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대실패로 끝났다 해도, 흐지부지되었다 해도, 아예 시작도 못했다 해도, 처음부터 모두 마음속에만 있었다 해도. 그것이 단 하나의 이야기였다.’ 반스가 써내려간 쓸쓸하고도 처연한 그 단 하나의 이야기. 사랑하다와 살다는 동의어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스스로 사랑하기를 금지한 사람이 있을까? 스탕달의 <아르망스>에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옥타브’가 바로 그렇다. 이제 스물인 이 청년은 아름다운 외모에 독특한 언행과 남다른 분위기, 귀족 신분 등 그 어느 하나 남에게 뒤질 것 없는, 치명적인 매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다. 오직 하나 흠이 있었다면 귀족임에도 부유하지 못하다는 점인데, 그 마저도 운 좋게 해결되어 200만 프랑을 손에 넣을 희망이 생긴다. 그리하여 옥타브는 말 그대로 사교계의 ‘꽃’이 된다.

옥타브를 사교계에서 유독 빛나보이게 하는 그 남다른 분위기는 그의 독특한 성격에서 비롯된다. 그의 부모가 걱정하듯이 옥타브에게는 ‘우울증’ 증세가 심각한 것이다. 염세적이고 그 무엇에도 쉽사리 만족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 때문에 옥타브는 세속적 삶을 떠나 신에게 자신의 생을 바칠 생각을 하기도 하고, 독서에 몰두하는 등 세상의 일에는 초연한 태도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 병이 또다시 도질까 봐 걱정하며 그저 옥타브를 하루 빨리 결혼시키고자 한다. 이제 200만 프랑이라는 재산도 생길 터이므로 아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혼사를 치를 수 있다. 과연 옥타브의 삶은 아버지 뜻대로 흘러갈까?

안타깝게도 그리 될 것 같지는 않다. 옥타브는 사교계의 속물스러움과 천박함에 진저리를 친다. 내로라하는 집안 출신들이 모인 사교계에서도 드러내놓고 금전을 숭배하는 행태를 ‘오 인간이란 얼마나 비천한지!’ 외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가 보기에 ‘어디를 둘러봐도 천박함뿐’이며 거기에 맞서려면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찾아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옥타브는 우연히, 사촌누이인 ‘아르망스’가 그녀의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된다. “할 수 없지 뭐. 그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걸! 나는 그이가 훌륭한 심정을 지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200만 프랑을 손에 넣을 희망이 생기자 사람이 바뀌고 말았어!”(61쪽) 아르망스의 이 말은 벼락처럼 옥타브 위로 떨어진다. 모두가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경멸하는 여자,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처지임에도 돈을 숭배하지 않는 여자. 옥타브는 그녀를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아르망스는 오래전부터 옥타브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부자가 된 옥타브가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실망하던 참이었다. 옥타브는 이 모든 오해를 풀기 위해, 아르망스에게 다시 존중받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 둘의 우정을 빙자한 사랑은 곧 옥신각신하다가 이루어질 것 같다. 아, 그런데 옥타브와 아르망스 이 두 연인의 사랑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다. 특히 옥타브가 그러하다. 그는 스스로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인물이다. 아르망스에게 자기도 모르게 관심이 가고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모으고 전율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깊은 우정,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아르망스는 아르망스대로 답답하다. 옥타브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가난한 자신이, ‘처지에 비해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 심지어 옥타브 또한 그런 의심을 할까봐 그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옥타브 곁에서 그를 오래 지켜봐야 한다고 번번이 다짐한다.

이렇듯 스탕달의 <아르망스>는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사랑받기를 갈망하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금지한 대책 없는 두 연인의 밀당을 숨 가쁘게 그려나간다. ‘밀당’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 밀당은 계산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에게 부과한 ‘절대 상대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롯되는 일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몹시 궁금해진다. 아르망스야 자신의 처지 때문에 옥타브를 거부한다고 해도, 옥타브는 왜 스스로 사랑을 금지했을까? 그 어린 나이에 무엇 때문에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이 궁금해서라도 이 책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첫 작품 <아르망스>를 써내기 이전에 일찍이 <연애론 De l'amour>을 썼던 스탕달. 묘비명이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였던 만큼 스탕달은 연애의 달인이었다. 아니, 달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했다. 그런 그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아르망스>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지켜보노라면 사랑의 여러 속성을 볼 수 있다. 옥타브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지만, 사랑이 어찌 그리 마음대로 되는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진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불행했다. 그 가혹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드디어 한 사람을 찾아낸 그. 옥타브는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냉소적이고 삐딱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런 경험은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을까?


