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무거운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품을 읽는 대부분 사람들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이 작품은 실제로 일어난 범죄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까?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하기엔 카포티의 향기가 무척 느껴진다. 반면 단순한 소설이라
하기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너무나도 충실하게 1959년 미국의 한 마을이 재현되고 있다.
1959년 미국 캔자스의
작은 동네 홀컴에서 일가족 네 명이 엽총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당한 사람은 중년 부부와 그들의 10대
아들, 딸이다. 목격자는 없다. 증거도 없다. 아주 작은 액수의 현금만이 사라졌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왜, 무슨 동기로 그들을
그렇게도 잔혹하게 살해했을까?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카포티는 뉴욕 타임스에서 이 기사를 보고 친구(‘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와 함께 홀컴을 방문한다. 그들이 체류하는 동안 두 명의 범인이 체포된다. 카포티는 그들과 인터뷰를 시도한다. 범인, 마을
사람들, 수사 담당자 등을 만나며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카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위해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그렇게 해서 1966년 <인 콜드 블러드>는 세상에 등장한다. 이 작품은 카포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생생한 기록 속에서 살인이라는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배경, 동기, 살인이 일어난 이후 마을 사람들의 심리, 위선적인 행태,
희생자들의 삶, 남겨진 친인척 및 친구들의 삶, 그리고 무엇보다 범죄자의 삶, 범죄자가 만들어지는 배경, 범죄자들의 심리 등을
만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무엇보다 두 잔혹한 범죄자 딕과 페리 때문이다. 예전에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를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한 심정이 되살아났다. 연쇄살인범들과의 인터뷰를 다뤘던 이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어린 시절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그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트라우마)를 얻었다. 가족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어릴 때 성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폭행을 당한 경험이 많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장 환경에서 자랐어도
범죄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그랬다.
일가족 4명을 잔혹하게 살인한 딕과 페리- 그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조금 특이하다면 딕은 그래도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공감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고, 작은 범죄로 감옥에 가게 되면서 감옥에서 점점 더 망가졌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큰 범죄자가 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페리는 불우한 가정환경, 한없이 부족한 관심과 애정, 사람들의 인정, 받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교육 환경
등 열악한 사회적 환경 때문에 범죄자의 길로 들어선 유형이다.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면 분노가 일다가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희생자는 어떨까? 살해당한 클러터 씨 일가는 마을에서 그 누구도 적이 없을 만큼 사랑받던
가족이다. 아이들도 그렇고, 클러터 씨 부부는 말할 것도 없다. 적이 없기 때문에 누가 그들을 죽였을지, 죽이고 싶어 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수사는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게 선량한 사람들이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무기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야 한다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은 두려움도
느껴진다.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복잡한 심경이 든다. 잔혹한 범죄를 예방하고자, 그리고 잔혹하게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일말의 ‘복수’를 하고자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할까? 파렴치한 범인들이 이토록 선량한 일가족을 몰살하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는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다가도 복수를 위해, 똑같이 죽음으로 되갚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진다. 그런다고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게다가 범죄자의 가족들이 사람들을 이목을 두려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 끔찍하게 사형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을 볼 때면 더더욱 사형제도의 정당성에 의문이 든다.
<인 콜드 블러드>는 딕 히콕에 비해 지나치게 페리 스미스를 동정적으로 묘사할 때가 많아 기분이 나빠질 때도 종종 있다.
카포티가 페리라는 인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카포티는 페리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도록 독자를 설득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실제로 담당 형사 중 한 사람은 카포티가 페리와 애정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잃었다고 비난했다). 페리에게 사랑을 느꼈기에 카포티가 그를 그토록 동정적으로 묘사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카포티는 페리에게서 자신과 닮은 면을 봤던 게 아닐까. 자신처럼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한 남자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지.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딕과 페리가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토록 죽기 두려운 너희들, 너희들은 죽기 그렇게 싫으면서 살려달라고 공포에 떨던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댔지? 그러면서 너희는 그렇게 살고 싶니? 욕이 나오기도 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가 치민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데(교화하는 데는)는 결국 강력한 처벌보다도 애정이 중요한 것 같다. 사랑과 끊임없는 관심이 없다면 인간은
이렇게 쉽게 망가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구나 싶다.
모든 범죄는 단지 ‘절도의 변형’이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살인도 포함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의 삶을 빼앗는 거지’(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라는 말. 남의 물건을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오거나, 훔쳐 본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을 ‘인간’ 그런데 그
인간이 그런 행동을 단순히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끝내는지, 상습범이 되는지, 그러다 결국 타인의 생명까지 훔치는 잔혹한 살인범이
되는지는 결국 또 다른 인간의 사랑과 관심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정말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그토록 잔인한
범죄자마저도 그 나약함을 벗어날 수는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