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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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에서나 문학에서나 영화에서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연민도 들고 불쌍한 마음도 들지만 가까이는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의 주인공 ‘주디스 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주디스 헌은 일요일 오후마다 절친이라고 생각하는 ‘오닐 가족’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 가족 중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핑계를 대서 주디스 헌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주디스 헌의 친구인 ‘오닐’은 정작 자신의 친구인데도 그녀가 올 시간이면 냉큼 서재로 도망가 버린다. 결국 오닐의 아내인 ‘모이라’가 마지못해 그녀를 환대하는 척하지만 주디스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이내 졸다가 잠들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런데도 이 눈치 없는 여자 주디스는 그 가족이 자신을 기피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이 가정의 따뜻함을 그리워하면서 다음 일요일에도, 또 그다음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이 집을 찾아온다. 대체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일까?

1950년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이제 마흔을 넘긴 독신 여성 ‘주디스 헌’은 철저히 혼자이다. 부모도 형제도 일가친척도 없다. 유일한 친척이었던 이모가 몇 해 전 세상을 뜨고 난 후로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이모는 그녀에게 이렇다 할 재산도 남겨주지 않았고, 특출한 재능도 그렇다고 빼어난 외모를 지니지도 못한, 아니 도리어 못난 얼굴에 가까운 이 여성은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했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하숙집을 전전한다. 타인의 마음을 오해도 잘하고 제멋대로 판단하기 일쑤여서 마음에 드는 하숙집을 찾았나 싶으면 금세 또 불만거리를 찾아내서는 다른 집으로 옮기고는 한다. 그렇게 또 새로이 찾아든 하숙집이 바로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라이스 부인’의 집이다.

처음에 이 작품은 큭큭 웃음이 터진다. 이 각진 얼굴의,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디스- 주디의 성격과 생각이 좀 독특하기도 해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고, 라이스 부인의 하숙집과 하숙인들 묘사가 생생해서 시트콤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라이스 부인의 아들인 버나드, 버니.......(오 마이갓 다시 생각해도 끔찍해!)를 묘사하는 부분은 너무나 절묘해서 블랙코미디처럼 초반은 그렇게 흘러간다. 버나드는 서른이 넘은 덩치 큰 남자인데도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아 섹스는 하는구나) 거의 없는 인간이다. 밥도 엄마가 먹여줄 기세이고 심지어 중반 이후에는 엄마인 라이스 부인이 몸을 씻겨주는 장면도 나온다(오 마이갓.....). 하숙집에서 이 버나드를 마주한 주디는 허옇고 퉁퉁하게 살 진 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버나드를 보고는 속으로 ‘아기 라이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기 라이스가 결코 아기처럼 순진무구하지 않다는 것- 제가 편하게 엄마에게 기생해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잔머리를 굴리는지 이 끔찍한 아기 라이스의 간계에 주디도 놀아날 뻔한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이 집에 주디의 눈을 사로잡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 아기 라이스의 삼촌이자 라이스 부인의 오빠인 ‘제임스 매든’- 삼십 년 넘게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온 그는 중후한 장년의 남성으로 한순간에 이 외로운 여인 주디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말끝마다 미국을 찬양하는 매든은 미국에서 호텔업을 하다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미국에서 호텔 사업으로 성공한 남자가 왜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돌아왔겠는가. 호텔업은커녕 호텔 도어맨 등 변변찮은 직업을 전전하다 고향으로 쫓기듯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여동생의 집에 생활비도 한 푼 내지 않으면서 기거하는 것이고. 그런데 주디는 이 남자를 미국에서 성공한 돈 많은 사업가로 ‘오해’하고 매든은 매든대로 주디가 단지 멋을 부리려고 찬 (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금시계를 보고는 그녀가 골드미스(ㅋㅋㅋㅋ)라고 ‘오해’하고는 한몫 건져보려는 욕심에 주디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 속내를 모르고 주디는 매든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이 블랙코미디는 갑자기 급 우울&슬퍼진다. 한마디로 웃프다. 주디가 왜 그 나이까지 짝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는지, 왜 변변찮은 직업(물론 시대배경이 1950년대의 보수적인 아일랜드 지방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조차 없이 이제는 피아노 교습으로 근근이 먹고살아가는지 그 속내를 알게 되는 순간 하, 인생이란 무엇인가 독신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가 갑자기 슬퍼지는 것이다. 단지 주디가 못생겨서 결혼하지 못한 것일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그건 아닐 것 같다. 젊은 나날의 주디에게 그 의무가 없었더라면, 그녀가 이기적으로 자기의 꿈(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좇아 계속 그 시절에 그것을 추구했더라면 꼭 그녀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좋은 남자는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어찌어찌 남자는 만나서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살지는 않았을까 싶어진다. 그랬더라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으리라-

속물스럽기도 하고 남을 제멋대로 판단하기도 하지만 딱히 악하지도 않고 같이 있는 게 너무나 역할 정도로 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닌 주디스 헌- 그런데도 그녀는 그 젊은 나날에 단지 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 응당 누렸을 법한 우정이나 사랑 등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인간관계에서 소외당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 과도한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기피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일에서도 그렇다. 그 의무에 묶이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결혼 전까지 나름 자기의 커리어를 쌓아가지 않았을까. 주디가 원하지는 않았으나 주디를 원했던 그녀의 의무는 참으로 안타깝고 과도하게 그녀의 삶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아간다.

주디의 운명을 굴곡지게 만든 그 의무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뜻하지 않은 복병이 하나 더 등장하는데, 바로 주님- 알코올이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가운데 이렇게 술에 취한 여성 주인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가끔 술에 취하고 망가지는 여성 캐릭터들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토록 철저히 알코올의존증인 여성 캐릭터는 처음인 것 같다. 술에 기대어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잊고자 하는 여자, 그렇지만 저 하느님, 그러니까 저기 저 먼 어딘가에 계실지도 안 계실지도 모를 주님이 이렇게 알코올에 기대는 자신을 보면 꾸짖을 게 틀림없으므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의 주님을 멀리하려고 애쓰는 여자. 그러나 저기 하늘의 주님은 기어코 그녀를 외면한다. 현실에서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신부와 사제들도 그녀의 고해성사나 그녀의 외로움에 지친 하소연은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릴 뿐이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 여자기 기댈 곳은 오직 주(酒)님뿐이 아닐까.........

누군가 단 한 존재만이라도 주디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녀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나조차도 이 주디스 헌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오닐 가족처럼 대했을 거 같으니 참 쉽지 않은 인생이다.


“당신에게는 남은 희망이 없어요, 모이라 그럼 당신도 나처럼 되는 거예요. 대낮에 망상이나 하면서 그 꿈을 붙잡고 싶어 하는 거죠. 하지만 붙잡을 수 없어요. 그래서 술을 마셔요. 그 망상을 실현해 주는 힘을 얻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모이라, 그 인간이 실제로는 어떤 인간이건 간에, 그는 당신한테 상냥한 말을 건네는 왕자님이 돼요. 왕자님. 설령 그 왕자님이 늙고 못생기고 흔해 빠진 사람일지라도요. 그 남자가 가장 자랑할 만한 경력이 뉴욕 어느 호텔의 도어맨이라고 해도 상관없게 돼요. 이제 내 말이 실감이 돼요?”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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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8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오늘 도착햇어요!!

그런데 첫 단락 읽고 떠오른 영화가 있는데 하도 오래된 영화라서 기억이 나질 않거든요. 그거 씨네큐브에서 본거라 어쩐지 잠자냥 님도 보신 영화일 것 같은데. 아 제목도 배우도 생각이 안나서 검색을 할 수가 없네요.

