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 쇼쇼쇼 - 가식의 식탁에서 허영을 먹는 음식문화 파헤치기
스티븐 풀 지음, 정서진 옮김 / 따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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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먹는 대로 되는 건 아니다. You Aren't what You Eat'


책을 보니 '먹는 대로 된다. You Are What You Eat' 의 책과 동명의 프로그램을 패러디 한 것으로 보인다. (질리언 매키스 저)


쿡방과 먹방을 찬양하는 나로선 매우 뒤를 돌아보게 한 책이었다. 뭐 최현석 쉐프를 나의 '구루'같은 걸로 삼은 건 아니지만 짬뽕을 하나 사도 이연복 쉐프 얼굴이 붙어 있는 것을 별 고민도 없이 카트에 척척 넣어버린다. 자신을 위해 요리 하나 할 줄 모른다는 남자에게 정이 확 떨어져 버린 일도 있고. 그냥 눈만 점점 높아진다고 하기엔 내 머리속에서 '요리'라는 것 자체가 어느 순간 인생에서 뭔가 중요한, 굉장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내가 꽤 좋아하는 영화 [줄리&줄리아]를 보면서 나도 우리나라에서 어떤 요리 멘토이자 삶의 멘토를 누구로 삼아야하나를 심히 고민한 일도 있었다. 요리를 하는 행위 자체로 인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할까. 특히 예상치도 못한 재료로 환상의 맛을 낸다고 하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고.


스스로 대단히 강단있고 줏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 이런 것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거라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진다. 갑자기 어느 날 부턴지 렌틸콩과 커민 가루를 주문하고 아보카도 같은 것을 사서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과카몰리를 집에서 하게 되었고 파스타 면 삶는 냄비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바보상자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특히 식재료를 잘 아는 사람이 참 멋있어 보여서 음식 미시사같은 책도 틈틈이 찾아보았다. 토마토가 한 때는 얼마나 에로틱한 채소였는지 아스텍 문명에서 최면과 주술로 먹었다는 코코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당시 어떤 맛이었는지 상상을 펼쳐보기도 하고 어딜가야 먹을 수 있는지 찾으면서 보낸 시간은 꽤 된다.


고든 램지의 [키친 나이트메어] 에서 얼굴 주름을 한껏 잡으며 F***를 연발하는 고든 램지의 카리스마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월급을 꽤 많이 받는 것 같은 대학 동기 Y가 페이스북에 이태원과 강남 등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포스팅한 것을 몇 번이고 염탐하기도 한다. 참고로 이 친구는 모델처럼 깡 말랐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어떤 음식, 요리를 모르면 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요리책을 하나하나 사다가 결국 엄청 두꺼운 하드커버 요리책까지 구입한 상태다. 원래 살 때 즈음에만 해도 그 요리책을 한 장 한 장 펼치며 거품기를 들고 밀가루 범벅이 된 꼴로 오븐과 식탁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나를 상상했으나 결국, 요리책은 비싼 커피 컵 받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나 정도의 사람은 '푸디스트'라고 부르기는 매우 미미한 수준인 걸 안다. 한 때 유기농 재료와 이국적인 재료를 좀 찾았다고 해서, 가정 요리의 달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다고 해서 '음식 미치광이'처럼 비춰지기는 싫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조금씩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먹는 것에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예.. 저도 알아요. 저 좀 병적인 거!


종교는 없지만 7가지 죄악 중에 탐욕, 탐식이 들어간다. 음식을 섹스에 비유하는 것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로마 도덕주의자들이 섹스에 대한 혐오감과 과식에 대한 혐오감을 하나로 취급해 "매음굴과 기름투성이 요릿집은 당신의 열망을 자극한다."(p.101)했다는데 나도 가끔은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게 스스로 좋지 않게 생각될 때가 있다.


물론 책은 나같은 사람을 비난하기 보단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이 구는 일부 셰프들과 똥폼 잡는 푸드 블로거, 외식 사업과 방송의 실체를 발가벗기는 데 있겠지만 왠지 뜨끔하긴 했다. 정신차려야지.


밑줄긋기 해본다. 몇 가지 뜨끔한다면 깨달아야 한다. '먹는 대로 되는 건 아니다. You Aren't what You Eat' 라고.


