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초판본 복간 붐에 이어, 리커버 붐인가 보다. 어제 교보문고에서 온 메일을 확인해보니, 문학동네에서도 세계문학 전집 가운데 몇 권을 리커버로 출판하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롤리타>가 있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롤리타>는 번역이 괜찮다는 평이 많아서 이 판으로 다시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이 리커버판 출판 소식은 살짝 구미가 당긴다. 알라딘에도 올라왔는지 검색해보니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과 관련한 소식은 교보 링크로 대신한다. (요기를 클릭)


나는 이제는 절판된 민음사 버전 <롤리타>로 예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문학동네 판을 구매해서 다시 읽어볼까 싶다. 그런 참에 예전에 써두었던 <롤리타> 리뷰를 옮겨본다.


롤리타 콤플렉스, 롤리타 신드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통은 아는 사실이리라. 아동 포르노 관련 기사나 아동 성범죄 관련 기사 이런 것들을 읽을 때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아동을 보고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어떤 면을 보고 성적으로 끌릴 수가 있을까?

나보코프의 <롤리타>에는 님펫(Nymphet)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정확히 9살에서 14살까지의 사춘기 증후가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소녀들을 의미한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그런 님펫에 미쳐있는 중년의 남자다. 자신의 이런 욕망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그저 그런 님펫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어린소녀를 훔쳐보며 자기만의 도취된 세계  안에 갇혀 산다.

그러다가 험버트는 그의 영원한 ‘롤리타’- 열두 살 난 완벽한 님펫 ‘돌로레스 헤이즈’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갖기 위해,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돌리, 돌로레스, 로, 롤라, 롤리타! 그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의붓아버지가 되어 계속 그녀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어느 날 사고로 돌로레스의 엄마가 죽자 험버트와 돌로레스 둘만 남게 된다. 험버트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천국이 따로 없다. 그 완벽한 천국에서 험버트는 그의 완벽한 님펫인 롤리타의 육체까지도 소유하게 된다.

역겨운가? 나는 좀 처음에 솔직히 역겨웠다. 소녀들이 뛰어노는 공원 근처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며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험버트의 시선을 따라가자니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할까, 이런 고민까지 들었다. 그의 읊조림은 아동을 대상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변태 중년남의 변명, 자기합리화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아픈지. 읽을수록 쓸쓸하고, 애달픈 감정이 드는 것인지. 내가 왜 이 변태(!)에게 동조하고 있는지. 이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집착이, 광적인 열정이, 헌신적인 애정이 왜 그렇게도 안타깝던지. 슬프고 씁쓸했다. 돌로레스의 육체는 가질 수 있을지언정 마음은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불쌍한 남자. 어쩌면 돌로레스의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원할 수 없었던 사랑. 님펫은 영원하지 않다. 성장하고, 결국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잡았다 해도 결국은 영원하지 않은 세계. 그 모든 것이 무척 슬프고 서글펐다.

사회에서 이른바 ‘비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사랑, 변태라고 부르는 사랑, 그 사랑의 감정을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가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애끓는 사랑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영화 롤리타(Lolita)에서 험버트 역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한없이 쓸쓸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이 불쌍한 남자에게 더 동조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없는 세계, 이미 잃어버린 세계, 영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끝없는 열망, 동경…. 이런 것들이 한편의 시(詩)처럼 펼쳐진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이 혐오스러운 사랑, 금기의 사랑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의 엄청난 문학적 재능 때문일 것이다. <롤리타>를 읽고 나면 이 세상에 과연 변태의 사랑, 금기의 사랑,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한 도덕적 잣대에 따른  구분은 사라지고 그저 오로지 ‘사랑’ 그 자체만이 남는 기분이 든다.  


