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의 영향으로 BL 장르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벌써 취향도 나름 확고하다. 나카무라 아스미코는 국내에도 매니아층이 두터운 모양인데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동급생]이 영화화되서 지금 프로모션 중인 것같다. 배너를 보고 리뷰를 쓰자고 결심했다.


만화 그림체에는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라 왜곡이 심한 인체 모형도 적나라한 형태도 다 봐줄만 하다. 가끔은 좀 징그럽긴 하지만. 예쁘장한 여장 남자 J를 구체 관절인형처럼 표현해서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느낌이 나기도 한다. 모든 인물이 길쭉길쭉 다 징그럽게 늘어져 있는데다 눈동자가 텅 비어있다. 신경질을 부리는 장면은 정말 딱 맞을 정도로 노이로제스러운(?) 미학이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자면 팀버튼스럽다고나 할까. 괴기한 느낌으로는 팀버튼보다 위다. 아무튼 그림체에는 징그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문제는 스토리. 3권으로 끝난 작품이라 지구력 부족한 독자인 나는 처음부터 쾌재를 불렀다. 다 읽고는 찜찜한 마음에 10권은 그려서라도 이렇게 끝내선 안 되는 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용두사미, 찜찜한 해피엔딩이라고 간단히 치부하기엔 J에게 지워진 삶의 불행한 사건이 너무나 끔찍했다. 현실에는 분명 존재하기야 하지만 J의 생명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기엔 너무너무 불쌍하잖아! 그리고 등장인물을 그런 식으로 존경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히 매력이 없는 이야기다. 아니면 내가 엄청 부아가 나는 이야기거나.


괴기스럽게 아름다운 그림체처럼 처음 1-2권의 이야기는 몹시 섬뜩하면서도 끌린다. 이야기를 하는 현재의 시점은 1980년대. 취재에 응한 J는 마릴린 먼로의 복장을 하고 다리를 꼰채 담배를 시원하게 피고 있다. 1960년대 뉴욕 클럽에서 최고의 가수였던 J의 롤모델은 당연히 50년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마릴린 먼로. 어릴 때부터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한 J는 마릴린 먼로가 나오는 영화관에 숨어 들어가거나 엄마의 슬립을 입고 악세서리를 착용해서 남부출신의 카톨릭 신자 엄마한테 혼나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J의 우상. 자동차 공장에 다니며 엄마에게 혼나는 J를 언제나 보호해주고 요상한(?) 짓을 하는 J를 귀여워 해주었다. 행복한 생활은 계속 이어지기 힘들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화로 바뀌는 혁명으로 아버지는 공장에서 짤리고 매일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술에 빠져사는 생활이 이어졌다. 


비극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술에 빠진 아버지는 자신의 예쁜 아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만다.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가 그 장면을 발견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하는 아빠의 죽음을 피부로 확인한 J.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린 J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 후로 고아원에 가게 되고 최악의 1년을 보낸 J는 예쁜 외모로 명문가에 입양되게 된다.


명문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만나게 된 일생일대의 사랑 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지만 아직 1960년대 미국은 아직 인종차별도 심해서 용기를 낼 수 없던 폴은 심한 말을 하게 된다. 상처를 받은 J는 그대로 클럽같은 곳에서 빠져나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예쁜 외모와 끼, 약간 광적인 성격으로 인해 J는 최고의 가수이자 잘 팔리는 엔터테이너가 된다.


J는 겉으로도 예쁜 여자로 보였지만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이기도 했다. 폴을 시작으로 클럽의 매니저인 모건을 흠모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불량배같은 친구에게도 알게 모르게 애정을 품기도 한다. 순정적인 J이지만 모건이 진짜 사랑하는 여자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나서 은근히 이용해 먹기도 하는 독사 같은 면도 있다. 하긴... J는 모건을 위해 모든 더러운 일까지 감해냈으니 그 정도쯤은 눈감아 줄 수 밖에...