그들은 건강식품 환자가 "먹는 행위에서 정체성과 영성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꼭 푸디스트처럼 말이다. "건강식품 강박증 환자는 음식을 생각하며 보내느 시간이 상당이 많다." 이 역시 푸디스트와 마찬가지다. 강박 증세를 보이는 이들의 먹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생활 방식, 식습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도록 한다." 푸디스트의 먹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p.31)

이제부터는 `스프링 램`에 관한 어휘 문제. 스프링 램이 봄에 먹는 어린 양고기를 뜻했던 적이있다. 도세트 혼이라는 오래된 영국 품종인 암양은 가을에 새끼를 낳았고, 그 새끼는 겨울 동안 충분히 자라서 부활절 무렵에 딱 먹기 좋게 컷다. 하지만 대다수 품종의 양은 봄에 새끼를 낳아 겨울에 먹어야 했다. 혼란스럽게도 이제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스프링 램을 먹길 원해서 업계에서 말하는 스프링 램은 "풀밭에서 자라다가 한해의 특정 계절이 아니라 적당한 무게가 되었을 때 도살되는" 양에 불과하다. 이런 점을 모두 감안하면 `스프링 램`이라는 명칭은 결코 믿을 수 없다. 지구상 어딘가에서 적어도 4월쯤에 초원을 즐겁게 뛰어다니던 양의 고기가 접시 위에 놓여 있다는 기분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려는 이름일 뿐이다. (p.74)

이렇게 메뉴에서 요리 이름은 미각적인 즐거움, 입에 닿는 흥미로운 느낌, 자연과의 교감, 윤리적 책임, 요리에 응용된 과학, 편안한 분위기에서 기꺼이 제물로 마쳐진 고기, 혐오스럽지 않은 이름의 생선을 약속하며 심지어 야유까지 담아낸다. 이런 모든 전략을 펼칠 때 메뉴는 매우 입에 발린 방식으로 손님이 식별력이라는 미묘한 안목을 갖춘 듯 느끼게 한다. 메뉴는 문학적 산물로 실제로 영향력이 있다. (p.81)

푸디즘의 또 다른 면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선호이다. 이국풍 음식에 대한 찬미는 주류의 가스트로포르노가 아니라 일종의 고금 페티시 성애물이라 하겠다. <펫덕 요리책>에 나오는 요리법의 매력이라 할 만한 것은, 누가 봐도 혐오스러운 조합(달걀과 베이컨 아이스크림, 올리브와 가죽 퓌레)으로 이루어진 참신함이 전부이다. (p.99)

유기농 식품에 대한 몰두는 쾌락적 폭식을 겨냥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현대 푸디스트의 가장 야심찬 방식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이다. 먹을 것에 대한 푸디스트의 병적인 집착이 단순한 방종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하는 방식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올바른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윤리적인 행위라는 것. 따라서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을 보는 것은 한 개인의 도덕적 우월함을 행사하는 것이다.(p.173)

음식은 상상 속으로의 여행이 아닐지라도 위로를, 특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기에 위로를 준다. 다른 모든 상황이 예측할 수 없이 돌아갈 때, 음식은 기댈 만한 위안물이다. 리처드 고드윈 기자는 삼십대 친구 중 상당수가 아파트를 살 경제적 여유가 없고, 아이를 가지는 시기도 미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대신 그들은 페이스북에 자신이 먹은 음식 사진을 올린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관대하게 보자면, 음식을 통해 다른 곳에서 부족한 위로를 받으려는 게 아닐까." (p.192)

현대의 푸디즘은 희귀한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엄청난 노력이거나 최소한의 노력. 그 중간이랄 것은 없다.(p.201)

이는 음식 문화의 격이 떨어진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 문화의 질적 하락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영국과 다른 유럽에서 많은 사람이 매일 저녁 집에 돌아와서 요리를 하고 싶어도 요리할 시간은 물론 정신적 에너지도 내지 못한다. 인스턴트식품을 먹으면서 혐오스럽고 무지하다는 소리까지 들으니 이러한 존재론적 상처에 모욕까지 끼얹는 셈이다. (p.203)

`딜리아의 클래식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재미 삼아 요리해 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추가로 돈을 내야 하는 현실을 보여 준다. 특히, 지적 노동이 증가하는 일반적인 근무 환경에서 무형의 생산물을 다루며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런 기회를 원할 것이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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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2016-02-1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쿡방, 먹방의 인기몰이에 `음식관음증`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고 하죠.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고 음미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기쁨을 주는 행위임에는 분명합니다. 저도 자칭 미식가입네 하고 다녔지만 요즘은 너도나도 먹는 것에 집착을 하다보니 맛집 찾는 것도 피곤하고 그냥 가볍에 평가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그냥밥`으로 한끼를 해결하고 싶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행위가 도리어 -맛있는 것을 먹지 않으면 안될것같은- 압박을 주기 때문이랄까요.
어찌되었든 굳이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열망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과도하게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뽈쥐의 독서일기 2016-02-16 01:21   좋아요 1 | URL
그쵸~ 저도 음식을 진짜 좋아하긴 하는데 가끔은 쿡방이니 먹방이니 좀 과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먹방같은 건 영국 잡지에서 `korean food porn`으로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해요. 저도 희안한 곤충 먹는 방송은 찾아본 적도 있어서 뜨끔합니다요.ㅎㅎㅎ
어느 순간 궁극의 한끼를 찾아먹는 것도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트레스도 받고.. 음식이 단순히 먹은 행위만은 아니라서 그런지 여러모로 의미 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책벌레님 말씀에 힘 입어 이제 죄책감 없이 맛난 음식을 호로록~ 하겠습니다.ㅎㅎ

cyrus 2016-02-15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 연휴에 TV 채널을 돌리는데 쿡방 프로그램만 나오길래 아예 TV를 꺼버렸습니다.  쿡방 프로그램만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가 어렵습니다.

