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기질
유진 오닐 지음, 백승진 옮김 / 지앤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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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 그로 말미암은 정신적 몰락과 붕괴 등을 그리는 데 탁월한 유진 오닐은 <시인의 기질>에서도 또 한 번 그 재능을 발휘한다. <시인의 기질>에도 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제 마흔 다섯 살인 ‘코닐리어스 멜로디’와 그의 아내 ‘노라’, 그들의 딸 ‘사라’가 이 희곡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말처럼 이 가정의 문제는 무엇일까?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란한 가정일 수도 있지만 어찌 유진 오닐의 작품에서 그러기를 바라겠는가. 그리고 이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1828년 7월, 보스턴에서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어느 마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코닐리어스 멜로디는 여관 및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 이 여관은 역마차들이 지나다니며 번창했으나 노선이 끊기면서 몇 년 동안 방치된 상태이다. 손님도 거의 없는 이 퇴락한 여관 식당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작품은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여관 주인인 멜로디에게는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술을 좀 좋아하는 것 같고, 지나간 세월에 얽매여 사는 인물인 듯하다. 이게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곧 드러난다. 


두 사람의 대화에 이어 멜로디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한때는 아주 잘생겼지만 이제는 피폐해진 얼굴이 그의 방탕한 생활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유진 오닐은 멜로디를 ‘적의를 품은 바이런류 영웅의 얼굴로 입은 오만하고 관능적이며 코는 조각을 해 놓은 듯’하다고 묘사한다. 또한 그의 매너는 과장돼 있어서 실제 그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과장해서 연기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특별하고 인상적인 뭔가가 있는데, 반도전쟁 당시에 영국 귀족이 입었던 스타일의 고가의 우아한 맞춤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입만 열면 장교와 신사의 품격을 운운하면서 바이런의 시를 낭독한다. 퇴락한 여관에서 아침부터 술기운을 풍기며 영국 귀족 옷을 입고 바이런 시를 읊는 사나이라니,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신사와 귀족의 품격을 운운하는 이 기묘한 사나이의 비밀(?) 아닌 비밀은 그의 아내 노라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벗겨진다. 마흔인 노라는 세월의 흔적으로 빛바랬지만 젊었을 때는 꽤 아름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녀는 신사병에 걸린 변덕쟁이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아침부터 전전긍긍이다. 남편은 술이 들어가면 너그러워졌다가 불현듯 노라에게 화를 낸다. 그런데도 노라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또 그를 어떻게 달래는지 아는 것 같다. 멜로디의 지나간 과거를 화려하게 부추겨주고 조금씩 술을 마시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비록 멜로디로부터 머리에서 스튜 냄새가 난다고 무자비하게 구박을 받을지언정, 허름한 옷차림에 종일 여관 일을 돌보고 오늘은 또 어떻게 외상을 얻을까 고심할지언정 노라는 남편을 받들어 모신다. 마치 멜로디가 자신의 지나간 시절과 바이런의 시를 받들어 모시듯이.


사라는 이런 부모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특히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귀족놀이에 빠져 순종 말을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아빠에 대한 반감은 상당하다. 멜로디가 순종 말을 타고 다닐 때 노라와 사라는 아빠의 축하연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 열기 속에서 땀 흘리며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도 멜로디는 딸이 귀족적이지 못하다고, 천하고 탐욕스럽다면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사라가 아일랜드 사투리를 쓰면 무섭게 화를 낸다. 그러다가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 진정하고는 한다. 그런 천박한 말을 하면서 사라를 몰아세우는 것은 결코 ‘신사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귀족적이고 신사다워 ‘보일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라는 그런 멜로디를 간파하고도 남는다.

 


사라: 세상에, 오직 환상만이 아빠에겐 현실이야. 그런 동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해. 그런데 내 일을 걱정하면서 아빠의 환상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술이나 마시고 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마. 아빠! 아빠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제정신이 아니야. 뭐가 거짓이고 환상이고, 뭐가 사실인지 전혀 분간이 안 돼? (<시인의 기질>, 59쪽)


