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드레드 피어스 (2Disc)
토드 헤인즈 감독, 케이트 윈슬렛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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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저자가 쓴 [밀드레드 피어스]. 꽤 오래된 소설이다. 옛날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를 떠올리면 쉽다. 이미 영화화도 한 번 되었다. 아주 오래전 흑백영화로.

[포스트 맨~]은 영화와 책으로 이미 만났었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정수다운 깔끔하고 감각있는 대사를 읽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제목에 낚여서 따뜻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격없는 남녀(년놈)의 개같은 사랑이야기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번뜩번뜩한 대사로 읽을 수 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옛날 타블로이드지의 기자가 와서 번쩍 번쩍 플래쉬를 깨뜨리며 무기같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문장이 "정오 무렵 건초 트럭에서 쫓겨났다."라고 시작하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다. 카뮈도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이방인]을 썻다고 하니 강추해보고픈 책이다. 

배경은 대공항 시대 미국, 글렌데일. 솜씨 좋은 가정주부 밀드레드는 넓은 집에서 깨끗한 앞치마를 두르고 케잌을 굽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성숙하고 예쁜 첫째 딸과 그저 귀여운 둘째 딸을 키우고 있다.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남편은 외도를 하고 그걸 문제삼는 밀드레드와 두 딸을 냅두고 나가버렸다. 아주 나간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감과 가끔을 집을 가지러 그는 집에 들렀고 올 때마다 두 딸은 아주 기뻐했다. 철없는 둘째딸은 별 생각이 없어보였고 거의 사춘기에 들어가는 첫째는 가시돋친 말을 한다.

1930년대에는 위자료 같은 개념이 별로 없었는지 경제가 엄청 어려워서 그랬는지 밀드레는 점점 생활에 쪼들린다. 모든 사람이 그랬지만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은 더 절박해지는 법이다. 밀드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서 타이핑같은 일을 주선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직업소개소에서 밀드레드에게 소개해준 일은 부잣집 가정부 같은 일 같은 것 뿐이었다. 모두가 '그런' 일이 밀드레드에게 어울릴 것이라 말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대저택에 면접을 보러 간다. 집사같은 사람은 나오자마자 가정부 면접을 보러 왔으면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천박한 부잣집 여자는 내가 앉으라면 앉고, 자기 집에 입주해야 하며 밀드레드의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한다. 역겨움을 느낀 밀드레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바로 들어간 음식점 겸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은근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농을 치는 손님이나 까달쟁이들을 상대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준비했다. 대공항 시대에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식당까지 내는 밀드레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점점 돈이 생기고 자유가 생기는 밀드레드. 예전 남편의 사업파트너(남편을 배신한 전적이 있는)의 도움으로 회사의 구색을 갖춰나가고 매력적인 애인까지 생긴다. 몬티 베라곤 역은 가이 피어스가 맡았는데 나쁘고 매력적인 남자 역할로 최고. 귀족적이고 퇴폐적인 매력을 마구 내뿜는다. 그래서 둘째 아이가 쓰러지던 날도 정신없이 그와 빠졌던 거겠지. 결국 귀여운 둘째 아이는 비극을 맞이하고 재능있는 첫째딸과 힘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

베다는 어려서부터 약간 되바라진 아이였는데, 밀드레드는 자신이 예전에는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자신의 예전 모습을 발견하고 베다를 적극지원한다. 약간 압박이 있었을 게 뻔한 이 모녀 관계는 거의 전쟁이다. 게다가 애인 몬티와도 말썽이 생긴다. 성공한 폴로 선수이자 농장 사업가였던 몬티는 대기업의 공격에 사업이 쫄딱 망하고 어설픈 자격지심인지 진심인지 잘 나가는 밀드레드와 싸움이 끊임없다. 결국 둘은 미친듯이 싸우다 관계를 끊낸다. 실은 밀드레드가 베다의 피아노를 사주지 못한 일에 스스로 마음을 다 잡은 것이긴 하지만. 

밀드레드는 그때부터 일과 가정만을 위해 열심히 산다. 하지만 적당히 재능이 있는 욕심많은 베다는 열일곱살에 피아노를 그만두기로 하고 모든 것에 다 성질을 낸다. 예전부터 엄마가 웨이트리스를 하는 것부터 못마땅했는데 자신의 재능도, 구질구질한 글린데일도 다 싫어서 밖으로 마구 나돈다. 결국 못된 베다는 부잣집 남자 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속이는 일로 모녀는 크게 말다툼을 하고... 원래 엄마를 경멸했던 베다는 그 일로 집을 나가버린다.