의외로 보수적인 동네인 미국에서, 특히 1960년대라는 촌스럽고 폭력적인 시대를 묘사하는 2권의 장면은, 표지그림 못지 않게 끔찍했다. 잘 나가는 여장남자인 J를 혐오하는 정치인이 내뱉던 말 같은 것들. 기름진 미소를 짓는 정치인은 말한다. "나는 말야, 정직하고 강하고 깨끗한 미국을 만들고 싶을 뿐이야."


이런 저런 일을 겪고 부랑죄(?)같은 걸로 한달 정도 감옥에 잡혀갔을 때 J는 운명의 상대인 폴과 재회한다. 폴이 변호사로 오게 되어서. 사무적인 이야기를 하는 폴에게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냐는 말을 하는 J. 그리고 돌아가 나가려 하자 폴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J를 사랑했던 여자아이가 J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마릴린 먼로의 죽음과 자신의 아이, 갑작스런 폴과의 재회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J는 간수를 꼬아내 사고를 치는 등의 일을 벌여 J와 폴의 운명은 계속 엇갈리기만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랑을 믿는 순수한 J와 폴은 우여곡절, 격한 사랑 싸움 끝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단단하게 다지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꾸미기 좋아하는 예쁜 J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폴과, 자신을 닮은 예쁜 아이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에 둘러 쌓여서.

 

나는 BL을 약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는 성소수자는 어찌되었든 사회에서 약자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약자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BL은 작품성이 좋은 경우가 많아서. 게다가 어두운 사회를 그리는 것도 많아 배경도 독특하기 때문이다. 뭐 약간(?) 에로틱한 장면은 덤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으로 주인공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힘이 든다. 마지막에 당근을 주듯이 해피엔딩을 급 맞이하는 것도 그래서 더 속상했다. 어린 시절을 트라우마를 그런 식으로 보상하지 말라구!!


이 작가의 다른 책 <동급생>이 영화화를 한다는 것 같던데 이 작품이 좀더 대중적(?)이고 팬 양산을 많이 작품인 듯하다. 제목에서 보듯 풋풋한 느낌으로 이끌어 가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동급생> 이 책이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원래 그런 풋풋한 류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인 것 같은데 나는 조금 예외적인 작품을 읽은 것 같긴 하지만... 용두사미 식의 결말만 아니었으면 1,2권, 3권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흡입력이나 규모면에서는 독보적이다.


이런 그림체에서 풋풋한 느낌은 생각하긴 어렵지만 앞으로도 가끔 보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ex Signs - 여성을 위한 심리점성학
주디스 베넷 지음, 신성림 옮김 / 이프(if)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중에 소설은 전혀 안 읽는 사람도 많다. 자기계발서, 실용서, 인문 경영학 저서, 외국어 학습서 등등... 처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재미없는 책만 계속 읽을 수 있단 말인지 놀랐지만 그들도 나에게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역시 세상은 다양한 사람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을 무의식적으로 약간 폄하했던 나를 반성했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더 잘(?) 나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협소한 관찰에서 나온 의견입니다.)


나는 사실 영양가 없는 소설만 읽는 게 아니다. 더 영양가 없다는 만화책도 읽고 가끔 한 두 편만 겨우 읽을 수 있는 시도 산다. 내가 사는 책 중에 가장 실용적인 분야는 잡지와 요리서밖에 없다. 그런데 가끔 꽂히면 미친 듯이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책이 있다. 바로 심리학서. 그리고 점성학, 사주같은 책들...

고등학교 3년을 미션 스쿨에서 보내고 졸업 후에도 힘들 때마다 교회를 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어보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일요일에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는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늘 포기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하루에도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내게 불행도 슬픔도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해 신께도 의지할 마음을 쉬이 접고 마는 문제가 더 근본적이지만.

종교도 잘 갖지 못하고 숫자 4가 재수가 없다느니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 떨어진다 따위의 미신을 잘 믿지 않지만 나는 희안하게 점성술을 잘 믿는다. 사주도 조금. 혈액형은 진짜 어쩌다 한 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어날 시간이나 온 몸을 돌아다니는 피 유형이 내 인생을 뭘 결정지어준다는 건지 연관성 따위는 없지만 사람이 그리 팍팍하게 살면 쓰나.

