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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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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룻밤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아까워서 1, 2부는 하루 밤에 또 3, 4부는 다른 날 밤에 이런 식으로 나눠 읽었다. 소설을 아껴두었다가 읽는 다는 심정. 이해할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그만큼 이 소설은 참 흡인력 있다. <모리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이다. 그리고 E.M 포스터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픽션을 섞어서 만든 소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주인공 모리스 및 그의 연인인 더럼의 심리 묘사면에서 매우 빼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밀고 당기기, 처음 본 순간의 떨림, 헤어진 뒤의 더없는 절망감 등등.

신사의 나라 영국. 엄연한 사회적인 계급이 존재하는 그 꽉막히고 답답한 사회에서 캠브리지의 평범한(?) 대학생인 모리스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매혹당하고 자신도 모르게 끌리지만, ‘그러면 안되니까’ 그 남자의 사랑 고백에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냐며 돌아선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사춘기 시절 꿔왔던 꿈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캠브리지에서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것은 모리스의 연인 더럼이 주장대로 순전히 플라토닉한 사랑에 머무르고 만다. 남자들끼리의 사랑은 그래야 한다고- 정신적인 사랑, 지적인 사랑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더럼의 주장에, 모리스 또한 그게 맞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따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모리스에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일깨워준 이 ‘더럼’이란 남자는 참 ‘더럽’게도(?) '난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어'라며 매몰차게 기존의 평온한 삶, 즉 이성애자들의 세계이자 사회 계급적으로 안락한 영국 신사의 세계로 돌아간다. ‘우리가 함께 했던 것들은 치기어린 어린애들의 장난’에 불과할 뿐이라는 태도로 모리스를 외면한다. 더럼은 모리스와의 지난 관계를 '성장 과정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라는 식으로 치부하고 만다. 더욱이 모리스 앞에 약혼녀를 데리고 나타나, 그의 한때 연인이었던 그에게 가장 절친한 ‘친구’로서의 의무를 다해줄 것을 강요하기 까지 한다. 천하에 몹쓸 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더럼의 선택도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작품을 읽어보면 수긍이 간다. 그토록 견고한 인습과 전통의 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하여 더럼이 떠난 뒤 모리스는 암흑의 세계를 걷는다. 절망......

1, 2부는 모리스와 더럼의 캠브리지 안에서의 플라토닉한 러브와 그들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3부는 그로 말미암아 방황하고 절망하는 모리스, 그러면서 서서히 육체적인 부름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에게도 새로운 연인이 등장한다. 소설의 마지막 단원인 4부에서는 모리스가 방황을 종지부 찍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지를 숨가쁘게 그린다. 더럼과 나눈 사랑의 방식과는 다른,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사랑, 육체와 정신이 완벽하게 결합되는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꽤나 감명깊다.


모리스의 새로운 연인이 더럼과는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를테면 신분적인 면을 비롯하여 지적인 매력보다는, 육체적인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유치할 정도로 스스럼 없다는 면에서)이라는 설정도 좋았다. 그리고 단순한 머리를 지닌, 노동 계급에 속하는 모리스의 이 새로운 연인이, 모리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모리스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 부, 모든 것을 버린다) 장면에서는 눈물이 왈칵 나기도 한다.

E.M. 포스터의 생애를 훑어보면, 그가 사랑했던 남자, 또는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들이 모두 결국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권 안으로 귀착하는 데 반해, 포스터는 평생 독신으로 늙어갔다. 그런 그의 생애가 소설과 오버랩 되면서 슬픔을 동반한 아이러니컬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그의 사랑이 행복한 결맞을 맺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작품에서라도 포스터의 분신임이 틀림없을 모리스가 행복해지기를 그는 바랐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모리스>는 플라토닉한 사랑에서 육체적인 기쁨을 동반한 사랑,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인습과 전통따위를 모두 벗어 던져 버리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싸워가는 한 남자의 ‘성장’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거 알지만. 지금은 죽고 싶지 않고 네가 죽는 것도 싫어.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죽으면 우리 둘 다 끝이야. 넌 그걸 깨끗하고 투명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모리스가 말했다.
“그러면 나는 더러워지는 쪽을 택하겠어” (p.139)                                                                                       