하지만 야망이 큰 재능있는 베다는 결국 성악가로 성공하고 다시 만난 몬티와도 결혼을 하는 등 밀드레드의 인생에는 이제 고생 끝 낙이 오는 것 같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르와르 장르가 원작이라 그런지 결말은 몹시 끔찍하다. 배우의 연기력과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커버가 안 될 만큼. 작품이 주는 교훈이 뭔지를 모르겠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마라? 여기서는 금발이겠지만. 다만 주인공 밀드레드의 강한 생활력과 생명력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예전에 [포스트맨~]의 후기를 읽었더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이 소설의 비화같은 게 있었다. 작가는 그 떠들썩한 사건을 접하고 자기 동네 주유소에 일하던 여자를 보고 "왠지 이런 여자가 그런 일을 한 것 같군" 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진짜 범인이었다는 일화가 실려 있었다. 밀드레드 피어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아낌없이 주는 생활력 강한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이야기. 물론 배신하는 당사자들은 그녀에게 "너는 돈으로 나를 지배하고 잡아두려 했잖아"와 같은 말을 했지만. 어쨌든 베타 이 X는 시청자 입장에선 이해 못 할 순도 100%의 '쌍년'인 것은 분명하다. 

뭐 사실 르와르, 추리 영화같은 데서 교훈 따위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차 있어!' 같이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보고 부르르 떨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작품이다.  


* 사족1 : 장녀 베다 피어스가 소프라노가 되어서 공연하는 노래는 조수미가 불렀다는 야로.
* 사족2 :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완벽했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연기 구멍은 찾기 힘들다. 아역 배우까지도. 드라마지만 영화같은 작품.
* 사족 3 : 보다가 포기한 미드 [길모어 걸스]가 다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드지만 미드같지 않은 미드는 시종일관 내가 어릴 때 '미미'의 머리를 빗어주던 아름다운 모녀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10대 미혼모가 이렇게 아름다우려면 그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나보다 똘똘하고 얌전한 여자아이를 낳으면 된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며 괜히 성내다 그만 본 드라마. 생각해보면 [소공녀]와 [작은 아씨들]같은 따뜻한 인성과 감성을 가진 여자 아이들이 나오는 책을 조금 읽다가 휙휙 던져버렸는데 사람은 취향도 별로 바뀌지 않는다. 
* 사족 4 : 30년대 복식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성 패션을 보는 것 만으로도 최고. 불편하긴 하지만 블라우스나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으면 저절로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속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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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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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읽지 마셔요. 절대 절대!!)


요시다 슈이치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아주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감정 '뚝뚝'이 흐르지 않는 문체에 예리하면서도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서늘한 느낌도 없다. 하드보일드 문체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도 과하면 지겹다. 너무 '가오'잡는 거 아냐? 같은 괜히 삐뚤어진 마음도 들기까지 한다. 일부러 찾아본 건 나지만.


'이 사람이라면 어떤 시선으로 볼까?'라는 질문이 항상 드는 작가다. 특히 감상적이지 않은 '악인'이라는 제목에 요시다 슈이치라면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 정의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책을 집었다. 책을 덮고 나는 세상에 찌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쏘시오패스 같은 걸 생각했다. 미드를 끊어야 하나.



---------------스포일러 있는 줄거리


이야기는 263번 국도 미쓰세 고개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이 고개는 예전부터 음침하고 기분 나쁜 소문이 끊이질 않았지만 고속도로에 비하면 요금이 적어 이 루트를 선택하는 사람이 꽤 있다. 고개에는 주로 귀신을 봤다거나 하는 괴이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낮이라도 나무에 둘러쌓여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요금을 생각하면 꾹 참고 갈만한 곳이었다.


여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이시바시 요시노라는 보험사에 다니는 20대 여성.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자 경찰은 빨리 조사에 착수한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사택에 거주하면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요시노는 살해된 밤, 친한 동료 2명에게 클럽에서 만났던 부유한 집 자제인 날라리 마스오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게다가 그 마스오는 하필 행방불명 상태. 강력한 용의자 마스오는 방송에서도 저격당하고 형사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다.