실제로 내 독서 사이클을 보면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이런 희안한 책을 찾는 경향이 있다. 몇 년이나 전에 절판이 되었지만 요즘은 중고시장의 힘으로 결국 손에 넣은 책. 전에 학교 여성학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보고 몇 달전에 결국 구매했다. 시기적으로 많이 힘들었었고 또 역시나 이런 책에서 자그마한 구원이라도 얻어 볼까해서 열심히 찾았다. 

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처음에 느꼈던 감동(?)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요 몇 년 사이 조금 더 고차원적인 인간이 되었거나 아니면 좀 더 시니컬한 인간이 되었거나. 애시당초 스스로 찾아야할 자기 정체성을 별자리에 기대보려는 알량한 생각도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점성학 책 중에 가장 애정하는 책이다. 의외로. 의외로! 저자가 심리 상담사를 꽤 오랜기간 하면서 여성들의 고충을 듣고 나름대로의 점성차트를 만들어 분석한 내용이라 꼭 자기의 별자리가 아니더라도 딱 맞는 유형이 있다. 10년 전의 혈액형 심리학보다 오늘의 혈액형 심리학이 더 맞는 것처럼 나름 점성학 같은 것도 오랜 관찰의 결과, 심지어 심층적인 관찰의 통계라 맞는 부분이 많다.

뭐 이런 것들이 무조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믿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사주 시장이 엄청나게 큰 것이 그들이 일종의 정신 상담사 역할까지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점을 보러 가겠다하는 건 위로를 받고 싶다는 희망의 표시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별자리도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위치가 변하듯이 자신의 흐름도 변하고, 태양의 위치를 중심으로 변하기 때문에 꼭 자신의 별자리만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35가지의 특성을 보고 자신과 가장 맞다고 생각되면 지금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제목이 Sex Sign인 만큼 자기의 욕망을 확인하고 사랑을 주고 받는 일, 인간관계를 정립하고 분노를 이해하는 데 이용하면 좋다. 다만 여자에 한해. 그러고 보니 왜 남자를 위한 심리 점성학 책은 없는 것일까... 아마 큰 고객이 되기 힘들어서?

나는 원래 게자리인데, 뭐 아주 틀린 점이 많지는 않지만 나는 게자리에서 제시하는 그리 (남의 평가로)편안한 여성은 아니므로 역시 건너 뛰기로 하고 다른 것을 찾았다. 읽다보면 별자리 중에 서로 비슷한 유형도 있고 읽다보면 다른 쪽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 책을 읽을 때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정확히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그게 맞는 것을 읽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여성이 되고 싶다고 굳이 무리하며 생각을 맞출 필요가 없다.

다 들어 낼 수는 없지만 변덕스러운, 일관성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등등의 키워드에서 나는 쌍둥이자리에 가깝다고 확신했다. 요즘 팟 캐스트에서 애니어그램에 관련한 프로그램을 듣는데 거기서도 7 유형이 나왔다. 7 유형은 재미를 찾아 약간 뭐든 뛰어드는 형이라고 하는데, 여기 쌍둥이자리에서도 성격을 잘 보여주는 말이 '뛰어든다'는 말이라고. 

친구들도 새로운 것에 대한 나의 초기에만 바짝 타오르는 열정에 질린 상태이다. 다만 쌍둥이자리 여성은 대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행동에 자신감이 넘친다고 하는데... 과연...  

안 그래도 쌍둥이자리 여성이 배워야 할 점이 '권태'라고 하는데 정말 참고해야겠다. 또 공감하려는 능력을 키우는 법도 번호까지 매겨서 세세하게 알려주는 주디스 언니 짱짱. 하지만 슬프게도 저자는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이 책은 주디스 베넷의 사후에 친구, 동료의 헌신으로 이룩한 책이다. 평소 이렇게 사람을 잘 관찰하고 책을 읽는 것만으로 자존감이 높아지는 느낌을 드는 말투를 구사하는 그녀에게 이런 멋진 친구들이 없을리 없지.