사라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자 희망이 있는데, 바로 여관 2층에 머물고 있는 사이먼과 결혼해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는 것이다. 사이먼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몽상가로 하포드 가(家)의 상속자이다. 오두막에서 홀로 살면서 자연과 하나가 된 삶을 꿈꾸던 그는 사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몸이 좋지 않아 사라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여관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사이먼의 배경을 아는 사라는 물질과 신분 상승을 꿈꾸며 어떻게든 그와 결혼하려고 애를 쓴다. 사실 사이먼의 집안인 ‘하포드 가(家)’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진 오닐은 1755년부터 193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하포드 가(家)의 역사를 추적하는 11편의 드라마를 썼다. 하포드 집안 이야기를 통해 그는 미국 자본주의 정신이 타락해 가는 과정과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인간성이 어떻게 상실됐는지를 비판하고자 했다. 한 집안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와 얽힌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1편의 작품 중 대부분은 유진 오닐이 죽기 전에 불태워 버렸고, 지금은 <시인의 기질> 등 단 세 편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시인의 기질>은 하포드 가와 얽힌 멜로디 집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포드 집안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멜로디 집안은 위기를 맞는다. 사이먼과 사라의 관계를 떼어놓으려고 하포드 가에서 손을 쓰게 되는데, 그로 인해 ‘멜로디’의 환상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환상이 무너지고 난 뒤의 멜로디는 더없이 처참하다. 더 이상 신사이기를 포기한 그는 딸에게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폭언을 퍼붓는다. 사이먼이 아니라 여관에서 일하는 말로이가 사라의 상대로 적합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와 말로이는 잘 통할 거야. 사투리도 잘 어울리고. 그는 건장한 동물이지. 너희 둘은 가축우리 같은 집의 진흙 바닥 위에서 소리 지르면서 돼지들과 싸울 무식쟁이 애들을 많이 나을 수 있을 거야.’ 집안에 감도는 이상 기운 때문인지, 멜로디에게 한없이 순종적이기만 했던 노라마저도 남편에 대한 진짜 자기 생각을 사라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노라: 자기 자신하고 자기 자존심 말고는 누군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야. 맞아. 빌어먹을 영국의 빨간 군복을 입고 있는 위대한 신사인 네 아빠가 나를 생각한 적은 없었어. 자존심 하나는 대단해! 그런데 그게 허상 아닌가? 더러운 술집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을 잘 속여 먹는 네드 멜로디의 핏줄 아닌가? 아니야! 이런 말 하면 안 돼! 결코 안 돼! 네 아빠는 자신의 환상을 결코 비웃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시인의 기질>,164쪽)


이 가정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하포드 가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고고한 ‘신사’였던 멜로디는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또 노라는 왜 그토록 멜로디에 대한 신랄한 발언을 딸에게 하기에 이르렀을까? 멜로디가 보기에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몽상가이면서 어수룩’한, ‘시인의 기질이 있는’ 사이먼은 탐욕스러운 사라에게는 ‘식은 죽 먹기’와도 같은 제물이다. 사라는 정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멜로디가 바이런을 읊으며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그러나 끝내 가질 수 없었던 ‘시인의 기질’을 하포드 집안의 장남인 사이먼은 정말 갖고 있을까? 이 모든 궁금증은 <시인의 기질>을 직접 읽는 독자들만이 알 수 있으리라. 


멜로디가 그토록 아낀 순종 말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환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살아갈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바이런의 시와 순종 말 한 마리, 잘 다려진 군복. 이런 것들만을 좇던 멜로디의 허세는 한심스러웠지만,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가엾기도 하다. 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환상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사람을 살게도 하고 또 때로는 죽게도 하는 환상의 실체가 <시인의 기질>에서는 생생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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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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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세와 조르주 상드의 실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작품. 뮈세 버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나 할까. 뮈세의 아름다운 문장 때문에 작품이 한결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사랑의 거의 모든 것-이렇게 사랑해야 하지만, 또 이렇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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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0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요즘 리뷰가 왜 이리 짧으세유?ㅎ

잠자냥 2018-12-05 14: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냥 책 읽은 기록용으로 100자평만 올리고 있네유. ㅎㅎ

카알벨루치 2018-12-05 14:22   좋아요 2 | URL
그럼 안되유~기달리는 독자들이 있는뎅~잠자냥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좋은 작가를 만났는지 감솨하고 있습니다 늘~

잠자냥 2018-12-05 14:31   좋아요 1 | URL
눼 명심하겠습니다. ㅎㅎㅎ

봄밤 2018-12-0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주 상드의 실제 사랑을 바탕으로 했다니 궁금하네용! 꼭 읽어봐야겠어요! :)