옥타브가 느끼는 행복감이 커질수록 그의 정신도 한층 더 명민해졌다.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그 세계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좀 더 참을 만해 보였고, 무엇보다 그 세계가 자신을 향해 내보이던 적대감을 누그러뜨린 듯이 느껴졌다. 결국 그가 깨달은 사실은 이 세상이 ‘그를 겨냥해서’ 적대감을 퍼붓는다는 생각이 그 자신의 오만이라는 점이었다.(<아르망스>, 121쪽)

‘내가 있는 이곳이 인간의 사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이름은 모르지만 절친한 친구가 스무 명은 있는 느낌이었다.’ (<아르망스>, 127쪽)


사랑하는 자신을 최초로 발견한 그에게는 온 세계가 달라 보이고, 모든 것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에 이 사랑이 완전한 것일까? 의심하고 의혹에 쌓이고 때로는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한다. 옥타브와 아르망스 또한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젊기에 어쩌면 심하게 흔들린다. 옥타브는 아르망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자신을 동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아르망스는 사교계 사람들이 옥타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가짜라고 의심할 것이라며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평범한 결혼 생활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옥타브가 나를 계속 아껴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내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까. 내가 재산을 보고 그를 택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하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청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갈팡질팡한다.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지켜보노라면 비록 그 모습은 똑같지 않을지라도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고, 그 감정을 인지하고,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고, 그 뒤에 의심과 불안과 질투와 불안에 싸이고 등등 사랑이 전하는 온갖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연애에 일가견이 있던 스탕달 그 자신이 사랑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인물들에게 투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르망스>는 중간 중간 드러나는 사랑에 대한 스탕달의 생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없이 행복한 사랑일지라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은 있는 법이다. 사랑은 그 행복만큼이나 고통으로도 생명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아르망스>, 119쪽)

인생의 정수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에 있으며, 사랑은 숭고한 만큼 숭고하지 못한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터라, 우리는 긴 세월 속에서보다 단 얼마간의 순간 속에서 더 많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르망스>, 181쪽)


옥타브를 비롯하여 갈팡질팡 하는 인물들. 그 생생한 캐릭터 때문에도 <아르망스>는 무척 흥미롭다. 옥타브의 모습은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과도 닮았다. 아름다운 외모에 섬세한 감수성, 남다른 재능, 사회와 일정 거리를 둔 개인, 흔들리기 쉬운 마음과 그로 인해 비극적 연애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까지. 스탕달은 옥타브와 쥘리엥 소렐에 이어 <파르마의 수도원>의 파브리스까지 소설사에서 잊기 힘든 강렬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아이구, 이런 연애쟁이!’ 하면서 계속 스탕달의 작품을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보다 이런 생생한 인물에 있을 것이다.

사실 <아르망스>는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었는데, 결국 하나 뺄 수밖에 없었다. 옥타브의 ‘치명적 비밀’ 때문이다. 대체 그는 왜 사랑하기를 스스로 거부했나? 그 비밀이 무엇이기에? 궁금증 때문에 미친 듯이 책장을 넘겼는데, 비밀은 끝끝내 작품 안에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 허무함이란! 물론 작품 해설에서 그 비밀이 밝혀지기는 한다. 스탕달이 친구인 작가 메리메(Mérimée)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를 두고 옥타브의 비밀은 ‘이것’이라고 밝히는데……. 글쎄. 작품 안에서 독자가 직접 유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8-10-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마지막 문단은 그냥 빼고 넘어가시지, 책을 꼭 읽어보게 만드시네요. ^^

잠자냥 2018-10-10 14:46   좋아요 1 | URL
ㅎㅎ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까지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는데요. 별 한 개 뺀 이유를 말하려다 보니 ㅎㅎㅎ
(만일 이 책 읽으실 계획이라면 온라인에 있는 책 소개도 보지 마세요!)

Falstaff 2018-10-10 15:44   좋아요 0 | URL
옙. 저 이런 정보도 무지 좋아합니닷!!!
 
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불안정한 청춘, 그들의 첫사랑이 연애박사 스탕달의 펜으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사랑받기를 갈망하면서도 스스로 사랑하기를 금지한 옥타브와 아르망스. 이 무모한 연인들의 대책없는 밀당에 책장이 미친듯이 넘어간다. 낭만주의자이자 연애의 달인 스탕달이 그린 러브스토리이니 오죽하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머싯 몸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 또한 그렇다. 읽고 나서 크게 감명을 받았다거나 오래 기억한 적도 드물다. 그럼에도 이상하다. 그의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회상록이라고 해야 할까 <서밍업>이 출간 되었을 때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글을 아주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도 이 책은 궁금했다. ‘문장과 소설과 인생에 대하여’라는 부제에 마음이 끌렸다. 그중에서도 ‘문장과 소설’에 더 꽂힌 것이 맞겠지만.

