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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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꼬마, 내 둘째 조카에게 요즘 크나큰 고민이 생겼다고 한다. 꼬마가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 언니가 그냥 지나치는 말로 “늙으면 죽는 거야.”라고 말을 했는데 “늙으면 죽는 거야? 엄마도 늙어? 아빠도 늙어? 할머니도?”라면서 종일 묻고 다닌다고 한다. “엄마도 지금 늙고 있지”라고 말을 하니 펑펑 울었다나.

‘늙으면 죽는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늙으면 죽음에 가까워지기는 하지만 사람이 꼭 늙어서 죽으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사고로, 병으로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으로 등등 늙지 않아도 죽음은 늘 가까이서 머물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아니,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되는 그 순간부터) 삶이다.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살에 대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까? 삶이 너무 귀찮고 피곤하고 힘들어서(자살에 꼭 큰 명분이 있는 건 아닌 듯하다. 그냥 어느 순간 사는 것이 싫어지면 죽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죽고 싶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자살을 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수많은 방법이 끔찍하고 그럴 용기조차 없어 그저 다시 살아가기로 (실은 죽음을 향해 조금 천천히 달려가기를) 마음먹은 적도 수없이 많다.

가장 행복한 죽음의 형태는 어떤 죽음일까? 아무런 고통 없이 자다가 눈을 감는 게 그렇지 않을까? 우리 할아버지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 밤에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죽기 전까지 그는 흔한 병조차 없었고, 치매도 그를 피해갔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복 받은 사람’ ‘축복받은 죽음’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웃었다. 그때 나는 열일곱이었는데, 내가 만약 어느 날 늙어서 죽어야만 한다면 저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내가 늙어서 죽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토록 나이를 많이 먹도록 삶을 쥐여 잡고 있는 게 구차해 보이는 십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죽는다면 그렇게 죽고 싶다.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늙고 병들어 누군가의 짐이 되어 죽어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고통 속에 비명횡사하고 싶지도 않다. 좀 더 호사스러운 바람을 해 본다면, 내가 늙어 죽을 때 그 옆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똑같이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정도. 써놓고 보니 참 큰 욕심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은 죽음을 함께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 세상에 먼저 보내고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더 쓸쓸한 것은 없다. 그들에게 결혼이라는 희극은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만 살아남아 남편이나 아내의 부재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도 없을 테고, 새로 만난 사람에게 적응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필요도 없을 것이다.(p.73)’
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 이유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짐 크레이스의 소설 <그리고 죽음 | 원제 Being Dead>은 죽음, 삶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간을 던진다. 작품 속의 주인공 조지프와 셀리스는 시작부터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나눈 그 장소에서 30년 전과 똑같이 한 번 더 ‘사랑’을 나누려고 시도하던 중 강도를 만나 무참히 살해당한다. 중년의 사내 조지프는 벌거벗은 몸으로 그리고 그의 아내 셀리스는 반라의 상태로 썩어가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렇게 이들을 죽음을 시작으로 그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부부가 되고, 함께 늙어가는 일생을 보여주고, 그들이 죽기 직전의 하루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조지프와 셀리스의 뒤늦은 부재를 깨닫고 그들을 찾기 위한 산 사람들의 노력을 다른 한 축으로 보여준다. 두 사람의 죽음 앞에 그들의 지나온 인생과, 죽기 직전의 하루,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이 담담하게 묘사되고 있다.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을 믿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천국에 대한 확신도 지옥에 대한 확신도 없다. 정말 그런 곳이 존재할까? 단지 죽는 그 순간부터 육체가 썩기 시작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영혼도 육체와 함께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육체의 죽음, 그 부패의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바닷가에서 죽은 그들의 시체를 탐하는 곤충과 조류, 어류 등의 동물들과 그들의 썩은 육체를 자양분 삼아 자라나는 식물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 어차피 죽는다면 왜 살아야 하나? 이런 허무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행복한 죽음이라고 볼 수 없는 조지프와 셀리스의 죽음에서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갈지언정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육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죽은 채 발견된다.