마지막 장에 제시하는 '우주적 여성'은 모든 별자리를 가진 완결된 여성이다. 이 책이 점성학보다는 페미니즘에 가깝다는 것은 바로 이런 궁극적인 따뜻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심리점성학 책을 찾는다. 그렇다면 저자가 해주는 따뜻한 위로와 그럼에도 따끔하게 행복해지는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것저것 알려주는 일도 받아들어야 한다. 결국에는 우주적 여성이 목표가 되어야겠지.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행복해질 필요만 있을 뿐.  


*사족: 희안하게도 속 시원하게 뭔가 확정적인 답을 듣고 싶다가도 사주가가 즉답을 하면 바로 선무당이라고 확 반감이 생기는 건 왜일까. 역시 한 길 사람 속은 참 알 수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지 2016-06-2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읽어보고 싶네요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6-20 10:35   좋아요 1 | URL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 어릴 때 혈액형이나 별자리 책 같은 걸 재밌게 보신 분이라면 감동을 느끼면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절판이 되어 몹시 아쉽지만 중고샵에서는 그리 귀한 책은 아니더라구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ㅎㅎ
 
스트리트 페인터 - 초보 화가, 길에서 인생을 배우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수신지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길'하면 자유로움을 떠올리게 된다. 희안하게 잘 볼 수도 없는 미국 서부에나 있을 법한 끝없이 시원한 길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어느 나라 말이나 '길'은 인생이나 방식의 은유로 쓰이는데 대체로 뉘앙스가 아주 다정하지는 않다. 자유를 상징하기는 하지만 자유를 누리기는 힘든 만큼 '길거리'에서 자란다거나 구른다거나(?) 하는 것은 무지 천박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거친 종자들을 상대할 가능성도 많고 모든 걸 혼자해야 하니까.


[스트리트 페인터]는 작가가 한 때 경험한 생활 밀착형 리얼리티 그래픽 노블이다. 국내 작가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닌데 확실히 비슷한 환경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경험할 수 있는 수준높은 울컥함을 선사해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전부터 [3그램]이라는 작품을 알고 있긴 했는데.. 왠지 줄거리만 봐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만나서 감동을 받은 이유로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 용감하게 읽어 보기로 했다. 독자의 의리로!


졸업을 앞 둔 대학교 4학년 아랑은 당연히 진로와 생계를 걱정한다. 학교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온 후에도 쓴 돈이 있으니 이왕이면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가지고 싶고 미술학원 알바는 이미 신물이 난다. 학자금 대출도 있으니 걱정은 더 커진다. 특히 취업에는 쥐약인 인문보다도 더 힘들다는 순수 예술을 전공한 아랑은 직접 선택 전 돈도 벌고 경험도 쌓을 겸 일종의 직업 체험형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 마침 과 사무실 앞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고 구청에서 주최하는 '거리의 화가'에 지원해 보기로 한다.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간 자리에 아랑을 포함해서 베테랑인 것 같은 작가 4명이 더 왔다. 작품으로 말하는 그들은 모두 면접을 보고 아랑은 선배의 충고대로 '무조건 예쁘게' 그린다. 면접 결과는 지원자 수가 적어 싱겁게도 지원자 모두로 결정되었다. 어느 기간 동안 합법적인 길거리 화가로 살게 되는 아랑은 똘망하게 생기지 못한 관계로 동료(?)들에게 가벼운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자신을 구해준 떡볶이 아줌마에게도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는 식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너무 생생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거리의 화가는 일한 만큼 받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손님을 잘 끄는 게 매우 중요한데 요령이 없던 아랑은 기센 손님들과 옆에서 반칙적으로 행하는 호객 행위에 비실거린다. 돈 벌기가 쉽지 않은 만큼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많다. 앞에서 싸우는 커플, 자기가 아주 예쁜 걸 알고 있는 미녀, 애를 맡겨 놓고 한 시간이나 쇼핑하고 오는 밉살스러운 아이 엄마까지!(나도 이거 예전에 당해봐서 정말 열받았다.) 스스로 왕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 공임을 깎고 싶어 에누리 시도하는 사람들에 길에서 배우는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다. 나도 읽으면서 콧등이 뜨끈해졌다. 동정이 아니라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전공을 살려서 하는 일은 남에게서나 스스로에게나 기대가 많은만큼 실망도 크고 자괴감도 큰 일이다. 나도 졸업 후에 직장을 몇 곳 전전하면서 굳이 전공을 살리는 곳에 들어갔는데 그 때 자괴감과 한계를 느낀 적이 있어 큰 공감이 갔다. 결국 지금도 계속 얇은 끈을 구질구질하게 잡고 놓치 못하고 있지만 아랑이 유치원에 가서 하루에 100명씩 아이들을 그리며 노력하는 것을 보며 힘을 얻었다. 놀이 동산에서 귀엽게 치장하고 그림을 그리는 선배에게 붙어 대목을 노리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나 일하면서 아주 잠깐의 마약같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니 이건 노블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 중에는 대부분이 진상이지만 그래도 빛 한 줄기와 같은 노래하는 훈남이 와서 아랑의 볼을 빨갛게 물들여주고 상상속에서 결혼에 시집살이까지 하는 젊은 여자의 상상은 깜찍하고 너무 귀여웠다. 게다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려고 해도 출발선이 다른 금수저 친구를 보며 허탈감에 빠지고 마침 비까지 내려 완전 비참한 기분에 들어갔을 때 무지개 빛으로 아랑의 이름을 써주는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우아한 예술가 할머니한테서 치유를 받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맘을 먹어도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면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에 또 그런 자신이 못나보이는, 그런 바닥을 치는 날이 있으니까. 울컥 울컥.  


