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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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의 <카시지>는 한 소녀가 사라지면서 시작한다. 소녀는 말한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사라진 이유였다. 열아홉 살, 내 인생을 주사위처럼 던진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크레시다’라는 소녀가 스스로 집을 가출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왜 소녀는 가출을 했을까, 그녀의 말처럼 가족들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았기에 집을 나간 것일까? 소녀에게, 그리고 그 가족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런데 이윽고 이 소녀가 ‘실종’됐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사라짐이 단순 가출이 아니라 ‘실종’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떤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아니나다를까, 크레시다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남자가 있었음이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남자는 실종된 소녀의 언니 ‘줄리엣’의 약혼자였던 ‘브렛 킨케이드’이다. 지금은 파혼한, 한때 약혼자였던 남자. 그는 이라크전쟁에서 부상당한 뒤로 몸이 망가졌고, ‘외상에 의한 뇌손상’으로 기억마저 명료하지 못하다. 그런 상태에서 소녀가 사라진 숲속에서 술이 떡이 된 채 발견된다. 그의 셔츠와 지프에는 크레시다의 핏자국이, 지프에서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발견된다. 크레시다를 찾는 대규모 수색이 펼쳐지지만, 소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시신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증거는 브렛이 범인이라고, 살해범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정말 브렛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동생을 강간하고 죽였을까? 만일 그랬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소녀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한 것일까?

그러나 시작 부분에서 크레시다는 분명 사랑받지 못해서 사라졌다고, 주사위처럼 인생을 던졌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브렛과 함께 차를 타고 숲속으로 들어간 뒤에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을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도 왠지 수상쩍다. 크레시다의 가족,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 ‘제노’와 엄마 ‘아를렛’, 그리고 언니 ‘줄리엣’. 한없이 부유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 ‘메이필드’ 가족에게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둘째 딸은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을까? 그 비밀이 궁금해서 책장은 멈추지 않고 넘어간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메이필드 집안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들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인다. 그런데 두 딸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영리하고 버릇없는 작은 딸 크레시다와 얌전하고 예쁜 큰딸 줄리엣. 제노와 아를렛에게 둘째 딸 ‘크레시다’는 이름처럼 평범하지 않은 자식이다. ‘사랑하기 수월한 자식이 있고, 사랑하려면 노력이 필요한 자식’이 있는데 크레시다는 후자에 속했다. 줄리엣처럼 빛나는 자식들이 있다. 순수하고 그늘진 데 없고, 행복한. 그러나 모든 자식이 그럴 수는 없는 모양이다. 크레시다처럼 까다로운 자식들도 있다. 뱃속에서부터 그랬던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데 이골이 난. 더욱이 크레시다는 초등학생 때 ‘자폐증’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아스퍼거증후군’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더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카시지에서 메이필드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줄리엣은 예쁜 아이로, 크레시다는 똑똑한 아이로 본다. 그런데 크레시다는 그것이 싫다. 자기 또한 예쁜 아이이고 싶다, 병을 앓는 아이를 향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진짜 사랑을 받고 싶다. 언니처럼! 그래서 가족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크레시다는 자신의 존재를 카시지에서 지워낸 것일까?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 이 소녀가 사라지는 일이 가능할까?

더욱이 언니의 약혼자 ‘브렛 킨케이드’는 독자가 보기에도 조금 수상쩍다. 뇌손상으로 기억이 불분명한 그, 술에 취해 크레시다를 태우고 인적 없는 호숫가로 차를 몰았던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리고 이라크에서 돌아온 브렛을 시종일관 괴롭히는 그 기억은 크레시다의 실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카시지>는 초반부터 책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실 목차를 보면 1부 제목이 ‘사라진 소녀’이고, 2부는 ‘도피’ 3부 ‘귀환’이다. 때문에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소제목들만 보고도 사라진 소녀가 결국에는 제 발로 돌아올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라졌던 이유와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파문의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가볍지 않다.