단란한 장년의 부부에게 찾아오는 싱글여성 이웃이 있는데, 이 싱글 여성 이웃은 자신의 나이가 많은데도 이 부부의 젊은 아들을 흠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이 좋은 이웃이니 그 아들과도 잘될거라고 생각하고 그 아들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 아들에겐 젊은 여자친구가 있고.. 그리고 그 부부도 그녀를 사실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 그 영화가 똭 생각나는데 포스터는 나무가 그려져있었던 것 같고... 이 책이 딱 그 영화 같아요, 잠자냥 님. 그 영화 뭔지 잠자냥 님은 아시죠? 그렇죠? 엉엉 ㅠㅠ 답답하다 ㅠㅠ

아무튼 그녀의 이야기,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마음을 열게 될 것 같진 않네요. 내 마음 열기, 쉽지 않아!!

잠자냥 2023-05-18 17:31   좋아요 1 | URL
<세상의 모든 계절> 아닌가요? ㅋㅋㅋㅋ 속 시원히 풀렸기를…

다락방 2023-05-18 17:56   좋아요 4 | URL
대박!! 맞아요!!! 잠자냥 님은 진짜 천재야!!!!!!!!!!!

잠자냥 2023-05-18 20:57   좋아요 1 | URL
이 작품 영화로 만들어졌었는데 매기 스미스(해리포터 맥고나걸 교수님 ㅋ)가 주디스 헌 연기했었다네요. 왠지 상상됨…

독서괭 2023-05-20 11:43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은 다락방님을 위한 AI임이 틀림없어요 ㅋㅋㅋ

건수하 2023-05-18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그런데도 자냥오별이라는 거죠. 어찌해야하는가….

잠자냥 2023-05-18 20:42   좋아요 3 | URL
잘 쓴 소설이고 책 덮고 참 이런저런 생각이 듭니다. 스포일러(?)일까봐 그 의무를 밝히지 못했으나 현대의 페미니즘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지점이 많고 암튼 그렇습니다…..

유부만두 2023-05-18 1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쳐 아일랜드 소설을 읽어야겠어요!

잠자냥 2023-05-18 20:43   좋아요 1 | URL
ㅎ 아기 라이스! 누가 같이 좀 욕했으면 좋겠어요.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05-18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리뷰 읽으니까 완전 재미있을거 같아요. 블랙코미디가 갑자기 급 우울해진다니 너무 궁금합니다 ㅋ

잠자냥 2023-05-19 09:43   좋아요 1 | URL
문학청년 새파랑님!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3-05-18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치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너무 외롭기때문 아닐까 하면서 리뷰 읽다가 중간에 댓글 답니다.^^

그레이스 2023-05-18 22:25   좋아요 1 | URL
다 읽고도 같은 생각이네요 ㅎㅎ

잠자냥 2023-05-19 09:47   좋아요 1 | URL
네, 어쩌면 눈치를 채고도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너무나 외로워서....

2023-05-19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0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05-20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백자평에 쓰신 주님이 그 주님이었다니 ㅡㅋㅋㅋㅋㅋㅋㅋ
엄마가 몸을 씻겨주는 서른 넘은 남자라니 으으 징그러…
잠자냥님의 오별이 저를 유혹하네요.. 으으으으 5월은 넘겨야 하는데 ㅠㅠ

잠자냥 2023-05-20 22:43   좋아요 1 | URL
어우 저 남자 진짜 여러 가지로 징그럽! ㅋㅋㅋㅋㅋ 천천히 읽어보세요. 책 어디 도망 안 가요!
 
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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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 간혹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심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들더라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옮긴다면 그것은 살인이 될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 저 인간 좀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어떨까? 그런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나는 종교인이 아닌지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아, 저 인간 좀 죽어버렸으면”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져 본 사람이 만일 가톨릭 신자라면?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기독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독실한 종교적 분위기 아래 자라난 사람이라면? 그는 아주 잠깐일지언정 그런 생각을 품은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시달릴 것이다.

그레이엄 그린이 묘사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종교적으로 그 개인은 신실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분위기 아래 나고 자라서 그런 사회에서 생활해 가기 때문에 살의(殺意)를 품는다든가 또는 이혼을 꿈꾼다거나, 불륜을 저지르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인물은 대부분 그레이엄 그린 그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미국인>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영국 <더 타임스>의 기자인 ‘토머스 파울러’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는 2차 세계 대전 직후 베트남에 특파원으로 보내졌다. 그동안 프랑스의 지배 아래 놓였던 베트남은 이제 해방과 독립의 열기로 달아오르면서 저마다 주의주장을 내세우며 정권을 차지하려는 분파들이 속속 등장해 실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날마다 폭탄이 터지고 논밭에서 살육이 일어나는 이곳에 파울러는 정세를 취재하기 위해 영국에서 날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껏 제국주의를 주도해온 영국과 프랑스, 거기에 맞서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과 중국, 새로운 패권 국가로 떠오른 미국의 아귀다툼의 장이 된 이 베트남에서 기자로서의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고 심지어 전쟁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만사에 심드렁하달까? ‘영원한 삶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갈구’하고 ‘행복을 잃을까 봐 항상 전전긍긍’(104쪽)하는 모순된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는 뭐랄까 그냥 산다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니힐리스트처럼 보인다. 전장에서 죽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을 정도로 삶에 염증을 느끼는 50대에 접어든 늙은 남자일 뿐이다.

그나마 그가 이 베트남에서 안식을 구할 때는 아편을 피우며 사랑하는 여인 ‘후엉’과 같이 있을 때뿐이다. 그런데 이 관계도 참 묘한 것이, 작품 초반에 파울러는 ‘후엉’을 다른 남자, 그러니까 ‘파일’이라는 젊은 미국 남자에게 보내기로 한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아니, 빼앗겼다고 해야 하나? 작품이 전개되면서 이 기묘한 관계의 실상이 드러나는데, 사실 파울러는 영국에 아내를 둔 남자로 후엉은 말하자면 베트남의 현지처이다. 그것도 거의 서른 살이나 어린…. 영국의 아내는 가톨릭 신자로, 이혼은 절대 못 하는 처지- 이미 사랑은 사라진 지 오래라 파울러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내고, 후엉과 함께 이혼을 허락한다는 답장을 기다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No’라는 대답뿐이다.

그러던 차에 젊고 싱싱하고 부유한 미국 남자 ‘파일’이 미국 경제지원단 소속으로 베트남에 온 것이다. 그리고 파일은 후엉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끊임없이 구애한다. 이 파일이라는 인물이 바로 제목이 의미하는 ‘조용한 미국인’인데 서른둘의 이 남자는 언뜻 보기에는 전혀 해가 될 여지가 없는, 조용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착한, 이제 막 학생 티를 벗어난 선량한 인상의 남자이다. 처음에 파울러는 그런 인상의 파일을 보고 후엉의 말대로 ‘조용한 미국인’이구나 생각하지만 곧 그가 지닌 모순을 간파하게 된다.

