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폰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0
루돌프 V.예링 지음, 윤철홍 옮김 / 책세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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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빵을 먹을 수 없”듯이 “당신은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다. 고별 강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차고 뜨거운 예링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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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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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대형 쇼핑몰에서 나는 본다. 부부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음식점은 이미 만원이고 그들은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내는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쁘고 아이는 아이대로 제 또래와 노느라 정신이 없다. 바로 그때, 나는 남편의 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권태와 짜증,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아내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내는 통화중이라 남편의 시선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남자는 아내를 더없이 증오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봐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그들도 한때는 사랑을 했겠지. 그러니까 아이도 낳으며 함께 살고 있겠지. 그래, 그들도 한때는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만이 간직한 하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테니스코트. 하필이면 테니스코트다. 폴과 수전은 테니스코트에서 만난다. 나는 슬쩍 미소 짓는다. 문득 내 이야기가, 나의 단 하나의 이야기, 아니 너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너를 테니스코트에서 만났듯이, 폴과 수전도 테니스코트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 테니스공을 쫓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럼에도 유독 너만은 눈에 들어왔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함께 팀을 이룬 폴과 수전은 게임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게임하는 방식, 포핸드 백핸드 공을 치는 법,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 코트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서로를 파악한다. 너와 내가 그러했듯이. 테니스코트에서 너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폴과 수전처럼 우리는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을 본다. 나와 너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에 비하면 폴과 수전의 사랑은 조금 뻔해 보인다. 그런데 폴과 수전 또한 그들 나름대로 경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진부해 보이리라.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일 것이다. 자신들은 범주와 표시를 다 벗어나 있다’(27쪽)고 생각하는.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The Only Story>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절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사랑이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흐지부지되었을지언정, 또는 애초에 시작도 못했거나 자기 혼자만의 마음속에서만 있는 일이었을지언정, 이 세상에 존재했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지금 여전히 사랑을 지속중인 사람이라면 그가 떠올리는 장면들은 대개 장밋빛이리라. 사랑에 빠진 폴처럼 그 또는 그녀의 웃음, 웃는 방식에 주목하고, 폴에게 수전의 이빨이 남다르게 다가왔듯이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사소한 신체적 특징 또는 결점(다른 이에게는 결점으로 보이더라도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매력인!)에 열광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미 끝났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사랑이 자기 삶에서 빠져나간 사람이라면 그 기억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우리 참 행복했는데”하고 말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우린 진짜로 행복했던 적이 없어.” 말하듯이, 끝난 사랑은 대개 서로 다른 기억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289쪽). 이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할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331쪽)이기 때문에. 감정적 기록은 역사책과는 달리 그 진실은 항상 변하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기 때문에(289쪽). 


<연애의 기억>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못지않게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의 부정확한 기억이 빚어내는 생의 희비극에 대한 반스의 통찰은 이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빛을 발한 적이 있다. 한때는 서로 사랑했고, 어쩌면 사랑에 빠졌었다고 기억(착각)하는 남자의 제멋대로 부풀려지거나 또는 축소된 기억, 즉 윤색된 기억. 진실을 알 수 없는 모호한 기억의 엉킴으로 인한 삶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폴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와 닮았다. 철저히 폴의 관점에서 그려진 수전은 토니가 묘사한 베로니카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젊은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그런 그에게 토니의 선생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도 했다. 그들의 이런 말들은 한 사람의 일생, 즉 개인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투영할 수 있다. 역사와는 달리 한 사람의 일생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때문에 나이 든 토니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할 때 그 역사는 곧 한 사람의 생이 된다. 누군가의 삶은 주로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결국 평범한 이들의 회고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애의 기억>속 폴의 사랑 이야기가 된다. 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한 기만일 수도 있는 어느 사랑의 역사….  