오츠는 1부에서 먼저 브렛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라크전쟁의 한 단면, 그것도 아주 어두운 단면을 폭로한다. 지금까지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은 주로 1차,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한국전쟁 또는 걸프전 등을 다뤄왔다. 그 정도가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카시지>에서는 이라크전쟁이 등장한다. 솔직히 나는, 대개 고전문학 위주로 구성된 ‘세계문학전집’에서 이라크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오츠와 이 작품은 현대적이다. 브렛이 전쟁터로 향하는 동기도 과거의 전쟁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의 문학 작품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이들은 대개 자기의 선택이 아니었다. 징병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갔으나 이라크전쟁을 ‘선택’하는 브렛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딸의 약혼자가 자원입대하는 것에 제노는 그래서 회의적이다. 베트남전쟁 후반 냉소적인 시기를 보낸 그로서는 브렛처럼 현명한 청년이 자원입대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징병된 것도 아닌데 왜! 미친 짓이었다. 브렛은 조국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누구의 조국인가? 정치 지도자들의 아들딸들은 아무도 자원입대하지 않았고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도 그랬다. 2002년에 이미 사람들은 전쟁에 나갈 사람들이 미국 하층민이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국방부도 이를 파악했다. 브렛은 하층민 출신이었고, 전쟁터로 나아가 뭔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창피하게도 브렛은 훈장을 받고 싶었다. 가진 것이 없었던 그가 훈장을 받아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상냥하고 순진한 약혼녀와 카시지 전체가 감동하고, 톰 크루즈처럼 제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랄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터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만행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 ‘달리는 트럭 뒤에서 쓰레기 버리듯 군에서 내처져 불구의 몸으로 되돌아왔을 때’(200쪽). 그를 기다린 것은 더 이상 장밋빛으로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다. 파혼, 장애, 약물복용, 알코올 중독 등이 그의 인생에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지속적인 경찰 감시를 받는 장애를 가진 이라크전쟁 참전용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불분명한 기억 때문에 약혼녀의 동생을 살해한 사람으로 지목받기에 이른다. 브렛은 그의 말처럼 전쟁터에서 죽는 게 나았다.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이라크에서 살해됐지만 죽지 않았다. 브렛은 왜 자신이 크레시다를 해쳤다고 생각할까? 기억하지는 못하면서도 왜 자신이 크레시다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일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약혼녀 동생이었던, 순진한 소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일까? 그래서 오츠는 브렛을 통해 광기어린 전쟁, 그 부도덕한 악을 고발하는 것일까?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상상하든 당신의 예상은 또 쉽게 빗나간다.

1부 ‘사라진 소녀’가 크레시다와 브렛을 통해 단편적으로는 전쟁의 부도덕함을 고발하고 있다면 2부는 그보다 더 큰 악, 일상에 만연하는 폭력을 고발한다. 2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와 논조로 시작한다. 대학 교수이자 연구원인 한 남자와 그의 연구를 돕는 ‘새버스 맥스웨인’이라는 인턴이 등장한다. 이 연구원은 현재는 ‘힌턴’ 박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맥스웨인 관찰 끝에 힌턴 박사 또한 가명이며, 지금 그가 하는 연구 또한 세상의 악을 폭로하는 일 중의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는 사회공공기관의 부패와 비리를 취재하고 고발하는 데, 이번에 그들이 조사하는 대상은 교도소 시스템과 형사사건 재심제도인 ‘이노센트 프로젝트’, 그리고 사형제도이다. 그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중범죄자 교도소에 견학팀으로 위장해 참가한다. 이 연구원의 눈을 통해 오츠는 국가의 형벌 시스템이 작동하는 현장을 탐색하고, 구속과 사형 제도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이 수수께끼 같은 연구원은 자신을 숨긴 채 이제까지 동물권 및 환경단체, 좌파활동조직가, '국경없는여성들' 같은 여성운동단체에 상당액을 기부해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잠입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치! 당신의 (불)명예)>라는 책으로 썼고 이 책은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상태이다. ‘이노센트 프로젝트’는 또 다른 ‘수치’시리즈의 등장을 예고한다. 그는 이렇게 끊임없이 사회의 환부, 이 세상의 '수치'에 메스를 들이 댄다. 그리고 오츠는 이 연구원을 통해 ‘너무도 많은 이 시대의 악’ ‘백악관과 국방부뿐만 아니라 법원에까지 뻗쳐 똥칠이 된 천장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미국의 악, 부도덕한 미국의 실상을 까발린다.