파일은 순수한 이상가. 아니 몽상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책에서 배운 이론을 현실 세계에서도 고스란히 적용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순진한 면모를 갖고 있다. 그는 요크 하딩이라는 사상가의 책을 교본처럼 따르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다. 재미난 점은 파울러가 지적하듯이 요크 하딩 또한 현실의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지식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이 완벽하다고 믿는 파일은 베트남의 제3세력과 접촉해 그들을 물밑으로 지원한다. 그 일의 위험성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런 중에 파일은 그곳이 영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결혼하여 다른 나라로 가길 꿈꾸는 후엉을 만나 동정인지 연민인지 선민의식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상에 따라서인지 그 자신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는 뇌의 명령(나는 마음의 명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에 따라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파울러(이 늙은 영국 남자의 손에서부터)로부터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결혼까지 신청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파일은 후엉을 데리고 민주주의의 이상을 베트남에서 실현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사실 초반부에 파일이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이 순진한 몽상가는 책에서 가르친 대로 세상 판단도 하지 못한 채 이론과 이상만으로 똘똘 뭉쳐 제 신념대로 행동하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파울러는 이 ‘젊고 무식하고 어리석고 쓸데없이 나서기 좋아한 인물이 지나치게 순진해서 생존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죽임당한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죽었는데 저렇게 차디차게 말하다니! 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작품을 읽는 대다수 독자들은 파울러의 심정에 어느 정도는 동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만큼 파일의 순진함, 그 순진한 맹종은 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일은 영국과 프랑스로 상징할 수 있는 제국주의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패권을 손에 쥐고 신이 난 미국의 표본이다. 늙어가는 중년의 영국 남자 파울러에 비해 젊고 싱싱하다는 점에서도 단연 그렇게 보인다. 더욱이 그 나라의 내부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믿는 바가 선이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온 세계에 그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도, 또 그러는 와중에 수많은 생명이 피에 스러지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도 철저하게 미국의 얼굴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지원한 제3세력의 테러로 인해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자기 신발에 묻은 피부터 닦을 생각을 하는 그런 인간에게 이상(理想)이란 과연 무엇인가? “순진함은 일종의 광기”라며 분노한 파울러가 그랬듯이 그런 ‘조용한 미국인’ 파일의 모습에 비위가 상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파일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려던 후엉은 다시 이 늙은 영국 남자의 곁으로 돌아온다. 아, 자력으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도, 삶도 어떻게 바꿀 수 없는 베트남 여인이여…. 그렇다고 이 늙은 영국(제국주의) 남자 파울러는 선(善)인가? 그 또한 제 나라에 아내를 두고는 이곳 베트남에서 베트남 여인을 착취한다(사랑이라는 이름의 성착취). 전쟁에 염증을 느낀다고 해서,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에 분노한다고 해서, 그 모든 일들에 죄의식을 느낀다고 해서 그가 파일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또한 이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하얀 피부의 인간”일 뿐이다. 떼를 지어 몰려와서는 “얼쩡거리며 이곳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멋대로 설정하고는 굳이 납득시키려고 덤비는”(211쪽) 그런 “하얀 피부의 인간”- <조용한 미국인>은 이렇게 2차 대전 이후 베트남을 배경으로 제국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끝으로 이 작품에는 나름의 반전이 숨어 있는데, 그 반전이 밝혀지기까지는 추리소설처럼 읽히기도 하고, 반전이 밝혀진 후에는 과연 어디까지가 죄일까 내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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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0 11: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를 진짜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에(마르고 고뇌하는 남자가 겹쳐지는 건 왜일까요) 읽으면서 답답해 하겠지만 그러나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저는 딱히 그레이엄 그린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오는 족족 읽게 되는 것 같네요? 어쩐지 잠자냥 님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지금 이 리뷰를 읽으면서도 생각한건데요, 사람이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멍청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것과 내가 읽는 책이 한데 모여 감상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잠자냥 님 리뷰가 언제나 좋은 이유는 잠자냥 님이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구나, 라는 생각이 오늘 새삼스레 듭니다.

이만 총총.

잠자냥 2023-05-10 11:49   좋아요 3 | URL
마르고 고뇌하는데 순진한 이상주의자면 정말 답없다.......ㅋㅋㅋㅋㅋㅋㅋ
그나마 이 책의 순진한 이상가는 덩치는 커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엄 그린 작품은 대부분 악이나 선에 대해서 모호하게 그리고, 추리소설 같은 요소가 있어서 계속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근데 그럼 다부장님도 교양과 지식을 두루 갖춘 분! ㅋㅋㅋㅋㅋㅋㅋ (우리끼리 칭찬 ㅋㅋㅋㅋ)

잠자냥 2023-05-10 11:50   좋아요 0 | URL
참 이 책 다부장님 베트남 가셨을 때 읽고 있었는데 부장님 생각 조금 했습니다.
쌀국수 드시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5-10 13:40   좋아요 1 | URL
그런데 덩치 크고 순진한 이상주의자는 또 그런대로 싫으네요? ㅋㅋ

그나저나 잠자냥 님 앉으나 서나 다락방 생각.. ( ˝)

잠자냥 2023-05-10 14: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쌀국수 드시나 생각은 누워서 했습니다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5-10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세계사 읽으면서 이 책이 언급되었을 때만 해도 번역서가 없었는데 이렇게 나왔군요. 리뷰 보니 더 흥미롭네요. 덕분에 보관함에 담습니다^^

잠자냥 2023-05-10 11:47   좋아요 1 | URL
와우, 세계사에 언급된 책이군요? 그럴 거 같아요.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베트남의 역사를 더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책읽는나무 2023-05-10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생각거리가 많을 것 같은 책이로군요?
그리고 살면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
전 뉴스를 보면 한 번씩 살의를 느낍니다.ㅋㅋㅋ

잠자냥 2023-05-10 12:07   좋아요 3 | URL
음 제가 책나무님과 같은 살의를 느껴서 그걸 본문에 썼다가 지웠습니다..
그 인간을 지지하는.......(설마) 사람들도 이곳에 있을지 모르니까요.... (설마?!)
암튼 제가 요즘 ‘아 저 인간 좀 죽어버렸으면‘ 하는 사람은 바로 그......... 휴.......

독서괭 2023-05-10 12: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제목 보고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사회과학 서적인 줄 알았어요. 그레이엄그린 소설이었군요? 읽지 않은 책장에서 몇년째 저를 노려보는 그레이엄그린 단편선이 생각납니다....
역시 가장 큰 피해자는 제3세계의 여성이군요. ㅠㅠ 후엉... 이름도 우는 소리야, 후엉.. ㅠㅠ

잠자냥 2023-05-10 14:0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책 표지만 보고는 그레이엄 그린 작품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었어요.
그레이엄 그린 신간 알리미를 신청해놨어서, 알림이 뜨긴 했는데 클릭하고도 약간 의심했다니까요.
아니 무슨 이런 촌스런 표지가..... ㅋㅋㅋㅋ
후엉 후엉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책먼지 2023-05-11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아.. 이 책 사라고 알라딘이 적립금을 줬나봅니다!!! 저는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지만”을 마음속에 품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첫문단에서부터 움찔했어요ㅋㅋㅋ 누가 혼자서 과도한 죄의식을 갖는 건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그 잣대로 남의 행동을 판단하고 남에게도 과도한 윤리를 강요하면 숨막힘을 넘어 해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호손 주홍글씨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또 구성원들이 너무 죄의식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되지 않을 것 같고요!! 파울러고 파일이고 다 싫은데 욕하는 재미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잠자냥 2023-05-11 10:52   좋아요 2 | URL
헐-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정말 괴롭겠는데요...!
많은 분들이 그러실 것 같기도 한데.... ㅎㅎㅎ 저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런 사람이 회사에는 없어서.
이 책 말고 다른 책 사보셔도 될 텐데...욕하는 재미가 필요하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5-11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이렇게 쭉 읽으니까 소설 진짜 너무 메타포인데? (분석뇌 발동!!!)ㅋㅋㅋㅋㅋ
파일 너는 베트남 남자는 안구하고 왜 여자만 구해? 그것도 결.혼.으로? 그 이상주의 참 독특하네. 암튼 저는 둘다 싫고, *후엉* ... 흐엉 ㅜㅜ
책나무님과 잠자냥님이 죽이고 싶은 그 인간은 파울러와 파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잠자냥 2023-05-11 11:11   좋아요 2 | URL
음 그리고, 파일은 처음에 후엉을 보고, 미국인이고, 프랑스(군)인이고 하여간 백남들 상대로 몸을 파는 여인인가 하고 생각해서 연민&너를 구해야 해! 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책 제가 다 뭐라뭐라 쓸 수는 없었으나 분석하자면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 작품..... 그나저나 그놈은 여기 일본인까지 나왔으면 더 좋아했을 듯.ㅋㅋㅋㅋ ˝그 인간˝ 자꾸 이러니까 다부장님 말하는 거 같아서 그놈으로 수정.......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5-11 17:37   좋아요 0 | URL
그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끼놈!!!