이 책을 펼쳐들고 읽는다. 이윽고 나는 무뚝뚝하고 냉소적이며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그렇다고 딱히 자기 자신에게도 너그럽지 않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서머싯 몸이다. 이 책 표지를 장식한 그의 얼굴처럼 무언가 매사, 삶 자체가 못마땅한 불만투성이 늙은 남자, 살짝 심술궂기까지 한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난다. 그는 곧 딱딱하고도 건조한 말투로 잔소리를 시작한다. 문장은 이런 거야, 소설은 이렇지, 연극은 또 이렇다고. 그래서 인생은 이렇다네. 나는 이 냉소적인 남자의 말에 조금씩 넘어간다. 그의 말에 조금씩 귀 기울이다가 잠깐만요, 잠깐만요, 메모 좀 할게요! 하면서 허겁지겁 수첩을 꺼낸다. 그가 말하는 속도를 늦추면 좋겠다. 좀 더 깊이 있게 경청하기 위해. <서밍업>은 그런 책이다. 몸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도, 때로는 그의 꼰대 같은 소리에 반문이 들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새겨들을 말이 많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머싯 몸 그의 인생을 곁에서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는 일종의 회상록 같은.

몸은 이 책은 ‘자서전도 회고록도 아니’라고 밝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문장과 소설, 연극, 인생에 대해 77장의 에세이로 담아낸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서머싯 몸, 한 작가의 일생이 고스란히 눈앞에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몸이 그렇게 밝혔음에도 <서밍업>은 그의 자서전 ‘요약본’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인물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읽는 일은 그에 대한 호감이 있지 않는 한 좀처럼 불가능하다. 분명 나는 서머싯 몸에 대한 호감 때문에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몸이라는 한 인간에 예전보다는 관심이 생기고 그의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자신을 미화했는가? 그렇지도 않다. 호감 받을 만한 인물로 그렸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왜 이런 마음이 들까? 그것은 이 냉소적이고 삐딱한 인물이 자신의 글과 작품, 그리고 삶 전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썼으며, 거리를 두고 되돌아볼 줄 아는 자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에 얼마쯤의 존경심이 들기 때문이다.

<서밍업>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간의 굴레>가 떠오른다. <서밍업>에도 ‘인간의 굴레’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인간의 굴레>의 필립은 몸의 페르소나와도 같다. 몸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품들 속에 자기 인생에서 벌어진 일들을 활용해왔으며, 때때로 그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하나의 주제로 삼기도 하고, 그 주제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일련의 사건들을 지어내기도 했다고 <서밍업>에서 밝혔는데, <인간의 굴레>가 바로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절름발이로 태어나 일찌감치 부모를 잃고 삼촌 밑에서 자란 몸. 그는 곧 <인간의 굴레>의 필립이다. 필립은 절름발이로 태어났기에 그 신체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조금 남과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 육체적으로 연약했기에 정신적인 일에 몰두하고, 사색하고 책을 읽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예민한 감수성, 남다른 지각을 지닌 필립은 타인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누군가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기도 한다. 예술을 논하는 사람에게 열광적으로 매혹되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 그런 모습이 순전히 허영으로 보여 그를 멀리하기도 한다. 어릴 때는 종교에 탐닉하다, 모순을 깨닫고 그림이나 문학 등 예술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런 삶에서도 쉽사리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의사에 도전을 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이런 필립의 삶은 <서밍업> 속 몸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

몸은 <서밍업>에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술을 즐겨 마시면서 동료 인간들에게 커다란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회식의 즐거움은 언제나 나를 따분하게 한다. 나는 찬송가도 불러본 적이 없다. 나는 신체접촉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의 히스테리는 내게 혐오감을 안겨주며 기쁨이나 슬픔을 격렬하게 표시하는 대중 사이에 있을 때 나는 평소보다 더 초연해진다. 나는 여러 번 사랑에 빠졌으나 완벽한 사랑의 축복을 느껴본 적은 없다. 나는 나 자신의 독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했다.’ (<서밍업>, 103~104쪽)

예술을 논하는 사람에게 매혹되었던 필립이 어느 순간 그런 모습이 모두 허영이라고 깨달으며 그를 멀리하는 장면도 <서밍업>에서 밝힌 몸의 예술관과 일치한다. 몸은 문화, 즉 예술은 인간의 성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성품을 고상하게 하거나 강화하지 않는다면 문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몸은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량함에 있다고 보면서 책 천 권을 읽은 것이 밭 천 이랑을 간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종종 자기만족을 가져오는데, 자기 지식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인의 어리석은 편견이라고 꼬집는다. ‘진선미는 값비싼 학교에 다녔거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살거나, 박물관에 자주 가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면서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을 활용하면서 그들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몸의 생각은 <인간의 굴레>속 필립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었으리라.