1부와 2부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3부 ‘귀환’은? 3부에서는 누구나 예상하듯이 크레시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그려지고, 그 과정에서 마침내 그녀가 스스로 사라졌던 이유가 밝혀진다. 그런데 이 비밀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대부분은 그녀를 향한 분노랄까, 비난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AIDS, HIV에 감염되는 것처럼, 접촉하는 사람들을 감염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게 악의 본성’(257쪽)이라고 말하는데, 3부에 이르면 과연 누가 악이고 선일지, 크레시다의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을 성질의 것일지 혼란스러워진다. 크레시다는 삶을 누려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유폐된 삶은 자초한 게 아니었을까? 크레시다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패배감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모두 대단하고 기발하고 독창적이지만 깊이와 감정은 없는, 자신이 즐겨 그리던 그림과 비슷했다는 그녀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3부를 읽다보면 이언 매큐언의 <속죄>가 생각나기도 한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불러온 폭풍처럼, 누군가의 무심한 몸짓, 비밀, 오해 등 전혀 사소했던 그 사건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삶을 파멸로 몰아갔으니 말이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자기 스스로도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인간. 그의 참혹한 비밀 앞에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없이 나약한 인간과 그런 결함에서 비롯된 이기주의,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얽히고설키며 빚어내는 세상의 악.... 책을 덮고도 한동안 이 복잡한 기분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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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7-3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못견디는 내용의 소설일 것 같아, 선뜻 읽을 엄두는 안나는데, 크레시다가 저지른 죄가 너무 궁금해서 언젠가 읽어볼 것 같긴 하네요. 오늘도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비오지만 산뜻한 하루 보내셔요.

잠자냥 2019-07-31 13:00   좋아요 1 | URL
그래도 오츠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무시무시하게 끔찍한 편은 아니에요. 하하하하.^^;; 점심 맛있게 드세요~

2019-08-05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5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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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SF 소설이라 하기엔,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선 냉동 상태로 삶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불치병에 걸려 냉동인간이 되려는 사람, 그와 함께 하고픈 욕망 때문에 스스로 냉동인간이 되려는 한 남자. 이 상태는 죽음일까, 생명의 일시적 멈춤일까? 우아한 문체로 써내려간 묵직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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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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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추리소설이지! 지옥철을 견디는 데는 추리소설이 제격이지! 하면서 집어든 에도가와 란포의 <도플갱어의 섬>- ‘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 ‘검은 도마뱀’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역시 재미있어. 흥미롭게 빨려 들어가면서 읽었는데, 응? 이상하다, 이 기시감은 무엇? 알고 보니 ‘지붕 속 산책자’와 ‘도플갱어의 섬’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재미나게 읽었다. 결말을 알고 읽는 데 무슨 재미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추리소설은 범인은 바로 너! 이런 이유 때문이지! 우후훗- 하고 범인을 지목하고 범죄 방법이 드러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읽는다. 그러나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처음부터 범인이 드러나면서 시작하고, 심지어 범죄 방법까지 독자는 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범죄를 탐정이나 형사가 어떻게 밝혀내는가를 지켜보기 때문에,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안다하더라도 다시 읽는 재미가 크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범죄를 저지르게 된 동기, 인간의 이상 심리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 네 작품을 읽으면서 란포 특유의 작법 스타일이랄까, 범죄자로 치자면 그만의 고유한 트릭이랄까, 그만의 개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란포는 젊은 주인공, 주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린 네 작품 중 세 작품(‘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이 그러한데, 주인공들은 주로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데도 이상하게 이 세상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지붕 속 산책자’의 사부로나 ‘도플갱어의 섬’의 히로스케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부로는 어떤 직업을 가져 봐도 통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노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당구, 테니스, 수영, 등산, 바둑, 장기뿐만 아니라 각종 도박에 이르기까지 오락백과 사전 같은 책까지 사들여 놀이라는 놀이는 죄다 시도해보았지만 직업과 마찬가지로 늘 실망만 한다. 여자와 술에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는 “이런 재미없는 세상에서 오래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히로스케는 또 어떠한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무료하게 살아간다. 학교 다닐 때는 스스로 철학과 출신이라 칭했으나 그렇다고 철학 강의를 들은 건 아니다. 한때 문학에 몰두하면서 그 방면 서적을 탐독하더니, 때로는 건축과 강의를 듣기도 한다. 사회학, 경제학에 이어,  유화 도구를 사들여 화가 흉내를 내는 등 엄청난 ‘변덕쟁이’였다. 무엇에도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내는 성격이다. 직업을 갖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식의 생각이 없다. 그는 세상을 경험하기 전부터 세상에 완전히 질린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도 하숙방에서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극단적인 몽상가로 언젠가는 자기만의 이상향을 세우리라는 몽상에 잠겨 있다.

