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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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중 ‘처음 읽는’이라는 말은 참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혹은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인 ‘아프리카 역사’라고 해야 할까.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온갖 역사를 배웠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설명은 늘 많아야 몇 페이지, 보통은 몇 단락으로 마무리되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종식, 제3세계의 독립운동 등을 다루는 장에서 ‘서구열강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속속 독립을 하고 있다’ 등의 짧은 서술로 끝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세계사를 배우다 보니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의 아프리카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때문에 아프리카 역사는 처음 읽는 것이 아니면서도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처음 읽으면서도 처음 읽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아프리카의 역사’라는 제목을 보면서 불현듯 ‘아! 아프리카에도 역사가 있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구매욕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네덜란드계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이 서술한 아프리카의 역사라…. 그럴듯해 보이지만 왠지 서구중심 세계관을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런 의심이 들었다.

책을 덮을 즈음, 나의 그런 편견은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할 수 없는 게, 서술하는 역사가의 관점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 루츠 판 다이크는 자신의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대신 현재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주민, 살다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 등을 통해 최대한 반영한다. 이런 독특한 접근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책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흘러나오는 각계각층 사람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진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 화가의 삽화도 색다른 느낌을 전달하는 데 한몫한다. 게다가 이 저자는 남성들로 쓰인 역사의 폐해를 끊임없이 지적하며, 아프리카 여성들의 정치 참여 및 여성들로 만들어진 새로운 아프리카 역사가 탄생하기를 누차 강조한다.  

거의 모든 문화의 역사는 권력과 부유함을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자신의 민족을 극히 고약한 방식으로 착취했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고 처음 10년 동안 아프리카에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배자들이 압도적이었다. 첫째, 그들은 이전의 식민 지배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이나 적어도 묵인 아래서 권력을 차지하였다. 둘째, 적어도 처음에는 각 국민의 보수적 엘리트 계층의 지원을 받거나 묵인되었다. 셋째, 남자들이었다. (195쪽)


그러고 보면 참 어이없다. 이집트는 분명히 아프리카의 한 국가인데, 우리가 접하는 이집트 관련 영화(피라미드, 파라오 등을 다룬)에서 파라오는 거의 백인에 가깝게 그려져 왔다.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역시 거의 백인에 가까운 외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실은 ‘흑인’아닌가? 이 책을 읽다 보면 최초의 원시인이 존재했던,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땅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잘난 서구는 아프리카인을 열등한 존재로,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노예로 삼아왔다.

제국주의 얼굴을 하고 남의 땅을 제 땅처럼 침략한 유럽 국가들, 아프리카의 그 수많은 종족적 특성은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주인도 없는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땅을 나눠 갖고 국토를 분할한 그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아프리카에서 수없이 내전과 내란이 일어나도록 한 원흉임에도 그들은 하등의 책임도 없는 듯 아프리카의 내전과 내란을 바라보며 ‘역시 저들은 미개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냉소와 조롱 섞인 시선을 보낸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구호물자를 보내고 원조를 하면서 온갖 생색은 다 내고 있다. 서구사회는 아프리카에 몇 백 년이 지나도 다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의 엄청난 자원을 탐내며 강탈은 끝나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정말로 희망이 없을까? 그러나 이 책의 몇몇 아프리카 국가의 사례를 보면 희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넬슨 만델라가 이끌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국가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 불렸던 ‘토마 상카라(Thomas Sankara 1949~1987년)’가 이끌던 시절의 부르키나파소(‘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의미)다. 그가 이끌었던 시절의 부르키나파소를 보면 제대로 된 지도자와 그를 뒷받침할만한 세력만 존재한다면 아프리카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는 안타깝게도 쿠데타로 총살당했다. 상카라 뿐만 아니라 세네갈의 대통령 레오폴드 셍고르나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처럼 권력을 쥔 자가 그 권력을 민중을 위해 제대로 작동시킬 때 아프리카에 희망이 빛은 조금 더 빨리 찾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프리카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에도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데 좀 더 냉정하다. 그들은 한때 아시아 국가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들이 오히려 더 추락하고 있는 이유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연대하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하고, 고급인력의 두뇌 유출을 꼬집기도 한다. 이런 새로운 목소리가 민주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기 결정권을 실현할 때 아프리카에도 새로운 희망의 역사가 쓰일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또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 ‘이국적인 원시림과 비참함만을 생각하는 일’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꿈을 바라볼’ 자유를 허용해야 할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런 제안을 따르자면 이런 책을 읽어보는 것도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벗는데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서구 사회가 아프리카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하며, 그 오랜 세월 동안 아프리카 땅을 착취해왔던 것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부채탕감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나!). 또한 다국적 기업의 가면을 쓰고 자행하고 있는 21세기의 또 다른 약탈 행위도 이제는 제발, 멈춰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진심으로 호감을 느낄만한 아프리카의 몇몇 지도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남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이념은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통해 인간이 된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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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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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선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글렌 굴드’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중에 읽어보려고 적어두기는 했는데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쩍 더 이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등장한다고 해서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굴드가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그의 오랜 친구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글렌 굴드’가 나온다.


