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큐어 하는 남자 - 강남순의 철학에세이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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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김영민과 <쾌락독서>, <개인주의자 선언> 등 문유석의 책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아직 이들의 책을 읽어보지는 않아서 비교하기는 뭐하고, 그런 이들 틈에 강남순의 이 책을 한번 꼭 읽어보라고 슬그머니 권하고 싶다. 마치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하는 심정으로, 집집마다 이 책을 들여놓고 싶달까. 잘은 모르겠지만 문유석이나 김영민의 글을 즐겁게 읽은 독자라면, 또 평소에 정희진, 정혜신의 글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매니큐어 하는 남자>도 그에 못지않게 자신의 사유가 확장되는 기쁨을 느끼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강남순의 모든 저작을 읽어 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종종 일간지 칼럼을 통해 글을 만나봤을 때, 다음 글이 기대되고 거기선 또 어떤 생각을 펼쳐 보여줄지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권력과 교회>에서도 그이의 글이 가장 인상 깊었고, 드디어 이렇게 그 이름이 온전히 박힌 책 한 권을 사서 기쁘게 읽었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2장 ‘페미니즘,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한 밑거름’과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을 다룬 4장 ‘신의 이름으로’이다. 저자가 이 문제에 깊이 천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개인적 경험에서 더욱 비롯되었을 것이다.

2003년 6월, 당시 감리교신학대학 총장은 “부부 교수는 전임교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음 해인 2004년, 2년 동안 이 대학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여성과 종교’를 강의했던 강남순 교수는 이 방침에 따라 초빙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강 교수 측은 이는 명백한 성차별이며, 불공정한 교칙에 저항한 것에 대한 보복적 인사 조치라고 맞섰고 그 후 2년 복직 투쟁을 벌였지만 학교 측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복직 투쟁은 2006년에 강남순 교수가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에 임용되면서 기쁘지만 아쉽게 끝이 났다. 이런 배경을 살펴보니, 종교와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모든 차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그에게는 화두와도 같은 게 아닐까 싶어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매니큐어 하는 남자>가 페미니즘과 종교 문제만 다루리라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지, 인간은 또 어떻게 해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 진지한 성찰과 사유로 가득한 글들을 만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강의실이나 회사 또는 대중교통에서 예쁘게 매니큐어 한 남자와 마주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열에 아홉은 무심히, 그러니까 여성이 매니큐어 한 것을 봤듯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강남순 교수가 수업하는 강의실에 실제로 한 남학생이 매니큐어를 하고 참석했다. 학생 열두 명이 세미나 형식으로 수업하기 때문에 이 남학생이 매니큐어 한 사실을 다들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타인의 남다른(?) 행동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 풍경이 너무나도 부럽다.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실제로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과 남자 선배 중에 매니큐어를 하고 온 이가 있었다. 그는 평소 행동도 여성스러워서 과에서는 거의 놀림거리이자 손가락질 대상이었다. 그의 뒤에선 ‘게이’가 틀림없다는 말들이 오고 갔다. 단지 매니큐어를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때 나는 저 사람은 참 용감하구나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조차도 어리석게 느껴진다. 어떤 여성이 매니큐어를 했다고 해서 용감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럴 땐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싶어져서 자괴감도 든다.

강남순은 이 일화를 들며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병중 하나인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사회는 ‘획일성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갖가지 비난과 사회적 추방을 서슴지 않는 폭력이 자연스럽고 강력하게 작동’된다고 말하며 ‘획일화 폭력성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개별인들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존중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인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억압적인 엄숙주의와 위계주의를 매니큐어라는 작은 몸짓으로 무효화하고, 폭력적인 젠더 고정관념을 자연스럽게 뒤집는 행위와 상징’이다. ‘자신이 지닌 남성으로서의 젠더-권력, 이성애자로서의 섹슈얼리티-권력을 현상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억압적 기제를 뒤집는 전복적 기능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자세와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일깨워준다.