지나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기억되게 마련이다.배움이 없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지난 사랑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음란한 욕망, 두서없이 나누던 기나긴 대화들도 돌이키지 않으니.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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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맑음 2016-11-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내리는 날 숲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에 소설이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인데 이렇게 다시 보게되니 기쁘네요^^

잠자냥 2016-11-28 13:44   좋아요 0 | URL
네, ‘비내리는 날 숲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라는 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모리스>뿐만이 아니라 포스터의 모든 작품들이 숲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ㅎㅎ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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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벨 훅스를 만난 것은 <사랑의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통 지적 수준이 높은 이들(흔히 우리는 '학자'라고 부르는)은 그들의 박식함이나 많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혹은 일부러 '글'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있다. 내가 처음 만난 벨 훅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쉽고 간결하면서도 매혹적인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벨 훅스- 그녀를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느덧 내개 그녀의 저작은 나오는 족족 찾아봐야 할 그런 책이 되었고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또한 그렇게 만났다. '계급'이라는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를 그녀는 역시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요?"라고 입을 뗀다. 계급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잘 알다시피, 벨 훅스는 흑인이며, 여성이다.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젠더, 인종, 계급, 문화와 관련한 다수의 비평서를 집필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흑인이며, 여자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녀가 속한 위치가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은 갈 것이다. 그녀가 1952년 미국 남부 켄터키 주의 흑인 분리 구역에서 태어나, 1973년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력을 보면서 흑인 분리 구역에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그녀의 고군분투기는 이 책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좌절하고 상처를 무수히 받을만한 상황인데도, 그녀는 우뚝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전형적인 노동 계급의 가난한 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현재는 '풍요로운 세상'으로 이동한 벨 훅스- 그녀는 '계급'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그녀는 그 문제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흑인이기‘때문에 라는 인종 문제와, '여자이기'때문에 라는 젠더의 문제로 계급 문제를 희석할 뿐이었지, 그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는 것은 꺼려해 왔고, 그녀 역시 자신이 속한 세계가 흑인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인종과 성의 문제보다 '계급'문제가 가장 뼈아프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단적으로 부자 흑인 집안 출신의 아이들은 가난한 집안 출신 흑인 아이들과 연대하려 하지 않으며 부자 백인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차라리 백인 빈민층과 흑인 빈민층이 연대하는 경우가 더욱 많음을 벨 훅스는 지적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 어느 곳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얼마든지 노력하고,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부’를 창출하는 능력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근면, 성실한 태도 등)로 치부하며 흑인은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이념을 전파한다. 게다가 그런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존재(약물에 취해, 총기를 소지하고)로 설파하기까지 한다. 흑인도 노력하면, 여자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데 단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벨 훅스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성공해서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속의 ‘그 정상’이라는 위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그녀에 따르면 ‘지배 계급은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할까봐 약물 중독을 심고, 노동 계급에게는 쇼핑 중독을 심었다.’ 노동 계급이 계속해서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녀는 광고의 악영향을 이야기한다. 물건을 사면 그만큼 당신의 지위가 향상된다는 거짓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재테크라는 말 자체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모든 인종의 여자들과 흑인 남성들이 빠른 속도로 가난하고 혜택을 박탈당한 계급으로 유입되고 있음을 벨 훅스는 지적한다. 이 상태를 계속 두면 머지않아 미국은 계급투쟁의 장이 될 것이라는 깊은 우려와 함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우리가 ‘계급 문제를 직시하고, 더 많은 사실을 깨달아 경제적 정의를 위해 제대로 투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제일 먼저 공정한 경제 체제부터 만들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직시하고, 그 계급과 연대해야 할 것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벨 훅스는 자신이 충실하게 연대해야 할 계급은 물론 '노동 계급'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책을 마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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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1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너 리그에서서 열심히 노~~오력하면 매이져 리그로 편입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매이져와 마이너라는 이 리그 시스템 자체로써의 계급적 고찰을 묻는 질문이었네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듯합니다. 결국 리그의 자각을 통하여 투쟁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 읽어 볼만한 책이네요..참고하겠습니다.