길거리에서 돈을 버는 것은 힘들다. 자유.. 이름은 좋지만 보험도 안 되고 날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아도 진짜 너무 힘든 일이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제공받았다는 이유로 다른 상인들의 질투를 사서 구청에 항의를 받게 된다. 구청도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민원을 처리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행히도 한 명을 짜르기도 한다. 왠지 좀 더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아저씨 베테랑 4명이지만 아랑도 학자금 대출에 학교 생활 내내 알바까지 햇을 정도로 딱한 사정이 있다. 결국은 잔인한 방법으로 한 명을 떨구기로 한다. 이름하여 실적주의로.


모두 절박한 사정으로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이가 있는 덕용 아저씨는 아이가 아프다는 사정으로 중도 하차를 하고 결국 아저씨는 탈락하게 된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은 승리. 모두 말이 없다. 아랑은 계속 생각한다. 그들과 나눴던 추억을. 그리고 자신이 빠질 것을 선언한다. 자신의 힘든 무게만큼 처자식 딸린 아버지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생각한 것일까. 남은 아저씨들은 착잡한 심정이지만 아랑에게 고마워 하고 아랑의 광고 전단지를 모두 붙이며 아랑에게 일감을 조금씩 나눠주는 따뜻한 결말로 마무리.


돈을 벌어보니 삶이 참 녹록치 않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삶의 질 또한 뚝뚝 떨어지는 걸 느낀다. 그 전에 너무 곱게 자랐다는 걸 느낀다. 평범한 삶이 어렵다는 얘기에 공감하고 현실에 타협하며 사는 것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그래픽 노블보다 더 눈물이 찔끔했던 건 현실적이고 생생한 우리 이야기를 신파적이지도 자기 연민을 하지도 않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부제가 더 마음에 든다. 초보 화가, 길에서 인생을 배우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게 삶이고 아무리 인복이고 행운이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혼자 배워서 걸어가야 하는 게 인생이란 걸 느끼고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건 없지만 스스로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인생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터문 에디션 D(desire) 4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함유선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만 폴란스키는 내가 애증하는 감독이다. [비터문]을 보고 감독을 열심히 찾아보니 예전 EBS에서 본 주말의 명화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영화 [테스]를 찍은 것도 알았고 앞으로 영원히 미국에 갈 일을 없을 거라는 이유도 알았다. 바로 스스로 일으킨 엄청난 스캔들 때문이다. 미성년 관련 범죄에 극히 엄격한 미국에서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기소됐는데 유럽에서는 자신들의 위대한 감독이라 송환 거부중. 유럽이 더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터라 무진장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미운 마음으로 본 [차이나타운]도 어머어머하고 감탄을 내지르게 하는 '악마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니 내주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게 뭐 유럽만의 일인가. 쩝.