또한 여성과 아이, 소수자, 장애인, 난민, 유색 인종 등 소수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 땅의 차별과 배제, 혐오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책 구절구절마다 밑줄 긋고, 공감하고, 분노하고, 깨우치게 된다. 페미니즘과 관련한 여러 부분에서 깊이 공감하고 또 때로는 새롭게 깨닫기도 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남성 대 여성이 단순한 구도로 대결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한 인간은 젠더만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요소가 중층으로 겹치는 교차성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는 복합성’을 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크게 공감했다. 최근 이 땅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거의 남녀대결을 넘어서 남녀혐오조롱문화가 된 듯한 씁쓸한 풍경 아래, 한없이 답답하기만 하던 내 마음에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내린 것도 같았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면서 인종·계층·성소수자·장애인·특정 종교 등 다른 종류의 차별에 무관심하거나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페미니즘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단순구도에서만 인간을 본다는 한계점을 지니게 된다. 또한 한 인간은 젠더만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요소가 중층으로 겹치는 ‘교차성’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는 복합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내가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라고 표기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다. ‘여성주의’는 페미니즘의 ‘출발 지점’을 예시하는 개념일 수 있지만, ‘도착 지점’의 복합성을 간과하는 ‘여성중심주의’라고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억압과 차별의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젠더’는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계층·장애·성적 지향·인종 등의 문제와 매우 다층적으로 교차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현대의 페미니즘은 ‘젠더 렌즈’만이 아니라 끝없이 변하는 정황에 따른 ‘다중적 렌즈’가 필요하며, 이에 따른 다층적 연대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긴급한 과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108쪽)

남성과 여성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이 작동될 때, 그 권력을 여전히 행사하는 남성이 위계적 구조에서 ‘밑’에 존재하는 여성에게 표시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애인이나 부인을 사랑한다면서 폭력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간의 권력이 균등하게 행사되고,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 지점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호감의 이름으로 여타의 성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112쪽)

‘페미니스트’ 또는 ‘진보’라는 정체성의 표지를 지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양한 차별구조에 대한 예민성과 실천성을 당연하게 지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이 현실 세계 속에서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얼굴로 어떻게 구성되고 실천되고 있는가”에 대한 다층적 학습을 통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어가야 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136쪽)



미투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부당한 사건에 정당한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자’로 그려내야만 한다는 이야기도 인상 깊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미투운동은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그동안 감춰두었던 은밀한 비밀을 이제야 선정적으로 드러내는 ‘고백자’로서의 이미지로만 부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여성을 고백자로만 범주화하면 성추행·성희롱·성폭력이 범죄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 고백에서 호명되는 남성들은 단지 운이 나빠서 걸린 사람들로 간주되는 문제가 일어난다. 미투운동 보도방식은, 여성은 피해자이며 남성이 주체자라는 전형적인 남성중심적 젠더 이해라는 고정된 틀 속에 문제제기 여성을 가두는 이미지들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백’은 피해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행위를 한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공적으로 드러낼 때 차용되어야 하는 표현이라는 말에는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미투운동 또한 ‘남자 대 여자’의 문제라는 단순요인적 접근 방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기억할만하다. 어떤 사건이든 가해자 대 피해자의 권력 관계가 남녀 구도 안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으며, 나이·직급·정치·경제·종교 등에서 다양한 권력 구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가 없다. 이 불확실한 인생에서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는데, 앞으로도 내가 종교인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종교는 말할 수 없이 반인권적이고 성차별적이며 가부장제 그 자체이다. 동성애를 죄라 말하며 반인권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럴 때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런데 성경은 신의 말인가? 아니,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여부를 떠나, 성서의 저자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때문에 강남순의 말처럼 ‘성서 저자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다양한 가치관을 초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서에는 ‘모든 인간의 평등·정의·평화·인권 등과 같은 인류 보편가치가 부재한 차별적 텍스트들’이 곳곳에 담겨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말하듯이 ‘성서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은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성서 이해 중 하나’가 된다. 성서는 ‘사실만을 담은 책이 아니라 다양한 상징과 은유, 종교적 고백을 담고’ 있으며 성서 메시지는 ‘과학적 서술이 아닌, 고백적 서술’이다. 때문에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러므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태도 대신, 저자의 지적처럼 성서에 담긴 다양한 메타포를 이해할 때, 성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텍스트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평화·사랑·정의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무참한 살상과 폭력·일부다처제·노예제도·여성혐오·여성의 소유화와 집단강간 등 다층적 소수자들의 인권유린 내용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를 ‘잘’ 읽는다는 것은 성서와 ‘함께’ 생각하면서 성서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서가 담고 있는 평등과 정의의 원리를 가지고, 동시에 배제·차별·폭력·불의의 메시지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234쪽)

