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다른 책으로 건너가는 길을 마련해준다. 최근 읽은 <미하엘 콜하스>도 바로 그 ‘어떤 책’이 내준 길을 통해 만났다. <미하엘 콜하스>는 몇 해 전에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으로 개봉한 적이 있다. 그 무렵에는 영화는 물론 원작인 이 책도 그다지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한 남자의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쥐뿔도 모르면서 말이다.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를 읽지 않고 죽는다면 얼마나 아까울까! 이제라도 읽었으니, 참 다행이다. 이 고마움을 그 어떤 ‘책’에게, 그 책의 저자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쯤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그 ‘어떤’ 책이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바로 그 책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예링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려는 개인과 사회의 자각을 이끌어내면서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권리를 위해 끝까지 싸운 인물로 ‘미하엘 콜하스’를 예로 든다. 예링은 <미하엘 콜하스>를 이렇게 말한다.
클라이스트가 자기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 속에서 매우 감명 깊고 진지하게 묘사해놓은 인물, (...) 미하엘 콜하스는 다르다.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멸시당한 자기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취한 후, 그리고 잔악한 내각이 재판이 그에게 법적 구제 방법을 폐쇄하고 사법을 최고의 대변인인 영주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하게 불법의 편에 가담시킨 후에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 때문에 끝없이 비통한 감정으로 가득 차 “인간으로서 짓밟히기보다 차라리 개가 되겠다”고 말하고, 이어서 “내게서 법률의 보호를 거부하는 자는 나를 황야의 야만인들에게 내쫓는 자이며, 스스로를 보호할 몽둥이를 내 손에 쥐어주는 자다”라면서 결심을 굳게 다졌다. 그는 부패한 재판관의 손에서 더렵혀진 칼을 빼앗은 다음 그것을 휘둘러 온 나라를 공포와 경악에 떨게 했고, 부패한 국가 제도를 무너뜨렸으며, 왕위에 있는 군주로 하여금 전율하게 했다. 그러나 그를 격분시킨 것은 거친 복수의 감정이 아니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다로 하여금 이리 떼들과 맞서게 하기 위해 온 천지에 폭동의 나팔을 불고 싶다”면서 침해된 법 감정 때문에 전 인류를 향해 전쟁을 선언한 카를 무어와 같은 강도나 살인자가 아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윤리적인 이념, 즉 “자기가 받은 침해를 배상받고 장래의 침해로부터 동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바쳐야 할 의무를 이 세상에 지고 있다”는 이념이다. 그는 이 이념을 위해 모든 것, 즉 가족의 행복과 명예와 재산과 신체와 생명을 희생한다. 그리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파괴적으로 싸우지 않고, 오직 죄과가 있는 자와 그의 동조자만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권리를 회복할 만한 전망이 보일 때는 자진하여 무기를 버렸다. (...) 사람들은 흔히 “순교자가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에는 진실하다고 판명되었다. 또한 경고성을 띤 그의 모습은 그가 받았던 이러한 권리의 억압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 작용했다. (루돌프 폰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이런 구절을 읽었는데 어찌 <미하엘 콜하스>가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읽게 된 <미하엘 콜하스>는 첫 장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클라이스트의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찬 문체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100쪽을 조금 넘는 분량으로 중편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미하엘 콜하스>는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단순하다. 16세기 중엽 작센의 한 마을에 사는 미하엘 콜하스라는 말장수가 어느 날 부당하게 지주귀족 계급인 융커에게 보기 좋게 살찐 말 두 마리를 빼앗긴다. 콜하스는 융커의 횡포에 맞서 법원에 탄원함으로써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세도가인 융커는 이미 곳곳에 손을 써둔 상태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과정에서 아내마저 목숨을 잃자 크게 절망한 그는 더 이상 법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정의를 세우고 자신의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고자 폭도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융커의 성으로 향한다. 콜하스는 과연 그의 뜻대로 융커를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빼앗긴 말을 되찾을 수 있을까.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사이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반전처럼 얽히고설켜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융커를 비롯한 지배계급의 암묵적인 연합과 그에 따른 온갖 만행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끓어올라, 스스로 복수를 꿈꾸며 봉기에 나선 미하엘 콜하스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올곧았던 사람, 서른 살까지만 해도 선량한 백성의 귀감으로 삼을 만했던 사람, 이웃 가운데 운 나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정의롭던 미하엘 콜하스는 ‘정의감이 지나쳐’ 도적이자 살인자가 된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벼랑으로 내몬 것은 그의 불타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법체계, 뒤틀린 사회 구조에 있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도 남을 것이다.