이들은 오래전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 공부를 했던 사이로 그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작품은 ‘나’에게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나’는 베르트하이머의 자살 이유를 밝히고자 그가 죽기 전 머물렀던 별장과 근처 여관을 찾아간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를 추측해보다가 베르트하이머가 글렌 굴드 때문에 자살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우연히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자신은 도저히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피아노 대가로서의 꿈을 접는다.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어버린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영원히 2인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몰락하는 자>를 통해 굴드로 대변되는 완벽한 예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한없이 나약해지며 좌절할 수 있는지 베르트하이머라는 인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줄거리만 보면 꽤 흥미 있어(?) 보이지만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전형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기에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른하르트 특유의 길고 거친 독설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나름의 통쾌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한편 작품에 그려진 굴드의 모습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이리라 짐작하다가는 굴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을 소지도 있어 보인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 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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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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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0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벨아미 펭귄클래식 108
기 드 모파상 지음, 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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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Bel-Ami’는 잘생긴 친구, 아름다운 친구, 혹은 미남 친구 정도의 의미다. 또한 모파상의 장편 <벨아미>의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의 별명이기도 하다. 조르주 뒤루아는 그야말로 가진 것이라고는 잘생긴 외모, 그것 하나뿐이다. 부모님은 시골의 가난한 농사꾼이고 조르주 자신도 특출 난 재능이라고는 딱히 없다. 그저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일만이 쉬울 뿐이랄까?

그럼에도 그에게는 매우 대단히 큰 욕망이 있다. 누구보다 잘 살고 싶고, 누구보다 유명해지고 싶으며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고 싶어 한다. 귀족 출신도 아니고 집안도 가난한 이 남자가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제 불 보듯 뻔하다. 조르주 뒤루아는 그의 잘생긴 외모를 무기로 파리 사교계에 진출하며 여자들의 마음을 쉽게 얻게 된다. 그는 귀족 출신의 잘나가는 여자들만 상대하며 승승장구한다.

여자들은 그를 정부로 두면서 몸과 마음을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경제적인 후원은 물론, 쉽게 얻기 힘든 갖가지 기회를 제공한다. 뒤루아는 이 여자 저 여자 닥치는 대로 이용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나간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면 행복할까? 글쎄.... 작은 행운이나 기회에도 크게 기뻐하던 처음과 달리 조르주 뒤루아는 점점 더 만족을 모르게 된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데도 그는 어쩐지 더 큰 욕심을 낼 뿐이다. 이 잘생긴 친구 ‘조르주 뒤루아’의 인생은 그래서 어디까지 질주할 수 있을까?

단편으로 유명한 모파상의 장편으로 <벨아미>는 무척 재미있다. 특히 ‘조르주 뒤루아’의 속물적인 모습, 허영기,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묘사하는 부분들이 이 작품의 백미이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외모와 달리 어쩌면 이렇게도 못났으면서도 찌질한 인간이 있을 수 있는가! 뒤루아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넘어가는 여자들 또한 허영으로 똘똘 뭉쳐있다. 교양 넘치고 정숙한 척은 다하지만 결국 <벨아미>의 여자들은 반반하게 잘생긴 남자 외모 하나에 홀딱 넘어가서 영혼까지 털려버린다. 