뽈쥐의 독서일기 2016-02-15 17:45   좋아요 0 | URL
그죠 명절에 기름에 목욕한 전에 질리는데다 또 남은 전탕(?)해먹어야 되나 싶은데 쿡방에서는 막 럭셔리 음식에 남은 전으로 막 햄버거 만들어먹으라 그러고...ㅎㅎ
요즘 쉐프들도 연예기획사에 속해 있는 경우도 꽤 있어서 그런지 예능감 넘치는 분 아니면 불편하게 방송하는 게 느껴져서 짠하기도 하더라구요. ㅠㅠ

cyrus 2016-02-15 17:46   좋아요 1 | URL
남은 설 음식... 오늘 점심은 떡국이었습니다. ㅋㅋㅋ

서니데이 2016-02-15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뽈쥐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뽈쥐의 독서일기 2016-02-15 20:31   좋아요 1 | URL
네 고맙습니다. 서니님도 따뜻한 저녁 시간 보내세요~^^
 
인사이드 아웃 - 한국어 더빙 수록
로니 델 칼멘 외 감독, 리처드 카인드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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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이 페이스북에 디즈니 영화 [인사이드 아웃]를 보고 이런 평을 했다. "무심코 보다가 울었다."


워낙 평도 좋았고 해서 그저 [겨울왕국]정도의 뜨끈하는 눈물이려나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나중에는 코 안이 간지러웠다. 눈물보다도 빨리 흘러내리는 콧물. 이놈의 비염. 수술을 해도 도무지 낫질 않는다. 

어떤 감정이 느껴질 때 뇌 속에서 어떤 식으로 조절하는지를 감정콘트롤 본부에서 깜찍한 다섯 캐릭터가 활약 하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시스템이 무지 미래적이라 약간 갸우뚱 하긴 했지만...  

미네소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오게 된 11살 라일리의 머리속에는 다섯 가지 감정이 산다. 기쁨이, 슬픔이, 까칠이, 버럭이, 소심이 다섯은 나름대로 제 역할을 든든히 한다.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는 소녀의 감정은 다행스럽게도 주로 기쁨이다. 기쁨이는 넘치는 에너지만큼 기쁨이는 주도권을 잡고 나머지 넷을 지휘한다. 자신과 상극인 슬픔이에게는 유독 박하다. 

기억은 구슬로 이뤄져 있고 그 중에서는 행복한 주요 기억 다섯개가 제일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기쁨의 색깔인 주황색으로 반짝인다. 가족, 우정, 정직 등의 행복의 섬이 라일리의 머리속에 둥둥 떠서 소녀를 받쳐준다. 외동딸로 사랑을 듬뿍 받은 소녀가 낯선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게 기쁠리는 없다. 계속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삿짐 차는 안 오고 상황은 꼬이기만 한다. 자연스럽게 슬픈 감정으로 가려하는 라일리.

하지만 소녀의 감정 콘트롤 본부에서는 활발하고 주장이 강한 기쁨이가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를 못한다. 슬픔이가 구슬에 손대는 것을 저지하려다 몸싸움이 일어나고 둘은 기억 저장소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이래서 감독이 중요하다는 거겠지. 남은 까칠이, 소심이, 버럭이 셋은 자신들의 성격만큼 오래 감정 콘트롤을 해본 경험이 없다. 셋은 계획없이 엎치락 뒤치락 하고 기쁨이와 슬픔이는 주요 기억을 가지고 본부로 돌아오려고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삐뚤어진 라일리는 계속 사고를 치고 좋았던 '기억의 섬'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리고 만다.

기억의 섬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인 본부로 가는 기차의 정차역이 하나씩 없어진다. 더 우울해지는 슬픔이와 어느 순간에도 긍정적인 기쁨이는 둘이서 온갖 구상을 다 하고 기억의 장소를 여기저기 떠돌아 다닌다. 그 중에서 기억 저장소에서 만난 빔보. 기쁨이는 누구보다도 빔보를 기억하고 있다. 빔보를 코끼리와 여러가지 동물을 합친 어린 라일리의 상상속 친구. 라일리는 빔보와 함께 하늘을 나는 바퀴달린 마차를 타고 신나게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빔보는 멍청하지만 언제나 즐겁고 라일리를 위해주며 아름다운 상상력, 혹은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몸집 거대한 친구다. 그것이 책임감 강하지만 자기 중심적인(대박 오만한) 기쁨이가 빔보와 함께 기억의 무덤에 빠졌을 때, 그리고 빔보의 희생에 코등이 뜨끈해져 눈물을 줄줄 흘렸던 이유다. 우쒸 방심했어. 근데 더 슬픈 건 내 빔보가 기억이 안 나는 것. 난 코끼리보다는 여우같은 걸 더 좋아했으니 분명 그런 모양일텐데 도무지 기억이 안나는 거다. 덕분에 평소에도 활약하고 있는 버럭이만 더 활활 타오른 상태. 어쩌면 좋니.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기억의 무덤에서 빔보가 희생하는 장면은 베스트이지만 그 전에도 기쁨이가 슬픔이 덕분에 자기가 마음껏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중요 포인트. 사람은 조증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때로는 슬픔에 기대서 위로와 힘을 받기도 한다. 다행히 착한 기쁨이는 그것을 깨닫고 빔보의 희생을 발판 삼아 본부로 돌아가는데.... (이건 스포일런가.. 근데 디즈니는 항상 해피엔딩이니까.)  