잠자냥 2018-12-05 21:59   좋아요 0 | URL
네, 이 작품 자체로도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시인의 기질
유진 오닐 지음, 백승진 옮김 / 지앤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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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과거에 사는 아버지, 이미 시들대로 시들어버린 사랑 속을 헤매는 어머니, 언젠가는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리라는 야망을 지닌 딸 등등 인물 모두가 저마다 환상에 빠져 살고 있다. 그 환상이 산산이 깨져버릴 때,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를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역시 유진 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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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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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처럼 몰아치는 이야기와 질주하듯 내달리는 박진감 넘치는 문장. 이 한 권으로 클라이스트에게 완전히 반했다. 대표작 ‘미하엘 콜하스’는 물론 기존의 질서나 도덕, 종교, 가부장의 권위에 맞서는 독특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다른 단편들도 무척 매력적이다. 그는 정녕 시대를 앞서간 작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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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 - 셰르파, 히말라야 원정대, 두 문화의 조우
셰리 B. 오트너 지음, 노상미 옮김 / 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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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힘들여 올라가나’ 생각하기도 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물론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남다른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말하는 이도 있고, 산에서 느끼는 고양된 마음과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도나 티베트, 네팔 같은 곳을 다녀오거나 그러기를 꿈꾸며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주로 ‘영적인 구원’ 같은 것들-을 운운한다. 나는 이런 지역, 그러니까 네팔이나 티베트, 인도 같은 곳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안락하고 깨끗한 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도 갠지스 강을 간다고, 네팔이나 티베트를 다녀온다고 내 영혼에 뭔가 기적적인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품는 것 또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이런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세계의 지붕이자 하늘의 이마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두 발로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곳은 네팔과 티베트(중국)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서구인들이 영적인 구원을 꿈꾸며 떠나는 장소가 되었다. 쉽사리 등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쟁’의 장이 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은 등반가들이 어떤 동기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인종과 계급, 종교, 젠더 차원에서 다룬다. 기존의 히말라야 관련 책들이 주로 등반에 성공한 서구 등반가들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이 책은 등반가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거의 등반은 성공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존재)인 ‘셰르파’에 주목하여 그들 또한 나름의 복잡한 인생과 의도가 있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산이라든가 등반에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셰르파’는 단순히 히말라야에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현지 가이드나 포터쯤으로 생각했다. 물론 셰르파들은 그런 역할을 한다, 다만 셰르파란 네팔 북동쪽 에베레스트 대산괴 주변의 산과 계곡에 사는 ‘소수민족’ 자체를 지칭한다. 이들은 애초부터 고산지역에서 나고 자랐기에 뛰어난 적응력으로 히말라야 원정대에게 엄청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떤 등반가도 셰르파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오른 경우는 없기 때문에 셰르파는 히말라야 등반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구 원정대나 일본 또는 우리나라 원정대가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들 위주로 구성된 원정대’의 모습이 대서특필될 뿐이지 함께 등반한 셰르파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서 말했듯, 셰르파 없이 히말라야 등반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산소통만큼 중요한 존재라고나 할까. 셰르파들은 높은 보수, 개인적인 출세 가능성 등을 이유로 등반에 참여하면서, 물품 운반, 요리와 청소, 루트 개설 등을 담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셰르파들이 ‘높은 보수’, 즉 돈 때문에 등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초창기 서구 원정대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네팔 당국에 지불해야 하는 돈을 비롯해서 원정대를 꾸리고 셰르파를 고용하는 등의 비용까지 헤아리면 최고 9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이 책에서는 1996년 등반대의 경우 에베레스트산 정상까지 전문가의 안내를 받는 대가로 각자 6만 5천 달러 정도 지불했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할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히말라야 등반은 애초부터 계급과 인종 문제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시작된 국제 등반가의 대다수는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중상류층 출신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해서 비단 서구 원정대만이 아니라 아시아 원정대도 일본 및 한국 등 히말라야에 ‘입장’할만한 경제력을 갖춘 이들로 구성된다(이 엄청난 비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금 활동을 벌이거나 스폰서를 등에 업는다). 한쪽에서는 돈을 들여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등반에 몸을 던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도우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목숨까지 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는 ‘사히브’(힌두어로 ‘보스’나 ‘주인'을 뜻함. 등반가를 지칭)들을 셰르파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1976년 미국 20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릭 리지웨이(Rick Ridgeway)와 셰르파의 대화를 보면 극명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니마, 셰르파들은 원정대 일을 좋아하나, 아니면 구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을 더 좋아하나?”
“아, 셰르파가 돈이 있다면 집에서 마누라와 자식들이랑 있겠죠. 원정대 일은 매우 위험해요. 하지만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받으니까요.”
“니마, 등반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우리는 왜 하고 싶어 할까?”
“저야 모르지요. 아시겠지만 셰르파들도 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마 당신네는 돈이 너무 많아 어찌 써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휴가를, 그리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나?”
니마는 웃었다. “글쎄요. 정 우리 생각을 알고 싶다면야, 우리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네들은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7쪽)