잠자냥 2016-11-18 10:04   좋아요 1 | URL
지금의 우리 사회도,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사회도 계급간 불평등은 더 심화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평등사회라고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연대해야 할 계급끼리 인종 또는 젠더 갈등으로 오히려 더 첨예하게 대립하지요. 암튼 여러모로 답답한 요즘입니다....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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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소개 중에 ‘위대한 러브스토리’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를 보고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카엘’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어쩐지 정말 ‘위대한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초반부는 조금 그럴 듯했다. 한나라는 여자와 미카엘이라는 남자가 대학 교정에서 만나서 조금씩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데이트를 하고 가까워지는 부분, 그리고 주변의 만류에도 서둘러 결혼을 하는 부분까지는 이제 곧 한나와 미카엘의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펼쳐 지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그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펼쳐 지려나 궁금해 하고 또 궁금해 하는데, 어느덧 소설의 결말이…. 실은 읽기 상당히 지루했다. 무미건조하고 무덤덤한 문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아마도 없는 것 같다.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의 작가이며 <나의 미카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꽤 유명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도 처음이고, 아모스 오즈의 작품도 처음이었다.

이 소설은 꽤 낯설게 다가온다.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특히 그렇다. 그런 한편 작가의 문체는 무미건조하면서도 꽤 서정적이다. 서걱서걱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기분이 든다. 머릿속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 아랍, 사막 등등의 낯선 풍경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읽으면 그 무미건조함이 더욱 잘 느껴진다.  

이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나가 미카엘을 만나 데이트를 하고 이내 서둘러 결혼을 하기까지는 앞서 언급했듯이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데, 결국 읽다 보면 ‘한나’와 ‘미카엘’의 아주 평범하고 지루한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가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 그 이후 첫 아이 임신, 중동 전쟁, 지질학을 전공하던 남편의 박사학위 취득, 친척 혹은 가까이 하던 이웃들의 사망, 그리고 둘째 아이의 임신… 남편의 외도 그리고 결국 서서히 파탄에 접어드는 ‘한나’의 결혼 생활.

‘한나’는 처음부터 결핍을 앓았던 사람이고, 그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미카엘’을 선택했지만 사실 ‘미카엘’은 ‘한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소설을 보는 내내 든다. 착하고 자상하고 늘 한결같은 남편이지만 ‘한나’의 외로움, 우울증, 결핍, 소외감 등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런 그녀는 현실에서의 불만족을 매일 밤 꾸는 환상적인 ‘꿈’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하지만 결국 그것은 끝없는 우울증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위대한 러브스토리’라고 어떤 이는 이 책을 소개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러브스토리’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지만 ‘위대한 스토리’라는 생각은 조금 들기도 한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웃이나 친척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지루하고 불만에 찬 삶이지만 그래도 계속 ‘살아야만 한다'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메시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한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위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은 역설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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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와 미카엘. 두 사람 성격 다 답답해보여서 끝까지 읽는 일이 힘들었어요. ^^;;

잠자냥 2016-11-15 14:27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끝까지 답답합니다;; ㅠㅠ
 
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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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출판사 북플을 친구로 추가해 신간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 본다. 최근 눈에 띈 책 두 권이 있었다. 헤밍웨이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과 나카지마 아쓰시 <산월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둘 중 뭘 먼저 사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헤밍웨이 단편집은 다른 단편집에서 읽은 작품도 꽤 있어서 나카지마 아쓰시의 <산월기>를 골랐다. 처음엔 좀 반신반의 했다. 사보고 후회하는 거 아닐까 싶은….