내가 베스트로 뽑는 로맨틱 코미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휴 그랜트가 쑥맥 귀염둥이로 나와서 첫눈에 반한 여자와 정사를 치르면서 "허니문은 왜 허니문이라고 할까요? 꿀처럼 달콤해서.. 아니면 처음 본 신부의 하얀 엉덩이가 달같아서...?" 같은 대사를 친다. 하지만 [비터문]에서는 결혼 생활의 권태를 이기려 미지의 땅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부부로 나와서 좀 혼란스러웠다. 영화는 원작보다 오히려 임팩트 있고 깔끔한 결말이지만 원작의 결말은 더 끔찍하다. 영화는 당시 선정적인 장면으로 논란이 되었다는데 흡사 파밀라 앤더슨의 분위기를 풍기는 레베카 역의 배우는 감독의 실제 부인이라니, 역시 감독 이 자식.. 보통 정신 세계를 가진 놈은 아니다. 보통 남자라면 부인한테 그런 수위로 영화를 찍게 하긴 어려울테니.


영화의 끔찍한 선정성을 뒤로하고 내용은 오히려 더 끔찍하다. 허니문의 꿀이 다 떨어지고 난 후, 남은 생을 비터문의 지겨운 생활로 살아간다니. 게다가 이 공포는 꽤 현장감과 현실감이 있다. 결혼한지 일 년도 안 된 친구는 벌써 '내가 미쳐서 결혼했다'라는 말도 할 줄 알고... 나도 항상 권태의 문제로 헤어지니... 단물을 다 빨아먹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다. 특히 취미도 계층도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기가 더 빨라질테고.


원작 소설 [비터문]에서 사랑에 빠지는 단계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루주아 계급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프란츠는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댄서 지망생이자 미용사 레베카에게 홀딱 빠지고 완전 사랑꾼인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중심이 되서 돌아가는 것처럼 밤에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자신의 부루주아 친구들 앞에서 생생한 매력을 뽐내는 레베카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찰나의 순간이라서 둘은 타계책으로 온갖 음란하고 지저분한 행위를 다 해보지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둘이 깔끔하게 쿨하게 헤어지면 좋았으련만.


미련이 남은 레베카는 프란츠가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하고 자존감을 짖밟아도 생기를 점점 잃어가면서도 그의 곁을 떠날 줄 모른다.그런 레베카를 프란츠는 미워해 사람들한테서 고립시키고 심지어 낙태까지 한 레베카를 여행을 가자고 하면서 공항에서 몰래 도망치는 만행을 저지른다. 말로만 부루주아인 그는 레베카가 없어진 사이에 전에 없던 자유를 누리며 여자들을 마구 옮겨가며 신나게 놀다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러자 갑자기 병실에 나타난 레베카. 태양에 살결을 그을리고 더 예뻐진 레베카를 보고 순간 기대를 했던 그였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그녀에게는 경멸로 대할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레베카도 증오의 칼을 갈았다. 프란츠가 관심을 돌린 사이 침대의 조임을 풀러놓고 손을 잡으러 점점 다가오는 프란츠를 그대로 떨어지게 만들고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할 몸으로 만들어버린다. 프란츠는 병원의 부주의로 고소하고 그 댓가로 연금을 받게 되고 레베카는 그와 결혼하여 평생 그를 돌보게 된다. 한을 품은 레베카는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고 불구가 된 그를 오물로 방치하거나 그의 앞에서 남자들과 심지어 그의 아들과 관계를 갖는 등의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인도로 가는 크루즈를 타고 디디에와 베아트리스 부부를 만난다.