폴이 기억하는 그의 첫사랑은 처음에는 눈부시다. 도발적이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이라는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부모의 잔소리 또는 암묵적인 협박, 미스터 매클라우드와 그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의 존재 등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까지. 첫사랑의 역사에 어울릴만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폴의 관점, 폴의 처지에서 그렇다. 폴보다 삶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이해한 여자, 그래서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수전, 그녀에게는 폴이 첫사랑도 아닐뿐더러 처음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은 위험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수전에게 사랑이란 그녀가 희미하게 언급했던 첫사랑이 사라진 뒤 미스터 매클라우드를 거쳐 폴에 이르는 동안 내내 어떤 고통을 싹틔울 수밖에 없는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매클라우드와 함께할 때부터 있었던 음주벽이 그녀의 그런 쓸쓸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수전의 이야기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으므로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수전이 폴을 바라보며 ‘내 평생 어디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어버렸을 때 수전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폴은 첫사랑의 눈부신 기억을 쫓는다. 거기에는 행복한 기억도 괴로운 기억도 존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행복했던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운 사랑의 흔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고독하게 지낸 한 남자의 인생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 수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한다. 폴처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사랑이 끝난 뒤라면 더욱 그렇다. 비탄에 잠겨 자기의 역사, 이제 끝나버린 어느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그 생생한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에, 그것이 식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이다. 끝이 좋지 않아서 ‘나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랑에도 여전히 좋은 사랑의 잔재, 기억은 포함된다. 수전을 기억하는 폴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쁜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에 자국을 남긴다. 좋은 쪽에 남기기도 하고, 나쁜 쪽에 남기기도 한다.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테고 저마다 개별의 하나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여러 개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이어져 하나의 삶이 된다. 아내를 더없이 증오에 찬 눈으로 쏘아보던 남자. 그 남자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분명, 사랑은 있었을 것이다.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도로 증오하는 듯한 한 쌍.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한 쌍. 그러나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75~76쪽)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야기는 모두에게 곧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이자, 단 하나의 인생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폴이라는, 그리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 팔짱을 낀 채 조금은 관조적인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폴이 늙고, 수전은 더 늙고, 그들의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사랑이, 자신들은 틀림없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그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 그래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한 사랑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끝이 있다는 참혹한 진실을 알려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쓸쓸하고도 비통했다. 사랑이 그렇듯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찬란하리라고, 나의 사랑과 삶만큼은 타인과 다를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진실은 친절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오듯이, 인생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 닳아버린 세대’가 될 즈음에 그런 깨달음은 더 깊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폴과 수전은 사랑했고, 사람들 또한 사랑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 때문에 행복하거나 또는 괴롭거나 할 것이다. 나와 너의 기억이 어떻게 다르든 모든 연인은 진실을 말하며, 사랑과 진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 사는 것은 진실 속에 사는 것’(243쪽)이기에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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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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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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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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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그의 마지막 책이 될 줄은 몰랐다. 부음을 듣고 차마 못 읽던 이 책을 이제야 읽는다. 단아하고 섬세한 문장에 세상을 보는 너른 시선. 그 깊은 사유의 결과물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저 먹먹하다. 사소한 것에서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사소한 부탁’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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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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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에 읽은 <환상의 밤> 또한 그렇다. 대개의 츠바이크 작품이 그러하듯이 책을 손에 잡으면 멈추지 않고 읽게 된다.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이다. 이 작품은 불감증에 걸린 한 사나이가 ‘환상적인 밤’을 보낸 뒤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 나간다. 불감증에 걸린 남자와 환상의 밤이라? 이런 조합만으로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그런 상상을, 츠바이크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나’는 교양 넘치는 고상한 시민이자 부자이다. 그는 인구 백만이 넘는 화려한 도시에서 최상류 인사들과 가깝게 교제하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지낸다. 연애기술도 탁월한 편이라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야말로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 잘 고른 넥타이, 좋은 책이나 자동차 여행, 카페에서 여성과 대화하는 한 시간에서 행복감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삶을 누릴 줄 아는 진정한 ‘향유자’이자 세련된 멋을 아는 남자. 그는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치 영국식 신사복처럼 사교계에서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생활양식에 몰입해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이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 삶을 즐길 줄도 알고 행복도 느낄 줄 알던 이 남자에게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느 날 그는 미칠 듯한 공허감, 무력감, 권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의 내부는 ‘모든 물체를 반사할 따름인 유리알처럼 공허’하다는 생각만 든다. 삶이 지나치게 윤택하고, 고통도 고난도 없을 때, 보통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권태’ 그 자체에 빠져버린 것이다. 츠바이크는 이런 상태를 정확히 묘사한다. ‘삶의 모든 요구를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시도하거나 쟁취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미 긴장과 감정의 결핍, 삶 자체가 무기력함을 배태하고 있었던 것’(13쪽)이라고.