많은 교회에서 신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이 타자를 향한 포용과 배려, 환대와 연대가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죄를 정죄하고 배제하는 일이라면, 신은 왜 존재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신인가. 종교인이라면 진지하게 묻고 씨름해야 할 물음이다. 오히려 인간이 종교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또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신의 뜻이 아닌가’를 생각하는 일이며, 타자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뿐이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218쪽)


마지막으로 ‘애도’와 ‘연민’ ‘환대’와 같은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저자는 “우리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리다의 말을 빌려 인간다운 존재 방식을 묻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로서의 개체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애도하는 나’로서의 관계적 존재이다. 더욱이 애도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의 관계에도 있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와 너, 우리 등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근원적 존재 방식은 ‘애도’일 수밖에 없다. 또한 ‘연민’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중요한 근원적 실존 방식이다.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 받는 사람 사이에는 윤리적 위계가 형성되는 것과 달리, 연민은 수평적 관계에서 진정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우정과 사랑 등 관계가 주는 즐거움과 기쁨 이면에는 늘 애도가 잠재하고 있음을 인간은 인지해야 한다. 데리다는 ‘살아남음’을 애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주변부인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 평등과 정의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끌어안고 ‘살아남는 것’-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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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2-14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있는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책 읽고 글 쓰면서 놓친 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저자의 글을 읽고 나니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연초에 이 책을 읽기를 잘했어요. ^^

잠자냥 2019-02-14 17:1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공부란 무엇인가‘ 부분은 저 스스로 두고두고 읽어볼 생각으로 옮겨 적어 두었답니다.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글이지요. 이 책은 cyrus 님 말씀처럼 연초에 읽기 더 좋은 책 같아요-

coolcat329 2019-02-14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꼭 읽어보고 싶네요. 권력과 교회도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다 기억속에서 사라졌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14 20:56   좋아요 1 | URL
네 권력과 교회도 그렇고 이 책도 꼭 읽어보세요! ㅎㅎ

케이 2019-02-15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 이 말에 공감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면서 항상 하는 생각이 한국 사람들은 악한 사람보다 이상한 사람을 더 혐오한다는 것이예요. 대중들은 악한 사람들에게는 감히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죠. 하지만 이상한, 별난, 남들과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히 하자 혹은 문제가 있을 거라고 단정지으며 나보다 못한 인간으로 치부해 버리죠. 단지 내가 남들과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로 남을 짓밟는 사회라니 너무 이상한 사회예요.
저는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종교가 저에게 줬던 위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아마도 평생 기독교 신자로 살 것 같아요. 하지만 성서를 현재 기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부분에 크게 공감합니다.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는다면, 예수님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살고 행동해야 할텐데, 몇천년전 쓰여진 성서를 기본으로 자신들의 차별을 정당화 하는 행태를 보면 역시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기독교 신자인 저는 이 분이 신학대 교수라고 하시니 더더욱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역시 너무 잘쓰신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15 11:16   좋아요 2 | URL
이 사회는 정말 케이 님 말씀대로 조금만 다른 삶을 사는 사람에게 엄청나게 폭력적으로 굴지요.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이들이 더 그러기도 하잖아요? 정말 답답한 사회이기는 해요. 에휴.

잘은 모르겠지만 평소 말씀하는 내용들로 미루어봤을 때 케이 님은 ‘타자를 향한 포용과 배려, 환대와 연대‘의 정신을 갖고 계신 기독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요.
이 책의 저자인 강남순, 이 분은 실제로 자신이 종교인이면서 그 종교에 대해 애정어린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 같아, *양식*있는 기독교인들이 이 분 책을 읽으면 더 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네요(태극기부대 모임에 십자가 들고 나가는 분들 말고요. ㅠㅠ).

