈이 멀어 좋아하던 남자에게 성폭행범 누명을 씌운단 영화 소개를 읽고 이 이야기를 직접 보면 너무 짜증나겠구나 싶어 아직도 안 보고 있습니다. ㅋㅋ 속죄는 개뿔. 그런 미친 짓은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에요!! 흠.. 근데 저는 전쟁 중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는 약간 회의적인 거 같아요. 진짜 전쟁은 영화 ‘그을린 사랑‘ 이나 ‘풀메탈자켓‘ 에서 보여주는 모습 이상으로 지옥같을텐데, 남녀 사랑 이야기를 첨가하여 가끔 전쟁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좀 불만이기도 하고요.

잠자냥 2018-09-13 10:1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 인물이 바로 광년이 ㅋㅋ ‘브라이오니‘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나중에 ‘속죄‘하는 방법도 참 어처구니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민폐인 캐릭터. 그런데 그 인물 말고도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으로 헤어지는 두 남녀(영화 속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사랑도 저는 공감이 안 가더라고요. 저도 아마 전쟁 중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더 애틋해지는(?) 사랑이 엄청 나이브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전쟁 문학이나 전쟁 영화가 보통 너무 뻔한 스토리로 전개되는 것도 좀 그렇고요. ㅎㅎ

Falstaff 2018-09-1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속죄>는 아예 영화를 안 보시고 읽는 편이 좋았을 듯합니다.
영화 먼저 보신 분들이 책까지 덩달아 읽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괜찮은‘ 보다 조금 더 좋은 책인데요. ^^;
<어톤먼트>는 한 영문학자가 뽑은, 원작을 가장 망해먹은 영화들 가운데 꼭대기에 있더랍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8-09-13 15:06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군요. 원작을 가장 망해먹은 영화 ㅋㅋㅋㅋ
영화의 무지막지한 잔상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책은 영원히 안 읽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 한국 여성의 인권 투쟁사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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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변화와 발전(때로는 한계점)을 강준만 특유의 온갖 자료 섭렵 생생 성실한 글쓰기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다른 100자평 읽다보니 강준만도 ‘오빠‘아니냐며 여자의 말할 권리조차 오빠 지식인이 빼앗는다고 비판하는데..글쎄 이 책 읽어보긴 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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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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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책 읽는 계절이라는 말 때문에 그런가, 부쩍 관심 있는 작가의 새로운 책 출간 소식도 들려온다. 그중 단연코 눈길을 끄는 이는 윌리엄 트레버이다. <그의 옛 연인>이라는 책을 본다. 제목도 그렇고 책 표지 이미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손길 때문에 또 한 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옛 연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해져온 어떤 소식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는 내용이려나? 궁금하다. 이 신간을 더 기다리지 않고 사보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부터인가 윌리엄 트레버는 내게 그런 작가가 되었다.


<그의 옛 연인>을 사서 책을 펼쳐본다. 표제작인그의 옛 연인」부터 읽어볼까 싶었지만 왠지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뽑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만 같아서, 이 책을 대표하는 작품- 그러니까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작품이려나 싶어서 아껴 읽기로 하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기로 한다. 첫 작품인「재봉사의 아이」부터 읽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하다. 평화로운, 조금은 따분해 보이는 자동차 정비소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임을.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재봉사의 아이」의 주인공은 ‘재봉사의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할’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이름도 없이 그저 ‘재봉사의 아이’로 불리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아이. 그런데 그 아이가 카할에게 지울 수 없는 멍에가 되어 남는 것이다.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이의 엄마, 그러니까 재봉사인 그녀는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아이 엄마는 신뢰받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과연 믿어줄까? 겉보기에 카할은 이 게임에서 승자처럼 보인다. 그냥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울까? 재봉사의 아이는 평생 카할의 뒤를 쫓아다닐 것임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버가 빚어내는 인물들이 거의 그렇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일상을 사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삶은 그 일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으로 변하고 만다. 곁에서 그 일이 무엇인지 지켜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무언가’ 커다란 지진과도 같은 파열이 일어난다. 평범하지만 악하지 않은, 보통 정도의 ‘양심’이나 ‘죄책감’을 가진 그들은 그 어떤 일을 겪고 난 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으리라.