자, 이제 문학동네 버전으로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를 만나볼까......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 (<롤리타>, 민음사,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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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 이마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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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쾨펠의 <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을 읽었다. 이 책은 바나나의 모든 것(?)을 망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 따 먹은 열매가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주장부터 시작해 바나나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며 우리의 식탁 위에 올라오는지, 그런 과정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특히 중남미 국가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졌는지 등등 바나나의, 바나나에 의한 세계 역사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바나나에 대해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난 바나나는 다 ‘노란색’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빨간 바나나도 존재한다! 바나나의 종류가 기껏 몇 종류겠지 했는데 수백 가지도 넘는다! 그 중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가장 맛없는 종류인 ‘캐번디시’라는 것, 인도에 가면 정말 맛있는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등등), 바나나를 둘러싼 돌이나 치키타 같은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그로 인한 중남미 국가의 고된 역사 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산으로 올라간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인 댄 쾨펠을 비롯하여 바나나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는 바나나 연구 학자들은 바나나가 이대로 가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그 대안으로 유전공학을 통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강한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나나는 씨가 없기에 혼자 번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만 번식할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한 복제품과 다를 바가 없다.

유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소리는 곧 바나나가 병에 무척 취약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나나는 싱카토카병 및 파나마병으로 하루아침에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우리가 현재 먹는 캐번디시 전에는 그로미셸이라는 품종이 인기였다. 이 바나나는 캐번디시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하는데, 1960년대 파나마병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고, 그 뒤 파나마병에 더욱 강하게 개량되어 나온 품종이 현재 주로 소비되고 있는 캐번디시다). 그러나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바나나는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고 영양도 풍부한 좋은 과일이다. 때문에 중남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가난한 나라의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런 식품이 파나마병 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저자는 때문에 이 가난한 나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GM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GM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나나 연구학자들의 논리도 바로 이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전자조작 농작물들이 처음에는 이런 선의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결국 다국적기업들의 배만 불리고 중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라카의 땅은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바나나를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알겠다. 바나나가 가난한 나라의 주요 식량공급원이라는 것도 알겠다. 병에 약한 것도 알겠다. 그래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유전자조작 바나나를 만들어야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순진하지 않나?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시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 보다는 치키타나 돌 같은 바나나 기업들이 GM 바나나를 유럽이나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그들의 배만 더 부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물론 영국 국민의 82%는 GM 바나나가 나올 경우 결코 사먹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유전자조작 식품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 긴 세월을 버텨온 이 노란 과일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바나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GM 바나나만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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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주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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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했던가. 마르탱 파주의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를 읽고 있으면 내내 정희진의 저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은 주인공 앙투안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도저히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없어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을 선택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그려나간 작품이다.

앙투안은 스물다섯의 대학 시간 강사로 많은 책을 읽고, 예술 작품에도 조예가 깊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은 이른바 '지성인'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세상에 쉽게 융화되지 못한다. 늘 모든 행동을 하기 전에 사회적으로 성찰하는 버릇이 습관처럼 몸에 배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지성은 곧 질병'이며 구약성서에 나온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는 고통도 쌓여간다'는 말이 곧 진리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맥도날드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소굴이며, 기름기와 설탕 공급자이며 생활패턴의 획일화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가난한 앙투안이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곳이었으며 '고급 백화점은 사회 상류층 냄새인 사향 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부르주아 사육장'이기 때문에 고급 백화점도 갈 수 없고, 옷을 사더라도 혹시 '이 옷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옷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기를 주저하고, '헬스클럽은 찌르는 듯하고 최면을 거는 듯한 음악에 맞춰 근육질의 갤리선 노예들이 노를 젓는 곳'이기 때문에 또 가서는 안되는 곳이다. 때문에 그는 가난한데도 자기의 수입이 허락하는 한 유기농 식품을 사먹고, 옷은 최대한 소비하지 않으며 현대인의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자동차는 절대로 소유하지 않으며(때문에 운전면허증도 없다), 헬스클럽 같은 곳에서 운동을 해서 자신의 몸을 과시하느니 체력 약하고 빼빼마른 몸으로 그저 산책을 하는 일 등이 전부인 삶을 살아 간다. 그러다보니 계속 평범한 사람들과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에 애를 먹게 되고 결국 '너무 많이 알아서 괴롭고 불행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기로 한다.