몸은 극작가로서 일찌감치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그는 가난한 삶에 일종의 공포를 느꼈다. 그런 몸의 생각은 <인간의 굴레>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나는 돈이 육감과 같은 것이고, 돈이 없으면 다른 오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밍업>, 150쪽)

재산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가가 그런 문제로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가들 자신의 견해가 아니다. 예술가들은 애호가들이 그들의 적소라고 생각하는 다락방에 사는 것이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돈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돈이 없어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또다시 내몰리기 싫었기 때문이다.(<서밍업>, 217~219쪽)

“세상에서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 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예술가에겐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라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인간의 굴레에서>, 414~415쪽)



이렇듯 일과 돈, 예술, 사랑 등 인생에 대한 몸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인간의 굴레>는 썩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다 읽고 난 뒤에는 평범하고도 지지부진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 그 슬픈 생을 곱씹어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아마도 몸의 진솔한 자기 고백이 작품 곳곳에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립을 비롯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평범하면서도 다층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이 간다. 서머싯 몸은 평범한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예측 불가함과 기이함, 그 무한한 다양성’에서 끝없는 소재를 찾았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탕진 불가능한 무궁무진의 소재’라고 말했는데, ‘이기심과 이타심, 이상주의와 감각주의, 허영, 수줍음, 공평무사함, 용기, 게으름, 신경질, 고집스러움, 소심함, 이런 것들이 모두 한 사람의 내부에 깃들어 그럴듯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고 독자에게 이것이 진실임을 설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때문에 몸은 종종 냉소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인간을 실제보다 훨씬 더 나쁘게 묘사한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작가가 눈감은 인간의 어떤 특징을 좀 더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그가 인간성에 특히 주목한 부분은 일관성이 결여된 점이었다. 실제로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몸이 인간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램버스의 빈민가에서 의사로 지내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그 날것 그대로의 삶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몸은 그 무렵의 수첩에 분노하는 어조로 이렇게 썼다. ‘고통이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타락시킨다.’ 그가 보기에 ‘고통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야비하고, 좀스럽고, 의심이 많아지도록 했다. 고통은 인간을 인간 이상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체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고통을 통하여 체념을 배운다.’(<서밍업>, 86쪽) 이런 통찰력이라니, 그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머싯 몸은 자신이 작가가 된 데에는 물리칠 수 없는 충동 말고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글쓰기를 오리가 물속에 들어가는 일처럼 여겼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평범하고, 어휘는 제한되어 있고, 문법은 불안정하며, 문구(文句)는 낡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그에게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본능이었고, 자신이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썼다’. 사람들 대부분이 ‘타고난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다가 그 삶의 시계가 다하면 촛불처럼 스르르 꺼지’(<서밍업>, 352쪽)는 삶을 살 때에도 그 자신이 ‘소유한 모든 능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삶에서 얻어낼 수 있는 ‘쾌락, 아름다움, 정서, 흥미를 모두 획득하는 자기실현’(<서밍업>, 353쪽)을 이룬 것이다.

몸은 이 책 끝 부분에 ‘인생의 아름다움은 각자가 자신의 본성과 본업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썼다. 몸 자신은 글쓰기로, 문학으로 그렇게 살다가지 않았을까? 그가 보기에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인간이 예술을 통해 때때로 몸을 피신할 수 있는 암자를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그 악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과 맞설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한 암자가 되어야 했다. 몸이 생각하기에 거기에 예술의 의무가 있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을 때만 위대하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한 서머싯 몸. 그의 작품이 오늘날 바로 그런 예술이 되었으니, 그는 지금 저 먼 곳에서 아마도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을까. 이 깊어지는 가을에 그의 작품들을 더 찾아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경기문학 3
배수아 지음 / 테오리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뱀과 물>에 이어서 읽는다. 여기 실린 작품들 또한 <뱀과 물>과 이어져 있다. 카프카에 대한 오마쥬이자 찬가로 읽히는 작품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모호한 세계가 매력적으로 빛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