완벽한 관계,그의 옛 연인에는 연인 또는 부부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모두 안정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내도 그러할까? 은 시작부터 심란하다. 남자와 여자가 어느 ‘방’에서 만난다. 그와 그녀가 ‘불륜’ 사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그들은 왜 어느 방을 빌려 이렇게 몰래 숨어서 만나는 것일까?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을까? 그녀, ‘캐서린’이 남자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놀랍다. 그녀는 살해 혐의로 기소된 남편의 알리바이를 거짓으로 증언했다. 그 뒤로 9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고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혼 생활은 이미 그때 깨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완벽한 관계 속 연인들도 그렇다.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프로스퍼’이지만, 그런 그에게 ‘클로이’는 문득 이별을 고한다. 그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지도 않은 채 집을 나선다. 프로스퍼는 클로이를 찾아 그녀 부모님 댁을 방문하지만, 클로이의 부모는 딸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다. 프로스퍼는 클로이에게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둘이 곧잘 가던 카페에 홀로 앉아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와 그 카페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질투에 휩싸이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음’이 과연 완벽한 관계를 말해주는 증표일까? 클로이의 생각과 반응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둘은 과연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는 어떤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지만 프로스퍼와 클로이를 지켜보는 독자라면 그들이 다시 만나더라도, 그 관계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임을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그의 옛 연인에 바로 그런 커플이 등장한다. 가을에 어울릴 법한 애틋하고도 아련한 사랑이야기일까 싶었는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시작부터 누군가의 편지를 훔쳐 읽는 사람이 나온다. ‘조이’는 남편 ‘찰스’의 편지, 그러니까 그의 옛 연인으로부터 전해온 편지를 훔쳐 읽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는 지긋하다. 이미 흰 머리가 성성하다. 조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편의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훔쳐 읽어왔다. 찰스와 그녀가 통화하는 내용도 엿듣는다. 남편은 오늘도, 흰머리가 성성한 그 나이에도 옛 연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쇼핑’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집을 나선다. 조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눈을 감아준다.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배웅한다. 그 부부의 일상은 아마도 평생 그래왔듯이, 그들이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렇게 지속될 것이다.


<그의 옛 연인>의 원제는 <Cheating at Canasta>이다. 이 책에도 속임수 커내스터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속임수가 있는 카드놀이. 어쩌면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 부부나 연인처럼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수치감을 잊고, 아니 잊어야만 하는 남자는 스스로 양심을 속인 채 남을 협박하여 살아가며(아일랜드의 남자들), 십대 소녀 ‘애슬링’은 또래 소년이 맞아 죽는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 해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객기), 엄마를 잃은 딸의 빈자리를 다른 여자로 채워주어야지만 가족이 다시 화목할 것이라는 아빠의 믿음(아이들)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딸은 엄마를 잊을까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자식들을 생각하느라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어느 노부인(올리브힐에서)은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남은 생이 평화롭지는 않다. 


이렇듯 윌리엄 트레버의 <그의 옛 연인>에는 크든 작든 양심을 속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트레버의 시선은 그들을 단죄하는 ‘재판관의 눈길’이기보다는 이해와 연민으로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삶과의 카드게임에서 이정도 속임수는 쓰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임수조차 쉽게 잊어버리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하지 않은가. 그러나 트레버가 빚어낸 인물들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소리, 죄책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리고, 대개는 스스로 유폐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쓸쓸한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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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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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윌리엄 트레버. 이 책에 실린 단편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씩 어떤 사건(크든 작든)을 겪고 삶이 이전과는 달라진다.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희미한 ‘양심의 선‘을 넘어버린 이들. 그 미세한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한 섬세하고도 서정적인 트레버의 시선.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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