사회에 융화되기 위한 극단적 선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보려다 실패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로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는 대뇌피질 제거 수술을 받으려다 실패하고, 정신과 의사로부터 '에로작'이라는 약을 받아 먹으면서 서서히 바보가 되어간다. 따지고 질문하기 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과 음반 예술품 등등을 다 내다버리고, TV를 사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몸을 가꾸고, 회사를 들어가 떼돈을 벌면서 그 돈으로 고급 백화점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소용도 없는, 사용도 하지 않는 물건을 사기 시작한다. 그리고 포르셰 승용차도 장만하며...

그런데 이렇게 점차 그냥 평범한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앙투안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친구들이 그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폭탄을 배달하는데, 폭탄은 바로 앙투안이 '바보'가 되기 이전에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 플로베르의 서한집이었다. 플로페르의 서한집을 받아든 앙투안은 정말, 마치 폭탄을 맞은 사람처럼 원래의 그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 정말 문학과 음악 그림 같은 예술 창작품들이 사람을 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좀 더 해보게 된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의 비즐러가 그러했듯이.

예전에 본 <잔잔한 호수 위의 파문 : The Rage In Placid Lake> 도 좀 비슷한 내용이다. 물론 주인공 플라시드는 앙투안처럼 많이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개방적이고 좀 남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사회적 규범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 자라나는데, 그러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스스로 가장 사회적인 인물이 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험회사에 일부러 취직을 하고, 가장 전형적인 회사원이 되어가면서... (플라시드 부모는 아들이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고 하니까 막 운다; 애를 버렸다고. ㅋㅋㅋ)

암튼 이런 류의 책이나 영화들을 보면 사회라는 곳, 사회의 규범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이 조금 남다르게 사는 것은 참 힘들고 피곤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말이 대단한 진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이 아는 사람들이 그다지 상처받고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더 뻔뻔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생각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냐, 또는 많이 알면서 불행(?)하게 살 것이냐 조금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책. 나는 생각 없이 살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융화하는) 삶이 딱히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많이 알고 상처 받더라도 고독한 지성의 숲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 삶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인간들은 묘하게도 자기 자동차를 닮았다. 어떤 이들은 옵션이 전혀 없는, 그저 굴러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러니까 속력을 낼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예 멈춰버려서 종종 수리가 필요한 그런 인생을 산다. 그것은 싸구려 인생으로, 견고하지 못해서 사고가 났을 경우 탑승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인생은 가능한 모든 옵션을 다 갖추고 있다. 돈, 사랑, 미모, 건강, 우정, 성공까지. 마치 에어백, ABS, 가죽 커버, 보조방향조정장치, 16기통과 에어컨을 갖춘 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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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13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도 좋고 책은 읽어보고 싶네요 ㅎ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면 이기는 병신이 되어라는 이 병림픽 시대와 걸맞는 책인 듯 싶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ㅎ

잠자냥 2016-07-14 10:51   좋아요 0 | URL
네, 분량도 그리 많지 않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물론 그에 비해 던지는 질문은 쉽지 않지만 ^^) 금세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랍니다!

루쉰P 2016-07-15 00:16   좋아요 0 | URL
흠 질문이 쉽지 않다라...구미가 당기는 군요 훗 전 모험가 체질이라 ㅋ
 
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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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고전적인 질문을 던져보겠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외모가 먼저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영혼이 먼저일까? 아마도 다들 외모는 한 때이니 영혼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대답(은)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또 다른 질문, 당신은 아주 뛰어난 문장실력을 갖고 있다. 그런 당신에게 누군가가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해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연애편지를 쓸 대상은 평소 당신이 짝사랑해 오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을까?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에는 바로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 17세기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바로 그 주인공. 시라노는 검술은 물론 예술에도 능통하고,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나다. 게다가 ‘참나무와 떡갈나무는 못 되더라도.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을 걸세. 아주 높이 오르진 못해도, 혼자 힘으로 올라갈 걸세!라고 평소 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출세나 권력보다는 정의롭게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그에게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바로 엄청나게 큰 코다. 큰 코 때문에 지독한 추남으로 불릴 정도(프랑스에서는 동명 영화에서 ‘제라르 드 파르디유’가 시라노 역할을 했다던데 무척 어울렸을 듯). 그런 그는 사촌지간인 록산을 가슴시리도록 짝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의 추한 외모 때문에 고백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앓고 있을 뿐이다. 시라노를 그저 좋은 사촌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록산은 어느 날 그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알고 보니 그 상대는 시라노와 같은 근위대에 있는 젊고 잘생긴 크리스티앙.

