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우체국에 갔다. 엄마에게 택배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받는 사람 주소를 쓰고 마지막으로 엄마 전화번호를 적으려는데 외우지 못해서 핸드폰을 열고 엄마 번호를 찾다가 그만 실수로 통화를 누르고 말았다. 한 번의 신호가 다 가기 전에 재빠르게 끊었는데, 귀신같이 엄마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엄마의 목소리- “아니 지금 택배 보내려고 전화번호 입력하는데 잘못 눌렀어.” “응, 양말 잘 넣었지?” “어, 으이그 그놈의 양말.”
엄마와 통화를 끊고 우체국 직원에게 택배함을 건넸다. 보내는 물품이 뭐냐고 묻기에 양말이요, 대답하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양말. 그것도 신던 양말, 신던 양말 중에서도 멀쩡한 걸 보내기 왠지 아까워서 뒤꿈치에 살짝 구멍이 난 노란 양말을 택배 상자에 덜렁 넣어서 보낸다. 그것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 엄마에게. 올봄에도 이렇게 양말 한 켤레를 엄마에게 보냈다. 그때는 그래도 엄마 집에 직접 가서 하룻밤 자고 오면서 내가 신던 양말을 주고 왔는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귀찮아 택배를 보냈다. 택배 상자 요금까지 포함해서 4천 5백 원이 나왔다. 전철 타고 엄마한테 두 번은 갔다 올 요금이다.
우체국을 나오니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에휴, 그놈의 양말.” 한 번 더 투덜댄다. 엄마는 올해부터 내가 삼재라고, 삼재를 피하려면 그래야 한다면서 봄에도, 또 동지를 앞두고도 내 양말을 한 켤레씩 절에 가 태워야 한다면서, 신던 양말을 보내라고 신신당부했다. 봄에도 양말을 건네면서 나는 못마땅해했다. “그놈의 삼재. 어휴, 나는 인생 자체가 삼재 같아. 이 따위 양말 몇 켤레 태운다고 다 삼재 벗어나면 삼재 아닌 사람이 없겠다.” 봄에 한 번 태우고 마는 줄 알았더니, 동지를 앞두고 또 태워야 한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요즘에 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세상 사는 것 자체가 더 무의미한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는커녕 양말이나 태우고 있는 엄마가 답답하고 좀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내가 겪는 이 고통에 아무런 실질적 도움도 되지 않을 구멍 난 노란 양말을 보내고 나오는 그 길, 참 예쁘게도 눈이 온다. 온통 하얀 세상은 참 아름다운데, 내 마음은 그걸 느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지금과 비슷했던 어느 함박눈 내리던 날이 떠올랐다. 수년 전.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결국 그때까지 남아있던 직원들은 다 같이 짐을 꾸려야 했다. 사람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 내가 너무 게을렀던 것일까.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눌러앉아 있다가 망해버린 회사. 짐을 꾸리던 내가 한심스러워서 욕이 절로 나왔다. 퇴직금은커녕 밀린 월급 몇 달 치에 그간 생활하느라 깨버린 통장, 적금, 신용카드 빛 등등. 내가 한심스럽고 싫어서 눈물이 났다. 짐을 싸서 허탈하게 회사를 나오는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동료들에게 인사할 기분도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가기는 뭐했다. “밖에 눈 오네요. 이사 가는 날 눈 오면 잘 산대요.” 우울한 얼굴로 묵묵히 짐을 싸던 동료들이 그 순간만큼은 모두 함빡 웃었다.