나라는 인간은 물속으로 침투되지 못하고 반사되기만 하는 빛처럼 표면적인 삶만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무감동은 부패의 고약한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죽어 있는 상태, 무섭게 얼어붙은 감각 불능의 상태, 실제적인 육체의 소멸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17쪽)

다른 사람들이 청춘이라고 칭하는 시절은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청춘과의 이별이란 나에게 유별나게 서글픈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청춘 역시 별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쪽)


이런 그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마음속으로 그 자신이 명예심이나 만족감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강렬한 삶을 갈망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우연히 찾은 경마장. 흥분과 광기, 열광, 또는 아쉬움과 비탄에 잠긴 사람들…. 경마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눈에 불을 켠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조차 동화되지 못하고 사람들을 냉정한 눈으로 관찰할 뿐이다. 흥에 취한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우스꽝스럽고 섬뜩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터무니없는 행동의 가소로움이나 발작과도 같은 비천함’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과 광기, 열광에 내재한 그 어떤 생명력에 미묘한 동경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과연 이 권태의 늪, 무엇에도 감동할 줄 모르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경마장의 뜨거운 열기도 그를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을 지켜보다가 돌아가야만 하는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뒤에서 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그 여인이 어떤 유형일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편다. 상상은 꽤 자극적이다. 돌아볼까 말까?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는 그.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그의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꽤 관능적이다. 여인은 어느 장교를 희롱 중인데, 그의 시선도 즐길 만큼 대범하다. 그녀와 눈싸움 아니, 기 싸움을 벌이는 그. 이 놀이가 은근히 즐겁다. 

장교와 사귀는 사이인가 싶은데 난데없이 비속하기 그지없는 뚱뚱한 사내가 나타난다. 그녀의 남편이다. 경마에 빠진 남편과 함께 경마장을 찾은 여자는 그 와중에도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던 것이다. 이 기묘한 부부와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그를 몰아간다. 환상의 밤이 그에게 펼쳐진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마에 빠진 남편과 관능적이고 방탕하기 짝이 없는 아내. 이런 부부와의 만남과 환상의 밤이라? 흠. 그렇고 그렇겠군.’ 생각하겠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당신의 상상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은 뒤 문득, 중학교 때 한 사건이 떠올랐다. 어느 오후, 학교가 끝난 뒤 친구와 함께 집에 가던 길이었다. 슈퍼마켓 가판대에 놓인 바나나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것을 훔쳐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에게 무작정 “뛰라고 하면 뛰어” 말했다. 이윽고 나는 바나나를 들고 뛰었다. 친구도 뛰었다. 어느 골목에 이르러 친구와 나는 숨을 돌리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바나나는 친구에게 모두 줘버렸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는 “먹고 싶지도 않은 걸 왜 훔쳤어?” 물었지만 나는 그냥이라는 말만 했다. 훔친 이유는 없었지만 바나나를 들고 달리던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단지 달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훔쳤다는 사실.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내가 금기를 깼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심심했을까? 그저 중2병이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환상의 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규율과 질서를 존중하던 도덕적인 시민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자신을 자각한다. 그의 냉담한 표면의 바닥 어딘가에는 여전히 뜨거운 열정의 샘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우연’이라는 마법의 지팡이에 이끌려 그의 심장 위까지 치밀어 오른다. 완전히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그의 내부에 세속적인 삶의 비밀스런 활화산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까지 그가 그토록 무감동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았던 것은 ‘사회적 망상, 소위 젠틀맨의 오만함에 의해 불구화되고 유린되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비참함의 가장 깊은 곳, 그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된다. 거기서 ‘상황이 가져다 준 소름끼치는 굴종’을 마음껏 즐긴다. 생전 처음으로 야생적이고 충동적인 것, 비천한 것 속에서 그 자신과의 친밀성을 느낀다. 그리하여 ‘실종자나 다름’없었던 그는 ‘온전하고 무한한 세계의 문을 열고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무디고 미온적이며 공허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인간의 마음을 그 어떤 이보다 날카롭게 꿰뚫어볼 줄 알았던 츠바이크는 이 짧은 작품 안에서도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뒤쫓는다. 인간의 모순과 결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츠바이크였지만 그래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마음을 울린다. 슈테판 츠바이크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마 누구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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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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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에 시달리다 못해 불감증에 이른 한 사나이의 기묘한 경험과 그로 말미암은 변화를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 인간 심리의 대가 츠바이크. 이 짧은 작품 안에서도 인간의 기이한 심리를 얼마나 예리하게 꿰뚫어 보는지, 그 통찰력과 표현력에 그저 감탄 또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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