이렇게 인생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인물들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 눈이 번쩍 뜨이는 재미난 ‘놀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범죄’로 이어지고 만다. 주인공들은 대개 처음에는 일종의 유희처럼 금지된 선을 조금 넘는 정도에 그치는데, 거기서 조금씩 욕망의 싹이 자라나 마침내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고야 만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 지나친 호기심이 ‘그’ 또는 ‘그녀’를 살인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부로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 때문에 하숙집도 번번이 바꾸는데, 새로 옮긴 하숙집에서 어느 날 우연히 벽장을 발견한다. 벽장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천장을 돌아다니면서 말 그대로 ‘지붕 속 산책자’가 되어 다른 하숙생들의 방을 천장 위에서 엿보는 일에 재미를 들인다. 사부로는 그 전에 아마추어 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범죄’에 새로운 흥미를 느끼게 되기도 했다. 탐정 소설을 읽으면서 가능하다면 자신도 그 범죄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눈부시고 요란한 놀이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품게 된 가운데, 지붕 속을 돌아다니면서 남의 방을 엿보는 은밀한 놀이를 즐기게 된다. 여기까지는 관음증에 그치고 말았을 텐데, 그는 왠지 한대 후려갈기고 싶게 생긴 하숙생 ‘엔도’를 죽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천장 위에서 그를 엿보다가 잠든 엔도의 입에 침을 뱉으면 커다랗게 벌어진 그의 입 속으로 침이 똑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만일 그 입속에 독약을 넣는다면? 하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심리시험’의 후키야가 학비 걱정에 시달리던 참에 부잣집 노파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노파가 돈을 숨겨놓은 비밀 장소를 알게 되고, 일종의 유희처럼 살인 계획을 세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나, 히로스케(‘도플갱어의 섬’)가 우연히 대학시절 그와 쌍둥이처럼 닮았던 고모다 겐자부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범행을 꿈꾸는 것 등등 모두가 우연한 기회에 살인자가 된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검은 도마뱀’의 흑천사, 즉 검은 여인은 범죄 자체를 즐기는 인물이다. 그녀는  탐정 아케치와 내기하듯, 게임하듯 범죄를 즐긴다. 더욱이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는 돈이 아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건 죄다 모아보는 게 소원이다. 보석, 미술품, 아름다운 사람까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간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 부분은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던 히로스케와 닮았다. 그리고 그들은 애초에 별 거리낌 없이 무료한 일상, 지루한 삶, 흥미를 잃어버린 삶에서 일탈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듯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경찰 조사를 받고 돌아온 후키야는 득의양양해서 으쓱해하면서 떠들기도 하고(‘심리시험’), 사부로는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의 솜씨를 자랑스러워할 여유까지 보인다. “나도 참 대단해, 이것 봐, 누구 하나 여기 이 하숙집에 무서운 살인범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잖아.”(‘지붕 속 산책자’) 어디 그뿐인가. 죽은 이를 사칭하고, 자신의 엄청난 비밀이 밝혀질까 봐 사랑하는 여인까지 죽이게 되는 히로스케는 자기가 만든 기이한 왕국을 보며 흡족해마지 않는다(‘도플갱어의 섬’). 앞서 말했듯 검은 도마뱀은 사람을 수집하고(그래서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모아놓고 황홀해하는 기이한 심리를 지닌 여인이다. 그릇된 욕망과 호기심이 악의 질주를 멈추지 못한다.


