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터문 에디션 D(desire) 4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함유선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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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는 내가 애증하는 감독이다. [비터문]을 보고 감독을 열심히 찾아보니 예전 EBS에서 본 주말의 명화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영화 [테스]를 찍은 것도 알았고 앞으로 영원히 미국에 갈 일을 없을 거라는 이유도 알았다. 바로 스스로 일으킨 엄청난 스캔들 때문이다. 미성년 관련 범죄에 극히 엄격한 미국에서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기소됐는데 유럽에서는 자신들의 위대한 감독이라 송환 거부중. 유럽이 더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터라 무진장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미운 마음으로 본 [차이나타운]도 어머어머하고 감탄을 내지르게 하는 '악마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니 내주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게 뭐 유럽만의 일인가. 쩝.


내가 베스트로 뽑는 로맨틱 코미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휴 그랜트가 쑥맥 귀염둥이로 나와서 첫눈에 반한 여자와 정사를 치르면서 "허니문은 왜 허니문이라고 할까요? 꿀처럼 달콤해서.. 아니면 처음 본 신부의 하얀 엉덩이가 달같아서...?" 같은 대사를 친다. 하지만 [비터문]에서는 결혼 생활의 권태를 이기려 미지의 땅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부부로 나와서 좀 혼란스러웠다. 영화는 원작보다 오히려 임팩트 있고 깔끔한 결말이지만 원작의 결말은 더 끔찍하다. 영화는 당시 선정적인 장면으로 논란이 되었다는데 흡사 파밀라 앤더슨의 분위기를 풍기는 레베카 역의 배우는 감독의 실제 부인이라니, 역시 감독 이 자식.. 보통 정신 세계를 가진 놈은 아니다. 보통 남자라면 부인한테 그런 수위로 영화를 찍게 하긴 어려울테니.


영화의 끔찍한 선정성을 뒤로하고 내용은 오히려 더 끔찍하다. 허니문의 꿀이 다 떨어지고 난 후, 남은 생을 비터문의 지겨운 생활로 살아간다니. 게다가 이 공포는 꽤 현장감과 현실감이 있다. 결혼한지 일 년도 안 된 친구는 벌써 '내가 미쳐서 결혼했다'라는 말도 할 줄 알고... 나도 항상 권태의 문제로 헤어지니... 단물을 다 빨아먹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다. 특히 취미도 계층도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기가 더 빨라질테고.


원작 소설 [비터문]에서 사랑에 빠지는 단계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루주아 계급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프란츠는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댄서 지망생이자 미용사 레베카에게 홀딱 빠지고 완전 사랑꾼인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중심이 되서 돌아가는 것처럼 밤에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자신의 부루주아 친구들 앞에서 생생한 매력을 뽐내는 레베카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찰나의 순간이라서 둘은 타계책으로 온갖 음란하고 지저분한 행위를 다 해보지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둘이 깔끔하게 쿨하게 헤어지면 좋았으련만.


미련이 남은 레베카는 프란츠가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하고 자존감을 짖밟아도 생기를 점점 잃어가면서도 그의 곁을 떠날 줄 모른다.그런 레베카를 프란츠는 미워해 사람들한테서 고립시키고 심지어 낙태까지 한 레베카를 여행을 가자고 하면서 공항에서 몰래 도망치는 만행을 저지른다. 말로만 부루주아인 그는 레베카가 없어진 사이에 전에 없던 자유를 누리며 여자들을 마구 옮겨가며 신나게 놀다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러자 갑자기 병실에 나타난 레베카. 태양에 살결을 그을리고 더 예뻐진 레베카를 보고 순간 기대를 했던 그였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그녀에게는 경멸로 대할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레베카도 증오의 칼을 갈았다. 프란츠가 관심을 돌린 사이 침대의 조임을 풀러놓고 손을 잡으러 점점 다가오는 프란츠를 그대로 떨어지게 만들고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할 몸으로 만들어버린다. 프란츠는 병원의 부주의로 고소하고 그 댓가로 연금을 받게 되고 레베카는 그와 결혼하여 평생 그를 돌보게 된다. 한을 품은 레베카는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고 불구가 된 그를 오물로 방치하거나 그의 앞에서 남자들과 심지어 그의 아들과 관계를 갖는 등의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인도로 가는 크루즈를 타고 디디에와 베아트리스 부부를 만난다.


불구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남자 프란츠는 레베카를 미끼로 뭔가 불안정해 보이는 디디에를 꾀어 사일밤에 걸쳐 자신들의 위에 나열한 히스토리를 들려준다. 디디에는 처음에는 굉장히 불쾌해하지만 싱싱하고 야성적인 매력을 가진 '처음보는' 관능적인 여자 레베카와 그저 지적인 매력을 가졌을 뿐인 아름다운 편인 베아트리스와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하얀 아내의 피부는 그저 배멀미로 허옇게 질린 것처럼 보인다. 관계의 개선을 위해 미지의 땅인 인도로 가서 지루한 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맞아보고자 한 그들은 결국 이상한 부부의 꾐에 넘어가 완전히 틀어진다.