망한 회사의 문은 열고 나와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은 참담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농담처럼 꺼낸 그 말처럼, 이 함박눈이 앞으로의 내 삶을 조금은 축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보기도 했다. 그 후로 꽤 세월이 흘렀고 내 삶은 그때로부터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이리저리 휘둘리며 부딪치고 혼자 이겨내야 한다. 삼재를 피하려면 양말을 태워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무색하게 들릴 만큼 인생이 내내 삼재 같다. 양말을 보낸 그날 밤 나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었다. 누워 읽다가 어느 순간 앉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함박눈을 맞으며 눈물을 삼키며 걷던 딱 그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의 저자 황시운은 가장 기쁘고 행복하던 순간에 추락했고 그 추락으로 말미암아 척추가 부러져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날 그 끔찍한 순간 이후의 기록이다. 추락과 절망, 나락.... 그 삶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첫 일화부터 처절하다. 하반신 마비로 가장 기본적인 배설 행위조차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관장을 하고 배변을 볼 수밖에 없었던 그 참담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올봄에 나는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을 했기에 간호사의 도움으로 관장을 하고 소변줄을 차는 등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짧은 경험만으로도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워서 다시는 이런 수술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진저리를 쳤는데, 평생 배뇨도, 배변도 자기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실수라도 하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처리할 수 없는 삶이란 얼마나 참혹할까. 나는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저자의 상황에 섣불리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한 그해에 저자에게도 비극이 찾아와서였을까, 아니면 나와 비슷한 또래라서 그런 것일까. 그의 고통이 그의 절망이 그의 슬픔이 눈물이, 남 일 같지 않다. 내가 좀 더 빨리 그 회사를 떠났어야 했는데, 사람을 너무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책에 시달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 또한 자기에게 찾아온 비극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종종 자책한다. 그 봄밤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면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하는 안타깝고도 돌이킬 수 없는 자책. 황시운은 세상의 일이 원래 그런 것 같다고, “어떤 순간에도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세상은 늘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고, “대가를 지불함에 있어 선처도 유예도 없다”고, “유일한 위안은 세상이 내게만 잔혹한 것은 아니라는 정도”라고(25쪽) 자책과 함께 체념한 듯이 말한다.
나는 그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여러 번 말해주고 싶어진다. 잘못은 마땅히 있어야 할 난간이 없었던 그 다리에 있다고. 그것은 그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세상이 내게만 잔혹한 것은 아니라는 말, 그 말만큼은 차마 그에게 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스스로 경계했던 마음이 그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니까 너는 힘내라고, 너는 괜찮다고, 타인의 불행을 나의 행복의 근거로 삼는 그런 마음. 저자의 글은 그런 생각이 들 새도 없이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인간은 모두가 “돌아보면 모두들 제 몸집 이상의 짐을 짊어진 채 흔들리고”(25쪽)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이 크게 나아질 거라 기대하고 살기보다는 “삶이 주어졌으니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일 거라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과 불운에 온몸으로 맞서면서” “간혹 마주치는 사소한 기쁨이나 따뜻한 것들에 의지한 채 작은 성취들을 쌓아가면서.”(33쪽) 그렇게 다들 살아가고 있다고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이 책이 끝끝내 절망과 비참함의 기록이었다면 나는 아마 어떤 위로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시운은 그럼에도 살아간다. 비록 자기의 세상은 부러져버렸지만 그 부러진 세상에서나마 앞으로 나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를 아끼기에 항상 그와 함께 이 세상의 높은 턱들을 기꺼이 넘어가 주려는 이들이 있다. 물론 저자는 그 자신도, 그리고 자기를 아끼는 이들도 모두 그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길 소망해보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턱이 존재한다. 비단 장애가 있는 이만이 아니라 멀쩡한 몸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도 인생의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턱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턱을 기꺼이 함께 넘어가 주고자 할 이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양말, 양말 잔소리하던 내 엄마의 마음도 삶의 그 턱들을 함께 넘어가 주고자 했던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황시운은 여전히 달밤이면 설렌다. 그 달밤에 추락을 겪었으면서도 달을 보며 산책가는 것이 좋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빈털터리로 짐을 싸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함박눈이 좋은 나의 마음처럼……. 책을 다 읽을 즈음에는 생면부지의 저자에게 어쩐지 내가 아끼는 연필, 그것도 한정판 블랙윙 몇 자루를 선물하고 싶어진다. 척추는 부러졌지만, 그래서 세상도 부러졌지만 그래도 움직이라고, 움직여서 다시 쓰라고. 당신의 글이 오늘의 나에게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잠시 부러진 마음의 누군가에게 틀림없이 힘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 움직이자고, 쓰자고,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