진실은 항상 드러나고 나쁜 짓은 항상 폭로된다, 사람의 아들은 역시 결국 탄로 나는 법이다.(셰익스피어 인용-‘지붕 속 산책자’)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늘 허점이 있으니, 그 허점은 주로 그들의 무의식이 빚어낸 결과이다. 살인을 저지를 때 찢겨진 병풍, 언제부터인가 피우지 않게 된 담배, 아주 오래 전에 썼던 삼류 소설 등등.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생각지도 못했던 자기의 무의식이 결국 자기의 범죄를 지목하고 덜미가 되고 만다. 결국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무료한 일상에 놓여 있다가 비뚤어진 호기심에서 유희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의 완벽한 범죄에 우쭐거리지만, 하나의 허점, 무의식에 덜미를 잡히고 마는 것이다. 결국 란포는 모든 범죄는 인간의 그릇된 심리 상태에서 시작되고 인간 스스로 덫을 놓고 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도플갱어의 섬>을 읽는 내내 인간 심리 탐구자 란포의 정신세계를, 그 머릿속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사부로가 지붕 속을 거닐며 다른 하숙생들의 방을 엿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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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 Yorke - ANIMA [디지팩]
톰 요크 (Thom Yorke) 노래 / 강앤뮤직 (Kang & Music)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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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을 가장 핫하고 보람차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톰 요크의 이 앨범을 듣고 7월 28일 올림픽홀에 가는 것! 톰 요크의 끝없는 재능이 이 앨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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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7-2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 요크는 이제 락스타가 아닌 아티스트가 된 거 같아요. 하지만 전 그의 락스타 시절이 더 그립답니다. ㅜ_ㅜ 많이 덥겠지만 부디 즐거운 공연 관람 되시길 기원하며. 고등학생 시절, The bends 와 OK computer 수백번 들은 사람 올림.

잠자냥 2019-07-23 14:07   좋아요 1 | URL
우리 톰 ㅋㅋㅋ 이젠 정말 아티스트예요! 음악이 어쩜! 아티스트로 만든 이 음악들도 엄청 좋아요. 언제 기회되면 한번 들어보세요. 톰 요크 솔로 앨범 이제 3집인데 전 1집부터 3집까지 다 좋더라고요. ㅎㅎ The bends 와 OK computer 앨범은 정말 명반이죠. 지금도 제 아이폰에 고이 담겨 있습니다. ㅎㅎ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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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지루했다고 해야 할까. 몇몇 작품을 읽은 뒤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미지의 걸작>으로 나는 발자크를 다시 본다. 수도사 차림으로 독한 커피를 달고 살면서(살아생전 그가 마신 커피는 거의 5만 잔에 달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엄청난 강도로 글을 쓴 작가. 그의 <인간 희극>은 90여 편이 넘는 작품들로 구성되며, 등장인물만 2,000명에 이른다. 나폴레옹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신은 펜으로 이룰 것이라고 장담했다는 발자크. 평민의 아들이었으면서도 자기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드(de)’를 넣어 ‘오노레 드 발자크’로 불리기를 고집했던 사람.

그는 왜 그토록 미친 듯이 글을 썼을까? 발자크가 꽤 속물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에 실린 작가 소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시작한다. <미지의 걸작>은 앞부분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인용하면서 발자크라는 한 인간을 소개한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발자크는 속물인 동시에 결핍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발자크가 서른두 살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성공을 바라는 야심 가득한 청년을 만날 수 있다. 발자크는 말한다. “조만간 나는 한 재산 장만할 겁니다. 문필가로서, 아니면 정치계에서, 아니면 언론계에서, 아니면 결혼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사업상의 일확천금을 통해서 말입니다.”