참고인 진술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된다. 일단 그녀와 친한 동료 2명, 마코와 사리에게 진술을 받는다. 순진한 마코와 적당히 연애를 해본 사리의 기억은 다르다. 인간 관계는 무척 상대적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마코에게는 요시노는 미주알 고주알 거의 모든 걸 말했지만 막상 취조 비스무리한 걸 당하자 마코는 사건 있던 날 있었던 평이한 이야기만 한다. 사실 마코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왜 그런지 요시노한테 그 날 있었던 일 정도만 얘기를 하고 끝을 낸다.


아무리 둔한 여자라도 나쁜 직감은 대체로 잘 맞는다. 요시노는 그 날, 두 동료한테는 날라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사실 그 날 그녀가 만나러 간 남자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유이치였다. 부잣집 날라리는 답장만 꼬박 할 뿐, 먼저 만나자는 얘기가 없어 자존심이 상하던 중에 손쉬운 남자 유이치를 만나 어느 정도 목적(?)을 취하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요시노는 그날 밤 우연히 유이치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마스오를 만나고 바로 눈 앞에서 유이치를 물 먹이고 마스오의 차에 올라탄다. 마스오는 하필 그 날,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았다. 스스로 '싼티'나는 여자가 취향이라고 했지만 저녁으로 마늘을 먹고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는 요시노가 너무 짜증난 그는 "어디서 마늘 냄새 안나?" 냐며 모욕감을 준다. 하지만 요시노는 껌을 씹으면서도 계속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술을 마시고 운전하고 있던, 짜증이 극에 달한 마스오는 왠지 이런 여자가 살인을 당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너무 화가난 나머지 미쓰세 고개에서 요시노의 등을 뻥차면서 떨궈 버린다. 


이게 사건의 정황이었고 당황해서 잠적한 미스오가 다시 잡혀서 수사에 혼선을 빚기까지 사건의 정황이다. 소설의 반 이상은 살해된 그녀가 진짜 만나려고 했던 유이치를 쓰는데 할애한다. 유이치는 묘하게 남자다운 구석은 있지만 말수도 없고 음침한 남자이다. 게다가 자신과 비슷한 교육과정을 밟고 오지 않은 유이치와는 할 말이 더더욱 없다. 이 따분한 남자와의 만남은 결국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간다. 평범한 여자인 요시노는 생각보다 깜찍한 모양새로 남자들과 만났고 그녀와 비스무리한 경험을 했던 남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뒤흔들까봐 무서워한다.


가해자는 여전히 잘(?) 살아간다. 조용히 은밀하게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일도 계속 이어간다. 친구도 말수도 아주 적은 이 젊은 남자는 실은 아주 외롭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도 버림 비스무리한 것을 받았을 때도 늙고 병든 조부모의 팔다리 노릇을 할 때도 말없이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그를 취직도 시켜주고 애정있게 봐주는 외삼촌도 여자도 만나지 않는 그를 안쓰럽게 볼 뿐이다. 거의 세상과 교류없이 사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방식은 그렇게 타당하지 않다. 인터넷과 매춘 등으로 여자를 만나지만 여자가 생각없이 뱉는 달콤한 말에 쉽게 의지하고, 스치듯 다른 남자를 떠올리는 말에는 크게 분노하는 아주 외로운 남자였다.   


외롭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서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된다해도,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에 끌리는 법이다. 따뜻한 곳으로 가기 위해 현실의 일이나 이성 쯤은 쉽게 마비된다. 암울할 일만 더 심해질 그의 삶에 나타난 한 뼘의 따뜻함에 그는 무모한 도주를 결심하게 된다. 

 

--------------------------- 대충 줄거리 끝.