영화는 아주 임팩트 있게 한방을 탕- 쏘지만 원작은 오히려 더 끔찍하다. 나름 반전이 될 수 있으므로 쓰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욕망(Desire)의 D를 따서 D에디션 시리즈로 낸 책 중에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외설시비에 걸렸던 만큼 원작은 정도가 더 심하다. 어떤 장면은 정말 너무 더티해서 토가 나올뻔 했다. 하지만 성애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이니 마음이 열린 분들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서로 학대하고 짓밟고 으르릉거리는 장면 묘사도 뛰어나다. 작가 소개를 보니 경제학 에세이로 경제학 도서상도 탔다고 하니 참 특이한 이력이다. 아카데미형(?) 작가 치곤 표현도 생생하고 소위 먹물 냄새라 하는 것도 별로 나진 않는다. 프란츠가 지가 부루주아라고 잘난 척 할 때만 빼고. 


책이 가볍고 작아서 휴대는 용이하지만 넘기는데 좀 불편한 게 단점. 번역은 꽤 좋은 듯.  

  

아직 결혼을 안 해봐서 허니문이든 비터문이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만 남녀의 애정만큼 변하기 쉬운 건 없다는 그의 관점에는 동의한다. 현대 결혼관이라는 '낭만적 사랑'이 어떤 면에서 얼마나 허상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아예 결혼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듯도 싶지만. 인생에서 단 맛과 쓴 맛은 있지만 특히 애정하는, 단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과 애정이 다 떨어졌을 때 지지부진하게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우리의 스테레오 타입 중에 서양 사람들은 애정 떨어지면 자녀를 생각하기 보단 이혼을 한다는 식의 이미지가 박혀 있는 것 같은데 얘들도 헤어지는 게 그렇게까지 쉬운 문제는 아닌가 보다. 뭐는 안 그러겠냐마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아름다운 시간이 계속 되는 삶은 없을까. 매순간이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내 주위로 지구가 팽글팽글 도는. 이런 권태를 너무도 두려워한 사랑할 자격없는 두 남녀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를 계속하는 안타까운 어리석은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설명할 것도 없었소.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싶은 이유는 바로 2년 전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멋대로였으니까.
"말해 봐.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 당신을 성가시게 했어? 아프게 했어?"
"당신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 그런 것 없어. 단지 내 곁에 있다는 게 잘못이야. 간단해."(p.222)

"레베카, 나는 누구보다 더 나 자신을 증오해."
"아니" 그녀는 딱 잘라 말했소.
"그 점에 관해서라면 착각하지 마. 나는 절대로 당신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의 천 배 만 배 이상으로 당신을 증오하니까. 당신이 품고 있는 반감을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다니 어리석을 정도로 아직 너무나 감상적이군."(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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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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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현대 누리꾼의 질병'에 따르면 나에게는 일명 '홍대병(비주류병)'이 있다. 정의는 본인이 홍대앞 비주류인 척 하는 병, 자유로운 영혼인 줄 아는 병이라고 한다. 자매품으로는 '쿨톤병', '동안병', '남친일심동체병', '도화살병' 등이 있다. 음악엔 문외한이라 역시 쉽고 청승맞은 가사가 좋지만 아무래도 취향이 남들보다 고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다. 요즘 '태양의 후예'에서 완전 뜬 배우 진구도 그런 맥락에서 아까운 남의 남자다. 소위 무명시절이라고 할 때 내가 완전 팬이었는데! 그의 진가를 알았는데!! 영화표 몇 장 사고 그런 우월감을 부렸는데 지금껏 애도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제 만인의 연인으로 그를 놓아줘야겠다.ㅎㅎ


왜 진구까지 팔면서 내 정신 질환을 고백하느냐 하면... 그간 베스트 셀러를 무시(?)한 벌을 톡톡히 받았기 때문이다. 출간 후 말 그대로 빅 히트한 이 책, 지금까지 안 읽었다. 벌써 육년이나 전에 발간되었다. 스릴러 장르에 본능적인 거부감도 있었지만 그저 재밌다는 사람들의 평이 독서에 의욕을 불어주지 못했다. 알라디너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헐리우드 영화같은 재미라면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되지 않는가! 와 같은 무지렁이 마인드로 빅재미를 놓칠 뻔 하다니, 알라디너로서 실격이다.


나는 왜 베스트셀러는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비주류이고 싶어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이 약간 동경하는 선배는 백년전에 나온, 검증받은 책만 읽는다고 하는데 나도 독서에 관해서는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느낌이라 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재미도 있고 작품성도 훌륭한 책을 읽으려면 무수한 사람이 인정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어도 죽을 때까지 읽을 수가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이르렀고, 아무리 인정받은 작품이라도 나한테는 생각보다 재미나 감동이 없는 경우도 꽤 있었다.


수많은 알라디너의 의견을 무시하다가 도서관에서 옆에 있던 언니가 "글케 찝찝하면 비닐장갑이라도 끼고 읽던가!"했던 책이 바로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쳐]다. (나는 또 왜 이런 '흥미 위주'의 책을 사는 것에 쪼잔하게 구는지!) 인기작치고 귀는 조금 접혀 있었지만 줄도 많이 안 쳐져 있고 손 때의 흔적은 별로 없었다. 다만 박진감이 넘치는 내용이어서 그런지 군데 군데 귤과의 과일을 까먹으면서 본 듯한 노란 얼룩을 피하지는 못했다. 한 겨울 뜨뜻한 온돌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빅 픽쳐]를 음미했던 구로도서관 주변에 사는 시민들이 부디 나와같은 즐거운 경험을 했기를!