물론 여자들만 그렇지는 않다. 뒤루아가 처음 일자리를 얻은 신문사와 신문사에 드나드는 기자들 및 작가들 또한 다르지 않다. <벨아미>에 나오는 인물들은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을 떠나 하나같이 세속적이고 우스꽝스럽다. 돈이나 권력, 성공에 대한 욕망만 있을 뿐 자기 성찰이나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인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한 사람쯤은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인물이 있기 마련인데(물론 이 작품에도 조르주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이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벨아미>에는 그런 인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과 권력, 거기에 쾌락만 있으면 그저 좋은 인간들뿐이다. 조르주 뒤루아는 가진 것이 없던 시절, 그런 상류층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했고 결국 그런 삶을 추구하며 쫓아가기 바쁘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동경하던 사람들과 꼭 닮은, 어쩌면 더 혐오스러운 인물이 된다. 여전히 잘생겼지만 아름다움은 점점 잃어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스탕달의 <적과 흑>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신분 상승을 위해 멈출 줄 모른다는 점에서 ‘조르주 뒤루아’는 ‘쥘리앙 소렐’과 꼭 닮았지만 쥘리앙 소렐보다 조르주 뒤루아 쪽이 한층 더 문제적인 인물이다. 왜 그러한지는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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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6-09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건, 지구상 어느 곳보다 잡놈 잡년들이 많아서 그랬다.....는 게 늘 제가 주장하는 바입지요. 조르주야말로 `잡놈` 국가대표고요. ㅋㅋㅋㅋ
전 민음사 책으로 읽었군요.

잠자냥 2016-06-09 13:38   좋아요 0 | URL
하하하. 폴스타프 님 주장 정말 공감가네요. ㅋㅋ
 
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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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절정. 이보다 더 우울할 수는 없다. 읽으면 한없이 우울해지는 작가들이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작가는 있으리라.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레이먼드 카버? 얼핏 이런 이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손창섭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문득 손창섭의 작품이 무척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점에서 주문해서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는데,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많이 읽으면 하루 세 편? 손창섭의 작품은 그게 한계다. 하루 두 편 혹은 세 편 정도. 그 이상 읽으면 하루 허용할 수 있는 우울의 양을 넘어서기 때문에 쉽게 극복할 수가 없다. 막판에는 남은 걸 다 읽을 셈으로 네 편을 몰아 읽었더니, 책을 덮고 나서 울렁거리는 울렁증 때문에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더라. 가람기획에서 <손창섭 단편 전집 1, 2>권이 나와 있던데 이걸 또 읽어볼까 싶었지만 한동안은 못 읽을 듯하다.

손창섭을 처음 알게 된 건 열여덟, 열아홉 그즈음이었다. 수능 언어영역 지문이었나, 아니면 문학시간이었나. 문제풀이를 하던 중 문제지 지문에서 그의 작품 <비 오는 날>을 처음 읽었다. 전문은 아니었지만 꽤 긴 내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지문을 읽는 동안 이미 문제 풀 생각은 사라졌다. 이런 작품이 다 있나 싶었다. 전문을 찾아 읽었는데, 한동안 그 작품이 주는 짙은 우울의 정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비 오는 날>과 함께 잘 알려진 또 다른 작품 <잉여인간>도 찾아 읽었다. 이 작품은 <비 오는 날>처럼 심하진 않지만 역시 읽고 나니 엄청난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대학에 와서 손창섭 작품을 더 찾아 읽었다. 손. 창. 섭. 그의 이름 석 자를 마음에 새겼다.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약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단편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은 그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잊기 힘든 작품이다. 그의 문장은 사실 거칠고 투박하다. 별다른 꾸밈도 없다. 북한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문장을 음미하면서 읽는 소설가류는 아니다. 어쩌면 손창섭과 ‘꾸밈’이라는 말은 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심하게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불구자 문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작품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아, <잉여인간>의 ‘서만기’ 그 정도만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작품에서조차 만기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하나같이 병신스럽다. 몸도 불구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같이 마음이 병든 자들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사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고, 죽을 용기도 없어 근근이 살아간다. 삶은 즐겁기보다 고통 그 자체다. 왜 태어났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는 더더욱 모르겠다. 좀비들 마냥 먹고 싸고, 자고, 흐리멍덩한 눈을 치켜뜨고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생을 향락하다니? 생의 어느 구석에 조금이라도 향락할 수 있는 대견한 요소가 있단 말인가? (‘사연기’, 28쪽)