유이치의 외로운 삶은 그를 결과적으로 괴물로, 악인으로 만들었지만 온전히 자신만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방임된 삶, 그를 같잖게 보는 시선,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격. 하지만 유이치는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원했고 온기가 있는 곳에는 무모하게 뛰어드는 면도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유이치이지만 '악인'은 꼭 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살해된 요시노, 건방진 양아치 마사오 같은 평범한 이들은 쉽게 유혹에 빠지고 순간적으로 쉽게 악해졌다. 또 유이치를 버린 생모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버린 직업 여성,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은근히 유이치에게 기대고 마는 할머니도 어느 정도 유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과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누구한테는 기분 나쁘고 싫은 사람이 누구에게는 귀엽고 좋은 사람이 된다. 살해된 요시노는 부모에게는 고명딸이지만 만남 사이트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는 굉장히 귀여운 여자, 마스오에게는 천박한 여자애, 마코에게도 만남 사이트같은 데서 남자를 구하는 애라는 최종적인 평판을 얻는다. 또 나중에 그와 도주를 결심하는 여자 미쓰요는 쌍둥이 동생에게는 왠지 섬뜩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겉으로는 성숙한 장녀언니고 유이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뜻한 여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유이치는 친모에게는 돈이나 뜯는 나쁜놈, 할머니에게는 왠지 여성의 본능을 일으키는 사랑하는 손자, 요시노에게는 왠지 기분 나쁜 놈, 미쓰요에게는 눈물 짓게 만드는 아련한 사람.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지만, 약인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빼면 악인이다. 사실 징글징글한 악인만 아니면 대체로 처음에는 약인이었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악인으로 변한다. 점 하나를 빼듯이 자제심을 빼버리고 나면.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약하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도저히 그 남자에 관한 말은 젊은 형사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면 자기도 요시노 같은 부류의 여자로 보일 것 같았다. 만남 사이트 같은 데서 남자를 구하는 여자의 친구.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젊은 형사에게 말할 수 없었다. (p.95)

미아는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아 같은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나 같은 남자가 20년이나 잊지 못할 말을 건네주는 여자였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p.278)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p.439)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p.448)

그런데 그 사람, 제 예상과는 달리 "원치 않는 돈을 뜯어내는 것도 괴로워"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안 뜯어내면 되잖아"라며 웃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 라고 하더라고요.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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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30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뽈쥐님, 좋은 저녁 되세요.^^
 
언틸유아마인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일화 1> 방학 때마다 우리집 세 모녀는 같이 주부를 위한 아침 프로를 즐겨봤다. (요즘은 '실제상황'에 흠뻑빠졌다.) 주부들이 좋아하는 주제는 요즘과 변함이 없다. 살림의 달인이 될만한 유용한 살림살이 방법, 시집 스트레스 토로, 바람피는 남편, 말 안 듣는 애들... 최대한 자극적인 문구로 시청자를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잡아 놓고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별 것(?) 아닌 그런 이야기가 아침 한 시간 정도 방송된다. 특히 기억에 남는 제목은 '세번째 부인의 눈물'. 하긴 주 5일 매일 한 시간씩 시청률을 온전히 유지시키는 것도 힘든일이다. 이 좁은 나라에서 매번 쇼킹한 일이 일어날리도 없으니까.


완전한 타인의 인생이라고 '에이 이번 건 별로네~', '완전 낚였구만!' 같이 신나게 입방아를 함부러 찧으면서 마른 빨래를 열심히 접으면 아침 일과가 대충 끝나곤 했다. 


이것도 꽤 몇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때 였으니 거의 십년 전일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한선교와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핫 했던 정은하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한동안 프로젝트로 난임부부 클리닉을 지원해주는 코너를 꾸렸다. 요즘이야 인공 수정이니 뭐니 가격도 많이 내려가고 비교적 흔한 수술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쉬쉬하는, 생소한 일이었던 것 같다. 광고인지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술비를 지원받은 몇 커플이 사생활을 어느 정도 공개하고 힘겹게 아이를 갖는 모습이 몇 주에 걸쳐 방송을 탔다. 나는 별 생각없이 담배 피는 남편 하나에 뜨악했고, 엄마는 혀를 찼다. 여자가 고생을 얼마나 하는데 지는.. 이라며 인상을 팍 찌푸리던 엄마 뒤에서 난데없이 성이 난 언니 왈,


"세상에 사랑을 못 받고 자라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몸 고생 마음 고생하면서 자기 애를 낳아야 돼? 그냥 입양하면 서로 좋은 일이잖아."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로취, 그로취를 연발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갑자기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성을 팍 냈다. 그 후에 따발따발 반박이 이어졌는데 기분이 상한 엄마의 얼굴이 너무도 험악해서 그날 분위기가 아주 엉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논리로는 완벽한 언니의 승리. 엄마는 "임신을 하고 싶을 때 못하면 여자로서 자괴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에 왜 여자로서의 가치를 거기서 찾지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사실 지금도.  