라일리는 결국 라일리의 밝음, 아니 평점심으로 부모를 (불행으로 부터) 구하고 역시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사춘기' 버튼이라는 복선을 남겨둔 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을 사춘기를 어찌어찌 넘어가듯이 라일리도 잘 넘어갈 것이다. 기쁨이의 활약을 무시한 채. 그리고 디즈니의 여느 주인공처럼 좋은 어른이 될 것이다.
  
무심코 울어 버린 디즈니 영화. 물론... 내 인생의 디즈니 영화는 언제까지나 [인어공주]다. 안드레센은 너무 가혹하단 말이야! 아무리 원작의 비유가 딱 떨어질지라도. 언제나 [인어공주]의 사운드 트렉을 듣고 자란 나는 행복한 꿈을 꾸며 수영따윈 전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긴 했지만 언제나 아이큐 한자리의 물고기를 좋아하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나의 빔보는 누구였을까. 더럽게 정리도, 버리지도 못하는 성격을 가진 나지만 빔보를 쉽게 버렸던 나를 스스로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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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 [유미의 세포들]도 감정 세포들이 머리속에서 싸우는 내용이다. 수요일마다 아주 재밌게 보고 있다. 주인공 유미는 삼십대 직장 여성이라 복잡한 세포가 아주 많다. 재밌으니까 추천! (근데 동화처럼 '아름다운' 내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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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에 라일리에게 한 눈에 반하는 꼬마 남자아이가 나오는 특별 영상도 있다. 완전 재밌다. 남과 여의 차이라고 봐도 되려나.
꼭 미드 [모던 패밀리]의 필을 보는 것 같은 라일리의 아빠.

https://www.youtube.com/watch?v=xeafFsiaUeU

근데 아직도 3D에는 당최 적응이...ㅠㅠㅠ 얘네 무슨 인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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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피어스 (2Disc)
토드 헤인즈 감독, 케이트 윈슬렛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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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저자가 쓴 [밀드레드 피어스]. 꽤 오래된 소설이다. 옛날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를 떠올리면 쉽다. 이미 영화화도 한 번 되었다. 아주 오래전 흑백영화로.

[포스트 맨~]은 영화와 책으로 이미 만났었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정수다운 깔끔하고 감각있는 대사를 읽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제목에 낚여서 따뜻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격없는 남녀(년놈)의 개같은 사랑이야기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번뜩번뜩한 대사로 읽을 수 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옛날 타블로이드지의 기자가 와서 번쩍 번쩍 플래쉬를 깨뜨리며 무기같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문장이 "정오 무렵 건초 트럭에서 쫓겨났다."라고 시작하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다. 카뮈도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이방인]을 썻다고 하니 강추해보고픈 책이다. 

배경은 대공항 시대 미국, 글렌데일. 솜씨 좋은 가정주부 밀드레드는 넓은 집에서 깨끗한 앞치마를 두르고 케잌을 굽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성숙하고 예쁜 첫째 딸과 그저 귀여운 둘째 딸을 키우고 있다.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남편은 외도를 하고 그걸 문제삼는 밀드레드와 두 딸을 냅두고 나가버렸다. 아주 나간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감과 가끔을 집을 가지러 그는 집에 들렀고 올 때마다 두 딸은 아주 기뻐했다. 철없는 둘째딸은 별 생각이 없어보였고 거의 사춘기에 들어가는 첫째는 가시돋친 말을 한다.