살아 있다는 것은 동주에게 있어서 그냥 견딜 수 없이 뻐근한 상태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하다못해 공기나마 담고 있어야하는 항아리처럼,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희망을-아니면 절망이나 공허라도 채워져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생활적’, 77쪽)

무덤 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흙으로 덮어 주리라 느껴지듯, 산다는 것의 무의미와 우울이 꽝꽝 소리를 내어 다지는 것처럼 전신을 내리누르는 것이다. 동주는 사뭇 안간힘을 하다시피 무엇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생활적’, 91~92쪽)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커다란 과오 같이만 해석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인간 행세에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그는, 누구 앞에서나 실없이 불안하고 비굴할밖에 없었다. (‘피해자’, 143쪽)

인간의 일이 어찌 저렇게 값싼 눈물로 해결될 수 있단 말이냐.  (‘미해결의 장’, 178쪽)


그러면서 성(性)에 대한 욕구는 다들 또 충실하다. 그야말로 동물스럽다. 불륜도 상관없고, 이성이든 동성이든 성의 구분도 상관없다. 거기엔 어떤 도덕적인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식욕처럼 자연스럽고 어떻게 보면 그래서 꼭 해결해야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손창섭 작품의 인물을 보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기도 하다.

손창섭 작품의 이런 극단적 우울, 불구적인 인물들, 삶에 대한 환멸스러운 태도 등을 논할 때 꼭 그래서 6.25 전쟁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손창섭 개인의 삶에서 찾는 게 더 옳지 않나 싶다. 거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을 보면 이 사람의 삶 자체가 이런 문학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손창섭은 그 자신을 '부모도 형제도 고향도 집도 나라도 돈도 생일도 없는, 완전한 영양실조에 걸린 육신과 정신이 피폐한 고아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자, 그래서 잃을 것도 없고, 때문에 무서운 것도 없는 삶. 스스로를 병신, 불구라고 부르던 사람. 희망은커녕 절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던 삶. 쓸 수밖에 없어서 썼는데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가 싫어 홀연 사라져 버린 사람. 대중에게서 자신이 잊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던 사람. 그 처절한 생의 기록이 그의 단편에 녹아있다. 때문에 삶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혹은 인생이란 행복한 것이라고 공허하게 외치는, 근거 없는 희망을 역설하는 말캉말캉한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의 진실이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전해진다. 이 기묘한 지구에 하필이면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한 생을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안됐구나. 하는 쓸쓸한 시선에서 비참한 감동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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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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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뻗은 길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난했고 앞으로도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돈을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 아니 알았다. 나는 숨을 수 있는 곳,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곳을 원했다. 무언가 된다는 생각은 소름 끼칠 뿐만 아니라 구역질까지 났다. 변호사나 지방 의원, 기술자나 뭐 그런 게 된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아 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가족 구조의 덫에 갇히고, 매일 어디론가 일하러 나가고 얼토당토않았다. 단순한 일이라도 뭔가 한다는 것,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 가족 소풍이나, 크리스마스, 독립 기념일, 노동절, 어머니날…… 인간은 이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인가? 차라리 접시닦이가 되어 작은 방으로 홀로 돌아가서 나 혼자 술 마시다 죽는 편이 나았다. (275쪽)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처음 읽었던 때는 2012년. 그 작품은<우체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또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우체국>을 읽은 뒤, 음 괜찮은데, 한 권만 더 읽어볼까? 해서 <여자들>을 읽었고, 그 다음에 한 번만 더 하면서 읽은 책이 <팩토텀>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의 작품이 또 언제 번역되어 나올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고백하건대, 몇 번은 그의 시가 읽어보고 싶어서 웹사이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이 안티히어로 작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랐지만 결국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가 된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에 나는 빠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러다가 작년에 모 출판사에서 나온 부코스키의 말년 일기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를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게다가 올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호밀빵 햄 샌드위치>가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고는 앗! 소리를 지르며 장바구니에 바로, 그의 책을 담았다. 더 기쁜 일은 그의 시집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가 또 곧 출판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나는 어쩌다 이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랐던, 그저 여자와 술과 담배와 책만 있으면, 골방에서 글만 쓸 수 있다면 행복했다는 이 남자. 찰스 부코스키, 헨리 치나스키에게 빠져 버린 것일까?