일화 2>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유모'대신 우리를 봐줄 파출부 아주머니를 고용했다. (어느 표현이 정확한 줄은 모르겠지만 왠지 유모는 낯간지럽다. 실제로 젖은 엄마가 다 먹였으니.) 아이보는 일은 중노동이라 아주머니는 자주 바뀌었다. 가끔 아무 말없이 안 나오거나 끼니도 안 챙겨주는 책임감 없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손녀를 잘 돌보는지 감시하러 자주 오는 울 할머니 때문에 울분을 토하며 그만두시는 분도 있었다. 그만큼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란 상대적이고 어느 시대나 일이나 가정이나 워킹맘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물론 그 분들도 힘들게 일하셨겠지. 애 봐주는 일이 보통 까다로운 일도 아닌데. 


그 많은 아주머니 중에서도 잘 해줬던 아주머니는 생각나는 법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만 내 기억 속에 남아 나를 돌봐줬던 사람하면 지금도 그 분만 딱 떠오른다. 왜냐면 그 분은 언니랑 나랑 사이에서 나를 유독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유치원을 늦게 간 나는 아주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맞벌이 자녀가 그런 경향이 있듯이, 나는 항상 조금씩 주늑이 들어있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애정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맙고 힘이 나는 일이다. 나도 그 아주머니를 참 좋아했다. 


최근에 엄마한테서 들은 얘긴데 그 분이 나를 너무 좋아해서 어느 날, 나를 하루 데리고 가서 자도 되냐는 청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도 순진했는지 그냥 날 예뻐해줘서 고마워서 그래도 된다고 흔쾌히 승낙했는데 그 얘길 들은 할머니가 노발대발해서 다시 물렀다고 했다. 엄마도 순간적으로 무서웠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한테는 아기가 없었다고 했는데 남편 쪽이 문제가 있다가 아예 판정을 받은 상태였단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나는 시큰둥하게 모든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하여튼 할머니가 유난스럽긴 했구만, 하고 혼자말만 하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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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냐하면 이 작품이 스릴러인 까닭에 자칫 스포일러를 흘릴까봐서다. 간이 원체 작아서 공포같은 걸 잘 보지도 못한다. 추리소설 매니아한테는 본 작품의 트릭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임신에 대한 미저리같은 열망을 알아야 몰입해서 공포를 배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가족 간의 끈적한 관계를 별로 안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용보다는 설정이 무섭고 몰입이 힘든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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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이 살아 돌아왔다!
독자를 속이는 맥거핀 기법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

클라우디아는 간절히 바라던 아기를 임신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멋진 집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수상한 가정부 조가 그녀의 삶에 끼어든다. 조는 장차 태어날 아기를 돌보며 클라우디아를 도와주러 왔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조가 미덥지 않다. 조가 자신의 침실에 있는 모습을 보고 클라우디아의 불안감은 점차 두려움으로 바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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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출판사에서 뒷 표지에 쓴 줄거리. 저자 소개에 맥거핀 기법을 설명하면서 던진 '떡밥' 이야기 때문에 머리를 많이 쓰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냥 후루룩 읽어 버렸다. 원래 추리 소설을 읽는 맛이란 게 내 뒤통수를 얼마나 퍽퍽 때려줄 지 기대하는 맛도 있으니깐. 머리 굴리지 않고 열심히 읽은 덕에 마지막에 몰아치는 반전에, 반전에, 반전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추리소설 매니아라면,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겁이 많아 추리소설을 못 읽는 탓에 마지막 페이지는 숨가쁘게 넘어갔다.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지만 킬링타임용으로 하루이틀이면 읽을 수 있다. 문체도 무겁지 않아 술술 읽히는 편이다. 비교적 남자보다는 여자가 조금이라도 몰입하기 쉬울 것 같다.


클라우디아, 조, 로레인 경장 3인 여성의 서술 시점을 열심히 따라가보면 추리극 중간 중간 여성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텁텁함 심정 묘사도 아주 잘 된 편이다. 작가 사만다 헤이즈는 아카데미형 작가라기 보단 체험형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체험형 작가만이 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글을 오랜만에 읽어서 기뻤다.  


