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날 서점에 나갔다가 <가만한 당신> 세 번째 권이 매대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갑고 기쁘고 어쩐지 뭉클한 마음이 들어 책을 펼쳐보았다. 오랜 친구, 그런데 좀 잊고 지내던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악수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날 바로 거기서 그 책을 살 수도 있었는데 업무로 동행했던 이가 있어 그러지는 못했다. 반가운 친구와 악수를 나눈 뒤 곧 만날 것을 약속하고 금방 헤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나는 며칠 뒤 꼭 만나자던 그 약속을 지켜 <가만한 당신>, 이 오랜 친구를 다시, 조용히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이 두 번째 권이 나왔었고, 나는 조금 소홀했었는데 그래, 너는 역시 변함이 없구나. 아니, 너는 더 깊어졌구나. 어쩌면 내가 너의 깊이를 이제 더 잘 알게 된 것일까? <가만한 당신>을 처음 읽던 무렵 나는 저자 최윤필의 자기소개만 보고도 조금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스스로 “국적·지역·성·젠더·학력 차별의 양지”에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그런 한국 남자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의 그 자기소개에 몇 줄이 더 추가되었다. “다만 서자여서 어른들의 ‘호적 타령’을 들으며 자랐다. 2006년 말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가구 일을 배우며 수도권 변두리 함바집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잠깐 한솥밥을 먹은 적도 있다. 솜씨도 벌이도 변변찮아 2009년 직장에 복귀한 사실을 <가만한 당신> 약력에 누락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생의 이력. 그런데 끝내 그것이 마음에 걸려 고백하고 마는 그. 어쩌면 그 “미미한 소수자성”이 <가만한 당신> 세 번째 권을 쓸 동력이 되었음을 밝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조금 달라진 자기소개, 좀 더 내밀한 자기 고백에 ‘역시 넌 여전하구나.’ 슬며시 웃으며 책장을 넘긴다.
이어지는 서문도 눈길을 끈다. “인간에게 인권은 과분하지 않은가.” 저자의 친구가 한 말이라고 한다. 최윤필처럼 나 또한 이 문장에 한참 눈을 고정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읽던 책 중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이 있다. 나 자신을 비롯해 이 지구에서 인간이 가장 해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한국 사회를 지켜보노라면 인구절벽으로 소멸해도 좋은 나라라고 생각할 지경으로 나는 냉소와 염세, 회의감에 빠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저 “인간에게 인권은 과분하지 않은가.”라는 말은 대뜸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게 된다. 저자 또한 “만일 그것이 추궁이었다면 솔직히 저는 맞장구치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서른 명의 부고를 접하다 보면 저 문장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위인전의 주인공들과 달리 세상으로부터 부단히 외면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 실패했거나 기대한 바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한 이들.” 그 서른 명의 부고가, 그 부고를 작성한 저자의 시선이, 이 겨울 냉소에 빠져 생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내게 말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므로 인간이니까 하는 작은 희망이랄까.
목차를 훑다가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성 정치학>의 케이트 밀렛- 그의 부고를 가장 먼저 읽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기념비적 저작을 남긴 밀렛의 삶은 전반적으로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부단히 외면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 실패했거나 기대한 바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한 이들”에 가장 가까운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밀렛의 성정체성이었다. 그는 컬럼비아대학교 여성운동 콘퍼런스에 패널로 참석했다가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말이 좋아 질문이지 고함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 정말 동성애자인가요? 대답해요!” 밀렛은 훗날 회고록에서 500여 명의 청중이 숨소리마저 죽인 채 자신을 응시하던 그날 그 순간의 풍경을 묘사한 뒤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았다. 파시스트의 칙령처럼 그들에게 양성애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레즈비언이다’라고 말했다.”