1930년대에는 위자료 같은 개념이 별로 없었는지 경제가 엄청 어려워서 그랬는지 밀드레는 점점 생활에 쪼들린다. 모든 사람이 그랬지만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은 더 절박해지는 법이다. 밀드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서 타이핑같은 일을 주선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직업소개소에서 밀드레드에게 소개해준 일은 부잣집 가정부 같은 일 같은 것 뿐이었다. 모두가 '그런' 일이 밀드레드에게 어울릴 것이라 말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대저택에 면접을 보러 간다. 집사같은 사람은 나오자마자 가정부 면접을 보러 왔으면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천박한 부잣집 여자는 내가 앉으라면 앉고, 자기 집에 입주해야 하며 밀드레드의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한다. 역겨움을 느낀 밀드레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바로 들어간 음식점 겸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은근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농을 치는 손님이나 까달쟁이들을 상대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준비했다. 대공항 시대에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식당까지 내는 밀드레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점점 돈이 생기고 자유가 생기는 밀드레드. 예전 남편의 사업파트너(남편을 배신한 전적이 있는)의 도움으로 회사의 구색을 갖춰나가고 매력적인 애인까지 생긴다. 몬티 베라곤 역은 가이 피어스가 맡았는데 나쁘고 매력적인 남자 역할로 최고. 귀족적이고 퇴폐적인 매력을 마구 내뿜는다. 그래서 둘째 아이가 쓰러지던 날도 정신없이 그와 빠졌던 거겠지. 결국 귀여운 둘째 아이는 비극을 맞이하고 재능있는 첫째딸과 힘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

베다는 어려서부터 약간 되바라진 아이였는데, 밀드레드는 자신이 예전에는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자신의 예전 모습을 발견하고 베다를 적극지원한다. 약간 압박이 있었을 게 뻔한 이 모녀 관계는 거의 전쟁이다. 게다가 애인 몬티와도 말썽이 생긴다. 성공한 폴로 선수이자 농장 사업가였던 몬티는 대기업의 공격에 사업이 쫄딱 망하고 어설픈 자격지심인지 진심인지 잘 나가는 밀드레드와 싸움이 끊임없다. 결국 둘은 미친듯이 싸우다 관계를 끊낸다. 실은 밀드레드가 베다의 피아노를 사주지 못한 일에 스스로 마음을 다 잡은 것이긴 하지만. 

밀드레드는 그때부터 일과 가정만을 위해 열심히 산다. 하지만 적당히 재능이 있는 욕심많은 베다는 열일곱살에 피아노를 그만두기로 하고 모든 것에 다 성질을 낸다. 예전부터 엄마가 웨이트리스를 하는 것부터 못마땅했는데 자신의 재능도, 구질구질한 글린데일도 다 싫어서 밖으로 마구 나돈다. 결국 못된 베다는 부잣집 남자 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속이는 일로 모녀는 크게 말다툼을 하고... 원래 엄마를 경멸했던 베다는 그 일로 집을 나가버린다.

하지만 야망이 큰 재능있는 베다는 결국 성악가로 성공하고 다시 만난 몬티와도 결혼을 하는 등 밀드레드의 인생에는 이제 고생 끝 낙이 오는 것 같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르와르 장르가 원작이라 그런지 결말은 몹시 끔찍하다. 배우의 연기력과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커버가 안 될 만큼. 작품이 주는 교훈이 뭔지를 모르겠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마라? 여기서는 금발이겠지만. 다만 주인공 밀드레드의 강한 생활력과 생명력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예전에 [포스트맨~]의 후기를 읽었더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이 소설의 비화같은 게 있었다. 작가는 그 떠들썩한 사건을 접하고 자기 동네 주유소에 일하던 여자를 보고 "왠지 이런 여자가 그런 일을 한 것 같군" 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진짜 범인이었다는 일화가 실려 있었다. 밀드레드 피어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아낌없이 주는 생활력 강한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이야기. 물론 배신하는 당사자들은 그녀에게 "너는 돈으로 나를 지배하고 잡아두려 했잖아"와 같은 말을 했지만. 어쨌든 베타 이 X는 시청자 입장에선 이해 못 할 순도 100%의 '쌍년'인 것은 분명하다. 

뭐 사실 르와르, 추리 영화같은 데서 교훈 따위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차 있어!' 같이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보고 부르르 떨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작품이다.  


* 사족1 : 장녀 베다 피어스가 소프라노가 되어서 공연하는 노래는 조수미가 불렀다는 야로.
* 사족2 :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완벽했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연기 구멍은 찾기 힘들다. 아역 배우까지도. 드라마지만 영화같은 작품.
* 사족 3 : 보다가 포기한 미드 [길모어 걸스]가 다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드지만 미드같지 않은 미드는 시종일관 내가 어릴 때 '미미'의 머리를 빗어주던 아름다운 모녀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10대 미혼모가 이렇게 아름다우려면 그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나보다 똘똘하고 얌전한 여자아이를 낳으면 된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며 괜히 성내다 그만 본 드라마. 생각해보면 [소공녀]와 [작은 아씨들]같은 따뜻한 인성과 감성을 가진 여자 아이들이 나오는 책을 조금 읽다가 휙휙 던져버렸는데 사람은 취향도 별로 바뀌지 않는다. 
* 사족 4 : 30년대 복식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성 패션을 보는 것 만으로도 최고. 불편하긴 하지만 블라우스나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으면 저절로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속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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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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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읽지 마셔요. 절대 절대!!)


요시다 슈이치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아주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감정 '뚝뚝'이 흐르지 않는 문체에 예리하면서도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서늘한 느낌도 없다. 하드보일드 문체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도 과하면 지겹다. 너무 '가오'잡는 거 아냐? 같은 괜히 삐뚤어진 마음도 들기까지 한다. 일부러 찾아본 건 나지만.