이 책을 소개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일본 교과서에 실린 국민 소설 <산월기>’ ‘중국 고전에서 제재를 가져다가 작품을 빚어내 제2의 아쿠타가와로 불리는 나카지마 아쓰시’ 사실, 일본 교과서에 줄곧 수록되었다는 말은 내 기준에 그리 큰 칭찬은 아니었다. 교과서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이랄까. 교과서에 실릴 만큼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그런 내용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중국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왔다니 더 그런 혐의가 짙었다. 권선징악적 주제에 도덕적 교훈적인 그런 소설이 아닐까. 그럼 너무 뻔한데, 재미없는데 하는 생각.

‘제2의 아쿠타가와’라는 수식어 또한 크게 끌리지는 않았다. 아쿠타가와 작품 중 중국 고전에서 제재를 빌려와 쓴 작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와 상관없이 담담히 써내려간 <귤> 같은 작품이 훨씬 좋다. 아쿠타가와의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라쇼몽>도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동명의 영화가 훨씬 훌륭하다. 가끔 원작을 뛰어넘는 빼어난 영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라쇼몽>이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일본 교과서에 실린 작품’ ‘제2의 아쿠타가와’라는 소개는 아무런 장점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럼에도 이 책을 사게 된 이유는, 내가 여태껏 읽어본 적 없는 일본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워낙 잘 쓴 단편을 좋아하다보니, 아직까지 단 한 작품도 읽어보지 못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사실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 책을 받아들고 첫 작품으로 실린 <산월기>를 읽었는데, 읽는 순간 내공이 느껴졌다. 어? 장난 아닌데 싶은 기분이랄까. 이 단편이 일본 교과서에 60년 가까이 실렸다는 문제의(?) 작품인데, 굉장히 짧다. 그런데 강렬하다!  

당나라 고전 <인호전>에서 소재를 가져온 <산월기>는 시인으로 후세까지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남자 ‘이징’의 뒤틀린 자존심과 수치심이 마침내 그를 호랑이로 만들고 만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남과는 다르다고, 속세의 범인들을 깔보며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이렇다 할 노력도 하지 않으며 그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탓하는 어리석고도 비뚤어진 남자.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남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다. 나부터도 그렇고 인간은 누구나 이런 면이 있지 않을까. 호랑이가 된 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듯하지만 ‘이징’은 여전히 다시 인간의 얼굴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호랑이가 되어서도 버려두고 온 처자식보다도 자기의 시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로써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거나 기꺼이 시우와 어울리며 절차탁마를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한 나는 속물들 사이에 끼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는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는 점차 세상에서 벗어나고 사람들과 멀어지며 번민과 수치와 분노로써 내 속의 소심한 자존심을 더욱 살찌게 했다. 인간은 누구나 맹수를 키우는 사육사이며, 그 맹수는 바로 각자의 성정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에는 거만한 수치심이 맹수였다. 호랑이였던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해치고 처자를 괴롭히며 친구를 상처주고, 결국에는 내 외모를 이렇게 속마음과 어울리게 바꾸어버렸다. <산월기>, 16~17쪽



<산월기> 못지않게 인상 깊었던 작품은 마찬가지로 중국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와 쓴 <제자>이다. 이 작품은 공자와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로’의 이야기인데 무척 아름답다. 나는 이 작품 때문에 <논어>를 이제는 한번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했고, ‘자로’라는 인물에 궁금증이 일어나, 그의 삶을 다룬 책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람다운 사람, 양심이나 순수함, 신의 등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인물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공자와 수제자 자로의 관계는 사람답게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성찰해보게 된다. 읽다가 어느 순간 좀 눈물이 나기도 했다. 아마 요즘 이런 사람, 이런 인간 관계를 좀처럼 만나기 어렵기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공자와 자로가 주고받는 말들 가운데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

자로가 지금까지 만난 인간의 훌륭함은 어느 것도 모두 그 이용 가치 안에 있었다. 이것이나 저것에 도움이 되므로 훌륭하다는 것에 불과했다. 공자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단지 그곳에 공자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제자>, 83쪽