하지만빨랐죠 2020-05-08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이네요. 책을 사서 읽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잠자냥 2020-05-08 09:19   좋아요 0 | URL
넵! 사서 읽어도 후회 없을 좋은 책입니다. 감사합니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세 여성의 이름이 보인다. 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그녀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메리’와 ‘마리아’는 더욱 그렇다. 그 둘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차별받으며 자랐고, 원하지 않는 결혼으로 구속받고, 둘 모두 남편이 아닌 동성 친구로부터 위안을 얻고 그 안에서 탈출구를 모색한다. ‘마틸다’는 조금 다른 삶을 살지만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기에는 그녀가 처한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메리>와 <마리아 : 여성의 고난>은 페미니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이며, <마틸다>는 <프랑켄슈타인>으로 널리 알려진 ‘메리 셸리’의 미발표작으로, 그녀는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다. 어머니와 딸이 쓴 페미니즘 작품이 나란히 한 권으로 엮어 나온 것이다. 세 작품 모두 어떤 면에서는 현재 읽어도 급진적이다. 그러니 울스턴크래프트와 셸리가 살았던 18~19세기 영국에서 이 두 여성의 작품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읽혔을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메리>와 <마리아 : 여성의 고난>을 집필한 몇 년 뒤에 발표한 글로, <메리>와 <마리아>에서 윤곽이 잡혔던 그녀의 생각이 확고하고도 더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의 권리 옹호>와 <메리>, <마리아 : 여성의 고난>은 유기적으로 관련 있으며 울스턴크래프트 사상의 집약과도 같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그녀는 여성에 대한 그 시절 편견들을 면밀히 검토, 이러한 편견이 만들어지는 체계를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생각하기에 여성을 ‘순수하고 나약하며 매력적인 존재’로 보는 기존 견해들은 결국 여성의 이성을 억눌러 권위에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여성도 이성과 미덕을 가진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여성들이 곧잘 저지르는 오류를 지적하는 일도 망설이지 않는다. 여성들이 점성술사나 최면술사에게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울스턴크래프트는 그 시절 여성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이 여성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이나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 탓임을 또 한번 언급하면서 여성들이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이성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남성들은 자기 정부(情婦)에게는 노예처럼 굴면서 여동생들과 아내, 딸들에게는 왕처럼 군림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여성들을 졸병처럼 묶어둘 뿐이다. 여성의 지성을 확대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강화하라. 그러면 맹목적인 복종은 종식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맹목적인 복종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독재자들과 관능주의자들이 여성들을 어둠 속에 묶어두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재자들은 노예를 원할 뿐이고, 관능주의자들은 장난감을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관능주의자들은 가장 위험스러운 독재자들이었고, 제후가 신하들에게 속아왔듯이 여성들은 연인들에 속아왔다. (<여성의 권리 옹호>, 2장 ‘성별 특성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를 논함’)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강조하는 내용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므로, 여성에게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한다는 것이었다. 출신이 아니라 재능이나 미덕이 사회적 인정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녀는 세습 재산이나 계급 같은 인위적 차별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性) 또한 여성을 노예 상태에 가두어 결국 아내나 어머니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한다고 봤다. 때문에 여성이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가 되고 여러 직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참정권까지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이러한 신념은 <메리>와 <마리아 : 여성의 고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두 작품은 앞서 이야기했듯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인들이 다른 한 여성과의 밀도 높은 정서적 교류를 통해 위로받고 이들과의 연대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메리’의 아버지는 여성이 배우는 것에 늘 반대했고, 자신의 아내가 게으르고 몸이 약해 딸의 교육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편 어머니는 ‘유난히 잘생긴 아들’ 그러니까 메리의 오빠에게 모든 사랑과 애정을 쏟을 뿐, 메리는 안중에도 없다. 오빠가 죽은 뒤 메리가 상속자가 되자 어머니는 그제야 메리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딸을 더는 ‘그 아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메리가 오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자신처럼 책을 사랑하고 사색을 즐기는 친구 ‘앤’뿐이다. 그녀와의 우정과 사랑만이 메리를 숨 쉬게 해준다. 그러나 원치 않는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그 ‘무거운 족쇄’가 떠오르면,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앤의 건강 때문에 둘이 함께 요양 여행을 떠나 남편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앤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해하고, 앤에게 집착하는 메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메리, 마리아, 마틸다>, 50쪽)