조지프와 셀리스가 서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곳에서 30년 전과 똑같이 사랑을 나누려다,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다(물론 그들은 몰랐지만)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강도에 의해 난타당해 몸이 이곳저곳 상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젊고 평화로워 보였다. 죽음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고, 지금 이 순간도 다가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 어두운 우주에서 주어진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있는 하찮은 거류자들, 덜덜 떨면서 예배를 보는 이들과 별을 바라보는 이들은 천국에 대한 기대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꽃처럼 타올랐다 스러지는 자신의 짧은 인생을 희생하는 바보들이었다. 아무도 초월할 수 없다. 미래도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탄생과 죽음 사이의 공간을 끌어안는 것뿐이다. 열심히 살아라, 넓게 살아라, 높게 살아라.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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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12-1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과 애도 상실에 대한 책을 모으고 있는데 ... 감사하니다. 서평도 훌륭합니다.

잠자냥 2016-12-14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죽음과 애도 상실에 대한 책을 모으고 계시다니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이미 알고 계실 것도 같은데,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도 꽤 훌륭합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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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있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온화하고 조용한 지성인을 대표하는 그런 남자. 결혼 생활 15년, 딸 하나와 부인을 둔 평범하고 모범적인 그런 가장이기도 했다. 적어도 친구 잭의 소개로 '앤'이라는 여자를 만나기 까지는. '앤'이라는 여자를 만난 후 그는 자기가 살아온 15년 결혼 생활이 그저 '자신의 자아를 구속하는 상실의 세월'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앤을 만나고 그는 '마치 오래 끊긴 어떤 통신선이 20년 전의 자아에게 갑자기 회복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 했고 아내 바버라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슈트케이스 하나만 달랑 들고 새로운 연인 '앤'에게 간다. 15년 간의 무미건조했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사랑에 대한 황홀함으로 가득한 새로운 결혼 생활을 '앤'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전 부인 바버라의 계략으로 인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의 현재 부인인 '앤'이 출연했던 영화를 관람하면서 '앤'이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장면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레이엄이 자신의 현재 부인 '앤'이 출연한 영화를 본 적도 없었던 것은 그는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앤'이 젊은 시절 출연했던 B급 상업 영화는 더더욱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고. 그런데 앤의 과거나 영화를 잘 보지 않는 그레이엄의 현재를 다 알고 있는 그레이엄의 전 부인 '바버라'는 이런 점들을 교묘히 이용, 딸이 아빠와 보고 싶어하는 영화라며 그 영화를 (더 정확하게는 영화 속 '앤'의 정사장면을) 그레이엄이 목격하게끔 조종한다.

그때부터 이 남자는 질투와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모르던 '앤'의 과거 캐기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이 깊으면 질투와 망상도 심해지는 것일까? 그레이엄의 경우 얼마나 앤을 사랑하는지는 그가 그의 친구 잭에게 앤을 생각하는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그레이엄은 앤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식사가 끝나고 식탁을 치울 때, "갑자기 난 그녀의 접시에 그녀가 남긴 것을 죄다 먹어 치우는 거야. 그래, 흔히 그것은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닌데- 기름 덩어리와 변색된 채소와 소시지 연골 따위인데- 난 그저 맛있게 먹어 치워"라고 말한다. 앤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녀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어한다.

이런 구절도 보인다.

