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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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음이 꽃필 무렵 고약한 마음의 병에 걸렸던 나는 그 삼 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상처 입은 것이 나 혼자뿐이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 쓰련다. (<세기아의 고백>, 9쪽)


뮈세의 <세기아의 고백>은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린다. 재능 넘치는 시인이자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단 하나의 소설 <세기아의 고백>에서 열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광기 어린 사랑을 시적 언어로 절절히 고백한다. 뮈세의 소설을 ‘고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작품은 뮈세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서두에서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기아의 고백>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뮈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더욱이 그 절절한 애정의 대상은 조르주 상드임을.

<세기아의 고백>은 알프레드 뮈세와 조르주 상드, 이탈리아인 의사 파젤로와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4대 시인으로 꼽히는 뮈세는 십대 시절부터 당대 최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천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열렬한 사랑을 꿈꾸던 그는 1833년 여름, 만찬 자리에서 상드를 처음 만난다. 뮈세는 스물세 살이 되기 전이었고, 서른의 상드는 이혼 뒤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함께 베네치아로 떠난다. 그러나 기대로 가득했던 여행에서 뮈세와 상드는 번갈아 병석에 눕게 된다. 먼저 상드가 몸져누워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파젤로의 간호를 받는다. 상드가 회복한 뒤에는 뮈세가 병이 나고 그사이 상드는 파젤로의 연인이 되고 만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홀로 귀국해, 거의 4개월 동안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화해하려는 노력에도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뮈세는 <세기아의 고백>으로 이 사랑의 내막을 폭로했고, 상드는 <그 여자와 그 남자>라는 책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렇다고 <세기아의 고백>이 뮈세와 상드의 사랑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르주 상드를 모델로 한 ‘브리지트 피에르송’은 상드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에서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사회 변동은, 붕괴하는 구세대에게는 환멸과 비애감을, 앞날을 모색하는 신세대에게는 불안과 초조감을 드리웠다. 이 무렵 청년들을 괴롭힌 우울증과 염세적 고독감을 뮈세는 이른바 세기병(世紀病)이라 말한다. <세기아의 고백>의 주인공 옥타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즉 ‘세기아’이다. 이제 막 꽃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인 그는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연인 사이가 아닌가! 믿었던 애인이 배신,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심지어 애인이 또 있다! 심하게 마음을 다친 옥타브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타락한다.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기에, 단 한순간도 그녀의 배신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배신은 더없이 치명적이다. 더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는 차라리 인간 사회를 믿지 않고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내 연인과 흡사한, 악과 위선의 소굴’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실연에 빠져 상심한 채 사회와 담쌓고 지내는 옥타브를 보다 못한 데주네는 선배로서 그에게 온갖 사랑의 충고를 한다. 그가 보기에 옥타브는 소설가들과 시인들이 그려낸 사랑, 이 세상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 같다. 그런 옥타브에게 데주네는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을 믿더라도 실제로 이루려고는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절도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듯 사랑을 마시게, 주정뱅이가 되지는 말게. 연인이 진실하고 충실하다면 그 이유로 사랑하게. 충실하진 않지만 젊고 아름답다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게. 상냥하고 재기발랄하다면, 더 사랑하게. 만일 그녀가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지만 오직 자네만 사랑한다면, 그녀를 더 사랑하게. 사람이 밤마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네. (<세기아의 고백>, 56쪽)


옥타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파리 근교 시골에 머물던 옥타브는 그곳에서 바로 운명의 여인, ‘브리지트 피에르송’을 만난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일찍 남편을 잃은 여인, 고결한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의 칭송받는 순수함의 결정체인 브리지트, 그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사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옥타브와 브리지트로 변형되어 뮈세와 상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했던 상드와 달리 브리지트는 더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뮈세가 상드에게 바랐던 여인상일까? 어쨌든 옥타브는 그녀와 단둘이서 걷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외친다. “신을 찬양하라! 너는 아직 젊고,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