'이 사람이라면 어떤 시선으로 볼까?'라는 질문이 항상 드는 작가다. 특히 감상적이지 않은 '악인'이라는 제목에 요시다 슈이치라면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 정의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책을 집었다. 책을 덮고 나는 세상에 찌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쏘시오패스 같은 걸 생각했다. 미드를 끊어야 하나.



---------------스포일러 있는 줄거리


이야기는 263번 국도 미쓰세 고개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이 고개는 예전부터 음침하고 기분 나쁜 소문이 끊이질 않았지만 고속도로에 비하면 요금이 적어 이 루트를 선택하는 사람이 꽤 있다. 고개에는 주로 귀신을 봤다거나 하는 괴이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낮이라도 나무에 둘러쌓여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요금을 생각하면 꾹 참고 갈만한 곳이었다.


여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이시바시 요시노라는 보험사에 다니는 20대 여성.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자 경찰은 빨리 조사에 착수한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사택에 거주하면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요시노는 살해된 밤, 친한 동료 2명에게 클럽에서 만났던 부유한 집 자제인 날라리 마스오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게다가 그 마스오는 하필 행방불명 상태. 강력한 용의자 마스오는 방송에서도 저격당하고 형사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다.


참고인 진술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된다. 일단 그녀와 친한 동료 2명, 마코와 사리에게 진술을 받는다. 순진한 마코와 적당히 연애를 해본 사리의 기억은 다르다. 인간 관계는 무척 상대적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마코에게는 요시노는 미주알 고주알 거의 모든 걸 말했지만 막상 취조 비스무리한 걸 당하자 마코는 사건 있던 날 있었던 평이한 이야기만 한다. 사실 마코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왜 그런지 요시노한테 그 날 있었던 일 정도만 얘기를 하고 끝을 낸다.


아무리 둔한 여자라도 나쁜 직감은 대체로 잘 맞는다. 요시노는 그 날, 두 동료한테는 날라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사실 그 날 그녀가 만나러 간 남자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유이치였다. 부잣집 날라리는 답장만 꼬박 할 뿐, 먼저 만나자는 얘기가 없어 자존심이 상하던 중에 손쉬운 남자 유이치를 만나 어느 정도 목적(?)을 취하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요시노는 그날 밤 우연히 유이치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마스오를 만나고 바로 눈 앞에서 유이치를 물 먹이고 마스오의 차에 올라탄다. 마스오는 하필 그 날,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았다. 스스로 '싼티'나는 여자가 취향이라고 했지만 저녁으로 마늘을 먹고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는 요시노가 너무 짜증난 그는 "어디서 마늘 냄새 안나?" 냐며 모욕감을 준다. 하지만 요시노는 껌을 씹으면서도 계속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술을 마시고 운전하고 있던, 짜증이 극에 달한 마스오는 왠지 이런 여자가 살인을 당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너무 화가난 나머지 미쓰세 고개에서 요시노의 등을 뻥차면서 떨궈 버린다. 


이게 사건의 정황이었고 당황해서 잠적한 미스오가 다시 잡혀서 수사에 혼선을 빚기까지 사건의 정황이다. 소설의 반 이상은 살해된 그녀가 진짜 만나려고 했던 유이치를 쓰는데 할애한다. 유이치는 묘하게 남자다운 구석은 있지만 말수도 없고 음침한 남자이다. 게다가 자신과 비슷한 교육과정을 밟고 오지 않은 유이치와는 할 말이 더더욱 없다. 이 따분한 남자와의 만남은 결국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간다. 평범한 여자인 요시노는 생각보다 깜찍한 모양새로 남자들과 만났고 그녀와 비스무리한 경험을 했던 남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뒤흔들까봐 무서워한다.


가해자는 여전히 잘(?) 살아간다. 조용히 은밀하게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일도 계속 이어간다. 친구도 말수도 아주 적은 이 젊은 남자는 실은 아주 외롭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도 버림 비스무리한 것을 받았을 때도 늙고 병든 조부모의 팔다리 노릇을 할 때도 말없이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그를 취직도 시켜주고 애정있게 봐주는 외삼촌도 여자도 만나지 않는 그를 안쓰럽게 볼 뿐이다. 거의 세상과 교류없이 사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방식은 그렇게 타당하지 않다. 인터넷과 매춘 등으로 여자를 만나지만 여자가 생각없이 뱉는 달콤한 말에 쉽게 의지하고, 스치듯 다른 남자를 떠올리는 말에는 크게 분노하는 아주 외로운 남자였다.   


외롭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서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된다해도,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에 끌리는 법이다. 따뜻한 곳으로 가기 위해 현실의 일이나 이성 쯤은 쉽게 마비된다. 암울할 일만 더 심해질 그의 삶에 나타난 한 뼘의 따뜻함에 그는 무모한 도주를 결심하게 된다. 