불구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남자 프란츠는 레베카를 미끼로 뭔가 불안정해 보이는 디디에를 꾀어 사일밤에 걸쳐 자신들의 위에 나열한 히스토리를 들려준다. 디디에는 처음에는 굉장히 불쾌해하지만 싱싱하고 야성적인 매력을 가진 '처음보는' 관능적인 여자 레베카와 그저 지적인 매력을 가졌을 뿐인 아름다운 편인 베아트리스와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하얀 아내의 피부는 그저 배멀미로 허옇게 질린 것처럼 보인다. 관계의 개선을 위해 미지의 땅인 인도로 가서 지루한 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맞아보고자 한 그들은 결국 이상한 부부의 꾐에 넘어가 완전히 틀어진다.


영화는 아주 임팩트 있게 한방을 탕- 쏘지만 원작은 오히려 더 끔찍하다. 나름 반전이 될 수 있으므로 쓰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욕망(Desire)의 D를 따서 D에디션 시리즈로 낸 책 중에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외설시비에 걸렸던 만큼 원작은 정도가 더 심하다. 어떤 장면은 정말 너무 더티해서 토가 나올뻔 했다. 하지만 성애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이니 마음이 열린 분들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서로 학대하고 짓밟고 으르릉거리는 장면 묘사도 뛰어나다. 작가 소개를 보니 경제학 에세이로 경제학 도서상도 탔다고 하니 참 특이한 이력이다. 아카데미형(?) 작가 치곤 표현도 생생하고 소위 먹물 냄새라 하는 것도 별로 나진 않는다. 프란츠가 지가 부루주아라고 잘난 척 할 때만 빼고. 


책이 가볍고 작아서 휴대는 용이하지만 넘기는데 좀 불편한 게 단점. 번역은 꽤 좋은 듯.  

  

아직 결혼을 안 해봐서 허니문이든 비터문이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만 남녀의 애정만큼 변하기 쉬운 건 없다는 그의 관점에는 동의한다. 현대 결혼관이라는 '낭만적 사랑'이 어떤 면에서 얼마나 허상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아예 결혼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듯도 싶지만. 인생에서 단 맛과 쓴 맛은 있지만 특히 애정하는, 단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과 애정이 다 떨어졌을 때 지지부진하게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우리의 스테레오 타입 중에 서양 사람들은 애정 떨어지면 자녀를 생각하기 보단 이혼을 한다는 식의 이미지가 박혀 있는 것 같은데 얘들도 헤어지는 게 그렇게까지 쉬운 문제는 아닌가 보다. 뭐는 안 그러겠냐마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아름다운 시간이 계속 되는 삶은 없을까. 매순간이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내 주위로 지구가 팽글팽글 도는. 이런 권태를 너무도 두려워한 사랑할 자격없는 두 남녀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를 계속하는 안타까운 어리석은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설명할 것도 없었소.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싶은 이유는 바로 2년 전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멋대로였으니까.
"말해 봐.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 당신을 성가시게 했어? 아프게 했어?"
"당신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 그런 것 없어. 단지 내 곁에 있다는 게 잘못이야. 간단해."(p.222)

"레베카, 나는 누구보다 더 나 자신을 증오해."
"아니" 그녀는 딱 잘라 말했소.
"그 점에 관해서라면 착각하지 마. 나는 절대로 당신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의 천 배 만 배 이상으로 당신을 증오하니까. 당신이 품고 있는 반감을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다니 어리석을 정도로 아직 너무나 감상적이군."(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현대 누리꾼의 질병'에 따르면 나에게는 일명 '홍대병(비주류병)'이 있다. 정의는 본인이 홍대앞 비주류인 척 하는 병, 자유로운 영혼인 줄 아는 병이라고 한다. 자매품으로는 '쿨톤병', '동안병', '남친일심동체병', '도화살병' 등이 있다. 음악엔 문외한이라 역시 쉽고 청승맞은 가사가 좋지만 아무래도 취향이 남들보다 고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다. 요즘 '태양의 후예'에서 완전 뜬 배우 진구도 그런 맥락에서 아까운 남의 남자다. 소위 무명시절이라고 할 때 내가 완전 팬이었는데! 그의 진가를 알았는데!! 영화표 몇 장 사고 그런 우월감을 부렸는데 지금껏 애도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제 만인의 연인으로 그를 놓아줘야겠다.ㅎㅎ