그러나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그 진행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첫 번째 사랑에서 실패한 옥타브이기에, 그 사랑의 그림자가 쉽사리 걷어지지 않는다. 의심과 질투, 불안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다. 첫사랑 연인을 완벽하게 믿었으나 그 신뢰가 깨져버리자 두 번째 사랑에서는 연인을 100% 믿는다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녀를 믿다가도, 때때로 질투와 의심이라는 망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든다. 심지어 이 어리석은 남자는 브리지트가 자기에게 몸을 허락한 사실을 갖고도 자신을 괴롭힌다. 의심에 빠진 모든 사람들처럼 그 또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고는 사실과 다투고, 의미 없는 말에 집착’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지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수록 정말 이 여자가 그토록 순수하고 칭송받아 마땅한 여인일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물론 철저히 옥타브 관점에서 그려졌으므로 <세기아의 고백>에서 묘사된 브리지트의 모습을 100% 믿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끝부분에 이르러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는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브리지트의 말처럼 ‘사랑은 행복이거나 고통’이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의심과 질투와 망상으로 깨져버린 이 사랑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는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그들, 아니 옥타브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신뢰로써 사랑하는’ 그 행복을. 브리지트의 예언처럼 이 어리석은 청년은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완벽하게 믿고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사랑만’이 그에게 남겨지리라. 그런데, 이 모습은 오늘날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모습과 닮았다. 100% 완벽하게 연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데주네의 충고처럼 ‘완벽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기아의 고백>은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며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또 어떠한지.


사는 것, 그렇다. 존재하고,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임을 강하게, 깊이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첫 번째 혜택, 가장 커다란 혜택이다.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어떤 사슬로, 어떤 불행으로, 그리고 나는 세상이 어떤 혐오감으로까지 사랑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할 것인데, 사랑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편견의 산 아래 푹 파묻혀 있어, 사람들이 모든 추악함 너머로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사랑, 강인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하늘에 태양을 매달아 놓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하늘의 법칙이다. (<세기아의 고백>,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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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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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와 가식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가는지를 조용히, 섬세하게 써내려간 수작. 1부와 2부에서 켜켜이 쌓아놓은 이야기들이 3부에서 압도적으로 폭발한다. 신기하게도 주인공 닉에게 안타까움이나 연민이 들지 않는다. 그 또한 어쨌든 반쯤은 그 세계의 일원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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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를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렇게 말하니, 페소아를 다룬 영화라도 상영하는지 오해할 수 있는데, 정확히는 ‘페소아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거나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영화제이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3일 목요일부터 23일까지 딱 열흘 동안만 열린다.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고 영화들도 단편이거나 상영 시간이 짧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지만 페소아를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까.


내가 관심 가는 작품은 크게 셋이다. 먼저 주앙 보텔료 감독의 <불안의 영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 소개를 살펴보면, 리스본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실과 구분하기 힘든 신비한 꿈을 꾼다는 내용으로 그림 같은 화면과 연극적인 연출, 몽환적 분위기로 인간의 고독을 그려나간다. 고요하고 적막한 리스본 풍경과 남자의 혼란스러운 표정 뒤로 <불안의 책> 구절이 흐른다고.


<불안의 영화>의 한 장면

















페소아의 이명인 ‘알베르토 카에이로’ 시 ‘양치는 사람(O Guardador de Rebanhos)’의 낭송을 들을 수 있는 작품 <금발 소녀의 기벽>도 궁금하다. 이 작품은 상영 시간은 1시간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은데 2015년, 106세의 나이로 타계한 포르투갈의 거장 올리베이라 감독의 작품이다. 삼촌의 사무실에서 회계로 일하는 한 젊은이의 사랑과 성공에 대한 이야기로, 주인공 마카리오는 사무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사귀게 되고 결혼하려고 하지만 매번 다른 장애물이 나타나면서 결혼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접한 몇몇 스틸 컷만으로도 독특한 미장센이 특징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금발 소녀의 기벽>의 한 장면















거의 평생을 리스본에서 살았던 페소아가 관광객들을 위해 영어로 쓴 리스본 가이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페소아의 리스본>도 흥미로워 보인다. 1920년대에 쓰인 페소아의 리스본과 2000년대 리스본의 풍경의 대비가 독특한 향수를 만들어낸다고. 이 영화를 보면 당장 리스본으로 날아가고 싶어지는 건 아닐지.


















평생 75개에 이르는 이명을 갖고 있었던 페소아. 이 영화들을 본다 해서 절대 그의 수많은 정체성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페소아가 남긴 일기나 시, 에세이를 읽는 편이 그를 아는 데 한결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스크린 속에서 페소아의 향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그의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분명 반가운 소식일 듯. 그나저나 아예 페소아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은데....