케이트 밀렛은 1970년 12월 <타임>을 통해 아웃팅당했다. 그 시점은 당시 페미니즘 기류 상 성정체성이 굉장히 민감하던 때였다. 그즈음 베티 프리던은 “(밀렛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은 여성운동 대변자로서 그의 명분과 이론을 불신하게 하고, 동성애자는 남성혐오주의자라고 폄하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며 레즈비언의 남성혐오 성향이 페미니즘 운동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케이트 밀렛의 성정체성이 공개되면서 밀렛은 당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레즈비언 진영으로부터 비판받았고, 너무 나갔다는 이유로 온건 진영으로부터는 배척당했다. 베티 프리던의 우려대로 그전까지 찬사를 받던 <성 정치학>을 향한 공격이 이어졌다. “읽다 보면 이 책이 여장 남자에 의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등등. 만성적인 양극성장애를 앓던 밀렛은 1973년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되었고, 두 차례 장기 입원했으며 1980년대 중반까지 13년간 리튬을 복용했다. 함께 운동 현장을 누비면서 저널리스트로, 학자이자 교수로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2세대 페미니스트 리더들과 달리 밀렛은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의 성 지향과 정신병 이력이 원인으로 보인다. 밀렛은 그렇게 서서히 잊혔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 정치학>을 비롯해 그의 대다수 책들도 절판됐다. 1998년 밀렛이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의 한 구절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잘 팔아먹을 재주도 없고, 취업할 능력도 없다. 나는 미래가 두렵다. 모아둔 돈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
오늘날 페미니즘에 관심을 둔 이들이라면 케이트 밀렛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땅에서 다른 의미로 밀렛에 견줄만한 삶을 살다간 한 여성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 그 이름은 이문자. 이문자는 ‘여성의전화’의 대모와 같은 존재이다. 그 또한 광의의 젠더폭력 피해자였다가 활동가로 변신한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1977년에 결혼, 83년에 이혼했다.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며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권위적인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했고, 남편은 고부간 갈등을 나 몰라라 했다고 한다. 그는 위자료도 양육권도 얻지 못한 채 시어머니에게서 ‘소박맞은 년’이란 말까지 들으며 쫓겨난다. 그 후 시어머니를 상대로 결혼 파탄의 책임을 묻는 위자료 청구소송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훗날 그는 파경의 사유를 고부갈등 즉 여성 대 여성의 갈등으로 치환하는 데 반대하며 광의의 젠더차별 의식에서 기인한 ‘시집갈등’이라 불렀고, 시어머니 역시 가부장적 사회구조로부터 심리적으로 매 맞는 아내였다고 말했다.이혼 후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다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그. 이문자는 1988년 자원봉사자로 여성의전화와 인연을 맺은 이래 상담부장과 부설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했고 수많은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간여했고, 성폭력 관련 법 제정 등 여러 정책적 진전을 위한 청문회와 투쟁을 이끌거나 동참했다. 그러나 그는 유력 정치인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 혹은 수많은 이들이 함께 이룬 뭔가를 보여주는 돋보이는 자리에 나선 적이 거의 없었다. ‘가난한 독거노인’으로 삶을 마쳤다.
이 두 사람의 삶만 보아도 인생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옳다고 믿는 길을 향해 신념대로 나아갔다. 그들 대부분은 나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살아갔다. 성차별에 맞선 트랜스젠더 과학자 벤 바레스, 다큐멘터리영화 촬영을 하며 함께했던 동물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아예 동물원을 열어버린 샤론 머톨라, 케이스 쇼팽의 <각성>을 읽고 요르단 내 최초의 페미니즘 강좌를 연 룰라 콰워스, 자신들이 사랑한 지역, 조국의 부패를 폭로하는 바람에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살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거나 쓸쓸하게 죽어간 왕슈핑, 이언 피시백….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하고 때로는 참혹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캄보디아에 병원을 세우고 평생 그 병원을 유지할 모금활동을 하느라 언제나 정신이 없었던 첼리스트 의사 ‘비트 리히너’의 삶이나 흑인 여성들에게 육상의 길을 열어준 ‘프레더릭 D. 톰슨’의 삶을 보면 타인을 위한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과 목숨을 구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루 평균 12만 스위스 프랑을 모금해야 했던 리히너는 “입원한 아이들을 안고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그건 저속하고 무례한 짓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모금을 위해 그런 사진들을 찍어야만 했다. 프레더릭 D. 톰슨은 어릴 때 “대학 졸업장은 아무도 못 빼앗아 가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따라, 혼자 잘 살지 말고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았다.
내부고발 혐의로 쓸쓸하게 죽어간 이언 피시백의 친구는 자기의 친구에 대해 “올바름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감각은 도덕적 고립감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윤리 의식이 이 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가 치른 대가 역시 그만큼 컸다. 그는 상처 입은 비극적 영웅”(258쪽)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사회로부터 고립당하더라도 신념대로 올바른 길을 가고자 애쓴 이들, 타협할 줄 모르는 높은 윤리 의식을 지녔던 이들의 삶이 ‘부고’ 기사를 통해 소개된다. 그런데 그들의 윤리 의식이 특별히 높았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 정도의 윤리와 공감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욕심만 채우느라 그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삶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타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로 판가름 날 것”(290쪽)이라는 수토포 푸르워 누그로호의 말도,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믿기 때문에, 내 소명임을 알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도 내게 다른 길을 가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좋은 교육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137쪽)는 룰라 콰워스의 말도 너무나 뜨겁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들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외면했지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키고 끝끝내 살아낸 사람들의 이 부고는 냉소와 회의감에 빠진 내 마음의 온도를 조금은 높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