이틀만에 신나게 읽은 책에 줄거리를 작성하려니 몹시 귀찮다. 그래서 오늘은 생략.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벤이 게리로 살기 시작하면서, 제발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리(=벤)은 정작 너무나 이루고 싶었던 결정적인 사진을 찍어 유명해지고, 그게 덫이 되어 계속 계속 도망다녀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자 정작 지겨웠던 신탁 변호사로 살고 싶어하는 삶의 아이러니가 이해가 되어 가슴이 턱 막혔다. 재밌으면서도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사진가는 자신의 이름과 신분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이루게 된다는 것도 아주 슬펐다. 당당한 내 신분으로, 내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보통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보다는 타인의 욕망으로 인한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기에. 


영상화된 영화는 은근 악평에 시달리는 것 같은데 시간이 나면 한 번 보고 싶기도 하다. 더글라스 케네디가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미국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일까. 40개국에 팔렸다고 해서 우와 저작권료가 얼마야, 하고 생각하는 나도 순수한 나로 사는 방법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 


단순히 재미도 있지만 의외로 교훈도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는 뒷맛이 씁쓸한 소설. 빅 재미는 보장된다. 겨울이라면 귤을 까먹으면서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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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2016-03-29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베스트셀러는 상업적인 재미를 추구한 책일거라는 편견이 있어서 많이 읽지 않는 편이지만, 더러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을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구나.. 싶은 책들도 많더라구요^^
빅픽처도 그 중에 하나인데
뽈쥐님의 서평을 보니 새삼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ㅎ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29 13:08   좋아요 1 | URL
의외로 베스트 셀러 중에 물건(?)인 것들도 많지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을 더 볼까 했는데 다작하는 작가인만큼 작품에 편차가 있긴한가보더라구요.
문체가 세련됐거나 엄청난 개성은 없지만 꽤 두꺼운 책이 하루이틀에 술술 넘어갔어요. 이것 또한 엄청난 재능이겠죠. 책벌레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킬링 타임용으로 한 번 가볍게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킬링 타임용 치곤 여운이 꽤 남는 책이에요.^^
 
Girl with a Pearl Earring (Paperback)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 Plume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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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의 모나리자.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 붙은 별명이다. 미술사적 가치는 빼고 그냥 비주얼로만 진짜 모나리자랑 비교하면 어쩌면 이 예쁜 소녀는 억울할지도 모른다. 보기 드문 분위기 미인이다. (사실 얼굴도 예쁘긴 하지만!)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평생 그린 그림은 한 40점 남짓. 그것도 우기고 우겨서 그런 거라는데 무지 디테일한 그의 스타일로 보면 적은 작품수가 이해가 가면서도 그림 크기를 보면 헉- 한다. 크지도 않다. 베르메르의 인생을 보면 장가를 잘 가서 그림을 더 느리게 그려도 됐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이를 10명이나 키우려면 가장으로서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했을 법도 하고...43세로 일찍 죽어 그의 작품을 조금밖에 감상하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이 소설 원작은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고요한 느낌이다. 섬세한 디테일 묘사와 사람이 들어가도 그의 그림은 어쩐지 정물화처럼 느껴지는데 이게 약간 원근법이 안 맞다나? 하여간 그 만의 독특한 구도와 스타일을 보면 베르메르가 어떻게 거장반열에 들어가는지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유머러스한 상황을 그린 작품도 웃기보다는 웬지 모를 이상한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웃는건지 무표정인지 모를 오묘한 미소로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진주 귀고리를 한 이름 모를 소녀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때문에 더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실은 둘다 관객을 완전 정면으로 맞대고 있어서 눈 돌리기가 민망한 거겠지만..) 특히 등은 돌리고 어깨너머 나를 딱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더 애처롭다고나 할까. 이름도 신분도 모른다는 알쏭달쏭한 점이 더 소녀를 신비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어쨌든 사람은 예쁘고 볼 일이다. 어떤 집요한 소설가가 그녀를 위한 글까지 써낸 걸 보면.



그리트는 이제 열일곱살이 되었다. 꽃다울 나이에 아버지의 타일 공장은 불이났고 아버지는 목숨은 건졌지만 그 대신 눈을 잃었다. 어린 여동생 아그네스만 집에 남고 자신과 오빠 프란은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어느 날 베르메르 화가 부부가 찾아왔다. 신경질적인 부인과 달리 '입에 시나몬을 문 듯' 조용히 말하는 화가는 그리트가 스튜에 넣을 채소를 배열한 방식을 주목한다. 그후로 그리트는 카톨릭인 화가의 집에서 일요일만 빼고 일을 하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카톨릭 신자가 배척되는 분위기였음.)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란 그리트는 예수가 못받혀 죽은 그림부터 젊은 사모, 자신에게 첫날부터 적대적인 어린 여자 애 대문에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시장 푸줏간에 자신에게 농을 거는 잘생긴 피테르와 화가의 작업실의 신기한 풍경만 빼면. 시장이나 광장으로 갈 때 운하를 지날 때면 세남매가 어울려 놀았던 기억이 어린 그리트를 힘들게 한다. 일요일마다 집에 돌아오는 그리트는 생기 없는 집안 분위기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로 고달픔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도 전염병으로 가족이 격리되기 전에 행복한 짧은 순간이었다. 푸줏간 피에터의 도움으로 가족의 소식을 듣고 몇 주뒤에 들른 집은, 이제 부모님 두 명만 남았다. 어린 아그네스가 죽은 것이다.