케이 2023-05-16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편과 가끔 실수로 그 사람 얼굴을 볼 때마다 제발 급사하라고 빌고 있어요. 임기가 아직도 너무 길게 남아있어서 절망스럽습니다.ㅜㅜ

잠자냥 2023-05-16 13:09   좋아요 1 | URL
실수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가끔 트위터 같은 데서 그놈 얼굴 보면 정말 황급히 닫아버립니다.
4년이라니........ 급사 기원합니다....

ilikems 2023-05-26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리뷰 글이 너무 좋아서 ˝어쩜 이렇게 잘 쓴 글이 있다니!˝하며 쭉 읽어가다 댓글까지 읽게 되었는데 댓글도 너무 흥미진진 최고네요^^

잠자냥 2023-05-26 12:36   좋아요 0 | URL
아이코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이 더 재미나죠! ㅎㅎㅎ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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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병을 만나면 고전한다. 뜻밖으로 지루한 책을 만나면 독서 자체에 슬럼프가 온다. <트러스트>가 내게 그런 책이 될 줄이야. 평소보다 조금 긴 휴일이 있기도 했고 여행을 다니느라 책을 좀 덜 읽게 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을 일주일 넘게 읽은 건 확실히 좀 이례적이긴 하다. 왜 그랬을까?

사실 이 책은 알라딘에 쓰여 있는 소개 내용만 보면 무척 흥미로워 보인다. “1920년대 월 스트리트를 주요 배경으로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 부부에 대해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경제, 금융, 돈, 권력, 계급 등 오늘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는 구절. 나도 이 내용에 혹해서 이 책을 읽을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대체 왜 기대보다 재미가 없었을까?

이 작품 내의 복병이라면 1부와 2부가 아닐까 싶다. 나름의 반전을 꾀해 깔아놓은 포석인 1부와 2부가 참 지루하고, 읽다 보면 1부에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심정이 들다가 2부에서는 ‘아아 네네 대단하십니다’하는 약간의 반감까지 든다. 그래서 2부에서 그만 읽을까 싶어지는 유혹에 빠진다. 그래도 끝을 보는 사람과 그냥 덮는 사람이 이 지점에서 갈릴 듯한데 인내심을 가지고 3, 4부까지 읽어서 작가가 영리(??)하게 설정해 놓은 반전을 마주하면 와우! 하고 놀라는 동시에 1, 2부의 고난을 보상받으며 아, 재밌다 하고 책을 놓는 쪽과 3, 4부의 이 반전을 이미 예상했기에 에, 정말 이게 다야? 더 없어? 하고 허탈해하는 쪽으로 나뉠 것 같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아직도 허탈하네.........

1부는 <채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소설 속 소설인 셈이다. 해럴드 배너라는 작가가 쓴 <채권>에서 다루는 인물의 이름은 ‘벤저민 래스크’와 그의 아내 ‘헬렌 브레보트’- 이 두 사람이 곧 2부와 4부의 화자인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이다. 앤드루 베벨이 어떤 인물인가 하면 그가 쓴 자서전인 2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조상 대대로 부를 쌓는 데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닌, 그래서 그렇게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사람이다. 그런데 해럴드 배너는 왜 이 부부를 모델로 <채권>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베벨 가문의 이력과 앤드루 베벨이라는 인물 자체도 흥미가 있어 보이지만 그보다는 그의 아내인 헬렌, 즉 밀드레드 베벨의 일생이 좀 더 사람들의 주목을 끌 것 같다.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주목과 선망을 동시에 받는 부부. 그런데 그중 아내가 정신병원에서 미쳐버려서 죽는다면?! 해럴드 배너의 소설은 그렇게 전개된다. 이것은 진실, 즉 믿을만한(Trust) 이야기일까? 소설이라는데?

2부에서는 이 앤드루 베벨이라는 인물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른바 자서전- 거물급의 미국 백인 남자가 그렇듯이 이 자서전 또한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자뻑으로 점철되어 있다.........하....... 그래서 더 읽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리한 포석을 깔아놓은 작가보다 더 영리한 독자는(내가 영리하단 뜻은 아니다 대개는 1부에서 유추할 수 있을 설정) 1~4부를 통틀어 이 앤드루 베벨이라는 화자의 말이 가장 믿기 어려운, 어쩐지 진실에서 가장 먼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자서전이라는 게 가장 그렇지 않은가? 소설이 허구(fiction)라는 외피를 쓰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듯이 1부와 2부만 읽고도 대부분의 독자는 앤드루 베벨의 자서전보다는 해럴드 배너의 소설에 어쩐지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3부와 4부로 이야기는 건너가는데, 3부의 화자는 ‘아이다 파르텐자’라는 전혀 색다른 인물이다. 이 여자는 또 누구야? 싶은데 알고 보니 이 여성은 앤드루 베벨이 비서로 채용해 자신과 아내 밀드레드의 이야기를 쓰게 하는 사람으로, 처음에는 앤드루의 자서전을 대필하다가 나중에는 베벨 부부의 회고록을 작성하게 된다. 앤드루 베벨은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채권>이 ‘허구’에다가 진실을 교묘히 조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내 밀드레드가 정신병을 앓다가 죽은 것으로 그린 그 부분은 완벽하게 허구이기에 아이다에게 ‘진실’에 가까운 자서전을 쓰도록 종용한다. 아주 많은 돈을 주면서……. 그렇다면 아이다의 입을 통해 그려진 베벨의 모습, 그녀의 회고록은 또 믿을만한(Trust) 이야기일까?  

소설도, 자서전도 회고록도 결국 헬렌 또는 밀드레드 본인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이야기의 진실, 아니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은 4부인 밀드레드의 ‘일기’에 담겨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 일기에 드러나는 내용은 사실 1부와 2부 두 남성 화자들(헤럴드 배너와 엔드루 베벨)이 그린 밀드레드의 모습을 유추해 보건대, 영리한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듯이 어쩐지 그런 여성은 아닐 거 같은데 했던 의심이나 심증을 확인하게 해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반전이라고 내세웠지만 딱히 반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나 할까.

엔드루 베벨은 아이다에게 밀드레드를 묘사할 때 아름답고 영특하고 가정적이며 음악과 예술을 사랑했고 아이처럼 순진한 여성이었다고 말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내내 강조한다. 그녀가 자신을 구원했노라고. 그런데 끊임없이 이런 부분들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어쩐지 실제는 그렇지는 않았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배너가 그린 밀드레드의 모습은 지적으로 영특하고 음악과 예술을 사랑해서 예술가들을 계속 후원한다. 앤드루와 배너의 서술에서 공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밀드레드는 지적으로 영특했으며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런 단체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거기서 안식을 구했던 여성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두 남성 화자의 의견이 달라지는 것일까? 소설 <채권>에서 묘사했듯이 헬렌, 또는 밀드레드가 정말로 미쳐서 죽어갔느냐 아니면 베벨의 주장대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병으로 죽어갔느냐 그 지점일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는 이 앤드루 베벨이라는 화자의 주장을 가장 믿을 수 없을 터이므로 밀드레드의 일기에 그려질 내용을 대충은 짐작하게 된다. 지적으로 그토록 영특하고 뛰어났던 여성이 왜 단지 음악 안에서 안식을 구하고 뒤로 물러나 예술을 후원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갔을까. 답은 그 안에 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온 독자라면....... 아내의 재능이나 재산을 이용하거나 시기하다가 결국 아내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거나 아니면 미친 여자로 만들어서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어 유폐해버리는 몇몇 유명한 작품들을 곧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트러스트>는 그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인물들은 또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앤드루 베벨이야 애초부터 정이 가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소설을 쓴 해럴드 배너와 대필 작가였다가 나중에 참회(?)의 심정으로 회고록을 쓰는 아이다 파르텐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두 사람은 저마다 베벨 부부- 돈과 권력의 정점에 있는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뭘 얻고자 한 것일까? 배너는 밀드레드가 후원하며 가깝게 지냈던 예술가 무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밀드레드가 살아있을 때도 배너 부부의 돈에 일정 정도는 기생했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기생한다(작품으로 유명세를 타서), 자서전 대필 작가였던 아이다는 애초부터 앤드루가 제안한 물질적 보상의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돈 때문에 양심에 뭔가 걸리는 게 있으면서도 ‘현실을 구부리는’ 일에 일조한다. 몇십 년이 지난 후 참회의 심정으로 회고록을 쓰지만 그 글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그리고 이 밀드레드, ‘일기’의 작성자. ‘일기’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글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그녀 또한 앤드루와 일종의 연합(Trust) 관계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작품의 화자들과 결말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결혼이라는 ‘트러스트’- 인간관계에서 이익을 중심으로 연합했다가 수가 틀리면 재빨리 등을 돌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어내기 급급한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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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5-03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 더 까셔도 될 듯합니다.