상영작 목록 및 상영 시간표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cinematheque.seoul.kr/rgboard/addon.php?file=programdb.php&md=read&no=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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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2-11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메일로 받아본 페소아의 영화들 소식듣고 반갑더라구요. 욕심같아서는 다 보고싶네요. ㅎㅎ

잠자냥 2018-12-11 11:35   좋아요 0 | URL
역시 알고 계셨군요. ㅎㅎ 그런데 너무 기간이 짧고 평일 저녁에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별로 없어서 슬퍼요.. 흐흑...ㅠ_ㅠ
 
소년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8
앙리 드 몽테를랑 지음, 유정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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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표지 이미지와 <소년들>이라는 제목에서 처음에는 짐작 가능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몇 쪽 넘겼을 때는 살짝 수다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젠체하는 느낌이랄까, 기존 소설과는 색다른 시도들도 어쩐지 잘난척하는 것 같고. 어쨌든 처음에는 썩 좋지는 않았다. 가톨릭 학교 파르크 콜레주,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합친 콜레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역시 예상대로 흘러간다.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천사 같기도 한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 소년들. 그들의 당돌하고도 열정적인, 순진무구하지만 어느 땐 지나치게 약삭빠르기도 한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니 슬쩍 웃음이 나온다. 첫인상이 딱히 좋지 않았던 사람과 몇 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좀 더 대화를 나눠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소년들>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의 심정이다. 그러다가 나는 중반 이후부터 완전히 이 책에 빠져들었다. 아, 이런 작품이 이제야 찾아왔다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 이 나이에 읽을 수 있어서 어쩌면 이 작품을 이렇게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안도했다. 사랑, 그렇다 사랑.


파르크 콜레주 철학반 우등생인 알방은 학교를 대표하는 기구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뽑힌다. 이 아카데미 소속 엘리트 학생들은 선배가 자신이 점찍은 후배를 돌보는 ‘보호 그룹’이라는 활동을 시작한다. 알방은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두 살 아래인 세르주를 자신이 보호할 후배로 점찍는다. <소년들>은 알방과 세르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 즉 콜레주 학생들, 콜레주를 이끄는 원장 신부, 세르주와 남다른 관계인 드 프라츠 신부, 알방의 어머니 등을 중심으로 좀처럼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알방과 세르주의 관계는 작가인 몽테를랑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알방처럼 콜레주 철학반 학생이던 몽테를랑은 후배인 필리프 지켈과 특별한 우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바 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곱씹으면서 무려 50여 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소년들>은 몽테를랑 필생의 역작이자 얼마쯤은 자서전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작가는 ‘자전적 요소는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나이 열다섯 살 반쯤 되면 사랑에 빠지는 덴 이골이 붙는다.’ 이런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년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이 작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온다. 심지어 파르크 콜레주의 원장 신부가 학교에 세운 규칙은 ‘많이 사랑하기, 많이 포옹하기, 많이 기도하기’일 정도이다. 그는 진정한 애정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 ‘사랑받는 자는 어디서든 사랑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간 감정의 움직임이라고 여긴다. 원장 신부의 이런 가르침(?)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이 학교 학생들, 특히 ‘보호 그룹’에 속한 소년들은 하나같이 선후배 커플을 이뤄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주인공인 알방과 세르주는 좀 더 특별하다. 


알방은 그야말로 세르주에게 미쳐있다. 똑똑하고 집안 좋은 그에 비해 세르주는 학교의 문제아다. “아,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세르주에게 늘 붙어 다니는 말이다. 이상야릇한 작은 괴물, 학교의 말썽꾸러기 세르주는 끊임없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짓을 찾아다니고, 교사들과 자습 감독이 싫어하는 골칫덩이이다. 품행 점수가 이십 점 만점에 오 점인 학생이자, 학교에서 모두가 견딜 수 없어하는 아이. 알방이 사랑해마지 않는 세르주 수플리에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알방은 왜 이런 세르주를 사랑할까? 알방은 ‘선을 향해서든 악을 향해서든 무차별적으로 치우치는 어떤 막연할 열정’을 지닌 소유자로 정의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그가 보기에 세르주에 대한 이런 평가와 대우는 정당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연약하고 가난한 소년에게 그는 한없는 사랑과 연민을 느끼고 그를 좋은 길로 이끌고 싶어 한다. 사랑에 빠진 알방에게 세르주는 완전히 특별한 존재다. 세르주에게는 특별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나는 건지 알방이 평생 궁금해 한 일종의 향기’. 세르주를 사랑하는 알방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면 어스름한 저녁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를 더 잘 떠올리기 위해 일부러 램프를 약간 기다렸다 켜곤 한다.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년들의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데,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사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가톨릭 학교에서 동성 친구 사이의 ‘사랑’을 용인하고 허락한다고? 공공연하게 소년들끼리 사랑한다고? 하는 생각들. 물론, 원장 신부가 ‘더 많이 사랑하기’를 학교 규칙으로 세웠듯이 선후배끼리 서로 보호하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일은 어느 정도는 허용된 일이었다. 단 그것은 서로 영혼의 성장을 돕는 사랑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보호 그룹’ 학생들은 신부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육체적 사랑의 쾌락도 마다하지 않는다. 알방과 세르주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낭만적’이라는 말로 파르크에서 일어나는 이탈을 관대하게 보아주던 학교 지도자들도 알방과 세르주의 어떤 사건 앞에서는 더는 그 일탈을 너그러이 넘어가주지 않는다. 그리고 알방은 세르주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학교를 떠난다. 아니, 퇴학당한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간다.