더 생기가 없어진 집에 활기를 불어 넣으려 아그네스는 프란을 찾아 집에 방문하는 등 노력을 하지만 자신도 이미 화가의 집에 더 익숙해진 걸 느낀다. 화가의 작업실을 언제나 처럼 정리하던 그리트는 옵스큐라같은 신기한 기계를 발견하기도 하고 화가와 대화를 나누고, 결국엔 그의 물감을 만들어주기까지 한다. 집안의 실세인 화가의 장모는 그걸 알고, 딸을 기만하는 행위이긴 하지만, 화가의 작업 속도가 빨라진 걸 눈치채고 묵인한다. 먹여야할 아이가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으니.


문제는 누구나 우려했듯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흐른다는 것. 허긴 어찌 이렇게 예쁜 여자 애한테 제 아무리 애처가라도 안 반할 수 있겠냐만은. 하필 색에 감각까지 있는 소녀와 화가는 뭔가 통하는 느낌까지 받는다. 원체 말수가 적은 베르메르의 행동만으로 그의 기분까지 아는 그리트는 좋은 어시스트이자 하녀다. 한편, 화가의 후원자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약간 겁에 질린 것 같은 그리트에게 꽂히고 자꾸 자신과 그리트를 그림에 등장시켜달라고 끊임없이 조른다. 


후원자 판 라이벤은- 실제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녀들에게 이미 지분거리고 애까지 임신시킨 경력이 있는 호색한이다. 화가와 수완좋은 장모는 그리트를 지켜주겠다 맹세를 하지만 그들도 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결국 그리트만 등장 시키기로 합의를 보고 몰래 몰래 그리트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하녀 복장 대신, 그리트, 그녀 자체를 그려주겠다 한다. 그리트는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은근히 기쁜 마음이 든다. 푸줏간 아들 피테르는 그 사이 그리트의 가족과 식사까지 하면서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 피테르는 금발 머리가 곱슬거리는 잘생긴 남자에다 성격도 수더분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지만 그리트는 자꾸만 화가의 깨끗하게 하얀 손과 피테르의 동물의 피로 물든 손톱 때를 비교하게 된다. 열일곱살. 우리나이로 하면 열아홉살이 된 소녀라면 역시 남자의 외면, 보이는 것에 신경 쓰는 나이인 것이다. 아무리 성숙한 그리트라고 해도 예술적인 화가 스승님과 울끈불끈한 푸줏간 남자 사이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스승님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리트는 울 것 같은 마음으로 그의 캔버스 앞에 앉는다. 어깨 너머로 그를 보고 때때로 입술에 침을 묻힌다. 그림이 완성되고 그리트와 화가는 모두 그림에서 뭔가가 빠졌다고 느낀다. 그러다 베르메르는 자신의 부인이 하고 있던 큰 진주 귀고리를 본다. 그리트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 훌륭한 어시스턴트는 그가 요청하기도 전에 자기는 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지만 완벽한 그의 방식을 추구하는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압박한다. 결국 이틀치의 삯을 치르고 귀까지 뚫는 그리트.


훌륭한 모델이던 그리트는 젊은 안주인의 귀고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 앉는다. 하필 그 날은 그리트의 열여덟살 생일이었고 피테르는 모두의 앞에서 자신과 결혼을 해서 이 집을 나가자고 한다.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올라온 그리트는 마리아 틴트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림을 완성시킨다. 이제 그림만 말려서 후원자를 가져다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임신한 젊은 안주인은 완성된 그림을 보고 거의 미칠지경이 되고 질투에 사로잡힌다. 그리트를 진주 도둑으로 몰아 세우려 하고 그림을 찢으려고 하지만 화가의 재빠른 대처로 칼은 바닥에 나동군다. 그리트는 그 날, 화가의 집을 나온다.


다행으로 푸줏간 안주인이된 그리트. 곧 화가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그의 장례식 장에서 그녀는 화가의 동명의 남자아이가 이제 말을 하고 못보던 아이가 태어난 걸 본다. 그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젊은 안주인한테서 귀고리 한 쌍을 받아온다. 


  

오랜만에 순수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었다. 문학이 이름없는 사람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한다면, 이 소설은 완전한 문학이다. 보면 볼수록 신비한 이 그림을 수시로 보면서 몇 백년전에 살다간 어느 소녀의 고달픈 삶과 최고로 반짝이는 순간을 공유하면서 설렜다. 