워낙 드라이한 인간이라서 그런지 인생경험 부족인지 아이한테 미친듯이 집착하는 것 자체가 몹시 의아스러웠다. 그래서 읽는내내 위에 일화가 생각이 났다. 아직도 내 식견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가지만 두 번째 일은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이래서 남의 애는 봐줘봤자..라는 거겠지?) 아주머니께 내가 너무 죄송하다. 


*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해두고 싶다. 그 아주머니는 그 일로 우리집 일을 그만두시진 않았다. 그만두고도 우리집 한 번 놀러 오신 적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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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28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뽈쥐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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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7층]을 읽고 다시 선택한 책. 손가락 살점을 물어 뜯어 도망치듯 아빠에게 갔을 때 냉담했던 아주 쿨~ 한 반응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북유럽이라도 부녀관계가 이렇게 이성적일 수가 있단 말이냐! 가족이 너무 끈끈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여기가 이상한 건가 했던 반응은 의외로 타당한 거 였다.


아무리 독립을 주장하는 나라들도 급한 상황에서는 손주도 기꺼이 봐주고 독립한 자식 집에 쳐들어(!)가서 빨래도 척척, 요리도 후루룩 해주는 게 꽤 만연한 정서였던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우리나라 엄마들이 자식한테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작가 오사 게레반의 그림은 여전히 투박하다. 글 또한 너무 솔직해서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오사 게레반의 솔직함은 자신도 어느 정도 구원한 것 같고 독자의 지지도 많이 받는 것 같다. 일단 나는 지지! SNS에 자신의 순간적인 우울증을 드러내는 내 감정 스펀지들과는 다른 솔직함이다.

[그들은 등뒤에서는~]은 오사 자신이 어린 시절 '원가족'(이런 표현이 맞다면)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힘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굳이 거창하게 심리학 이야기를 할 것도 없지만 경험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의 애착 관계나 충분히 사랑받은 경험이 중요하다는 건 잘 안다.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별 큰 사고 없이 자라면 다행인데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행한 가정이 워낙 많기에 이런 가정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져야 될 것이다. 


'정서적 방치'


생각보다 이런 경우 많다. 가정 폭력이 꼭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닌 언어 폭력도 포함하듯 이 또한 학대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인터넷 상에 이런 글, 생각보다 많이 올라온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래도 너희 부몬데..." 같은 인정적(?) 비전문가적 조언도 아직 많다. 이런 종류의 학대가 물리적인 폭력이나 굶기는 것과 같이 생명을 당장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데도 오래 걸리고 막상 가해자 쪽인 부모는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드러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생명을 위협하는 학대도 나쁘지만 이런 정서적인 학대, 방치도 나쁘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니.


오사는 운 나쁘게도 도리는 다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는 부모를 만나서 그들의 등 뒤의 냄새를 맡고 자랐다. 인정과 애정을 바랐던 오사는 뭔가를 잘 한다는 칭찬에 꽂혀 모든 걸 스스로 깨치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것이 상식이었던 오사는 친구네 집에가서 큰 충격을 받는다. 숲 속에서 커다란 뱀을 만나서 둘이 도망치다가 엄마를 만나서 마음껏 울음을 터뜨리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나서 오사의 상식은 깨진다. 뭐 뱀을 만난게 대수라고! 하지만 친구의 엄마는 친구를 끌어안고 달래면서 뱀이 누구보다 더 무서웠을꺼야~ 라며 간질간질한 말까지 해준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며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세요~'같은 말에 그럼 나는 못하나?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어린 오사나 아동법이 점점 강화되면서 자기보다 학대당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불행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오사는 관심을 달라고 호소도 해보고 울부짖어도 보고 난리 부르스를 쳐봐도 오히려 부모는 겁을 집어 먹고 거리를 둘 뿐 더 가까워지지 않는다.


오사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아주 약간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 했다. 굶주린 영혼은 역시 어떻게 해도 잘 채워지지 않는다. 오사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섹스를 한다. 상대방의 영혼없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우연히 뱉은 '사랑해'는 단비와 같아서 오사는 그 말에 집착을 하고 '피곤한' 여자가 되어간다. 왜 사랑해? 빨리 또 말해줘, 어서! (전 작품 [7층]에 나와서 손가락 살점을 물어뜯긴 일이 단 한 페이지로 나온다.)