그렇다면 선을 행한다는 것의 보답은 결국 선을 행했다고 하는 만족 이외에는 없는 것인가. <제자>, 97쪽

<시경>에 말하길, 백성 속에 부정이 만연되었을 때는 나서서 법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제자>, 113쪽



이 두 작품뿐만이 아니라 중국 고전에서 소재를 빌려온 나머지 작품들도 단순히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할 수 없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다. 인간의 복잡함, 그 복잡함에서 비롯되는 인생의 굴곡,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의 모습이 짧은 이야기들 속에서 번뜩이며 그 빛을 발휘한다. ‘제2의 아쿠타가와’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나카지마 아쓰시는 1920년에 용산중학교 한문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경성으로 건너와 조선에서 사춘기를 보낸다. 그 시절을 경험으로 쓴 작품들도 썩 훌륭하다. <범 사냥>과 <순사가 있는 풍경-1923년의 한 스케치>가 특히 인상 깊다. <범 사냥>은 전학생인 ‘나’가 조선인 ‘조대환’과 가까워지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조대환'과 다른 일본 학생들과의 관계, '조대환'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부분 '나'와 '조대환'이 대환의 아버지를 따라 범 사냥에 나서는 장면이다. 사냥터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며 느끼는 흥분, 설렘, 두려움 또는 공포가 빼어나게 그려진다. 더욱이 그저 범 사냥을 지켜보는 소년의 시선에서 그쳤을 법도 한데, 그 순간에도 인간의 모순이나 위선을 발견한다. 일본인 상급생에게 괴롭힘 당하던 조선인 조대환은 “강한 게 뭐고 약한 게 뭐란 말이야. 응? 정말로.” 이렇게 ‘나’에게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 사냥터에서 '나'는 '조대환'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양반집 자제인 조대환은 사냥터에서 하층민 몰이꾼을 발로 툭툭 차며 함부로 대한다. 강자에게 핍박당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가,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또 다른 약자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다.

이제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모두 얼어버리겠지 등을 생각하며 수면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문득 그가 아까 한 말을 떠올리고 그 숨겨진 의미를 발견한 듯하여 깜짝 놀랐다. ‘강한 게 뭐고 약한 게 도대체 뭐지?’라는 조의 말은, 하고 나는 그때 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단지 현재 그 한 개인의 경우에 관한 감개만은 아니지 않은가. <범 사냥>, 210쪽



<순사가 있는 풍경>에서도 이렇게 모순적인 인간은 등장한다. 식민지 치하 조선인 순사 ‘조교영’이 그런 인물이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모습, 조선인의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지만 그러는 한편 일본 신사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고는 우쭐해진다. 그런 인간의 모순과 나약함 이중성을 짧은 스케치 같은 단편 속에서 예리하게 포착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내가 반한 점은 식민지 조선 풍경을 묘사한 방식이다. 읽는 것만으로도 1920년대 식민지 치하 어둡고 불결하고 암담한,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조선의 어느 후미진 골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포석 위에는 얼어버린 고양이 사체가 굴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 위로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붉은색 단밤 가게 광고지가 갈가리 찢기며 날아갔다. 길모퉁이에 있는 대여섯 개의 포장마차에서는 하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지저분한 두루마기 밖으로 검붉고 단단한 유방을 드러낸 여자가 그 앞에 서서 뜨거운 김을 불어대며 고춧가루를 빨갛게 뿌린 우동을 먹고 있다. <순사가 있는 풍경>, 233쪽
 
춥다기보다는 아팠다. 몸 안의 심장 외에는 모두 동사해버린 느낌이었다. 길가에는 버려진 생선의 붉은 아가미가 흐트러져 있고, 응달에 쌓인 눈 위에는 비릿한 돼지 머리가 물어뜯긴 채 흩어져 있었다. 집 안의 사람들은 도랑에서 올라오는 가스 같은, 부추와 마늘로 썩은 공기를 쇠약한 폐로 호흡하며 간신히 살아갔다. <순사가 있는 풍경>, 247쪽