앤과 이렇게 지내면서 서서히 메리는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게 된다. 남편과의 삶, 그 속박으로 가득 찬 삶으로 돌아가느니 ‘일할 거라고’, ‘노예가 되느니 무슨 일이라도 할 거라고’ 메리는 외친다. 그리고 그녀는 홀로 서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몸담는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루소의 <에밀> 등 18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에서 여주인공들은 늘 남주인공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 것을 비판했듯이, <메리>는 온전히 메리가 지닌 합리적 사고, 불합리한 제도와 맞서는 능력, 여러 인물과 교류하며 사고를 넓혀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메리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이 ‘장가도 시집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얼마나 억압적으로 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리아: 여성의 고난>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작정하고 쓴 듯하다. 이 작품 서문에서 ‘훌륭한 감수성과 지적 능력을 가진 여인이’ 그럴만한 상대가 되지 못하는 ‘남자에게 평생 엮이는 것보다 더 괴로운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고 밝힌 울스턴크래프트는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결혼의 폭정과 같은 것은 고매한 정신의 함양을 방해하므로 여성이 겪는 고난’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잘못된 결혼의 불합리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리아’는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힌 신세이다. 정신병원에서도 두고 온 딸 걱정에 늘 고통스럽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이 통탄스러웠으며, ‘여자이기에 더 큰 고통을 겪으리라’ 예상한다. 마리아도 메리처럼 부모로부터 차별받으며 자라난다. 그리고 그런 집안에서 ‘어째서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고민한다. 정신병원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세상은 어차피 넓은 감옥이요, 여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가 아니던가.’ 반문한다. 그런 와중에 정신병원 관리인인 제미마와 가까워지고, 상류층이었던 자신과 달리 하층민으로서 더 기구하게 살아온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마리아는 억압받는 여성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에는 여성이 당하는 온갖 고난과 불합리한 결혼 제도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곳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빠는 진정 부모님의 우상이었고, 나머지 가족에게는 고통이었지. 편애의 힘은 정말이지 얼마나 큰지, 오빠에게는 활력과 기지라고 칭찬하면서 내게는 주제 넘는다고 잔인하게 핍박했단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203쪽)

한 여자가 애정도, 존중도 할 수 없는 남자와 혹은 자신이 가정부 이외에는 아무런 유용한 존재가 되어 주지 못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이며, 그것을 견딘다고 해도 신이나 인간의 눈에 의무를 다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메리, 마리아, 마틸다>, 243쪽)


<마틸다>는 <메리>, <마리아 : 여성의 고난>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결혼 제도를 비판한다거나, 부모로부터 차별받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부재 속에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을 받는 ‘마틸다’라는 여성이 나올 뿐이다. 메리 셸리는 자신의 어머니였던 울스턴크래프트와는 달리 부모로부터 편애를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작품에 그런 점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아들만을 사랑하는 어머니 대신, 오히려 일찌감치 세상을 뜬 어머니, 때문에 이상화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리고 홀로 남은 아버지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는, 또 자기 자신도 아버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마틸다’라는 여성을 통해 희생자가 아닌 여성을 묘사한다. 주체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인정하며, 그로써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 등을 돌리는 매우 전복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욕망하는 주체로서 여성을 그린다. <마틸다>가 세상에 선보이지 못한 채 오랫동안 파묻혀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급진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작품을 읽노라면 그녀의 삶 자체가 정치적인 것으로 이어져 이러한 작품들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장남만을 편애하는 어머니가 밑에서 정서적 안정도 누리지 못한 채 여동생들을 돌보며 자랐고 ‘메리’가 ‘앤’에게 의지했듯이 친구 ‘패니 블러드’에게 마음을 열었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여동생 엘리자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결혼 생활 자체에 있다고 말하면서 별거를 조언하기도 했으며, 패니, 엘리자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여성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하기도 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인권을 가진다고 주장한 울스턴크래프트. 이 당연한 권리를 위해서 오늘도 수많은 메리, 마리아, 마틸다들이 싸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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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2-12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읽어보고 싶어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잠자냥 2019-02-12 15:40   좋아요 0 | URL
네! 여성학/젠더 3번째 마니아이신 ㅋㅋㅋㅋ 다락방 님께서 좋아하실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락방 2019-02-12 15:42   좋아요 1 | URL
1위 탈환이 목표입니다, 잠자냥 님. 제가 여성학 마니아를 남자들에게 양보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훗.