왜 진구까지 팔면서 내 정신 질환을 고백하느냐 하면... 그간 베스트 셀러를 무시(?)한 벌을 톡톡히 받았기 때문이다. 출간 후 말 그대로 빅 히트한 이 책, 지금까지 안 읽었다. 벌써 육년이나 전에 발간되었다. 스릴러 장르에 본능적인 거부감도 있었지만 그저 재밌다는 사람들의 평이 독서에 의욕을 불어주지 못했다. 알라디너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헐리우드 영화같은 재미라면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되지 않는가! 와 같은 무지렁이 마인드로 빅재미를 놓칠 뻔 하다니, 알라디너로서 실격이다.


나는 왜 베스트셀러는 영양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비주류이고 싶어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이 약간 동경하는 선배는 백년전에 나온, 검증받은 책만 읽는다고 하는데 나도 독서에 관해서는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느낌이라 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재미도 있고 작품성도 훌륭한 책을 읽으려면 무수한 사람이 인정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어도 죽을 때까지 읽을 수가 없다는 불편한 진실에 이르렀고, 아무리 인정받은 작품이라도 나한테는 생각보다 재미나 감동이 없는 경우도 꽤 있었다.


수많은 알라디너의 의견을 무시하다가 도서관에서 옆에 있던 언니가 "글케 찝찝하면 비닐장갑이라도 끼고 읽던가!"했던 책이 바로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쳐]다. (나는 또 왜 이런 '흥미 위주'의 책을 사는 것에 쪼잔하게 구는지!) 인기작치고 귀는 조금 접혀 있었지만 줄도 많이 안 쳐져 있고 손 때의 흔적은 별로 없었다. 다만 박진감이 넘치는 내용이어서 그런지 군데 군데 귤과의 과일을 까먹으면서 본 듯한 노란 얼룩을 피하지는 못했다. 한 겨울 뜨뜻한 온돌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빅 픽쳐]를 음미했던 구로도서관 주변에 사는 시민들이 부디 나와같은 즐거운 경험을 했기를!


이틀만에 신나게 읽은 책에 줄거리를 작성하려니 몹시 귀찮다. 그래서 오늘은 생략.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벤이 게리로 살기 시작하면서, 제발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리(=벤)은 정작 너무나 이루고 싶었던 결정적인 사진을 찍어 유명해지고, 그게 덫이 되어 계속 계속 도망다녀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자 정작 지겨웠던 신탁 변호사로 살고 싶어하는 삶의 아이러니가 이해가 되어 가슴이 턱 막혔다. 재밌으면서도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사진가는 자신의 이름과 신분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이루게 된다는 것도 아주 슬펐다. 당당한 내 신분으로, 내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보통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보다는 타인의 욕망으로 인한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기에. 


영상화된 영화는 은근 악평에 시달리는 것 같은데 시간이 나면 한 번 보고 싶기도 하다. 더글라스 케네디가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미국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일까. 40개국에 팔렸다고 해서 우와 저작권료가 얼마야, 하고 생각하는 나도 순수한 나로 사는 방법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 


단순히 재미도 있지만 의외로 교훈도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는 뒷맛이 씁쓸한 소설. 빅 재미는 보장된다. 겨울이라면 귤을 까먹으면서 읽고 싶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벌레 2016-03-29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베스트셀러는 상업적인 재미를 추구한 책일거라는 편견이 있어서 많이 읽지 않는 편이지만, 더러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을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구나.. 싶은 책들도 많더라구요^^
빅픽처도 그 중에 하나인데
뽈쥐님의 서평을 보니 새삼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ㅎ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29 13:08   좋아요 1 | URL
의외로 베스트 셀러 중에 물건(?)인 것들도 많지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을 더 볼까 했는데 다작하는 작가인만큼 작품에 편차가 있긴한가보더라구요.
문체가 세련됐거나 엄청난 개성은 없지만 꽤 두꺼운 책이 하루이틀에 술술 넘어갔어요. 이것 또한 엄청난 재능이겠죠. 책벌레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킬링 타임용으로 한 번 가볍게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킬링 타임용 치곤 여운이 꽤 남는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