젊고 잘생긴 크리스티앙 역시 록산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 처지라 이 둘의 사이는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크리스티앙은 잘생긴 외모에 비해 입만 열면 여자들이 도망가 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크리스티앙은 말을 너무 못해 그에게 잘생긴 외모처럼 낭만적인 사랑의 언어를 기대하던 여자들은 금세 다 떠나고 만다. 록산을 놓치고 싶지 않던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에게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하고, 록산에게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고백하고 싶던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뜨겁고 달콤한 구애의 말을 쏟아 놓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앙이 ‘외모’만 멋있는 사람이 아닐까 걱정했던 록산은 ‘정신적인 아름다움까지 간직한’ 그에게 더 빠져버리고 만다.

실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썼으니 그 편지에는 얼마나 달콤하고 열정적인 말로 가득했을까!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남을 위한 일이었다 해도 가능할까? 시라노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남 좋은 일을 하면서까지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혹은 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크리스티앙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그녀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보며 희열을 맛보았던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지켜보고 그와 그녀가 결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모습에선 정말 이 사람 미친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같으면 아예 진작 ‘당신이 반한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결국엔 내 편지! 곧 나!’라고 밝혔을 거 같은데 말이다. 실제로 록산은 크리스티앙과 단 둘이 만났을 때 크리스티앙이 달콤한 말을 쏟아 내주길 기다렸지만 ‘사랑하오.’라는 말 밖에는 못하는 그에게 짜증을 내고 돌아서버리고 시라노의 편지에 빠지다 못해 나중에는 크리스티앙에게 ‘당신이 세상 제일가는 추남이라고 해도 이제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그런 말을 들을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시라노라며 괴로워하게 되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영화 <비포 선 라이즈>, <비포 선 셋>에서 제시와 셀린느를 보면 딱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를 즐겁게 해준다. 굳이 그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그 모든 대화 속에 ‘사랑해’가 숨어 있다. 록산이 그저 ‘사랑하오’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크리스티앙에게 화를 냈던 것은 그 이상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화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해’가 숨어있는 수많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역시 쉽지 않은가 보다. 록산 역시 그토록 가까이에 그런 사람이 있어도 커다랗고 못생긴 코에 가려 ‘그’가 ‘그’임을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주 뒤늦을지언정 결국 ‘진실’은 통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너무 늦어서 좀 슬프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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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7-15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라노>는 이태리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베흐쥐라의 시라노>란 제목으로 오페라로도 만들어 들어봤거든요. 거기선 연애편지는 물론이고 로잔느의 창문 아래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창문 까지 가는 사다리 위에선 크리스티앙이 립싱크로 입만 벙긋거리는 장이 나오는데, 그것도 원작과 같나요?
<시라노> 읽어볼 건 아니지만 걍 내용이 궁금해서요. ㅎㅎㅎㅎ

잠자냥 2016-07-15 12:3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그 오페라는 보지 않았지만 원작에 시라노는 대필만 해주는 게 아니라, 록산느 발코니 아래 가서 (어둠속에서) 크리스티앙인 채 대신 격렬하게! 사랑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라노가 대신 고백해 주기 전에 크리스티앙이 나름대로 고백을 하는데 말을 더듬는 것은 물론.. 사...사...사랑합니다. 계속 이런 말만 하니까 록산느가 매몰차게 나오기도 하지요.
 
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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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나? 전공 외 교양 수업으로 ‘일본근대문학’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수업 시간에는 일본 문학사에서 아무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읽어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후미코의 발(富美子の足)’이었다. 그때 정말 이 단편을 읽고 나서의 충격이란!