잠자냥 2023-05-03 16: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것은 다른 독자의 몫으로...ㅎㅎㅎㅎ

얄라알라 2023-05-07 14:44   좋아요 2 | URL
저도 제목 보고 읽고 싶음 표시해두었던 작품인데, 잠자냥님의 리뷰에 이어, 골드문트님의 댓글을 읽은 후....매우 매우 뒤로 미뤄서 천천히 읽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락방 2023-05-03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리뷰 읽으니, 소설 <비대칭> 생각 나거든요. 글의 형식이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저는 비대칭은 꽤 잘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아닌가봐요. 작가가 화자를 여러명 설정했을 경우, 왜 그러는지는 알겠지만, 사실 그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일은 드문것 같아요.

잠자냥 2023-05-03 18:28   좋아요 0 | URL
네 화자가 여러 명이고 관점을 달리하는 소설은 자칫 위험한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는 거 같아요. <비대칭> 궁금하네요.

독서괭 2023-05-03 18:44   좋아요 0 | URL
여러 관점에서 보여주는 설정 흥미로운데 왜 이 소설 재미없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ㅎㅎ

책먼지 2023-05-04 10: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도 영리한 독자라서!!! 후후후 1-2부에서 반전을 눈치채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3-4부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어요!! 아마 아이다와 밀드레드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고 작가의 형식적 시도와 시류에 올라탄 영악함이 저에겐 플러스로 작용한 것 같아요(그러나 아마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어마어마하게 갈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저 이 책 완독하고 어휴 지긋지긋했다 하고 바로 팔아버렸기는 합니다ㅋㅋㅋ 자냥님 글로 이 책 다시 보게 되니 참 좋네요!! 케이트 윈슬렛이 분하는 밀드레드는 어떨지 드라마 좀 기대되요.

아이다가 앤드루 베벨의 곁에 있었던 게 독립의 수단이자 아버지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게 제게는 설득력이 있었어요!! 20대 초반에 갓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만난 사람이 하필 앤드루 베벨이라 엄청난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주는 권위에 눌려 그에 동조하게 되는 것도 이해가 됐고요. 회고록은 그때 진실을 굽힌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일말의 저열한 호기심 때문에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해방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북태기 극복시켜줄 진짜 재밌는 책과 연휴 보내실 수 있길요!!!

잠자냥 2023-05-04 11:22   좋아요 2 | URL
아이다의 목소리를 밀드레드에게 입히는 과정 좀 소름끼쳤지만, 가진 자들은 그렇게도 할 수 있으려니 싶었습니다.
ㅋㅋㅋ 지긋지긋하다 팔아버려! 이거 공감해요. 저도 판매할 책 꾸러미에 넣어두었습니다......;;
처음엔 하도 질려서(?) 케이트 언니 나오는 드라마도 안 보려고 했는데 좀 며칠 지나니까 케이트 언니 땜에 볼까 싶기도 하더라고요. 특히 긁어대는 연기 궁금 ㅋㅋㅋㅋㅋ

아이다에 대한 책먼지 님의 평에도 공감합니다. 아, 아이다의 아버지도 저는 싫었어요. 어쩜 이렇게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정이 안 가는지 ㅋㅋㅋㅋ 그래서 더 읽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북태기가.... 심하게 왔는지 어제 책 한 장도 안 봤다는?!

새파랑 2023-05-04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슬럼프가 전혀 없을거 같은 잠자냥님도 슬럼프가 있네요? ㅡㅡ

저도 좀 북태기인데 술이 원인인거 같습니다 ㅋ

잠자냥 2023-05-04 13:19   좋아요 3 | URL
에이, 저도 가끔은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근데 저도 매일 술 먹는데? ㅋㅋ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3-05-07 14:42   좋아요 2 | URL
얼마전 새파랑님 올리신 북탑을 보았는데, 북태기라고 하시다니 ㅋㅋ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술 마시면 책부터 찾게 되는데, 막상 취한 채 읽으면 멜랑콜릭해져서 전 자제하는 편입니다. 술이 태를 촉발하는 군요^^ 새파랑님께서는.

새파랑 2023-05-07 18:09   좋아요 2 | URL
전 최근에는 술을 마시면 많이(?) 마셔서 책을 못읽고 자게 되더라구요....
일단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기는 합니다 ㅎㅎ
 
아메리카의 비극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0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김욱동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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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나를 사로잡은 작품은 단연 <아메리카의 비극>이다. 지난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4일 만에(화요일엔 술을 마시느라 몇 쪽 못 읽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일 만에) 상하, 1500쪽 넘는 분량을 미친 듯이 읽었다. 그러고 나니 뭔가 허탈. 어제는 새로운 책을 집어 들었으나 <아메리카의 비극>이 너무나 강렬했는지 그에 비하면 읽어도 읽는 게 읽는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 작품에 관한 생각이 종종 떠올라 자꾸만 무언가 더 끼적여보고 싶어진다.

자연주의 소설이 대게 그렇듯이 이 작품도 비극으로 끝난다. 제목에서조차 ‘비극’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쓰고 있으니 이 작품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정보 자체는 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을 분들은 이 글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읽기를 권한다(물론 그럼에도 결정적인 스포일러는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열두 살 난 소년에서 스무 살 넘게 성장하는 클라이드 그리피스이다. 이 청년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과연 언제 어느 때 어긋날 조짐이 보였던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인간의 삶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될 만한 순간이 있듯이 클라이드에게도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랄까,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든, 나쁜 결과를 초래하든,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지점이 있었다. 자연주의 소설은 사회적 환경과 유전이 한 인간의 성격 및 운명을 좌지우지한다고 하니, 더 그 ‘순간’에 주목하게 되는 것 같다.

거리. 첫 번째는 아무래도 그 거리이다. 이 작품은 지난 페이퍼에서도 언급했듯이 한 거리에서 시작한다. 가난하고 남루한 일가가 거리에서 전도활동을 벌인다. 오십 줄에 들어선 가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네 아이들로 이루어진 일가 중 소년 클라이드는 유독 눈에 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이 아이는 이 전도활동이 수치스럽다는 것을,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쩌면 그는 이 거리에 서 있는 것 자체도 부끄럽지만 그런 활동을 하게끔 한 근본적인 원인-기독교라는 종교에 애초부터 반발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이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도 종교는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특히 상권에서) 클라이드에게 동정심, 연민,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많이 들어서 비록 그의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속물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비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 하는 심정으로 이해하기도 했다(물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이다). 그런 심정이 가장 정점에 달했던 때는 바로 이 시작 부분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커녕, 신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믿는데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이런 종류의 회의감이 더 많은 열두 살 소년이 자의도 아닌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낯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서 전도활동을 벌여야 한다니 얼마나 가여운가? 소년의 수치심과 절망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분이다.