작가는 베르메르를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그의 그림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짜낸 것을 보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에피소드 중간에 나오는 그림을 구경하는 것도 큰 재미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안주인에게는 너무 박하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어느 여자가 이런 플라토닉 러브를 허용할 수 있단 말이냐! 특히 잦은 임신으로 계속 고생했던 여자라면 오히려 난봉질을 하는 것보다 더 용서하지 못 할 수도 있겠다. (베르메르에게는 아이 11명이 있었고 그 중 한명은 금방 죽었다.)


그리트의 심정에 빙의되서 읽는다면 너무나 근사한 설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저렇게 봐라봐준다고 생각만해도 가슴떨리는 일이다. 부인이 순간적으로 미쳐서 그림을 찢으려고 했다는 묘사가 심히 이해되는 느낌이다.


특히 블로그를 찾아보면서 베르메르의 생을 알아보면 더 재밌는 책이다. 


* 콜린 퍼스가 주연한 영화 <진주 귀고리 소녀>는 친절한 영화가 아니라서 이해가 좀 어려웠다. 스칼렛 요한슨은 아직도 어울리는지 아닌지 참 미묘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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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2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학생 때 뭣도 모르고 이 영화를 봤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는 장면만 기억납니다. 그땐 그냥 예쁜 외국 여배우구나 하고 봤는데, 몇 년 지나서 세계적인 배우가 될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ㅎㅎㅎ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28 19:13   좋아요 0 | URL
부끄럽지만 전 영화 내용 이해도 잘 못했어요..ㅠㅠ 확실히 스칼렛 요한슨은 남자들한테 선호도가 높은 것 같아요. 글래머한 스타일이라서 그런가..ㅎㅎ 전 스칼렛 요한슨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첨 봤는데 참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세계적인 배우가 되더라구요. 어릴 때 은근 성숙함 영화를 보고 대부분응 이해를 못했는데 나중에보니 이 영화도 꽤 훌륭하더라구요^^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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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과 돈, 죄에 대한 경구(?) 중에 나이가 들면서 동의하게 되는 것과 아닌 게 있다. 아니면 점점 의문을 품게 되는 것도 있고. 신성한 돈'님'에 쉽게 죄를 연관짓는 이유는 돈이 어떤 유혹이든 쉽게 빠지게 만든다는데 있다. 특히 죄의 유혹에는 더더욱.


1. 귀신이 무섭냐 사람이 무섭지!   ▶ (동의)

2. 사람이 나쁘냐 돈이 나쁘지!      (.... 그랴도 그러면 쓰나!) 

3.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의 죄를 미워하라.  (오 지져스...이건 경험상 불가능에 가까움.)


특히 1번인 <귀신이 무섭냐 사람이 무섭지!>를 동의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어린왕자]를 재밌게 읽게 된 일개 '어른이'일 뿐이다. 지금보면 매우 유치한 [전설의 고향]의 레전드 편 '내 다리 내놔'를 보며 부들부들떨던 초딩은 이제 [그것이 알고 싶다]와 [실제상황]을 복습 또 복습하며 인간 불신을 공고히 다지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의 죄를 미워하라.>는 3번문은 미션 스쿨 다닐 시절부터 이해가 잘 안 되었던 걸로 현재로서는 정말 그게 가능한지 궁금하다. 당연히 종교 지도자는 저렇게 말을 해야하겠지만 그저 범인인 나에게는 무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죄를 짓고나서 저런 태도를 취하는 범죄자를 보면 분노가 미친듯 상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사람이 나쁘냐 돈이 나쁘지!>라는 문장은 미묘하다. 돈 때문에 비굴해지는 게 사람이고 우쭐해지는 것도 사람이며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게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돈이 아쉬운 사람이 모두 범죄에 길로 빠지거나 추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돈은 모든 이에게 소중하고 아깝다. 죄를 저지르고 나서 "돈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하면 동정심이 팍 이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어디까지나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훔치거나 불법인 누드 사진을 찍는 등의 경범죄일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가치라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다 이놈한테서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니 사랑이니 자연이니 이런 아름다운 말도 돈의 유혹 앞에선 힘을 잃고 만다. 내가 맹하기는해도 백치아다다처럼 돈을 경멸하는 사람은 아니니 내숭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그저 돈의 힘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뭐 돈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던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테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국내에도 팬층이 두터운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 [화차]를 나는 지금 봤다. 원체 추리소설을 무서워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재밌게 찾아 보고 있다. 흔히 '사회파'라고 불리는 모양인데 추리 소설은 대부분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게 제일 무섭기도 하고... 특히 돈을 벌어보니 돈 문제가 가장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돈이 없는 것도 무섭지만 마이너스에, 돈 때문에 쫓겨서 원치 않는 일을 당하는 상황이라면...? 몹시 끔찍하다.


연예인의 개인 회생, 파산 뉴스를 듣고 곧 갚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빚 갚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보통 월급쟁이나 자영업자의 이야기는 아주 다르다. 뭐 연예인들도 웃음으로 승화시켜도 그게 아주 밝은 웃음이겠냐마는.


주변에 개인 회생 받은 사람 얘기를 누누히 들었다. 심지어 내 제일 친한 친구가 악명높은 제3금융권에서 근무해서 가끔 일 얘기를 듣기만해도 소름이 돋을 때도 있다. '신용'을 잃는다는 건 너무너무 무서운 일이다. 잘 되는 부자들의 이야기보다 반면교사가 더 효과적일 때도 많으니 소비가 주체가 안 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정말 이 소설을 먼저 읽게 해도 될 것 같다.