나카지마 아쓰시는 33세의 나이로 일찍 죽어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도 작가 연보를 보면 일본에서는 그의 전집이 전 3권으로 출판된 것 같다. 더 많은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아쉬운 대로 <산월기>를 몇 번쯤 다시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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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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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이후로 관심을 갖게 된 작가이다. 뵐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황색언론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한 여인의 삶을 다루었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가난한 부부의 삶을 이야기한다. 내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다. 그의 문체는 건조하고 담백하면서 크게 꾸밈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문체! 그런 문장으로 삶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피해를 당하는 개인에 대해 나름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카타리나’에게도 그랬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가난한 부부 프레드와 캐테에게도 그렇다.

작품의 배경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독일이다. 프레드와 캐테는 가난한 중년 부부다. 아이들은 셋이나 있고, 캐테는 심지어 임신을 또 한 것 같아 두렵기 그지없다. 좁은 단칸방에서 복작대며 살다 보니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이들은 집주인 눈치를 보느라 숨죽여 노는 법을 이미 터득했고, 옆방에 소리가 들릴까 부부는 마음 편히 사랑을 나눌 수조차 없다. 이와는 달리 옆방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때때로 섹스를 하는 바람에 캐테는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들을까 전전긍긍한다. 가난에 찌들어 힘겹게 살다 보니 프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게 되기도 하고, 결국 그렇게 사는 것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홀로 생활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미 이런 상황 속에서 시작하며 프레드와 캐테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한 번은 프레드가 그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또 한 번은 캐테가 아이들과 좁은 단칸방에서 씨름하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작품은 이런 부부의 어느 주말 48시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틀간의 이야기 속에서 전후 독일의 피폐한 상황, 가난에 찌든 하층민의 삶,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면모와 가난한 이들에게 절대로 구원이 되지 못하는 카톨릭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이 낱낱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프레드가 아내 캐테와 함께 할 ‘지상의 온전한 그들만의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 돈을 빌리러 다니며 느끼는 온갖 상념이 무척 인상 깊다. 삶의 비애가 절로 느껴진다. 삶에 지치고, 꿈이 부서진 중년 남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생의 씁쓸한 단면에 공감이 간다. 어떤 구절구절에서는 쿵하고 울림이 인다. ‘책가방을 여는 데서 시작하여 어딘가의 사무실 의자 위에서 끝나는 죽음의 순환 속에 매여 있는 내 아이들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와 같은 문장….


캐테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조용하게 노는 습관이 이미 몸에 배어버린 아이들을 보며 슬퍼하고,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터덜터덜 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프레드가 운 좋게 돈을 빌려 싸구려 호텔을 빌리게 되면 그를 만나러 가지만, 그렇게 가는 길 역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 부부는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따뜻하고 깨끗한 집 한 칸을 다시 얻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여러 소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서도 이 작품이 전후 독일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 ‘고전’으로 칭송받으며 하인리히 뵐을 독일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게 된 이유는 ‘깊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 갈수록 ‘가난’이 무능력과 게으름 등 개인 탓으로 돌려지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멸시도 서슴지 않는 요즘 같은 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런 시선이 과연 온당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준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현재에도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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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12-0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여지껏 이 책은 ‘당연하게‘ 읽은 줄 알았거든요. 근데 잠자냥 님 글을 읽어보니 무척 생소한 겁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읽지도 않고 읽은 듯한 느낌. 아... 전혜린의 같은 제목 책 때문에 그랬던 듯 합니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도 무척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ㅎㅎㅎ 잽싸게 보관함에 챙겨놨습니다.

잠자냥 2016-12-08 16:58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아마 국내에 전혜린 때문에 많이 알려졌겠지만 실제로 이 책 읽어보신 분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어릿광대>보다 저는 이 작품이 더 좋더라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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