이 시작 부분을 보면 무능력한 데다 무지하고, 폭력적인(종교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클라이드 부모의 감수성이 끔찍하게 싫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종교를 자식에게 강요하는 행위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모태신앙’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아연해진다. 그걸 어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회의懷疑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종교를 당연하다는 듯이 자식들에게 설파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이한 모습으로 전도활동을 하게 하다니. 이 부모는 애초부터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그런 족속들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그러므로 소년 클라이드가 이 가난을, 이 비루한 집안을 떠나기를 갈망하고, 돈을 벌어 성공해서 보란 듯이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같다. 아버지, 어머니 뜻에 따라 목소리 높여 찬송가를 부르던 그의 누나조차도 가장 먼저 집을 떠나지 않았던가. 그녀에게조차 이 집안은 구렁텅이였던 것이다.

호텔. 그렇게 해서 소년 클라이드가 돈의 맛을 알게 되는 곳은 호텔이다. 클라이드는 호텔 벨보이로 일하면서 화려한 세계를 엿보게 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일단 옷차림이 화려하다. 게다가 팁은 또 얼마나 잘 주는지!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겉모습을 꾸미고 그럭저럭 성실하고 반듯하게, 공손하게 말하는 방법을 익히면 사람들은 클라이드의 본성이 어떤지(나는 이 소년의 본성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혹에 약하고 물질이나 이성에 관한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른다는 점은 있지만 대개의 인간이 그렇지 않은가?), 따져보지도 않은 채 아, 이 녀석은 좀 괜찮구나 쉽게 판단하고는 그에게 돈으로 보상을 해준다. 일찍이 세상의 이런 맛을 알아버린 십 대 소년이 내면을 가꾸기보다는 외면에 치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그런데 이 호텔은 클라이드가 살던 동네와 가까운 곳-그러니까 변두리에 있는, 그저 그런 호텔이라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사회적으로 최상층에 속한다거나 거물급에 속하지는 않는다. 약삭빠른 클라이드는 곧 이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정체- 대다수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드나든다는, 그러니까 남자도 여자도 실은 사회적으로는 크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그가 두 번째로 일하게 되는 호텔-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클럽- 즉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만이 드나드는 클럽과 비교하면서 더 명확해진다. 이 클럽에는 남녀 손님이 나란히 오는 법이 없다. 어떤 중요한 비즈니스나 모임을 위해 미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중년 이상의 남성들만이 모여드는 장소이다. 이곳에 드나드는 남자들은 클라이드가 처음 일했던 호텔의 그 손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와 사회적 지위, 명예, 성공을 다 거머쥔 사람들로 그들의 옷차림, 행동, 말투 등은 그가 이전까지 알던 사회와 확연하게 다르다. 클라이드는 이 두 번째 호텔에서 진짜 성공이 무엇인지 목격하고 그걸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공장. 거리에서 드럭스토어로, 드럭스토어에서 호텔로 그러다 최상위층 남성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일하던 클라이드는 성공을 위해 ‘공장’에 가게 된다. 공장이라니?! 드디어 이 철부지가 정신을 차렸나 싶은데, 사실 이곳은 큰아버지의 공장으로, 큰아버지는 클라이드의 아버지와 달리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이다. 클라이드는 조카라는 신분을 십분 활용해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여기서 클라이드가 만일 제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성실하게 일해서 조금씩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오르듯이 착실하게 사회적 성공을 밟아 나갔........다면(아니다. 그렇게 살 경우 사회적 성공은 요원해 보인다), 아무튼 착실하게 살았다면 소소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을 일궈나가면서, 그래도 거리에서 전도활동을 벌이던 그 참혹했던 소년 시절과는 달리 어느 정도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랬더라면 이 작품은 탄생하지 않았을 테고 재미도 덜했을 것이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욕심 많고 유혹에 약한 성정을 지닌 클라이드가 그 유혹들을 뿌리칠 재간이 없었을 터이므로 이 가정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리라.

호수. 이 작품에서 호수는 굉장히 많은 의미를 지닌다. 클라이드가 처음으로 ‘진심으로’(나는 이 사랑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록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드는 칠푼이라 할지라도 호텔 생활 시절 처음 반했던 여자에 비해 로버타는 클라이드가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던 상대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그 여인과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반면 파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사랑도, 파멸도 모두 그의 거침없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저 여자를 갖고 싶다. 저 여자의 사랑을 받고 싶다. 저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다, 호수에서 그는 공장의 불문율, 금기를 깨고 결국 로버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클라이드는 나중에 또 한 번 호수에서 금기를 깨게 되는데 이 또한 완벽하게 그의 욕망 때문이다. 찰랑찰랑 가볍게 일렁이는 호수-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만들 수 있는 호수. 이 호수는 어쩌면 클라이드의 그 얄팍한 마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그 밖에도 또 다른 결정적 장소로 떠오르는 공간이 몇 군데 있지만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것은 그냥 스포일러 자체를 발설하는 것이 되므로 그건 제외하고……. 만일 클라이드에게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는 언제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기를 택할까? 내가 클라이드라면? 나는 아마도 이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 자체를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클라이드도 그랬을까?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아무래도 이 가정의 탄생이,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공간보다도 더 이 청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그래서 또 다른 클라이드의 탄생에 한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가난도 부도, 계급도, 지위도, 재산도, 심지어 종교도 계속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이 비극, 이게 어디 아메리카만의 비극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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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4-21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이 극찬하시므로 담아두긴 했습니다만 언제 읽을지 알 수 없어서 리뷰를 다 읽었습니다. ㅎㅎ
비극으로 향해가는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가난한 가정의 아이가 부와 권력을 갖기 위해 달리다가 추락하는 이야기, 하면 꽤 많을 것 같은데, 1,500페이지를 3일만에 읽으실 만큼 재밌다니.. 작가 필력이 엄청난가 봅니다. 궁금하다..
˝나중에 또 한번 호수에서 금기를 깨게 되는데˝ 이 부분 스포일러 때문에 참으신 것 같은데 특히 궁금하네요 ㅋ

잠자냥 2023-04-21 17:23   좋아요 4 | URL
이 작가 <시스터캐리>도 재미나요! 이 <아메리카 비극> 리뷰나 100자평 보면 다들 1500쪽 순간 독파할 만큼 재미있었다고 말하더라고요.

다락방 2023-04-21 17:2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아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나름 스포일러에 대한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이 리뷰를 읽으면서 말이죠. 저는 결정적 스포 당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이 리뷰를 읽기 전에 경고 문구 보고 망설였지만, 잠자냥 님의 글을 읽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밥을 굶는다는 것과 같기에... 흠흠.

저 상권만 사두었어요. 아 얼른 읽고 싶네요.

음, 여러가지 할 말이 많지만, 그중 한가지만 하자면, 저는 종교에 대해서인데요.

저야말로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녓던 사람이에요. 게다가 전도활동도 열심히 했답니다. 그 쪼꼬만 애가 말입니다. 국민학교때는 교회에서 반주도 하고요.. 크.. 뭘 하면 그렇게 열심히 해서 저도 참...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때 갑자기 확 관뒀어요. 저는 교회 안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정말 추악한 경험을 여러번 했어요. 그 경험들의 당사자가 저였습니다. 어린 저요. 그런 일이 있었던 바로 그 당시에는 제게 벌어진 일들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런데 차곡차곡 교회에 대한 환멸이 제 안에 쌓여갔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 확 돌아서게 되더니 그 뒤로는 교회라면 치를 떨게 되었죠. 왜, 도나 해러웨이가 그런 말을 했지 않습니까. 신을 믿었던 사람이 신을 미워하면 더 크게 미워한다고. 아,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는데 제가 어디다 적어두질 않았네요. 제가 나중에 생각나면 책에서 찾아볼게요.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교회를 미워하는 사람들보다 더 크게 교회를 미워합니다.