그런데 알방의 사랑이 벼랑으로 내몰리게 되는 데는 ‘그저, 무얼 하든지 간에 항상 청소년기와 유년 시절을 망쳐버리는 어른들의 속성’이 큰 역할을 한다. 늘 사랑하라고 사랑을 권하던 원장 신부의 비겁함, 세르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알방에게만 유독 가혹한 처벌을 내린 드 프라츠 신부 등은 처음부터 ‘특별한 우정’은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고 줄곧 눈감아주다가 자기들이 마음 내키는 때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알방과 세르주가 며칠 동안 달고 다닌 황금 단추 배지가 어른들에게는 일종의 ‘약혼반지’처럼 보인다. 알방의 어머니 또한 아들과 세르주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른들로 인해 망가진 세계, 내몰린 사랑. 알방과 세르주는 이대로 영영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알방이 퇴학당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이 책 중반까지에 해당한다. 이때 나는 분노와 함께 가슴이 아파왔다. 귀여운 녀석들, 하면서 내내 웃다가 어느 순간 분노하고 있던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부터는 거의 비통함과 서글픔 같은 것들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알방은 어머니가 바라던 남자가 된다. ‘보호받는 후배들’의 명단은 곧 다른 명단,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같이 춤을 추었거나 또는 (사회적 이유로) 반드시 춤을 추어야 할 ‘여자들의 명단’으로 대체된다. 원장 신부의 경박함도, 드 프라츠 신부의 배신도, 어머니의 훔쳐보기도 모두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이 한마디로 무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인생. 인생이 다 그렇지! 더더군다나 알방은 남자가 남자를 욕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젠 비상식적이고 괴상망측하고 혐오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린 소년들에게서 여자로 옮겨가기, ‘많은 사춘기 소년들이 경험하는 이 통과의례’는 일종의 성숙을 의미했고, 알방 또한 그렇게 그 시기를 지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정말, 그럴까?


파르크, 버릇없고 비겁하고 도벽이 있고 속물근성에 불경스럽고 무절제하고 위선적인 소년들이 있는 파르크는 창부의 집인 동시에 천사들이 옮겨온 집이었다. 이후 어디에서도 파르크에서 경험했던 관대함과 강렬함과 장점을 그는 보질 못했다. 자신에게서도, 주변에서도 다른 존재를 ‘더 훌륭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다른 존재를 위해 자기 인생의 가장 귀한 보물을 희생하려 하는 욕망을 단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다. (<소년들>, 439쪽)


알방이 학교를 떠날 무렵 드 파르츠 신부는 그에게 ‘스무 살쯤 되면 이 모든 일을 비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곧 스무 살을 앞둔 알방의 삶은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알방은 그럼에도 종종 세르주의 그 ‘과일 같은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날에는 약간 상한 과일 같고, 저녁나절 거리의 어둠 속에서는 환하거나 반쯤 밝아지는 과일 같은 얼굴’을……. 전적으로 순수한 애정을 바쳤던 대상, 절교가 눈물 너머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헤어지던 순간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대상. 그 ‘강렬한 추억을 남긴’ 자는 바람조차 건드릴 수 없는 서늘한 저 깊은 곳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파르크 콜레주는 알방에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이자 청춘이며 순수였고, 어떤 존재를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알방이 세르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도 울컥 치솟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은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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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8
앙리 드 몽테를랑 지음, 유정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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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의 풋풋하고도 뜨거운 사랑이야기에 웃음짓다가 어느 순간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다가 비통해진다. 아이들의 삶은 어른들로 인해 망가지고, 그 어른들은 스스로 자기 삶을 망가뜨린다. 사랑, 인생, 종교,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눈부신 작품. 이 한 권으로 나는 몽테를랑 신자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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