소설 [화차]의 제목인 '화차'의 뜻은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아버지의 태양 마차를 몰다가 한순간의 실수로 불에 타서 추락하고 마는데 한자로 풀어쓰니까 그 때보다 더 무서운 느낌이 든다. 망자, 지옥, 불수레....


불붙은 화차가 빠르게 지나가면서 한순간에 그 주변을 다 화끈하게 만드는 뜨거운 온기와 눈부신 밝음이 떠올라서 소름 끼친다. 정말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이 불수레를 타고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 위로 비스무리한 게 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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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떤 예쁜 여자가 있다. 한눈에 봐도 기억에 남을 만한 참한 미인. 여자를 남들보다 멋진 외모로 낳아준 부모는 선량한 사람이었으나 그저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융자를 받는다. 큰 경제 지식이 없었던 그들에게는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변제 능력을 잃은 사람이 하는 일은 다 비슷하다. 빚은 빚을 낳고 그들은 언제는 뿔뿔히 흩어졌다, 뭉쳤다하며 채권자에게서 도망을 다닌다. 돈을 받고 싶은 사람은 집요하다. (허긴 왜 안 그렇겠는가.) 어디로 숨어도 찾아내고 또 찾아낸다. 학창 시절부터 이런 일을 겪은 여자는 그들을 피해다니다 나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또한 이미 여자는 한 때 결혼까지 하여 한순간의 행복을 맞보기도 했었다. 한번 행복한 생활을 경험했던 여자는 크게 좌절하고 깨닫는다. 자신이 너무 불행하다는 사실을. 나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어. 이대로는 안 돼. 


하지만 여자는 이미 경험했다. 채권자는 아무리 구석으로 도망가도 구석구석 다 찾아냈다. 여자는 그래서 아예 자신이 아닌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다른 이의 신분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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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뿐인 인생을 신나고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도 아름다운 외모로 태어나 남들보다 더 유리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상대적 약자인 여자가 빚이라는 '흠'을 가지면 아름다운 외모는 더 큰 독으로 작용될 뿐이다. 교코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 나머지 다른 이의 삶을 간과했다. 아마 그들의 신분을 넣고 나서 처리한 것을 볼 때, 몸의 안전성을 찾았다고 해도 이미 마음은 불수레에 실려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긴 하지만 자신이 진 빚도 아닌데 평생 원치 않은 고생을 한 여자의 억울함도 쉽게 비난할 수가 없다.


한 십년전에 '카드대란'이라고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제의 원인에는 쉬운 신용 카드 발급이니 카드 사용자의 무분별한 낭비, 그로 인해 부실해진 카드사들의 폭탄돌리기 등등이 있으나 철저히 내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은 그 때까지 생소했던 플라스틴 자그마한 카드 한 장의 위력을 너무 쉽게 봤던 사람들이 남의 돈의 무서움을 모른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카드사들이 책임감없이 카드 발급을 남발한 것도 더더 나쁘지만. (철저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는 나도 신용카드 회사에서 통장에 뺄 돈이 없다고 한 번 욕먹은 적 있다. 다행히 '안심..'뭐가 걸려 있어서 바로 입금하고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겨우 50만원만 한도를 걸어 놓은 내 첫 신용카드는 역시, 대학생 때 나보다 우리 엄마의 변제 능력을 믿고 은행 창구에서 직접 발급 받은 거였다. 정말 현금이 아니다보니 아무리 안전한 체크카드라도 손쉽게 쓰게 되는 위력이 있다. 한도가 50만원이니 망정이지. 나도 정말 큰 일날 뻔 했다. 특히 대학생이다 보니 '설마 그렇게 큰 돈도 아닌데 잡아가기야 하겠어...?'같이 돈의 힘을 아주 가볍게 생각했었다. (아주 세상을 쉽게 봤던 듯.. 인정도 안 믿는데 그 때는 왜 회사의 정을 믿었던 걸까.)


같은 나라라도 집집마다 문화 차이는 있다.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집안 이야기를 하다보면 우리집과 달리 사업을 주로 하는 집인 경우에 '빚도 재산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경우가 상당히 많다. 언제나 화려하고 호인인 내 친구 Y의 집은 주로 개인 사업을 해서 빚이 많다고는 하는데 누리고 사는 수준은 아주 높다. 명품백에 구두에 최신 전자기기에 항상 최고 좋은 것만을 해야한다는 Y의 생활을 보고 있자면 월급쟁이인 우리집이 근근히 살고 있는게 웬지 궁상맞게 느껴질 지경이다. '빚은 철저히 넘의 돈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우리집이 당연한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빚도 재산이'라는 생각을 가진 집이 많다고 해서 크게 놀랐다. 부자들은 빚도 잘 굴린다는데 옆에서 본 바로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 돈으로 마음 편히 사는 게 낫다고 본다.    