제목을 보니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어쩐지 여성의 발에 집착하는 중년 ‘오덕후’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가? 만약 그런 상상을 했다면 제대로 집었다. 이 단편은 어린 첩의 발에  집착하는 노인의 이야기인데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하며 일종의 성도착이라고 할 수 있는 발 페티시즘에 걸린 노인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그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읽고 논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란 ‘탐미주의’ ‘유미주의’ ‘악마주의’ 이런 단어들이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실제로 ‘후미코의 발’ 외에 이런 성향의 작품들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일본에서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지만 그보다 먼저 노벨문학상 후보에 심심찮게 오르락내리락했던 이가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다.

‘후미코의 발’에서 느낀 변태 이미지가 컸던지 그 뒤 오래도록 그의 작품은 선뜻 다시 읽어보게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엔가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는 나도 모르게 새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라고 있더라. 아무튼 이 책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집이다. 예전에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출판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늘’이라고 번역한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우리말로는 선뜻 풀이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다다미 방이나 건축문화에 스며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그늘’ ‘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예찬인데 딱히 ‘건축문화’하나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전통 연극,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효용성 등 서구 문물과 대비되는 동양(일본)의 정서적인 ‘그늘’에 대한 찬미, 일본의 전통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그늘에 대하여’가 첫 장을 이루고 있으나 이 책에는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과 같은 수필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연애와 색정’- 이 수필을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변태 이미지가 더 굳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는 싱거웠다. ‘색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이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놓고 드러내기 보다는 감출수록 색기가 드러난다는 그런 주장이랄까.

‘손님을 싫어함’이라는 수필에서는 자기에게도 고양이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한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대화를 하는 중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다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곧잘 빠졌다. 때문에 제 때 대꾸하지 못해 손님에게 불성실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는 한다. 해서 자기에게 고양이처럼 꼬리가 있다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내가 너 이야기를 듣고는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나도 고양이 꼬리 좀 주슈~). 남들이 다 가는 명소와는 정반대의 여행지로 떠나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자기만 아는 최고의 여행지를 수필에서조차 끝내 밝히지 않는 괴팍함을 드러내는 ‘여행’이라는 수필도 꽤 공감이 갔다.

다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나 여체에 대한 묘사 등이 권위주의적인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하고, ‘하이고~ 웃기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서양에 비해 동양(즉 일본)의 우월함을 계속 강조하는 태도도 껄끄럽다. 같은 동양을 이야기할 때도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비하는 물론 일본의 상대적 우월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어쭈, 자화자찬은 참…’하며 혀를 차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별것 아닌 소재 속에서 뛰어난 묘사와 관찰을 통해 그토록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작가만의 꼴통 기질이랄까 괴팍함을 발견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었다.


문득 ‘후미코의 발’도 읽고 싶어져서, 생각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을 다시 읽었다. '후미코의 발'은 고려원에서 나왔던 <일본대표단편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돌아보니 이 일본대표단편선 시리즈에는 꽤 괜찮은 단편이 많이 실려있어서 뒤늦게 1권 외에 더 사두려고 찾아보니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아무튼, '후미코의 발'은 예전에는 충격적(?)이었는데, 어제는 좀 많이 웃겼다. 키득키득.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미친 듯이 웃었다.

발뒤꿈치의 곡선을 살며시, 그러나 머리 속이 타버릴 정도로 뚫어지게 탐닉했습니다. 밑에 어떤 뼈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식으로 살이 감싸고 있기에 저리도 부드럽고 원만하며 윤기 도는 뒤꿈치가 되었을까요? 후미코는 태어나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 뒤꿈치로 다다미와 이불 외에 그 어떤 딱딱한 것도 밟아 본 적이 없었겠지요? 저는 한 남자로 태어나 살기보다는, 이렇듯 아름다운 뒤꿈치가 되어 후미코의 발 뒤에 붙을 수 있다면 그쪽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미코의 발뒤꿈치에 밟히는 다다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생명과 후미코의 발뒤꿈치 중 이 세상에서 어느쪽이 더 존귀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일언지하에 후자 쪽이 존귀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후미코의 뒤꿈치를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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