잠자냥 2019-02-12 15:5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응원합니다. ㅋㅋㅋㅋㅋ
 
오에 겐자부로의 말 - 후루이 요시키치 대담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오에 겐자부로.후루이 요시키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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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언어에 관한 두 일본 작가의 ‘고담준론’- 여기서 ‘일본’을 강조하는 까닭은 문학과 언어에 대한 보편적인 담론이기보다는 일본이라는 특수 상황을 전제로 한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라고 하기엔 요시키치의 말이 절반은 넘는다. 억지로 엮은 책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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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2-1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 이라고 붙은 책은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하는 거 같아요. ㅋㅋ (저도 여러번 당한 적 있어서)

잠자냥 2019-02-12 15:01   좋아요 0 | URL
흐흑... 마음 산책 <말>시리즈는 나오면 반가워서 관심 있는 작가 것은 찾아 읽고 있는데 늘 만족스럽지 못하네요. 에휴.

펜문 2019-02-1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라~~ 읽어보고 싶답니다.

잠자냥 2019-02-15 12:36   좋아요 0 | URL
네~ 이건 뭐 개인 선택이니까요. 그래도 서점에서 한번 펼쳐보고 사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 강남순의 철학에세이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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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방식의 획일성을 강요하는 폭력성을 넘어서 모든 개별인들이 서로를 온전한 존재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 집집마다 한 권씩 들여놔주고 싶은 책. 머리는 냉철한 사유로, 가슴은 뜨겁게 만드는 글들. 강남순은 정희진, 정혜신과 함께 계속 귀기울여야 할 목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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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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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린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르 귄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판타지나 SF 장르를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가란 무엇인가> 3권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는 이 작가의 작품은 언젠가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모든 말들이 인상 깊었지만, SF라는 남성 중심 세계에서 여성 작가가 된다는 주제와 관련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예로 들어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털어놓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르 귄은 글쓰기는 남자들이 규칙을 정한 분야였고, 거기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작가와의 인터뷰>, 155)다고 말한다. 그래서 글이라는 남자들의 세계에 자기 자신을 맞춘 채 남자처럼 글을 쓰며 남성의 관점으로만 표현한다. 때문에 르 귄의 초기 작품들은 모두 남자의 세계가 배경을 이루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러다 르 귄은 문학적인 페미니즘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건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문제이자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운동은 르 귄에게 이봐, 그거 알아? 당신은 여자야, 여자처럼 글을 쓸 수 있어.”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때부터 르 귄은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에게 없는 온전한 경험의 영역이 있고, 그런 글이 쓸 가치가 있고 읽을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어스시 연대기해인 시리즈처럼 르 귄의 대표작은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읽지 못했지만, 저 인터뷰 글 뒤로 간간이 읽은 르 귄의 단편들에서도 충분히 그녀가 인터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르 귄의 작품을 하나 둘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사서 모으고, 언젠가는 모두 읽어도 될, 아니 읽어야 할 작가와 작품 목록에 속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지금도 책꽂이에서 르 귄의 책들이 나를 노려본다. 사지만 말고 부디 좀 읽어달라고. 그럼에도 판타지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기는 한다. 그럴 때 바로 이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가 나왔다. 그간 읽은 르 귄의 작품은 그리 쉽지 않다.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야 해서 진도도 쉽게 나가지 않는다. 몇 번 읽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에세이집이라니,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선뜻 주문하고는 이번 설 연휴에 읽었다. 그런데, 에세이도 아주 쉽게 읽힌다고는 할 수 없다. 여러 차례 문장을 곱씹으면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제가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이 책은 르 귄이 여든을 넘어 블로그에 올린 글 가운데 40여 편을 추려서 엮은 것이다. 블로그라고!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블로그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책상 한 쪽에는 고양이 파드가 가릉가릉 거리면서 잠들어 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라니. 하지만 놀랍게도 르 귄은 블로그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한다. 블로그라는 말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데 마치 늪지의 흠뻑 젖은 나무 밑동처럼들린다고. 무엇보다도 블로그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는 걸 당연시 여기기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르 귄은 아주 내향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은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르 귄을 컴퓨터 앞에 앉힌 사람은 바로 주제 사라마구. 사라마구가 자신의 블로그에 여든다섯, 여든여섯에 올린 글들이 <노트북>이라는 제목으로 영문판이 발간되었고, 르 귄은 그 글을 읽으며 경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다. 문득 어디 한번 나도 해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도 블로그를 운영하게 된다. 르 귄은 자신이 블로그에 올린 글들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라마구의 글보다 훨씬 가벼우며 다소 사소하고 개인적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 실린 글들은 한편 한편이 모두 자유롭고 소소한 일상을 다룬 매력으로 빛을 발한다. 나처럼 르 귄을 조금씩 알아가고자 하는 독자는 물론, 르 귄의 팬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물인 셈이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사라마구의 글보다 훨씬 가볍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리 가볍지는 않다. 첫 째 장인 여든을 넘기며에서는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감의 의미를 꼬장꼬장하게 되짚어본다. 어느 날 문득, 하버드대학교 동창회에서 날아온 설문지에 답하면서 그 질문들이 애초부터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꼬집는다. 특히 은퇴 후 여가 시간에 무얼 하느냐는 물음에 르 귄은 정색한다. 자신은 은퇴한 사람이 아니라고, 은퇴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며 반박한다. 은퇴가 불가능한 작가에게, 글쓰기가 업인 사람에게 여가 시간에 하는 일에 체크하라면서 골프 요가 등과 함께 글쓰기가 포함된 문항을 들이밀었으니 그녀가 얼마나 발끈했을지 상상이 간다. 르 귄은 노년의 자신에게는 그 무엇도 여가 시간이 아니라며, 다음 주면 여든 하나가 된다면서 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노년의 삶, 늙어감의 대한 르 귄의 글은 내가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않았고, 심지어 멀었음에도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솔직히 말해 팔십삼 년을 사는 일이 그저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와 같은 유머러스한 문장에서는 큭큭 웃음이 터진다.