앤이 업무로 출타하면, 그는 자신이 성적으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곁에 없을 때, 그는 움츠러들었고 따분해했으며 더욱 멍청해졌고 조금은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남편감은 못 되고, 바버라에게나 적합한 남편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앤이 돌아 왔을 때,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유심히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때때로 이 소심한 열정은 필사적이고 광적인 집념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손이 단 물건들을 질투했다. 그는 그녀 없이 보낸 세월을 경멸했다. 그는 단 하루라도, 그녀가 되지 못한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그렇게 그녀없이 보낸 세월을 슬퍼하고 경멸해하고 아까워 하던 그의 감정은 그녀의 과거의 한 장면을 목격한 뒤 겉잡을 수 없는 질투로 변하기 시작한다. 역사학자 답게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면서 앤이 만난 남자, 영화를 같이 찍으면서 관계를 가질 법했던 남자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그들의 뒷조사까지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과대 망상은 점덤 더 커져간다. 앤도 미쳐 기억 못하는 그녀의 출연작들을 구해와서는 수십번도 더 리플레이 해서 반복해 보면서, 저 남자와도 관계를 가졌겠지, 저 남자와는 어떤 식으로 했을까 등등 끊임없이 망상을 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앤에게 확인하는 작업까지 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그들이 아늑하고 평화롭던 저녁은 늘 눈물과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찬 저녁으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한다. 앤은 그렇게 그레이엄에게 과거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그가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가 원래의 다정하고 온화한 그레이엄으로 돌아올 것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그레이엄은 결정적으로 앤을 소개해준 친구 잭(잭은 소설가임)을 초대한 저녁 파티에서 앤과 잭의 어쩐지 은밀해 보이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실제로 잭과 앤은 앤이 그레이엄을 만나기 전에 잠시 연인 사이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앤은 그레이엄과의 결혼 후에는 결혼 전의 모든 관계를 끝냈고 그레이엄에게만 충실했음) 그레이엄은 그 후 잭에 대한 수집에 불타기 시작한다. 잭이 쓴 모든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 남녀 주인공들이 벌이는 정사장면을 모두 앤과 잭의 이야기라고 단정 내리고 그 장면 장면들을 책에서 찢어내어 따로 보관하기 시작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부인이 과거에 사로잡혀 행복한 생활을 파괴하고 있는 스스로를 가련한 오셀로라고 부르는 그레이엄. 그는 그래서 어떻게 될까? 그의 질투는 끔찍한 파국을 불러오고 만다.

이렇게 구구절절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흔히 질투가 사랑의 묘약이라는 둥, 양념이라는 둥, 질투 없는 사랑은 맹물 같다며 사랑하는 사람의 질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에서 여자가 자신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남자에게 술이 취해 "제발 나 좀 질투해 달라" 했더니 남자가 오바하면서 그 다음날부터 여자 주변의 모든 남자들에게 장난 아니게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무척이나 좋아하던 여자의 모습이 기억난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하면서 뿌듯해하고. 적당한 질투 같은 것은 정말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요소는 일부러 하려고 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안 하려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거기서 문제가 일어난다. 이 책에서도 전하고 싶은 말도 그게 아닐까? 평범하고 온화하던 한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질투에 눈이 멀어 어떻게 파괴적으로 변모해 가는가를 보여주면서, '인간은 본래 세 개의 두뇌를 타고났다. 구조가 크게 다른데도, 이 셋이 함께 기능하고 서로 교통해야만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세 두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본질적으로 파충류의 두뇌다. 두 번째 것은 하등 포유류에서 상속받은 것이고, 세 번째 것은 고등 포유류에서 발달한 것으로, 세 번째 것으로.... 인간은 참다운 인간이 되었다'는 책의 서문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결국 그레이엄은 포유류의 뇌가 파충류의 뇌에 잡아 먹혀버렸다고 할 수 있으리라.

책을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무섭기도 했다. 자신의 진짜 사랑을 드디어 만났다면서 행복해하던 그가 질투와 망상에 사로잡혀 그 행복한 일상을 스스로 파괴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편집증 적으로 아내의 과거를 캐내고, 아내의 과거와 얽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남자들에게 질투를 하고, 망상 속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는 사랑의 종속 된 감정일 뿐이다. 그것을 망각하고 질투가 사랑을 넘보려 할 때, 사랑이 질투에 종속되어 갈 때 그 사랑은 균열이 생기는 것 아닐까. 질투가 파충류의 두뇌에 속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아마 고등 포유류의 두뇌에 속하는 감정일 것이다. 세 번째 것으로 인간은 참다운 인간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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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12-0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신 듯합니다. 품절이군요. ㅠㅠ

잠자냥 2016-12-08 16:53   좋아요 0 | URL
네! 안타깝게도 품절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 사고 싶은데; ㅋ 회원 중고가는 비싸네요;; 음.