저는 일전에 친구들 만나서도 그런 얘길 했어요. 제 어린시절에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한 교회생활이 있었던 게 너무 싫다고요.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매주 교회를 다니고, 반주 연습을 하고, 전도를 하고... 제 어린시절에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게 너무 속상해요.

그렇습니다.

잠자냥 2023-04-21 17:41   좋아요 5 | URL
아니 이 인간아! 당신 읽지 말라고, 당신 말이야! ㅋㅋㅋㅋㅋ 역시 밥을 한끼도 못 거르는구만….. ㅋㅋㅋㅋㅋ

그나저나 그 교회에서의 일은 다락방 님 페이퍼에서 읽었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저도 그랬을 거 같고…. 도나 해러웨이의 그 문장 저도 기억해요. 최근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 시리즈를 봐서 더 종교의 해악에 대해(그리고 그걸 아이에게 강요하는 부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최선을 다해 교회 생활을 한 어린 다락방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걸 이용한 어른이 죄를 지은 거죠.

책먼지 2023-04-21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리의 서재에 이 책 있는 거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얼른 읽고 이 리뷰 제대로 읽고 싶어서 현기증나요..

잠자냥 2023-04-21 23:31   좋아요 1 | URL
ㅋㅋㅋ요즘 읽는 책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ㅋㅋㅋ

건수하 2023-04-24 14:33   좋아요 1 | URL
앗 밀리에 있군요!
그러면 읽어야 할 것만 같은데.

(곧 까먹길 바라며)

Falstaff 2023-04-22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일 나에게 인생을 다시 살 기회를 주겠으니 어디서 시작할래.... 묻는다면,
˝제발 그냥 놔두세요. 사람 들들 볶지 마시구요.˝

잠자냥 2023-04-22 22: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술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구요? ㅎㅎ

hijwkim 2023-04-2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살아갈 삶은 좋았던 기억은 가져가고 그렇지 않았던 기억은 반면교사 삼아서 거꾸로 살아가면 되겠죠
 
타인들의 나라 대산세계문학총서 179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황선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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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익숙했던 공간과 사람들을 떠나 완벽하게 새로운 곳으로, 단 한 사람만을 믿고 거주지를 옮긴다는 게 가능할까? 이 한국이 너무 싫어서 가끔 집사2랑 완전히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생각을 하다가도 망설여지는 지점이 조금 있다. 집사2는 나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거의 비슷한 문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다른 장소에서 그 사람하고만 살아간다는 게 엄청난 모험으로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타인들의 나라>의 마틸드는 대단하고 용감하다. 또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모하기까지 하다. 마틸드는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인으로,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고향을 떠나 모로코 메크네스로 향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곳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아민’-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프랑스의 백인 여자가, 모로코의 흑인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나라를 떠난다고? 와우- 그렇다 이 여자, 마틸드는 열아홉 살이 되던 1944년에 모로코 남자 아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 프랑스군소속의 아프리카 원주민 기병부대에 입대해 프랑스로 온다. 프랑스를 독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아민이 입대하기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는 아민에게 모로코 메크네스에서 2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넓은 토지를 남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전쟁을 버틴다. 전쟁 중 독일과 인접한 알자스의 한 마을에 아민이 속한 부대가 잠시 주둔하던 중 그곳에서 그는 마틸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한다. 전쟁이 끝난 후 마틸드는 드디어 남편이 먼저 가 있는 모로코의 메크네스로 향한다. 그녀는 꿈에 부풀어 있다. 새로운 땅, 사랑하는 남자, 그와 함께 꾸려갈 자기만의 가족, 새로운 미래..... 그런데 정말 마틸드 앞에는 그녀의 기대처럼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은 예상할 수 있다. 마틸드만이 그것을 모를 뿐.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이 말을 그녀는 앞으로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틸드는 자신이 외국인, 여성, 아내, 타인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민은 이제 자신의 고향땅에 있었으므로 규범을 알려주고, 나아갈 길을 일러주며, 염치, 수치, 그리고 예의 등의 경계를 제시하는 사람 또한 그가 되었다. (22~23쪽)


불길한 기운은 그녀에게도 곧 감지된다. 자유로운 프랑스에서 누구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았던 마틸드- 그런 그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모로코는 마틸드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곳에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감시와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호텔에 묵을 때조차 아내와 남편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녀, 흑인과 호텔에 묵는 백인 여성을 향한 눈빛은 싸늘하기만 하다. 아민은 더욱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꺼낸다. 계약문제 때문에 아민이 물려받은 농장으로 가 사는 것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아민은 농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니’ 집에서 함께 지낼 것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마틸드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호텔에서 지내는 일주일동안 그들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아민 같은 남자가, 그러니까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아내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시어머니 댁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이다. “진심이야?” 묻는 마틸드에게 아민이 말한다.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이 말을 할 때 그는 앉은 채로 일어서지 않는다. 마틸드는 아민에 비해 머리 하나 크기만큼 키가 더 크다. 아민은 굳이 이곳 모로코에서 아내와의 신장 차이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아니, 아내보다 작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이곳은 자기 땅, 자기 나라, 자기의 모로코이고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곳이니까-

아민이라는 남자의 이 치졸함에 치가 떨려온다. 마틸드라는 여자의 어리석음에 한탄하게 된다. 아아, 이 어리석은 여자야, 그러니까 어쩌자고 모든 걸 버리고 저 남자, 자기의 작은 키를, 그 열등감을 프랑스에서는 잘도 포장해 숨겼지만 이곳, 자기 땅에 오자마자 돌변하는 저 가련한 남자, 저 치졸한 남자를 믿고 삶의 터전 자체를 바꾸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인가, 아무리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방탕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가 억압적이고 차갑게 굴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런 가족을 빨리 떠나서 자기만의 가족을 일구고 싶었던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하필이면 인종도 다른, 하필이면 피식민 땅의 남자와 하필이면 이슬람을 믿는 남자와 결혼해 프랑스를 떠나버리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틸드는 아민의 눈부신 외모, 너무나 잘생겨서 누군가 낚아채갈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던 그 외모를 찬양하지만.... 이 여자야 정신 차려, 혀를 끌끌 여러 번 차게 된다. 외모가 밥 먹여주니.

아민은 얼마나 잘생긴 외모인지 모르겠지만 모로코 땅에서는 그냥 그렇고 그런, 흔한 이슬람 가부장제에 찌든 형편없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아내를 향한 폭력도 망설임이 없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말한다. “여기서는 다 그렇게 해.”,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일이 돌아간다고.” “여기서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틸드는 자신이 더는 프랑스에 있지 않음을, 이곳에서 자신은 유럽, 프랑스, 식민자의 나라 출신, 백인, 여성, 외국인, 영원한 타자임을 진저리 날만큼 깨닫는다. 그리고 이 타인들의 나라, 단지 인종이 다르고, 단지 나라가 다르고 단지 종교와 문화 언어가 달라서만 타인이 아닌, 남편이라는 사람마저도 완벽하게 타인인, 그래서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 타인들의 나라에서 그 남자, 자기보다 훨씬 작은 이 남자에게 예속되어 좌지우지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고통 자체이다.