 

둘째 장으로 넘어가면 문학 산업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장이 두 번째로 흥미롭고 재미났는데, 많은 이들이 읽고 깜짝(?) 놀라게 될 르 귄과 존 스타인벡과의 일화나 문학상에 대한 르 귄의 생각, 그녀의 작품 <날고양이들>을 읽고 보낸 아이들의 편지에 얽힌 이야기 등등은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된다. 그리고 이 장에서도 버지니아 울프를 향한 르 귄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장으로 넘어가면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 자본주의의 문제, 미국의 도덕성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데, 꼬장꼬장한 비판은 날카롭기 짝이 없다. 그만큼 이 노년의 작가의 통찰력은 빼어나다. 아래 인용문장은 진심으로 공감했던 문장인데, 읽다 보면 요즘 우리 사회를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


불의에 저항할 동기를 부여하는 측면에서 화는 유용하면서도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도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를 무기라고 생각한다. 전투와 자기 방어를 위해 사용할 때만 유용한 도구. 남성 지배가 중요하고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여성의 저항, 그러니까 화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무기를 알아보고 즉각적으로 예상 가능한 역공을 한다. 인간의 권리가 남성 권리의 총합인 줄 아는 사람들은 정의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든 여성들을 낙인찍었다. 남성 혐오자, 브래지어를 태우는 여자, 참을 성 없는 입이 걸은 여자라고. 대중 매체도 그들의 관점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의미를 비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단어들을 과민증과 동일시함으로써 거의 쓸모없게 만들 정도였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렇다. (‘분노에 관하여’, 213)

 