 

--------------------------- 대충 줄거리 끝.



유이치의 외로운 삶은 그를 결과적으로 괴물로, 악인으로 만들었지만 온전히 자신만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방임된 삶, 그를 같잖게 보는 시선,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격. 하지만 유이치는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원했고 온기가 있는 곳에는 무모하게 뛰어드는 면도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유이치이지만 '악인'은 꼭 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살해된 요시노, 건방진 양아치 마사오 같은 평범한 이들은 쉽게 유혹에 빠지고 순간적으로 쉽게 악해졌다. 또 유이치를 버린 생모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가버린 직업 여성,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은근히 유이치에게 기대고 마는 할머니도 어느 정도 유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과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누구한테는 기분 나쁘고 싫은 사람이 누구에게는 귀엽고 좋은 사람이 된다. 살해된 요시노는 부모에게는 고명딸이지만 만남 사이트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는 굉장히 귀여운 여자, 마스오에게는 천박한 여자애, 마코에게도 만남 사이트같은 데서 남자를 구하는 애라는 최종적인 평판을 얻는다. 또 나중에 그와 도주를 결심하는 여자 미쓰요는 쌍둥이 동생에게는 왠지 섬뜩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겉으로는 성숙한 장녀언니고 유이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뜻한 여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유이치는 친모에게는 돈이나 뜯는 나쁜놈, 할머니에게는 왠지 여성의 본능을 일으키는 사랑하는 손자, 요시노에게는 왠지 기분 나쁜 놈, 미쓰요에게는 눈물 짓게 만드는 아련한 사람.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지만, 약인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빼면 악인이다. 사실 징글징글한 악인만 아니면 대체로 처음에는 약인이었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악인으로 변한다. 점 하나를 빼듯이 자제심을 빼버리고 나면.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약하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도저히 그 남자에 관한 말은 젊은 형사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면 자기도 요시노 같은 부류의 여자로 보일 것 같았다. 만남 사이트 같은 데서 남자를 구하는 여자의 친구.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젊은 형사에게 말할 수 없었다. (p.95)

미아는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아 같은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나 같은 남자가 20년이나 잊지 못할 말을 건네주는 여자였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p.278)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p.439)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p.448)

그런데 그 사람, 제 예상과는 달리 "원치 않는 돈을 뜯어내는 것도 괴로워"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안 뜯어내면 되잖아"라며 웃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 라고 하더라고요.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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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30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뽈쥐님, 좋은 저녁 되세요.^^
 
언틸유아마인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일화 1> 방학 때마다 우리집 세 모녀는 같이 주부를 위한 아침 프로를 즐겨봤다. (요즘은 '실제상황'에 흠뻑빠졌다.) 주부들이 좋아하는 주제는 요즘과 변함이 없다. 살림의 달인이 될만한 유용한 살림살이 방법, 시집 스트레스 토로, 바람피는 남편, 말 안 듣는 애들... 최대한 자극적인 문구로 시청자를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잡아 놓고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별 것(?) 아닌 그런 이야기가 아침 한 시간 정도 방송된다. 특히 기억에 남는 제목은 '세번째 부인의 눈물'. 하긴 주 5일 매일 한 시간씩 시청률을 온전히 유지시키는 것도 힘든일이다. 이 좁은 나라에서 매번 쇼킹한 일이 일어날리도 없으니까.


완전한 타인의 인생이라고 '에이 이번 건 별로네~', '완전 낚였구만!' 같이 신나게 입방아를 함부러 찧으면서 마른 빨래를 열심히 접으면 아침 일과가 대충 끝나곤 했다. 


이것도 꽤 몇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때 였으니 거의 십년 전일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한선교와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핫 했던 정은하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한동안 프로젝트로 난임부부 클리닉을 지원해주는 코너를 꾸렸다. 요즘이야 인공 수정이니 뭐니 가격도 많이 내려가고 비교적 흔한 수술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쉬쉬하는, 생소한 일이었던 것 같다. 광고인지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술비를 지원받은 몇 커플이 사생활을 어느 정도 공개하고 힘겹게 아이를 갖는 모습이 몇 주에 걸쳐 방송을 탔다. 나는 별 생각없이 담배 피는 남편 하나에 뜨악했고, 엄마는 혀를 찼다. 여자가 고생을 얼마나 하는데 지는.. 이라며 인상을 팍 찌푸리던 엄마 뒤에서 난데없이 성이 난 언니 왈,


"세상에 사랑을 못 받고 자라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몸 고생 마음 고생하면서 자기 애를 낳아야 돼? 그냥 입양하면 서로 좋은 일이잖아."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로취, 그로취를 연발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갑자기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성을 팍 냈다. 그 후에 따발따발 반박이 이어졌는데 기분이 상한 엄마의 얼굴이 너무도 험악해서 그날 분위기가 아주 엉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논리로는 완벽한 언니의 승리. 엄마는 "임신을 하고 싶을 때 못하면 여자로서 자괴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에 왜 여자로서의 가치를 거기서 찾지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사실 지금도.  