콜하스는 단지 말 두 마리가 아까워서 소송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개 두 마리였다 할지라도 똑같이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법이 정의를 위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세상을 살면서 잘 담금질된’ 그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착실한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목적’을 찾아 분연히 일어섰다. ‘내 권리를 지켜주려 하지 않는 나라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재산을 처분하고 자기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폭도가 된다. 때문에 그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곳곳에 붙인 격문에는 “더 나은 세상 질서를 세우기 위한 자신의 투쟁에 합세”하라는 구절과 함께 자신을 “하느님께만 순종할 뿐 제국과 세계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라고 일컬은 문장이 포함된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철저히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그리스도교의 문제점을 폭로하기도 한다. 콜하스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많아지자 거침업이 타오르는 불길을 막고자 콜하스를 설득하기 위해 목사인 마르틴 루터가 나선다. 그런데 그는 철저히 지배계급이자 권력을 가진 자의 편이다. 루터는 ‘하나님’ 운운하며 세상에서 얻은 지위와 권위로 콜하스를 타일러 그를 ‘인간 사회질서의 틀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런 루터의 말을 듣노라면 독자는 또 한 번 분노하게 된다. 루터는 콜하스를 ‘눈먼 격정에 미친 듯 사로잡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의에 흠뻑 물들었다’ 말하며 그가 ‘거짓과 간악함에 가득 찬 주장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며 그가 휘두르는 칼은 도적질과 살인의 칼이라고 말한다. 또한 콜하스는 ‘역적에 지나지 않을 뿐, 정의로운 하느님의 전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하느님을 생각해서라도 융커를 용서하고 여위고 들피진 말이라도 돌려받는 게 낫지 않느냐’면서 ‘그 말에 올라타고 콜하젠브뤼크로 돌아와 마구간에서 살찌우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회유한다. 애초부터 루터는 콜하스가 하찮은 재산 소송 때문에 봉기했다고 인식하는 처지이니, 그가 정의를 위해 칼을 들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콜하스를 설득하는 루터의 말을 듣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수긍이 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말이다. “융커 폰 트롱카를 네 멋대로 판결하여 습격할 권리를 누가 너에게 주었느냐? 융커를 성에서 찾지 못했다고, 융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사회를 불과 칼로 송두리째 징벌할 권한을 누가 너에게 주었느냐?” 이 문장을 읽을 때는 한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유괴범을 납치해 피해자들이 스스로 복수하는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 피해자의 유족들은 잔혹한 방법으로 유괴범에게 복수한다.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고, 그 판결이 범죄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사법부가 송두리째 썩었다면서 분노한다. 날이 갈수록 사법권에 대한 불신이 깊어가고 있다. 심지어 오늘은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대법원장 차량에 화염병을 투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하나같이 법을 믿지 못하고, 판결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칼과 불을 들고 일어선다면 사회가 아수라장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에는 독자들이 그의 분노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법집행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융커와 똑같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콜하스는 자신을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했’다고 인식한다. 만일 그가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한 게 아니라면, 자신이 지금 인간 사회와 벌이고 있는 전쟁은 악행’이라고 말한다. 이에 루터는 그런 콜하스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라며, ‘국가가 존재하는데, 누가 무엇을 하든 국가에서 추방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고 되묻는다. 이때 콜하스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루터에게 던진다. 아마도 이 작품의 핵심 문장이 아닐까(이 문장은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도 인용되었다).
제가 말하는 추방당한 자란, 콜하스는 종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를 뜻합니다! 저는 그 보호를 받아야만 평화롭게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보호를 믿었기에 모은 재산을 다 들고 이 사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보호를 해주지 않는 것은 저를 황야의 야수들에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지키라고 제 손에 몽둥이를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미하엘 콜하스>, 56쪽)
너무나도 정의로운 미하엘 콜하스.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분연히 일어선 그는 무척 많은 것을 잃는다. 소중한 아내도 잃고 행복했던 그 소박한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애초에 눈 한번 질끈 감고 세상은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서 쓰린 속을 아내와 달래면서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았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말 두 마리를 잃어버린 것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콜하스는 이 작품의 화자가 말하듯이 ‘자신의 손으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 성급히 나섰기’ 때문에 파멸로 치닫는다. 그가 권리를 잃고도 아무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고 말았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일어섰다. 오직 정의 때문에. 그리고 그 정의는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눈 감으면 귀족들은 계속 다른 백성들에게도 그럴 것이었기에…. 이 점에서 미하엘 콜하스의 위대함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미미하더라도 언제나 이런 콜하스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권리를 위한 투쟁>과 <미하엘 콜하스>는 이렇게 인간의 정의와 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고전의 힘, 문학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