발자크는 생애 내내 그 무엇보다 돈을 원했다. 부를 통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나는 돈을 간절히 바라는 것 자체가 속물이며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발자크의 지적은 거의 맞다. 이 세계는 부를 쌓을수록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많아진다.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발자크는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귀족 출신도 아니며 가진 것이라곤 글 쓰는 재주뿐이고, 사업에도 번번이 실패하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엄청난 빚을 다시 글을 써서 번 돈으로 갚고, 그렇게 번 돈을 또 사업에 투자하고 실패하고, 다시 작업실에 자신을 가둔 채, 광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삶. 그렇기에 발자크는 결혼을 통해 자신의 채무를 갚아주고 신분상승을 이뤄줄 귀족 여인을 평생 찾아 헤맨다. 그의 꿈은 이뤄졌을까? 놀랍게도 쉰 살이 넘어서 드디어 그는 귀족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그 자신의 오랜 바람이었던 상류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런데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으니, 과로로 쓰러진 발자크는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다.

작품이 아닌, 발자크의 삶을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까닭은,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는 발자크의 삶을 알 때 좀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또한 츠바이크의 발자크론을 인용하면서 시작한 게 아닐까. <미지의 걸작>에 실린 짧은 두 편의 이야기,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에서는 평생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공, 상류층이라는 신분 등 자신이 애초에 지니지 못했던, 그래서 결핍을 느꼈던, 때문에 더 간절히 바라고 욕망하게 되는, 그러나 끝끝내 가질 수 없었던 그 신기루와도 같은 것을 추구했던 발자크의 초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도매상인에게 세상은 봇짐이거나 유통 중인 지폐 뭉치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에게 세상은 여자다. 일부 여자들에게 세상은 남자다. 그리고 어떤 영혼들에게 세상은 거실이고, 집단이며, 동네이고, 도시다. 하지만 돈 후안에게 세상은 그 자신이었다! (‘영생의 묘약’, 43쪽)


첫 번째 이야기인 ‘영생의 묘약’은 호색한의 대명사 돈 후안의 삶을 그린다. 끊임없이 여자를 유혹하고 그 여자를 얻게 되는 순간, 냉혹하게 여자를 버리는 행위를 거듭하는 돈 후안. 발자크가 돈 후안과 같았다는 소리인가? 묻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발자크는 이 바람둥이 돈 후안의 이야기에 조금 색다른 창작의 손길을 덧붙인다. 한순간의 쾌락만을 뒤쫓던 돈 후안, 그도 진실로 얻고자 했던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불멸의 삶’이다. 쾌락에 대한 끝없는 욕구와 그런 삶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넉넉한 재산을 지닌 돈 후안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젊음이다. 그토록 많은 재산과 쾌락을 끝없이 누리려면 그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야 한다. 그것도 영원한 젊은이로.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뜻밖의 기회를 통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묘약, 이른바 ‘영생의 묘약’을 손에 넣게 된다. 돈 후안은 영원한 젊은이로 이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인 ‘미지의 걸작’은 ‘미술’을 소재로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천재 화가 프렌호퍼가 등장한다. 프렌호퍼는 발자크가 그려낸 상상 속 인물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포르뷔스를 비롯해 푸생은 실존 인물이다. 거기에 발자크는 시대를 풍미했던 루벤스, 렘브란트, 티치아노, 라파엘로 같은 실제 대가들의 화풍을 언급하면서 프렌호퍼의 입을 빌려 자신의 해박한 미술론을 한껏 펼쳐 보인다. 그런데 프렌호퍼의 예술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림과 화가’라는 관계를 통해 ‘문학과 작가’ 또는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미술은 하나의 상징처럼 다뤄지면서 문학을 비롯한 어떤 예술 작품 전체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 그에 대한 발자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미지의 걸작’, 71쪽)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통사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언어적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아!” (‘미지의 걸작’, 77쪽)


포르뷔스가 보기에 프렌호퍼는 예술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으며 다른 화가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인물이다. 그는 색채와 선의 절대적 진실성에 대해 깊이 성찰할 줄 안다. 프렌호퍼가 보기에 이미 유명해진 화가들은 아직도 진실한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애송이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작품은 그럴듯하게 그려지긴 했으나 살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자신의 그림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고, 열정”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예술에는 신념이 필요하지. 이와 같은 창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오랫동안 작품과 함께 살아야만 하네. 이 몇 개의 음영들을 위해서도 나는 많은 작업을 해야 했지.(...) 내가 이 효과를 재생하기 위해 믿을 수 없는 고통을 치렀을 거라 생각되지 않나?”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프렌호퍼의 이런 말들은 발자크가 자기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위대한 작가이고, 내 작품은 영혼을 지녔으며 이런 놀라운 작품을 쓰기 위해 나는 믿을 수 없는 고통을 치렀다고, 치르고 있다고.