이 차이는 사히브나 멤사히브(여성 사히브들을 지칭)로 구성된 서구 원정대와 셰르파 사이에 권력 및 계급 차이를 비롯해 문화차이까지 유발한다. 초창기 등반가들이(현재도 물론) 셰르파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했다. 1920~30년대 서구의 등반가들은 그 무렵 천박한 물질주의에 결여된 ‘영성을 구현’한다는 생각으로 산에 올랐고, 이들은 금욕주의, 신비주의, 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셰르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셰르파들은 그들의 ‘영성적인 고급 스포츠 게임’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근대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면 등반은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근대가 시끄럽고 산만하다면 등반은 평화롭고 성찰적’이다. 또한 ‘근대가 편하고 지루하다면 등반은 어렵고 도전적이며 스릴이’ 있다. 에베레스트의 ‘거기’는 근대의 ‘여기’와 대조되는 지점이었고, 서구 등반가들에게 반근대를 상징하는 히말라야와 ‘거기’에 있는 셰르파들은 에베레스트와 마찬가지로 때 묻지 않은 자연, 순수한 자연, 그렇기 때문에 물질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서구 등반가들은 셰르파를 ‘아이들처럼 걱정 근심이 없다’ 라던가 ‘극동의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이 맨발의 천사들’로 표현하며 그들을 순진무구한 존재로 타자화했다.


초기 사히브들은 셰르파들이 주로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에서 등반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믿었던 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히브들은 셰르파들도 자신들처럼 낭만적이고 모험적인 등반 욕구를 가져서 등반을 하는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돈에 대한 셰르파의 관심을 최소화하거나 셰르파에게 돈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의문시했다. 그들과 달리 셰르파에게 돈이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0쪽)

셰르파가 등반 관련 일에 뛰어든 주된 이유가 그 일이 지불하는 돈과 그 돈이 수반하는 물질적 만족, 의존관계로부터의 자유, 보다 넓고 보다 국제적인 세계에의 참여 때문이라는 점이 금세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사히브와 셰르파에게 공통되게 돈은 안전, 자유, 평안, 지위, 권력,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아마 역사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그리고 현 논의와 가장 밀접한 차이는 많은 셰르파에게 돈이 자유라는 근대성을 사는 수단으로서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반면, 보다 낭만적인 혹은 보다 반근대적인 많은 사히브에게 돈은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근대성의 일부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다.(<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2~255쪽)


여성 등반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1970년대까지 히말라야 등반은 압도적으로 남성의 스포츠였다. 거의 배타적으로 셰르파들과 부유한 선진국 남자들만 참여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야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으로 상당수 여성들이 등반이라는 스포츠에 발을 들였고, 셰르파 여자들, 즉 ‘셰르파니’가 등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의 등장에 남성 등반가들의 반응은 반대하고 적의를 품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등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저자는 이 스포츠가 지닌 남성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히말라야 등반에 참여한 여자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 젠더’라고 말한다. 등반에 참여한 여자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장벽을 부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의식이나 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성 원정대의 유일한 여자로 등반을 하는 사례도 있으며, 여성들로만 구성된 폴란드 K2 원정대도 있었다. 이들은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맞섰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등반에서도 남자들은 장악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자들이 혼성 원정대에 반대했고, 등반에서 리더십과 독립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남자와 등반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미국 여성 스테이시 앨리슨(Stacy Allis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남성 친구, 남성 교사, 남성 등반 동료가 있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등반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한 등반은 그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전에는 남성들만 올랐던 곳을 등반하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서구 여성 산악인이 등장하면서 히말라야 등반에는 성적 모험, 성적 정화, 금욕주의라는 복잡한 역학이 만들어졌고 사히브와 셰르파 두 남성 집단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욕망관을 빚어내기도 했으며 ‘가부장적 위계’는 서구 남성 등반가나 셰르파 남성 모두가 공유한 권력 질서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사례들을 통해 여성 등반가들이 혼성 원정대에서 저항하고자 했던 대상은 성적 파트너, 연인, 혹은 남편으로서의 남자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가부장’ 스타일의 남자들, ‘아버지’로서의 남자들, 여자들은 장악하려 하고 어린애처럼 느끼게 만들려 하는 남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말라야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원정대는 물론 셰르파와 포터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는다. 눈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고 고산병으로 죽기도 하며, 잠깐 졸다가 그대로 동사하기도 한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은 어쨌든 위험 상황이므로 죽은 동료를 그냥 둔 채로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와야 한다. 나중에 시체를 수습하는 일 또한 위험하며 많은 비용이 든다. 그래서 히말라야에는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시체들이 산을 오르는 등반가들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위험한 활동에 돈을 지불하고 참여하는 ‘모험 여행’의 폭발적 증가와 여피족의 출현과 함께 등반은 더 이상 서구 부르주아 ‘근대’ 문화 내의 반문화적인 흐름의 일부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아닌,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 등반대와 여행자가 참여하는 거대한 관광지가 되었다. 저자는 셰르파를 폄하하고,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일부 기업형 등반대의 급증으로 에베레스트의 질서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어떤 이들은 산에 사람이 꾀기 시작하면서 에베레스트는 변질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는 언제나 ‘거기’에, 산으로 우뚝 서 있었을 뿐이다. 사히브나 멤사히브나 셰르파나 산에 오르는 인간의 동기와 욕망, 그들 사이의 관계가 ‘산’을 변하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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