일화 2>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유모'대신 우리를 봐줄 파출부 아주머니를 고용했다. (어느 표현이 정확한 줄은 모르겠지만 왠지 유모는 낯간지럽다. 실제로 젖은 엄마가 다 먹였으니.) 아이보는 일은 중노동이라 아주머니는 자주 바뀌었다. 가끔 아무 말없이 안 나오거나 끼니도 안 챙겨주는 책임감 없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손녀를 잘 돌보는지 감시하러 자주 오는 울 할머니 때문에 울분을 토하며 그만두시는 분도 있었다. 그만큼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란 상대적이고 어느 시대나 일이나 가정이나 워킹맘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물론 그 분들도 힘들게 일하셨겠지. 애 봐주는 일이 보통 까다로운 일도 아닌데. 


그 많은 아주머니 중에서도 잘 해줬던 아주머니는 생각나는 법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만 내 기억 속에 남아 나를 돌봐줬던 사람하면 지금도 그 분만 딱 떠오른다. 왜냐면 그 분은 언니랑 나랑 사이에서 나를 유독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유치원을 늦게 간 나는 아주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맞벌이 자녀가 그런 경향이 있듯이, 나는 항상 조금씩 주늑이 들어있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애정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맙고 힘이 나는 일이다. 나도 그 아주머니를 참 좋아했다. 


최근에 엄마한테서 들은 얘긴데 그 분이 나를 너무 좋아해서 어느 날, 나를 하루 데리고 가서 자도 되냐는 청을 받았다고 했다. 엄마도 순진했는지 그냥 날 예뻐해줘서 고마워서 그래도 된다고 흔쾌히 승낙했는데 그 얘길 들은 할머니가 노발대발해서 다시 물렀다고 했다. 엄마도 순간적으로 무서웠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한테는 아기가 없었다고 했는데 남편 쪽이 문제가 있다가 아예 판정을 받은 상태였단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나는 시큰둥하게 모든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하여튼 할머니가 유난스럽긴 했구만, 하고 혼자말만 하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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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냐하면 이 작품이 스릴러인 까닭에 자칫 스포일러를 흘릴까봐서다. 간이 원체 작아서 공포같은 걸 잘 보지도 못한다. 추리소설 매니아한테는 본 작품의 트릭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임신에 대한 미저리같은 열망을 알아야 몰입해서 공포를 배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가족 간의 끈적한 관계를 별로 안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용보다는 설정이 무섭고 몰입이 힘든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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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이 살아 돌아왔다!
독자를 속이는 맥거핀 기법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

클라우디아는 간절히 바라던 아기를 임신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멋진 집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수상한 가정부 조가 그녀의 삶에 끼어든다. 조는 장차 태어날 아기를 돌보며 클라우디아를 도와주러 왔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조가 미덥지 않다. 조가 자신의 침실에 있는 모습을 보고 클라우디아의 불안감은 점차 두려움으로 바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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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출판사에서 뒷 표지에 쓴 줄거리. 저자 소개에 맥거핀 기법을 설명하면서 던진 '떡밥' 이야기 때문에 머리를 많이 쓰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냥 후루룩 읽어 버렸다. 원래 추리 소설을 읽는 맛이란 게 내 뒤통수를 얼마나 퍽퍽 때려줄 지 기대하는 맛도 있으니깐. 머리 굴리지 않고 열심히 읽은 덕에 마지막에 몰아치는 반전에, 반전에, 반전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추리소설 매니아라면,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겁이 많아 추리소설을 못 읽는 탓에 마지막 페이지는 숨가쁘게 넘어갔다.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지만 킬링타임용으로 하루이틀이면 읽을 수 있다. 문체도 무겁지 않아 술술 읽히는 편이다. 비교적 남자보다는 여자가 조금이라도 몰입하기 쉬울 것 같다.


클라우디아, 조, 로레인 경장 3인 여성의 서술 시점을 열심히 따라가보면 추리극 중간 중간 여성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텁텁함 심정 묘사도 아주 잘 된 편이다. 작가 사만다 헤이즈는 아카데미형 작가라기 보단 체험형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체험형 작가만이 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글을 오랜만에 읽어서 기뻤다.  


워낙 드라이한 인간이라서 그런지 인생경험 부족인지 아이한테 미친듯이 집착하는 것 자체가 몹시 의아스러웠다. 그래서 읽는내내 위에 일화가 생각이 났다. 아직도 내 식견으로는 이해가 잘 안 가지만 두 번째 일은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이래서 남의 애는 봐줘봤자..라는 거겠지?) 아주머니께 내가 너무 죄송하다. 


*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해두고 싶다. 그 아주머니는 그 일로 우리집 일을 그만두시진 않았다. 그만두고도 우리집 한 번 놀러 오신 적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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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28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뽈쥐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