그런데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타인의 그림을 평가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예술론을 펼치는 프렌호퍼. 그 자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회화 실력을 지녔다는 프랜호퍼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걸작 <카트린 레스코>를 10년에 걸쳐 비밀리에 그려왔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나날이 그의 걸작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프렌호퍼의 걸작을 마주하게 되는데! 포르뷔스와 푸생은 경악할 수밖에 없다. 포르뷔스와 푸생이 본 그림은 프렌호퍼가 이야기했듯이 절대적으로 완벽한 회화이자, 그 누군가의 회화와도 견줄 수 없는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진실한 그림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프렌호퍼의 회화가 어떤 그림일지 예상 가능할 것이다. 마치 영원한 젊음, 불멸의 삶을 꿈꾸었던 돈 후안의 소망이 좌절되듯이,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듯이, 프렌호퍼의 뮤즈 카트린의 초상을 담은 회화는 포르뷔스와 푸생의 기대를 크게 무너뜨린다.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을 꿈꾸었던 돈 후안과 프렌호퍼.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끊임없이 성공을 바라며, 신분 상승을 꿈꾸었던 발자크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돈 후안도 프렌호퍼도 그들이 욕망했던 것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드(de)'를 진실로 이룰 수 있는 삶, 귀족으로서의 삶을 눈앞에 두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발자크의 삶과도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발자크는 자신이 꿈꾸던 세속적인 부와 명예, 신분 상승 등은 손에 잡을 만하면 놓치고 말았지만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결국 이루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열매는 빨리 없어지지만, 예술의 열매는 불멸한다네.”(‘미지의 걸작’, 122쪽) 라는 이야기처럼 사랑이나 성공, 귀족이라는 신분은 한없이 덧없기만 하다. 그러나 예술을 영원하다. 그리고 발자크는 자신의 걸작으로 불멸하고 있다. 세속적 욕망은 언젠가 이루더라도 결국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리라, 그러나 예술만큼은 영원하다는 것을 <미지의 걸작>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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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2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못 읽고 반납했는데... 다시 빌려야 하나요.

잠자냥 2019-07-22 12:33   좋아요 0 | URL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펼쳐 보시면 알겠지만 본 내용은 짧아서 금세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Falstaff 2019-07-22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또 발자크가 나왔군요. 포착되면 언제나 고민하게 만드는 작가가 아휴, 발자크입니다. ㅡㅡ;;
근데 단편 두 편의 가격이 좀 심하네요.

잠자냥 2019-07-22 14:43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은 아마 폴스타프 님이 직접 보시면 화낼 거예요. ㅋㅋㅋ 게다가 앞뒤로 이런저런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서 본문 내용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양장본에 책에 옷을(말 그대로 천을 입힌) 장정이라 아주 비싸게 받는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가 다 그래요(츠바이크 ‘감정의 혼란‘까지 두 권 나왔습니다만).

coolcat329 2019-07-2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자체도 고급스럽던데 귀족의 삶을 꿈꾸던 오노레 ‘드‘ 발자크가 봤으면 좋아했을까요?ㅎ 저도 읽을 책에 추가하네요^^

잠자냥 2019-07-23 14:09   좋아요 0 | URL
ㅎㅎ 자기한테 어울린다고 좋아했을 법한 고급스러운 책이긴 합니다. ㅎㅎ

카알벨루치 2019-07-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오만잔이 심장을 발자크~ㅋㅋ글 잘 읽고 갑니다 ㅎ

잠자냥 2019-07-23 15:29   좋아요 1 | URL
커피를 그렇게 마셔대고 밤새 글을 썼으니 죽을 수밖에요;;; 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