위치의 전복이다. 프랑스에서 마틸드가 아민을 처음 만났을 무렵 그녀는 아민의 안내자이자 보호자였다. 그가 마을에서 보냈던 길고 긴 주간 동안 마틸드는 그와 함께 산책했고,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해주었으며, 또 카드놀이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민의 말, 그의 명령과도 같은 말에 따라야 한다. 순종적인 시어머니 무일랄라를 비롯해 주변 모로코 여성들의 삶이 답답해보여서 조금이라도 바꿔 볼 시도를 해보면 아민은 싸늘히 말한다. “대체 뭐에 대해 불평하는 거지? 당신은 유럽 여자고, 아무도 당신이 하고자하는 일을 막지 않잖아. 그러니까 당신 일에나 신경 쓰라고, 어머니는 건드리지 말고.”(126쪽)

마틸드는 후회한다.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자신의 허영심을 탓한다. 모험을 하며 살고 싶었던 사람도, 어린 시절 친구들이 이국적이라면서 부러워했던 그 결혼을 허세를 부리며 성사시킨 사람도,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틸드는 자신이 어떤 굴욕이나 배신도 당할 수 있는 신세임을 자각한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그녀 앞에 놓인 것은 농장 생활이 안겨준 고립감, 자칼들의 울부짖음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어두운 밤, 그런 밤의 두려움, 자기 자리가 없는 세계에 산다는 절대적인 고독, 부당한 규칙들에 휘둘리는 세계에 산다는 절망감뿐이다. 이것은 귀양살이이다. 실패와 환멸감만이 마틸드를 감싼다.

이 여자, 마틸드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타인들의 나라>는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가 총 3부작으로 구상한 작품으로 그중 1부에 속한다. 작가의 가계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로, 마틸드와 아민은 레일라 슬리마니의 할머니-할아버지대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부부가 다 그런 것인지 저들 부부가 유독 저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저렇게 불협화음속에 살면서도 섹스만큼은 지치지도 않고 해서 이들에게도 자식이 생긴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딸인 아이샤는 아민처럼 검은 피부에 폭탄처럼 부스스한 머리털을 갖고 태어났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똑똑하다. 모로코 땅에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 백인도 흑인도 오렌지도 레몬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 게다가 아이는 이슬람 사회에 살면서 하필이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게 된다. 마틸다는 명민한 딸을 교육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 아이샤는 틀림없이 레일라 슬리마니, 즉 작가의 엄마를 모델로 하는 인물이리라. 오렌지나무 줄기에 레몬나무 가지를 접붙여 탄생한 ‘시트랑주’와도 같은 존재인 아이샤, 과육이 딱딱하고 맛이 써서 눈물이 솟구쳐 오를 지경인 시트랑주 같은 아이샤가 펼쳐나갈 세상도 마틸드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더욱 고단해 보인다. 아이샤가 살아갈 타인들의 나라는 또 어떤 모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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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04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그거네요! 필리스 체슬러의 실제 경험담이요. 카불의 신부! 일전에 단발머리 님이 올리셨던 그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네요. 미국에서 만나서 결혼해서 그 남자의 나라로 갔더니 그곳의 문화가 필리스 체슬러를 감금했던.. 결국 시아버지 도움으로 미국으로 다시 올 수 있었다고 햇던 것 같은데요, ‘이곳에서는 동등하고 다정했던 남자‘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개빻아가지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경우가 그러니까, 그동안 잘 몰랐지만 자주 있겠죠. 필리스 체슬러는 미국 레일라 슬리마니는 프랑스... 그들중 누구라도 한국 남자를 만났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요....(생각하기 싫구나..)

아.. 리뷰만 읽어도 너무 힘드네요.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은게 너무 싫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딸 아이의 이야기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잠자냥 2023-04-04 10:40   좋아요 3 | URL
와우, 역시 다부장님 이것이 필리스 체슬러의 실제 경험담이기도 하군요! 그래도 시아버지가 도와주고 다행입니다.
아이를 낳는 과정은 딱히 그렇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부부간 섹스의 폭력적인 면도 좀 잘 그리고 있더라고요(부부도 아닌 내가 어찌 잘 아는지 모르겠으나???;; ㅋㅋㅋㅋㅋㅋㅋ)
계속 마틸드의 이야기인가 했는데 아이샤가 그 못지 않게 중요하게 나와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무래도 작가의 엄마 이야기라 좀 더 내밀하게 쓸 수 있을 듯...

건수하 2023-04-04 13:37   좋아요 1 | URL
시아버지가... 도와줄려고 도와준다기보단... (할많하않)

필리스 체슬러도 그렇긴 한데,

모로코-프랑스는 또 관계가 좀 복잡하잖아요. 모로코와 아프가니스탄은 다르겠지만
별로 덜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ㅠㅠ

4월에 읽을 건데, 언제 시작할 것인가.. 고민됩니다 :)

잠자냥 2023-04-04 14:10   좋아요 1 | URL
네 수하 님 말씀처럼 식민 국가와 피식민국가의 관계도 있고 개인도 거기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런 복잡한 문제도 잘 그리고 있습니다. ㅎㅎ

시에나 2023-04-07 13:41   좋아요 2 | URL
(왜 이런 뒷담화에만 한마디 보태고 싶은 건지 ㅎㅎ...지나가다가..)

21세기 한국에서도 진행중인 이야기입니다. 요거.. 유학시절엔 그렇게나 동등하던 부부였는데...한국으로 귀국하면 남자가 개빻은 가부장으로 돌변하는 사례들 좀 들었어요. 한국은 가장 큰 변수가 바로 시가!! (지인들의 증언이 꽤 됩니다.;;)

잠자냥 2023-04-07 14:0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시에나 님이 말씀하신 사례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DYDADDY 2023-04-0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트랑주라는 과일에 대해 찾아봤는데 나오지 않네요. 번역의 문제인지 구글의 문제인지. ㅠㅠ
관습집단 외부에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에서 자발적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결국 정착한 곳은 언제나 또다른 관습집단이라서 이주가 아닌 여행으로 잠깐동안의 자유를 맛만 살짝 보고 온다는 생각도 들어요.

잠자냥 2023-04-04 12:22   좋아요 1 | URL
‘citrange‘로 표기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저는 왠지 맛있을 거 같은데, 처음 교배했을 때보다 품종이 개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대디 님이 말씀하신 부분때문에서라도 이주와 여행은 완전히 다른 일 같습니다.

건수하 2023-04-04 13:36   좋아요 2 | URL
https://en.wikipedia.org/wiki/Citrange ?

아 잠자냥님이 올려주셨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3-04-04 1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슬러의 남편은 그렇게나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던 신사였답니다. 이런 말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준이 맞는다‘라고 생각하고 체슬러가 남편 따라 아프칸으로 들어갔죠. 그것도 유럽 여행하다가 잠깐 찍는다는 느낌으로.... 그러나 파팍!

제가 잠자냥님 추천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읽었고요. <프로이트를 위하여> 읽었습니다. 저도 독서계획 있는 사람이라 좀 미루고 싶은데 최근에 돌쇠 출격 사건(<악의 길>)으로 매우 뒤숭숭한데, <타인들의 나라>까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럴 수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4-04 12:24   좋아요 1 | URL
어이쿠야, 그런 신사였군요. ㅎㅎㅎㅎ 이 책의 아민도 프랑스에서는 그랬을 겁니다. 모로코에서도 나름 약간은 깨우친 남자로 나오고요?! 그러나.........
돌쇠 출격 사건을 더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 그것부터 만나시고 이 책도 조만간....ㅎㅎㅎ

건수하 2023-04-04 13:38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카불의 신부도 읽다 말았네요.... 언제 읽나....

망고 2023-04-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얼마전에 이거랑 비슷한 이야기 영화로 봤어요 ˝솔로몬의 딸˝이란 영화였는데 미국에서 살땐 다정하고 멀쩡하던 남편이 가족 데리고 자신의 나라 이란으로 가서는 돌변ㅜㅜ 폭력도 쓰고 막 으휴...그러다 미국인 여자는 딸데리고 탈출 성공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댓글들도 보니 이런 패턴의 이야기가 많네요ㅜㅜ

잠자냥 2023-04-04 13:09   좋아요 1 | URL
인간이 참 그러기가 쉬운 존재인가 봅니다.... 아니 많은 남자들이?? ㅎㅎㅎ
아마 여자가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가 봐요. 에휴....

다락방 2023-04-04 13:43   좋아요 0 | URL
모로코 이란 아프간…. 이게 뭡니까!!

잠자냥 2023-04-04 14:09   좋아요 0 | URL
으음 이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