단발머리 2016-12-0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리뷰 읽었더니.. 줄거리를 알고 있는데도 더더 읽고 싶네요.
아, 줄리언 반스라니~~~ 기대됩니다ㅎㅎ

잠자냥 2016-12-08 17: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손톱 막 물어뜯으면서요. ㅎㅎ
열린책들에서 이 책 다시 내주면 좋겠습니다. 사고 싶은데 말이지요.
 
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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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아까워서 1, 2부는 하루 밤에 또 3, 4부는 다른 날 밤에 이런 식으로 나눠 읽었다. 소설을 아껴두었다가 읽는 다는 심정. 이해할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그만큼 이 소설은 참 흡인력 있다. <모리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이다. 그리고 E.M 포스터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픽션을 섞어서 만든 소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주인공 모리스 및 그의 연인인 더럼의 심리 묘사면에서 매우 빼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밀고 당기기, 처음 본 순간의 떨림, 헤어진 뒤의 더없는 절망감 등등.

신사의 나라 영국. 엄연한 사회적인 계급이 존재하는 그 꽉막히고 답답한 사회에서 캠브리지의 평범한(?) 대학생인 모리스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매혹당하고 자신도 모르게 끌리지만, ‘그러면 안되니까’ 그 남자의 사랑 고백에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냐며 돌아선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사춘기 시절 꿔왔던 꿈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캠브리지에서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것은 모리스의 연인 더럼이 주장대로 순전히 플라토닉한 사랑에 머무르고 만다. 남자들끼리의 사랑은 그래야 한다고- 정신적인 사랑, 지적인 사랑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더럼의 주장에, 모리스 또한 그게 맞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따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모리스에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일깨워준 이 ‘더럼’이란 남자는 참 ‘더럽’게도(?) '난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어'라며 매몰차게 기존의 평온한 삶, 즉 이성애자들의 세계이자 사회 계급적으로 안락한 영국 신사의 세계로 돌아간다. ‘우리가 함께 했던 것들은 치기어린 어린애들의 장난’에 불과할 뿐이라는 태도로 모리스를 외면한다. 더럼은 모리스와의 지난 관계를 '성장 과정 중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라는 식으로 치부하고 만다. 더욱이 모리스 앞에 약혼녀를 데리고 나타나, 그의 한때 연인이었던 그에게 가장 절친한 ‘친구’로서의 의무를 다해줄 것을 강요하기 까지 한다. 천하에 몹쓸 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더럼의 선택도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작품을 읽어보면 수긍이 간다. 그토록 견고한 인습과 전통의 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하여 더럼이 떠난 뒤 모리스는 암흑의 세계를 걷는다. 절망......

1, 2부는 모리스와 더럼의 캠브리지 안에서의 플라토닉한 러브와 그들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3부는 그로 말미암아 방황하고 절망하는 모리스, 그러면서 서서히 육체적인 부름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에게도 새로운 연인이 등장한다. 소설의 마지막 단원인 4부에서는 모리스가 방황을 종지부 찍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지를 숨가쁘게 그린다. 더럼과 나눈 사랑의 방식과는 다른,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사랑, 육체와 정신이 완벽하게 결합되는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꽤나 감명깊다.


모리스의 새로운 연인이 더럼과는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를테면 신분적인 면을 비롯하여 지적인 매력보다는, 육체적인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유치할 정도로 스스럼 없다는 면에서)이라는 설정도 좋았다. 그리고 단순한 머리를 지닌, 노동 계급에 속하는 모리스의 이 새로운 연인이, 모리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모리스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 부, 모든 것을 버린다) 장면에서는 눈물이 왈칵 나기도 한다.