자연스럽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르는 <호밀빵 햄 샌드위치>는 바로 내가 반해버린 한 쓸모없는 인간, ‘헨치 치나스키’의 성장기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기대했던 대로 이 책은 정말 여러 의미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특히 저 위의 인용구문….  저 구절은 곧 ‘헨리 치나스키’ 아니, ‘찰스 부코스키’의 세계관이랄까, 작품 세계를 단정적으로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을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물론 부코스키 이전에도 그저 아무것도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위대하고’ ‘훌륭하고’ ‘쓸모 있는’ 것들을 향한 역겨움을 토로하거나 성장이나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작가나 작품들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작품에 쏟아 부은 작가의 생각과 실제 삶이 일치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작품으로는 성장이나 발전, 진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실생활은 윤택하기 그지없어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귀족이거나 부유한 집 자식이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많거나 등등 고등유민인 작가들이 많았다. 그러한 이들이 작품에 그런 생각들을 아무리 펼쳐도 실생활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지거나 공허한 말장난, 헛소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찰스 부코스키는 삶과 작품이 거의 일치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가 자신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를 통해 ‘무엇인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니 ‘되어야만 하는’ 인간 존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기를 들었을 때, 그 의문은 결코 헛소리이거나 공허한 말장난이 아닌, 진실이자 진심으로 다가온다. 때문에 그 울림도 감동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년 헨리 치나스키는 빈민가,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한없이 약하기만 한 어머니를 연민하며 자란다. 학교에서도 마음을 둘 만한 친구를 만나기는커녕 이방인처럼 계속 겉돌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지도 않은 대통령 연설 장면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지어낸 글이 선생님의 인정을 받는다. ‘독창적’이라면서. 거기에 또 우연히 친구 따라 마신 와인 맛에 빠지면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만나게 된다. D.H.로렌스, 셔우드 앤더슨, 헤밍웨이, 헉슬리,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고리키 등등. ‘불 꺼!’ 고함치는 아버지 몰래 이불 밑에서 과열된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으며 헨리 치나스키는 점점 ‘마법’의 세계로 빠져든다. 숨을 만한 공간에서 술과 책과 함께 사람들과 떨어져서 홀로 있을 때 가장 평온해하는 ‘헨리 치나스키’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나는 인간 혐오자도 아니고 여성 혐오자도 아니었지만, 혼자가 좋았다. 작은 공간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좋은 친구였다. (400쪽)

‘헨리 치나스키’는 그 작고 누추한 공간에서 담배와 술, 책과 문학과 함께 성장하고 늙어간다. 어떤 사람들에게, 아니 이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이른바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이들의 눈에 헨리 치나스키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술꾼, 주정뱅이, 룸펜, 한량, 실패자, 루저일지도 모른다. ‘쯧쯧 왜 저러고 사냐’ 손가락질 하며 동정할 만한 대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루저 ‘헨리 치나스키’가 안티-히어로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가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될지언정 적어도 그러한 ‘의식’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 안티 히어로 ‘헨리 치나스키’의 웃기고도 슬프고, 쓸쓸하면서도 외롭고 어쩐지 뭉클한 성장담이 <호밀빵 햄 샌드위치>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115쪽)

처음 맞닥뜨린 진실이란 무척 우스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진실이 나의 진실과 같을 땐, 그가 마치 그것을 나를 위해서만 말해 주는 것만 같다. 근사한 경험이었다. (216쪽)

“현실로부터 숨어 버리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로 그게 작가들이 하는 짓이지!” (375쪽)

나는 세계사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무슨 헛짓거리인가. 부모가 성장기를 지배하고,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런 다음 자기 혼자 나설 준비가 되었을 땐, 다른 사람들이 제복을 억지로 입혀서 엉덩이에 총을 맞도록 내보냈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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