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소녀 ㅣ 창비세계문학 37
쿠라하시 유미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4년 10월
평점 :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를 다루려면 엄청나게 용감하든지 글을 엄청나게 잘 쓰든지 둘 중 하나여야 될 것이다. 동시에 몇 편씩 쏟아지는 막장드라마에 노출되어도 아직 이런 소재는 파격적이다. 불편하다는 뜻이다. 쪽수가 많지 않아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은 소재와 모호한 표현으로 술술 읽기가 좀 힘들었기 때문이다. 중반 이후까지도 '나'와 미키의 불행한 출생에 스스로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치기 어린 시설이 몹시 피곤했지만 나름의 반전으로 긴장감이 있었다.
사실 읽고 나서도 얼떨떨하고 스스로 뭘 느꼈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랑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겠지만 뒤 표지에 나온 것 같은 '성스러움과 악'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나한테는 사랑이라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유혹으로 시작되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스스로 어떤 소재에도 관대한 독자라고 생각했는데 근친상간을 성스러움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야기라니... 일년 중 기분이 젤 안 좋은 11월에는 바람직한 책읽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유미적인 문체도, 강한 개성도 커버하지 못할 만큼 우웩스럽다.
'나'는 어느날 신문에 난 사고기사에 몇 년 전 만난 '미키'라는 소녀를 떠올린다. 딸이 몰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 사고가 나서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는 즉사하고 딸은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기사의 딸은 '미키'였고 '나'와 미키는 몇 년 전에 '나'가 친구들과 차를 훔쳐서 파티를 하려고 절도질을 할 때 만났던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였다. 그 날 미키는 '나'에게 자신의 '파파'와 잘 계획을 고백한다. '나'는 애써 쿨한 척을 했지만 미키가 떠난 후 친구 '에스키모'와 계속 미키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에스키모'는 근친상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런 일은 거지나 세속을 등지고 사는 하류층 같은 사람들이 하는 사회악인데, 유럽의 상류층에서는 고급 취미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누나하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나'와 누나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파칭코에 빠져있는 할멈이 주워와 키우고 있는 남매인데(정확하지 않음)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나'는 엄마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은 뚱뚱한 여자를 별로 사랑하지 않고 가난한 태생을 '존재 자체의 비열함'이라면서 증오하는, 한 때의 코뮤니스트였다.
'나'는 친구들과 수면제를 먹은 여성을 납치해 윤간한 사건으로 퇴학을 당하고 미국에 유학을 위해 입국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미국대사관은 '나'의 코뮤니스트 활동에 대해 조사할 것이라는 답을 주었다. 미키는 기억을 잃은 채 공손한 목소리로 '나'에게 연락을 해온다. 그들은 일년전 미키의 전화 한 통으로 약혹을 한 상태였다. 노트를 보내 줄테니 내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노트에 씌여진 내용은 미키와 '파파'에 대한 것이다. 감정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 차가운 엄마와 거의 생활하는 미키는 엄마가 추천해준 치과에 간다. 노련한 의사인 '파파'는 미키를 희롱하듯 데리고 놀지만 미키는 이것이 싫지가 않다. '파파'는 아마도 엄마의 옛 연인. 미키는 '파파'의 담배로 집안에 담배 냄새를 풍기고 엄마와 같이 간 여행에서 그가 자신의 몸에 남긴 흔적을 엄마한테 과시하듯 보여주지만 엄마한테는 경멸을 당할 뿐이다. 어느 날 '파파'와 같이 호텔방에서 짐승같은 사랑을 나누고 그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미키는 일기에 적혔던 그 날 정말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미키의 일기가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미키가 실제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셔 결혼을 하자는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일기 속의 '파파'와 미키의 아버지인 실제로 방광암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미키의 아버지 중 누가 일기 속에 '파파'인지 구별을 할 수도 없다. 일기가 소설일 가능성도 있었다. 문제는 미키가 기억을 상실했으니 본인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미키의 일기에서 느꼈던 미키의 방이나 친구 M을 실제로 마주한 '나'는 상상과의 괴리를 느낀다. 하지만 미키네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의 흘리는 말에 '파파'인지 방광염에 걸려 누워있는 아버지인지 누군가와는 그런 식의 관계를 맺었던 것을 확인하게 된다.
미키가 기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동안 '나'도 미국대사관의 결정을 기다리며 자신이 누나와 했던 일도 반추하기 시작한다. 죄의식 같은 건 없고 '나'는 누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 사이 '파파'는 죽고 미국에서는 허락이 난다. 미키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될 것 같다고 말하자 그 대신 '나'는 자신과 결혼하자고 한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듯이 작가의 스타일이고 뭐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던 게 솔직한 심경이다. 하지만 단순히 불쾌했다고만 말하면 소위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그래도 조금 의견을 덧붙여본다.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라도 이들이 진짜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와 딸인지, 남매 사이이인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불쾌한 건 아니다. 다만, 아방가르드든 전위적이든 미키가 일기를 쓴 형식과 '나'가 직접 자신에 대해 얘기를 하는 부분에서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치기에 어린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
부정한 출생을 아버지와의 관계로 보상하려는 미키와 불행과 가난한 태생, 누나와의 관계로 자기혐오감을 갖고 있는 '나'와의 결혼이 사실상 이야기에서 가장 성스러운 관계라고 본다. 서로가 가장 사랑하는 상대는 아니지만 자신들의 결핍과 치부를 보완하는 나름의 성숙한 관계라고 생각된다. 찜찜한 해피엔딩으로 끝 마쳤지만 감각적인 표현이나 중세적인 분위기 묘사는 어쨌든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사족1 : 전후 소설이라 그런건지 요즘은 쓰지 않는 글자 수까지 맞춘 외래어 표기법으로 표기되었다. (ex- 도쿄→또오쿄오, 교토→쿄오또, 이탈리아→이딸리아 등등) 가볍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몹시 거슬린다. 특별히 이런식으로 표기를 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독자는 괴로워. 엉엉
사족2 : 예전에 교양 수업 때문에 억지로 읽었던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소설이 왠지 모르게 생각났다. 공허함을 달래려고 마약이든 술이든 섹스든 미친듯이 심취하는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고문인 소설들.. 꼰대가 되지 말자는 결심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 하다.
아아, 엄마는 타인의 이야기는 항상 이런 식으로 판에 박힌 소리밖에 하질 않으니. 위선의 완벽함도 여기까지 오게 되면 끔찍한 악의와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p. 62)
다시 말하자면, 결혼이라는 소유의 형식은, 미키 같은 고급스러운 여자를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잡종견이 아니라 콜리라든가 푸들, 테리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유하는 경우, 의외로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처음 미키를 만나고부터 이런 종류의 여자와 결혼 계약을 맺는 것을 진심으로 동경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분석하고 보니, 기가 막힐 만큼 웃기는 고급품에 대한 욕망이나 허영심이 탄로 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처럼 수상쩍은 가정이나 빈곤의 수치에 증오심을 불태우며 살아온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는 것이 때로 그런 형식을 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p. 2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