E.M. 포스터의 생애를 훑어보면, 그가 사랑했던 남자, 또는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들이 모두 결국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권 안으로 귀착하는 데 반해, 포스터는 평생 독신으로 늙어갔다. 그런 그의 생애가 소설과 오버랩 되면서 슬픔을 동반한 아이러니컬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그의 사랑이 행복한 결맞을 맺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작품에서라도 포스터의 분신임이 틀림없을 모리스가 행복해지기를 그는 바랐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모리스>는 플라토닉한 사랑에서 육체적인 기쁨을 동반한 사랑,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인습과 전통따위를 모두 벗어 던져 버리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싸워가는 한 남자의 ‘성장’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거 알지만. 지금은 죽고 싶지 않고 네가 죽는 것도 싫어.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죽으면 우리 둘 다 끝이야. 넌 그걸 깨끗하고 투명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모리스가 말했다.
“그러면 나는 더러워지는 쪽을 택하겠어” (p.139)                                                                                       

지나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기억되게 마련이다.배움이 없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지난 사랑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음란한 욕망, 두서없이 나누던 기나긴 대화들도 돌이키지 않으니.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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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맑음 2016-11-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내리는 날 숲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에 소설이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인데 이렇게 다시 보게되니 기쁘네요^^

잠자냥 2016-11-28 13:44   좋아요 0 | URL
네, ‘비내리는 날 숲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라는 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모리스>뿐만이 아니라 포스터의 모든 작품들이 숲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ㅎㅎ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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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벨 훅스를 만난 것은 <사랑의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통 지적 수준이 높은 이들(흔히 우리는 '학자'라고 부르는)은 그들의 박식함이나 많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혹은 일부러 '글'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있다. 내가 처음 만난 벨 훅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쉽고 간결하면서도 매혹적인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벨 훅스- 그녀를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느덧 내개 그녀의 저작은 나오는 족족 찾아봐야 할 그런 책이 되었고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또한 그렇게 만났다. '계급'이라는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를 그녀는 역시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요?"라고 입을 뗀다. 계급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잘 알다시피, 벨 훅스는 흑인이며, 여성이다.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젠더, 인종, 계급, 문화와 관련한 다수의 비평서를 집필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흑인이며, 여자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녀가 속한 위치가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은 갈 것이다. 그녀가 1952년 미국 남부 켄터키 주의 흑인 분리 구역에서 태어나, 1973년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력을 보면서 흑인 분리 구역에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그녀의 고군분투기는 이 책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좌절하고 상처를 무수히 받을만한 상황인데도, 그녀는 우뚝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전형적인 노동 계급의 가난한 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현재는 '풍요로운 세상'으로 이동한 벨 훅스- 그녀는 '계급'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그녀는 그 문제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흑인이기‘때문에 라는 인종 문제와, '여자이기'때문에 라는 젠더의 문제로 계급 문제를 희석할 뿐이었지, 그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는 것은 꺼려해 왔고, 그녀 역시 자신이 속한 세계가 흑인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인종과 성의 문제보다 '계급'문제가 가장 뼈아프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단적으로 부자 흑인 집안 출신의 아이들은 가난한 집안 출신 흑인 아이들과 연대하려 하지 않으며 부자 백인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차라리 백인 빈민층과 흑인 빈민층이 연대하는 경우가 더욱 많음을 벨 훅스는 지적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 어느 곳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얼마든지 노력하고,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부’를 창출하는 능력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근면, 성실한 태도 등)로 치부하며 흑인은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이념을 전파한다. 게다가 그런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존재(약물에 취해, 총기를 소지하고)로 설파하기까지 한다. 흑인도 노력하면, 여자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데 단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벨 훅스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성공해서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속의 ‘그 정상’이라는 위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그녀에 따르면 ‘지배 계급은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할까봐 약물 중독을 심고, 노동 계급에게는 쇼핑 중독을 심었다.’ 노동 계급이 계속해서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녀는 광고의 악영향을 이야기한다. 물건을 사면 그만큼 당신의 지위가 향상된다는 거짓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재테크라는 말 자체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모든 인종의 여자들과 흑인 남성들이 빠른 속도로 가난하고 혜택을 박탈당한 계급으로 유입되고 있음을 벨 훅스는 지적한다. 이 상태를 계속 두면 머지않아 미국은 계급투쟁의 장이 될 것이라는 깊은 우려와 함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우리가 ‘계급 문제를 직시하고, 더 많은 사실을 깨달아 경제적 정의를 위해 제대로 투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제일 먼저 공정한 경제 체제부터 만들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직시하고, 그 계급과 연대해야 할 것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벨 훅스는 자신이 충실하게 연대해야 할 계급은 물론 '노동 계급'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책을 마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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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1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너 리그에서서 열심히 노~~오력하면 매이져 리그로 편입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매이져와 마이너라는 이 리그 시스템 자체로써의 계급적 고찰을 묻는 질문이었네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듯합니다. 결국 리그의 자각을 통하여 투쟁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 읽어 볼만한 책이네요..참고하겠습니다.