확실히 물질적 풍요가 주는 행복감은 있다. 잡지나 티비에서 봐서 모든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싶은 심리도 있다. 아마도 스스로 다들 잘 알거라 생각하지만 '나를 뭘 믿고 돈을 마구 빌려준담...' 이런 생각은 꼭 해야한다. 월급을 받으며 '남의 호주머니에서 돈 빼는' 게 무지 어렵다는 걸 느껴본 나로서 대출, 사채는 정말 무서운 존재다. 


제3금융권에서 대출을 담당하는 친구에게 들은 얘기로는, 그 어마어마한 대출 이자도 한 번 써보면 생각보다 가볍게 느끼는 게 사람이더라. 심지어 직업 멀쩡한 사람도 생각보다 많이 그 곳을 이용하기도 한단다. 역설적으로 내 친구는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이 회사를 다니면서 집안 빚을 거의 갚고 생활비까지 척척 대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H야, 항상 힘내라.


이래도 끝내면 좀 찜찜하니, 한 말씀 올린다. 그래도,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은 지켜야 아름다운 겁니다!

돈도, 나쁘긴 한데... 그걸로 죄 지으면 사람이 나빠지는거여!

     


* 작년에 도쿄돔 가까이에 있는 호텔에 묶으면서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화려한 도쿄돔과 호텔의 낭만보다는 경마장 주변에서 눈이 풀려서 경마 신문을 보는 머리 희끗희끗한 할아버지들과 서민들이 갈 법한 근처 라멘집에서 손님 상 앞에 꽂혀 있는 '개인회생, 개인파산' 찌라시가 더 기억에 남는다. 스스로 죽거나 남을 죽이기 전에 그래도 법의 도움을 먼저 청하시라. 어찌되었든 살아 있는 게 더 중요할지니.


* 작년 9월에 발행되었던 시사인 주진우 기자의 칼럼 '일본계 대부업체들'이라는 기사를 보기 바란다. 정말 오들오들 떨린다. 이제 이자가 27.9%까지 내려갔지만 이들이 우리나라까지 넘어오기까지한 과정은 실로 무섭다. 예전에는 지들 본토에선 돈 빌리면 '생명보험'에 들게 했다. 한 마디로 빚은 '목숨으로 갚으라'는 거였다. 나름 합법이라는 이들... 27.9%... 진정 최선입니까?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242       

       

마지막 책임을 묻는 곳이 자기 회사만 아니면 됩니다. 사실 은행이나 사채시장이나 신용판매회사도 큰 곳은 별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말씀 드린 구조에서 피라미드 우쪽에 있는 업자는 당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 책임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거죠. 그런 굴레 속에서 채무자는 점점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중채무자라는 이름으로 결박되어 두 번 다시 떠오를 수 없도록 가라앉는 겁니다. (p.137)

돈도 없고, 학력도 없고, 별다른 능력도 없고, 얼굴도 그걸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도 별로였고 삼류 이하의 회사에서 잡무만 보고 있었죠. 그런 사람이 마음속에서는 텔레비전이나 잡지나 소설에서 보고 들은 화려한 생활을 꿈꾸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냥 꿈만 꾸는 걸로 만족하든지, 그게 싫으면 어떻게 해서든 꿈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해 보든지 했겠지요.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나쁜 길로 빠져든 사람도 있을 거예요. 옛날에는 아주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쨌든 간에 자력으로 꿈을 이루든가 현 상태에서 포기하든가 둘 중에 하나였잖아요?
(중략)
그렇지만 요샌 달라요. 꿈을 이루기가 힘들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자니 너무 아쉽고, 그래서 꿈이 이뤄졌다는 기분에 그냥 빠져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기 위한 방법이 지금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쇼코의 경우는 그게 우연히 쇼핑이나 여행같이 돈을 쓰는 쪽으로 간 것뿐이에요. 그런 걸 가볍게 도와주었던 게 바로 신용카드와 사채였죠. (p. 307-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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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2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2번 동의하고, 3번은 진짜로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해마다 비 인륜적인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더 무서운 건 뉴스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에요. 무서운 사람들이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을 수 있고요.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24 17:32   좋아요 0 | URL
그쵸. 아무리 흉악한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게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요즘은 이미 한번 걸러진 기사만 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어요. 근데 가끔 생각하면 죄인 중엔 별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는 사람도 많은데 당최 죄를 미워하니, 용서를 해줘야 되니...가 뭔 의미가 있는지 모를 때도 있네요. 차라리 그런 사람들은 죽으면 화차타고 지옥간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에 평화가 생길지도 모르죠.
게다가 뉴스도 자극적인 사건만 보도하니... 아파트 살아서 우리 아랫집도 모르고 사는데... 가끔 성범죄자가 우리 동네에 있다고 공지 붙으면 무섭더라고요. 죄보다 사람이 더 미워요ㅠㅠ
 