마지막 장은 보상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마치 이 책을 거의 다 읽은 이들에게 보상이라도 해주듯 르 귄의 소소하고도 개인적인 일상이 잘 드러난 글들이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르 귄의 서신 업무를 도와준 이를 추억하는 글인 들로레스라는 사람과 어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소재를 맛깔난 이야기로 그려낸 계란 빼고등이 기억에 남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노르웨이에서 온 손님으로 표현한 트리라는 글도 내내 미소 지으면서 읽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은 아무래도 장과 장 사이에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파드 연대기이다. 르 귄은 고양이를 줄곧 키웠는데(<작가와의 인터뷰>에서도 고양이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 파드는 마지막 반려묘이다. 이 녀석을 처음 만난 순간, 그리고 파드에게 간택당한 순간, 파드를 집으로 데려와서 서로 탐색하고 적응하는 이야기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르 귄이 아니라, 고양이를 매우 사랑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파드는 내 고양이랑 아주 비슷하다. 파드의 왼쪽 뒷다리에 난 검은 점무늬는 귀여움의 종결자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내 고양이 뒷다리의 검은 반점이 떠올라 웃게 되고, 르 귄이 묘사한 파드의 눈, ‘크고 검은 동공이 초록빛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은 불그스름한 노란빛이 감쌌다는 부분을 읽다가 어쩜 눈까지 내 고양이와 아주 흡사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파드가 사냥해서 갖고 놀다가 죽어버린 불쌍한 쥐를 위해 르 귄이 쓴 망자를 위한 시를 읽노라면 이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귀여움에 또 한 번 웃게 된다. 아마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집사라면 이 파드 연대기에 모두 마음을 빼앗기리라. 이처럼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르 귄의 팬에게도, 르 귄을 잘 모르는 이에게도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을 더없이 친숙하고 생생하게 그려준다.

 



내 고양이를 위한 졸시

 

하얀 발바닥, 두 귀는 까맣지.

곁에 없으면 허전한 맘 들지.

우렁찬 골골송, 부드러운 털

언제나 꼬리는 하늘 위로 척.

편안한 발걸음, 시선은 강렬하고,

어떠한 행사든 턱시도 입고 가고.

거칠한 발가락, 분홍 코 자랑하지.

앉아서 생각하는 널 보면 기분 좋지.

품종은 길냥이, 그 이름은 파드야.

너 없음 내 삶이 힘들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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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2-12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어떤 기자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왜 당신 작품의 주인공은 전부 여자인가? 라고 물었더니, 그가 왜 사람들은 남자가 주인공인 이유는 묻지 않으면서 여자가 주인공인 이유에 대해서는 묻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그 인터뷰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지요.
나도 여자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여자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반성도 했고요.
단순히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페미니즘 소설이 되고, 없던 작품성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독자들이 사고의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을 주는 작품들이 많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P.S 고양이 키우시는군요! 저랑 제일 친한 친구가 아이보리색 긴털을 가진 고양이를 키워서 영접하러 갔는데, 너무 귀여운 한편으론 도저히 나 같은 사람은 한 생명체를 돌볼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집사들의 지극정성을 저는 절대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지극정성을 들인만큼 고양이가 나에게 위로가 되니 다들 그렇게 키우는 거겠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12 15: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인터뷰 내용 들어본 기억이 나네요.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한,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풍경들을 여성으로 대치해보면 얼마나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배제되어 왔는지 알 수 있더라고요. 남자 앵커 - 여자 아나운서 이 배치만 달리 해봐도 생경한 풍경이 되고는 하지요. (아직도 여전히...)

P.S 네, 그것도 어쩌다 보니 세 마리나 키우고 있습니다. 르 귄의 파드와 닮은 제 고양이는 둘째 고양이고요. ㅎㅎ 제 서재 메인 화면 프로필 사진을 채우고 있는 녀석이 막내 고양이랍니다. 잠자냥이라는 제 서재 닉네임도 제 고양이들이 하도 잠만 자서 또 자냥? 또 잠자냥? 이러다가 만들었답니다. (카프카 <변신>에 나온 그레고르 ‘잠자‘ + ‘냥‘ 의 의미도 있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