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해서 고전은 못 읽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에는 몇 번쯤 ‘뭐야? 이거 왜 이래? 계속 읽어야 하나?’ 싶은 순간이 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험버트’의 끊임없는 수다와 말장난을 기억하리라.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명백히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 주인공 ‘게르만’은 어떤 면에서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 보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말장난을 늘어놓고 언어유희를 즐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읽는 이는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롤리타>에서의 험버트(아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의 수다가 그리 싫지 않았던(혹은 참을 만했던) 사람이라면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이 펼쳐놓는 이야기에도 큰 거부감은 들지 않을 것이다.‘험버트’와 닮은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한 편의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소개한 문구 중에 ‘폭로해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미스터리 플롯’이라는 구절이 있던데, 정말 그렇다. 만약 이 작품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와 상관있는 그 어떤 내용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의 서두는 정도는 괜찮지만, 중반 이후는 절대로! 스포일러를 모두 피해야 한다. 그나마 어떤 작품인지 잠깐 소개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색다르다고 해야 할까?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던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 그는 어느 날 출장 중에 교외를 거닐다 풀밭에 잠들어 있던 한 부랑자를 보고 흠칫 놀란다. 부랑자 펠릭스- 그는 게르만과 놀랍도록 완벽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의 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신과 이토록 닮은, ‘분신’ 펠릭스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게르만의 머릿속에는 놀라운 생각이 자리 잡게 되는데….이 작품을 읽으며 두 번쯤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험버트’를 쏙 빼닮은 ‘게르만’의 수다와 자아도취적인 태도 때문에….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놀랍도록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게르만의 수다가 단순한 ‘수다’가 아니었구나 싶어 감탄했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은 그 흔치 않은 작품에 속한다. 참 매혹적인 스릴러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며..... 어떤 출판사 버전으로 읽어볼까 고민하다가....
(민음사 버전은 번역이 엄청 이상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음)....
응? 열린책들 버전 보고 식겁했다. 응?????? 이 책의 어디가 틀렸을까요? 너무 쉬운가? ㅋㅋㅋㅋ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유미주의,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하다(또 다른 유미주의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도 그에게 존경을 표할 정도). 여체에 대한 탐미,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쉬 등 인간의 변태(?)성욕에 대한 집착 등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만(卍)>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이 두 작품 또한 그런 작가의 문학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먼저<만(卍)>을 살펴보자. 얽혀있는 저 한자 모양처럼 이 작품은 남녀 네 명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주를 이룬다. 동성애, 마조히즘, 사디즘 등 에로티시즘의 결정체라는 평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에로티시즘의 결정체'라는 말에는 딱히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속고 속이는 인간의 기만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사뭇 충격적이다. 뭐랄까, 인간은 어차피 이런 족속이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으로 또 확인하니 뼈저리게 씁쓸하다.
스포일러를 제외한 내용은 간단하다. 고지식하고 답답한 남편을 둔 유부녀 소노코는 취미 생활로 동양화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육체와 미모를 가진 미쓰코를 만나 한눈에 호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던 소노코에게 기회는 우연히 주어진다.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미쓰코와 소노코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을 계기로 실제로 그 둘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소노코는 미쓰코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어 가고 남편을 속여 가며 대담한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기만을 사랑하다고 믿었던 미쓰코에게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그의 등장으로 이들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만(卍)>에서 미쓰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육체에 반해 노예처럼 그녀에게 복종한다. 미쓰코 역시 그런 이들의 숭배를 받으며 점점 이기적이고 포악해져간다.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이들의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 절대적인 숭배를 받고자하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은 물론 아름다운 대상을 숭배하며 굴종하는 인간의 노예근성 등을 폭로한다. 무엇보다도 미쓰코를 자기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을 통해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한다기보다 결국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열정)에 빠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일본의 고전 문학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80에 가까운 노인이 20대의 아름다운 부인을 얻어 그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며 행복에 빠져 사는 이야기로 이 작품에도 역시나 아름다운 여자에 매혹당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를 어머니로 둔 한 소년의 시선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이나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내용도 재미있지만 고전적이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분위기나 문장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이어져온 ‘호색문학’의 전통을 근대문학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며 그만의 에로틱한 탐미주의 문학으로 피워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단순히 여체 숭배에 집착한 초기 작품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일본의 고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에로티시즘과 전통미를 탁월하게 결합했다고 하는데,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