오사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절대 먼저 오지 않는 부모에게 전화를 하고, 병원도 주기적으로 가보고, 술과 클럽을 모두 끊고 끝내 끔찍한 결과를 맞았던 스스로를 고립시켜보는 실험까지... 


모든 시도의 결과로 자신이 얼마나 특이하고 슬픈 환경에서 성장했는지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사는 현재, 다행히 남편을 좋은 사람을 만나 귀여운 아이도 둘을 낳고 열심히 사랑을 주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어릴 때의 상처는 깊어질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손주에게 여전히 관심조차 주지 않는 부모, 게다가 아이들의 방을 꾸미면서 자신이 쓰던 어린 아이 침대에 온통 손톱 긁은 자국으로 지저분했던 걸 의아하게 생각했던 기억 등이 갑자기 그녀의 일상을 뒤흔들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돼!"라는 각성이 든 그녀는 또 상담센터로 전화를 한다. 지금은 조금 흔해진 '정서적 방치'라는 진단을 내려준 상담사를 믿고 오사는 열심히 치료를 하고 스스로 상처받은 기억의 시점으로 가서 어린 오사들을 안고 데리고 가서 휴식을 취한다. 


물론 그 과정은 아주 힘들었지만 부모가 자고 있었을 때 몰래 그들의 등 뒤로 가서 좋은 향기를 맡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서는 아주 아름다운 발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들은 전혀 기억이 없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부모 자격증'이라도 발급해야 하는 건 아닐까? 모든 상처받을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은 '제니'다. 쓰다가 작가의 자전적인 얘기라고 해서 그런지 오사라고 해버렸다..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오늘 학교에서 티나가 나한테 침을 뱉었어.. 여기, 내 팔에다가."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그랬을 리 없어."
"정말이라니까. 선생님한테도 말했는데 내 얘길 안 들어주셨어."
"어머, 제니! 그런 거 가지고 선생님을 귀찮게 하면 어떡하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으실텐데!"
"....?"
"그 애가 정말 너한테 침을 뱉었다고?"

갑자기 내가 진짜 그런 일을 당했던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설사 그렇다고 치자. 네가 먼제 뭔가 잘못했으니까 그 애가 그랬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티나가 나한테 침을 뱉은 게 사실이더라도 어쨌든 잘못은 내게 있다는 얘기였다.(37-38p)

나는 저주스러울 만큼이나 늘 다른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했다.
한밤중에 깨어나면 나는 엄마 아빠가 깊이 잠들었을 걸 알고 아주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엄마 아빠의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서는 그 사이에 누웠다.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 친밀감의 욕구를 채웠다. 에너지를 충전하듯이.
몇 해 동안이나 나는 거의 매일 밤 이런 행동을 반복했다.
엄마 아빠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74-75p)

하지만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한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그가 처음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이 말은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의 세계가 통째로 뒤집어 엎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기 위해 나는 20년이란 세월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야 드디어 만났다. 날 사랑해 줄 사람...
(중략)
의지할 데 하나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난 그저 매달리기만 햇다. 매달려도 잘 안 되자..
... 나는 그 주문을 외워줄 새로운 남자를 찾아 필사적으로 해매 다니기 시작했다.
이 남자 저남자 닥치는 대로 잠자리를 같이 했다.(123-127p)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나란히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점점 더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학대 받는 어린 아이가 관심을 갈구하며 내 안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매일매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가 내가 갖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아물었던 상처가 또다시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안에서 울부짖는 아이가 차츰 나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나는 끝내 깊은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163-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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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낸시 마이어스 감독, 로버트 드 니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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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가 되었던 영화를 조금 늦게 봤다. 좀 그런 편이다. 하물며 좋아하는 감독 낸시 마이어스 작품이었는데도. 모험을 못하는 통에 영화 선택마저 느리다. 평이 좋았던 만큼 비꼬는 마음만 없다면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본 사람들 대부분이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인건가..."라는 식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걸로 안다. 나도 영화 보는 내내, 이거 영화라서 이런거 아니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던지. 내용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동화같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40년 동안 일을 하고 부사장으로 지낸 사람이나 되어야 젊은 이들과 섞여 '인턴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지... 조금은 씁쓸했다. 미국이 우리나라와 인턴에 대한 의식차는 있을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사회가 팍팍하다 보니 패션부터 시작해서 따뜻함을 찾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가 만들어 준 것 같은 따뜻하고 소박한 니트, 친한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밥이나 한 번 먹자의 킨포크 스똬일 등등. 나만해도 거의 매일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따뜻한 식사 한 끼를 침을 흘리면서 보고 있으니.