 송구스럽지만 예전 같으면 반값행사를 기다리며 샀을만한 책이다. 두껍긴하지만 2만원이라는 가격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 비싼 가격은 두께 때문일까 아니면 저작권 때문일까? 두께가 두꺼우면 지갑여는데도 후해지는 면이 있긴 하지만 책가격 책정을 정말 이렇게 하실라우? 도서정가제 시행 후 확실히 불필요한 책 지출은 줄었다. 오프라인 알라딘 중고서점에 갈 때마나 한두권씩 사는 게 전부가 되고 도서관 이용률이 높아졌다. 굳이 순기능을 따지자면 확실히 고민을 해보고 산다는 것. 물론 처음에는 알라딘 굿즈의 유혹에 몇 번이나 무너졌지만 막상 받아보면 부질없다는 걸 깨닫는 중.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의 한 에피소드에서 책을 '육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궁정식 연인'으로 대하는가 하는 꼭지가 있었는데, 나는 아마 '육체파'(!!)에 가까울 것이다. 나도 연필로 밑줄긋기를 무지 좋아하고 모퉁이를 접는 것도 망설이지 않지만 공공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중고책은 글쎄.... 일단 중고책은 집에 오면 향균 스프레이 샤워를 마치지만 그래도 왠만하면 침대에 올리지 않는 게 내 원칙이다.


 너무 인기많은 재미 위주의 (웬지 이런 책들을 구매하기가 망설여지는) 책은 도서관에서도 너덜너덜함을 자랑하한다. 뭐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하겠지. 여기에는 선뜻 돈쓰기가 싫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망설였다. 이 책, 내 방에 가져와서 읽어도 되는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언니는 조언했다. 야, 비닐장갑 끼고 읽어.


알고보니 자신은 그런 방법으로 인기 있는 책을 꽤 읽었다나 뭐라나.  


요즘은 책 소독기도 설치하고 희망도서 피드백도 훌륭하지만 그래도 공공도서관은 아무에게나 열린 공간이니 책의 순결성(?!)을 의심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가끔 누군가가 코딱지를 묻혀 놔서 기함하기도 하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털이 꽂혀 있을 때도 있으니까. 


하여, 도서관에서는 신간 도서 위주로 본다. 책 상태가 깨끗하고 재밌을 것 같으면 바로 대출해서 오는 편이다. 그렇다고 침대에는 올리지 않지만! 핑크빛 위용을 뽐내는 [작가의 책]을 집은 이유는 아마 알라딘 메인 페이지에 노출되서 친근한 면도 있었을 거고 책이 깨끗해서였을 수도 있다.


책은 두껍지만 인터뷰 집이라 편하게 읽힌다. 우리에게 유명한 작가도 있고 아닌 작가도 많다. 인터뷰를 보고 호감이 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실제로야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아주 겸손하다. 그리고 본인 작품의 성향에서 연상할 수 없는 의외의 책을 추천해주기도 해서 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참고할 만한 책이다.


역시 창작 일이라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라고 느낀다. 결과물이 어떻든 결과물이라고 매듭짓는 일 자체로 참 대단한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창작자들을 존경하고 싶다.


특히, 오디오북을 언급하는 작가도 많았는데 우리나라도 오디오북이 나오면 좋겠다. 뭐 매출이나 제작비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잘 안 만들어지는 것이겠지만서도.


작가별로 정리하진 못하고 그냥 나중에 보고 싶어 마구잡이로 포스팅해본다. 기준은 부끄럽지만 그냥 책 제목만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이 많은 것 같다.


*재밌는 점은 만나보고 싶은 작가에 셰익스피어를 꼽는 작가가 많았다는 것. 또 우상이었던 인물은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나 [그린게이블즈의 앤]의 앤같은... 걸 크러쉬(?)를 보여주는 주인공을 꼽는 점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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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인상에 남았던 대답>



올리버 색스는 매력적인 사례의 이력들을 엮어서 글을 아주 유려하게 쓰지만, 그가 자신의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살짝 무대감독의 허세 같은 게 배어 있어요. "이봐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잠시 멈추고 이것 좀 보라고요!"하는 논조가 깔려 있다는 거죠. 그런 관음증적인 정서 없이도 의료행위의 엄격함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죠.(p.302) <앤드루 솔로몬, 과대평가 된 책이 있냐는 질문에>


마크 트웨인이요. 그런데 일흔 살의 그가 아니라 마흔 살의 그를 만나 보고 싶어요. 아주 심술궂은 늙이어였거든요. 마크 트웨인한테 뭘 물어볼지는 잘 모르겠지만, 투자에 관한 조언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요. 어렸을 때 그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답장은 절대 안 왔죠.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p.455)<존 그리셤, 저자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다음은 의대와 레지던트 과정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덕목들이지요. 자기통제, 인내, 끈기, 기꺼이 잠을 포기하는 것, 가학-피학 성향에 대한 애호, 믿음과 자신감의 위기를 견뎌내는 능력, 피로의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확실히 도움이 되는 카페인 중독, 끝이 온다는 한결같은 낙관주의.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도 똑같죠. (p.528)<할레드 호세이니, 의사의 경험이 작가로 일하는 데 끼친 영향은?이란 질문에>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뛰어난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나서 식품산업에 정말 화가 났었지요. 그후 몇 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떤 책을 읽고서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은 사람이 분개하는 일 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갖 좋은 주장을 그저 간직하기만 한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무척 당황스럽고 정말 걱정이 됩니다. 진실성 없이 건성으로 읽고 마는 독자의 손에 들어간 책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증거 같아서 말이에요. (p.266)<알랭 드 보통, 최근에 당신을 화나게 만든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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