잠자냥 2016-11-18 10:04   좋아요 1 | URL
지금의 우리 사회도,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사회도 계급간 불평등은 더 심화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평등사회라고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연대해야 할 계급끼리 인종 또는 젠더 갈등으로 오히려 더 첨예하게 대립하지요. 암튼 여러모로 답답한 요즘입니다....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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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소개 중에 ‘위대한 러브스토리’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를 보고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카엘’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어쩐지 정말 ‘위대한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초반부는 조금 그럴 듯했다. 한나라는 여자와 미카엘이라는 남자가 대학 교정에서 만나서 조금씩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데이트를 하고 가까워지는 부분, 그리고 주변의 만류에도 서둘러 결혼을 하는 부분까지는 이제 곧 한나와 미카엘의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펼쳐 지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그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펼쳐 지려나 궁금해 하고 또 궁금해 하는데, 어느덧 소설의 결말이…. 실은 읽기 상당히 지루했다. 무미건조하고 무덤덤한 문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아마도 없는 것 같다.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의 작가이며 <나의 미카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꽤 유명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도 처음이고, 아모스 오즈의 작품도 처음이었다.

이 소설은 꽤 낯설게 다가온다.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특히 그렇다. 그런 한편 작가의 문체는 무미건조하면서도 꽤 서정적이다. 서걱서걱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기분이 든다. 머릿속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 아랍, 사막 등등의 낯선 풍경을 상상하면서 작품을 읽으면 그 무미건조함이 더욱 잘 느껴진다.  

이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나가 미카엘을 만나 데이트를 하고 이내 서둘러 결혼을 하기까지는 앞서 언급했듯이 위대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데, 결국 읽다 보면 ‘한나’와 ‘미카엘’의 아주 평범하고 지루한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가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 그 이후 첫 아이 임신, 중동 전쟁, 지질학을 전공하던 남편의 박사학위 취득, 친척 혹은 가까이 하던 이웃들의 사망, 그리고 둘째 아이의 임신… 남편의 외도 그리고 결국 서서히 파탄에 접어드는 ‘한나’의 결혼 생활.

‘한나’는 처음부터 결핍을 앓았던 사람이고, 그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미카엘’을 선택했지만 사실 ‘미카엘’은 ‘한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소설을 보는 내내 든다. 착하고 자상하고 늘 한결같은 남편이지만 ‘한나’의 외로움, 우울증, 결핍, 소외감 등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런 그녀는 현실에서의 불만족을 매일 밤 꾸는 환상적인 ‘꿈’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하지만 결국 그것은 끝없는 우울증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위대한 러브스토리’라고 어떤 이는 이 책을 소개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러브스토리’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지만 ‘위대한 스토리’라는 생각은 조금 들기도 한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웃이나 친척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지루하고 불만에 찬 삶이지만 그래도 계속 ‘살아야만 한다'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메시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한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위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은 역설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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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와 미카엘. 두 사람 성격 다 답답해보여서 끝까지 읽는 일이 힘들었어요. ^^;;

잠자냥 2016-11-15 14:27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끝까지 답답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