70세가 된 벤은 직장을 은퇴하고 무료한 생활중에 구인 전단지를 본다. 60대 이상에 정리 정돈을 잘 하는 인턴을 구한다는 것. 지원서는 자신의 동영상을 찍어서 유투브에 업로드 하라는 조건이 있고 파일은 avi 형식이니 뭐니 같은 알 수 없는 조건을 적어 놓았다. 벤은 출근할 수 있는 어딘가가 있다는 걸 순수하게 기뻐하는 인쇄기업의 전 부사장. 게다가 정리 정돈은 자신이 있으니 자신에게 적격이라 생각했다. 꿋꿋하게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간다. 멀끔한 수트를 입고 찾아간 곳은 30대 젊은 CEO가 운영하는 의류업체. 자신있는 태도와 튼실한 체력을 가진 벤은 금방 합격한다.


부서는 비서실. 창업 1년만에 2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한 사장은 보기보다 까탈스럽다. 하지만 전 관리직으로 있었던 벤에게는 깊은 통찰력과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무사히 넘어간다. 하루는 운전기사 술을 마시는 걸 보고 그걸 무마하면서 이제 픽업기사로 까지 있게 되어 사장의 개인사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 벤. 


일에서 완벽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줄스도 사업 성공으로 인해 유능한 마케팅 담당자였던 남편이 가정주부로 있으면서 죄책감을 갖거나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전업주부들한테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면서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 거의 아빠 나이인 벤은 명쾌하게 충고도 하고 그녀를 도우면서 신뢰를 쌓아간다.


특히 젊은 여자 CEO를 믿지 못하는 주주 때문에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게 되면서 남편 대신 벤과 줄스는 다른 주까지 출장을 떠나고 줄스는 남편이 바람피는 사실을 고백하며 고민상담을 한다. 하지만 전 주에 이미 줄스의 딸을 데려다 주면서 밀회를 목격한 벤은 줄스의 고백에 한 시름 놓고 줄스에게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말라며 위로한다. 그리고 사별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털어 놓으며 더 가까워진다. 정말 인상 깊은 대사는 "그녀는 정말 인생의 모든 일을 쉽게 했어요." 그러면서, 혼자 묻힐 것을 두려워 하는 줄스에게 자기 부부의 자리 옆으로 오라는 제안까지 한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이라도, 출장에서 아무리 나이 든 남자라도 호텔방에서 대화하는 건 아니겠지? 것도 한 침대에서!! 이것은 영화니깐.. 영화니깐 그런 상황인 거겟지?)


줄스가 가정과 회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결국 줄스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물론 새 삶을 시작한 벤도 예쁜 맛사지사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로맨틱 코미디인 만큼 관전 포인트는 역시 개그 에피소드.


1. 일하는 중에 벤을 상대로 영업하는 적극적이고 섹시한 맛사지사와 배려돋는(!) 동료들의 에피소드.  

2. 동네에서 끼를 부리는 부인("늦으면 안되요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요~")과 맛사지사 사이에서 곤란한 벤. 그리고 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쪽의 화끈한 의사 표시도 짱웃김. (힌트 : -_-ㅗ)

3. 첫 데이트를 장례식장 참석으로.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에서 관계 후 혈압 체크부터 하던 사랑스러운 커플이 떠올라서 빵터졌다. 물론 웃을 일은 아니지만. 


로버트 드니로의 멋진 할아부지 간지가 나는 수트 패션과 고풍스러운 필기구를 정돈하는 모습도 관전 포인트 중에 하나다. 이러니 후줄한 20대들도 이 멋진 할아버지한테 패션 조언을 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따름이다.


한 때의 부사장에서 인턴으로, 이게 미국이니까 가능한 이야긴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훈훈하고 재밌는 이야기 한 편을 볼 심산이라면 추천한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재미로는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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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1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뽈쥐님, 좋은 토요일 저녁 되세요.^^

뽈쥐의 독서일기 2016-01-16 21:0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님도 주말 풍요롭게 보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