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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여왕의 기사(완결/전17권)
학산문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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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푹 빠졌던 순정만화. 한때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오래전 일이다. 그치만 이상한 향수는 남아서 가끔 그 때 봤던 작품들을 찾아보고 있다. 이제 취미생활에 돈을 쓸 수 있는 어른이므로. 만화잡지가 그래도 나오던 시기 파티였나? 이슈였나? 아니면 밍크? 잡지 이름도 헷갈리지만 만화잡지를 두근거리면서 보던, 폐간이라는 말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한달에 한두번 큰 즐거움을 주던 날이 있었다. 요즘은 왓챠니 뭐니 해서 만화책 마저 거의 안 읽지만 지금은 사정상 고립된 상황이라 다시, 여왕의 기사를 읽는다. 


웹툰이란 이름으로 한주마다 만화를 손쉽게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아날로그의 매력은 따라가지 못한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만화지에 만년필로 입히고 톤을 붙이고 하는 옛날식 작화를 보면 장인정신에 감탄이 들기도 하고 손으로 그린 펜선의 맛이 있어서 왠지 더 감동스럽기도 하다. 만약 장면을 수정하고 그래야 했다면 그 당시는 너무 힘들었을 듯. 몇 년전 봤던 허영만 작가 전에서 본 원화는 여기저기 화이트 등으로 땜찔이 되어 있어 조금 놀랐다. 그래도 멋있긴 멋있었음.


매주마다 작품내는 게 압박이긴 하겠지만 만화대여점에서 한 푼 못 받는 대신 정산은 확실하게 받을 수 있어서 수익구조 면에서는 확실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다만 그 시절 흥행도에 비해 돈을 못 번 작가들은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최경아 작가도 네이버에서 연재를 했었는데 전에 비해서 아주 매끈해진 선과 컬러풀한 작화를 보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아주 매끈해진 그림에 비해 감성은 옛감성 그대로 였는데 사람이 변한건지 내 10대 시절의 감성이 이랬는지 여러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그러나 딱히 그 때의 감성이 그립지는 않았다. 사회생활 하는데 소녀 감성을 가지고 살면 그건 증멜.... 어휴...


순정, 개그만화 아니면 안 보던 때와 비교하면 요즘은 살인 1회 이상 없는 작품은 보지 않는 취향으로 바뀌었으나 가끔은 저런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어서 사놓고 보고 있다. 만화책 가득 채워진 책장을 갖고 싶었던 로망이 있었지만 이제 절판된 종이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자리 많이 차지하는 것보다 좋기도 해서 이북 최고를 외치고 있다. 문명 만만세! 

(하지만 이북은 만화까지만 딱 인 듯. 텍스트는 왠지 읽기가 참 힘들다)


다시 여왕의 기사로 돌아와서, 여중생 유나는 오빠 셋이 있는 막내딸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만 슬프다. 엄마는 독일로 유학갔고 학교에서는 얄미운 연적이 생겨버렸다. 우울해 하고 있는 유나에게 오빠들은 돈을 모아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고 방학을 이용해 독일에 간다. 독일에서 엄마를 만나고 이웃집 훈돌이와 잠시 산책을 갔다가 다리가 삐끗해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마는데.... 그리고 깨어난 곳은 어디지??


눈이 쌓인 황폐한 성에서 잘생긴 장발 기사가 그녀를 여왕이라고 부르며 보살펴 준다. 잘생겼지만 재수가 없어서 순정 만화의 클리셰답게 서로 잡아먹을 듯 싫어한다. 장발의 기사 리이노와 투닥거리면서 이상하게 기운을 차리면서 '판타스마'엔 봄이 오고 갑자기 생명들이 깨어난다. 그리고 여왕으로 추대된 유나. 이제는 어두침침한 외곽의 군주 리이노는 더 이상 그녀의 기사가 아니고 레온, 쉴러, 에렌이 그녀의 기사가 된다. 순정만화이므로 당연히 아이돌같은 외모와 캐릭터로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사들. 무식하지만 순정적인 돈키호테형 기사 레온, 엘프족이라 여자보다 예쁜 외모와 자상한 성격에다 하프같은 것도 켤줄 아는 쉴러, 집안도 머리도 좋고 이성적인데다 섬세한 에렌. 뭐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배경은 판타스마이지만 독일일게 분명해서 예전 중세시대 기사들의 싸움, 여왕의 임무 등의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악의 정령과 싸워야 하고 마음이나 몸의 성숙이 있을 때마다 외형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하는 여왕의 모습이 이 이야기의 세계관이다. 기사들의 싸움으로 인한 위기, 로맨스 또, 연적의 존재로 강화되는 사랑 등 클리셰 범벅이긴 하지만 만화란 그림체와 대사의 예술. 파티에서 연재하는 동안 큰 인기를 누린 이유가 분명히 있다. 분명히 인기투표도 하고 그랬던 거 기억난다. 1위가 누구였더라. 기억나는 건 제일 잘생기고 자상하기만한 남자보단 나쁜 남자와 멍멍이 같이 순정적인 남자의 인기가 엄청났다는 것. 아이돌 중에 제일 잘생긴 멤버가 인기가 그냥저냥한 이유와 비슷하달까.


판타스마는 여왕이 있을 때만 모든 나라의 사람이 깨어 있을 수 있는데 만약 여왕이 어둠의 군주와 결혼을 하고 그러면 나라에 또 혹독한 겨울이 오기 때문에 모두 깊이 잠 오는 강력한 약을 먹고 동면을 취해야한다.(그런 약이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군) 그래서 이번에도 여왕이 나쁜(!!) 장발의 기사와 이어진다면 이제 판타스마의 미래는 담보할 수 없으므로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세 기사 중에 여왕의 남자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나쁜 남자의 유혹은 계속 되고... (물론 12세 이상 관람가이기 때문에 남자가 아주 지독한 놈은 아니고 나쁜놈이지만 사랑한다는 전제) 


또한 소녀 만화이므로 유나는 사랑에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군주가 되려고 학교도 세우고 그런다. 왜냐 이 만화 주인공은 특.별.하.니.까. 그래야 소녀들이 감정이입을 무진장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순정만화의 재미가 없어져버린듯 하다. 어후, 결국 저런 위험한 놈을...ㅉㅉ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제 순정만화 즐기기는 좀 힘들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작가님들은 보통 20-40대에 순정만화를 쓰는데 어떻게 저런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가 매우 존경스러웠다. 계속 말랑말랑하고 순수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남자는 매력적인 애보다 특별한 사연이 없는 무난하게 잘 자란 남자가 좋다는 얘기. 이거 경험인가?? 


요즘 같으면 #이세계물 #하렘물 등으로 분류가 될 듯... 그 때는 #판타지 #로맨스 #오각관계 쯤으로 표현되었으려나. 요즘 마라맛 표현에 비하면 전에는 표현이 아주 순한맛이었던듯. 또 요즘에는 '처녀성' 같은 걸로 예민해진 사람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결혼한 엄마가 자아를 찾는다고 유학을 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 어떻게 보면 진일보한 이야기랄까. 그러니까 김강원 쌤 빨리 만화계로 돌아와요ㅠㅠㅠㅠ BiBi아이리스도 마지막작 I.N.V.U 도 재밌게 읽었단 말예요ㅠㅠ


완전 상관없는 이야기) '처녀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대학동기가 사주보러 갔다가 사주쟁이가 네 사주가 아주 남자를 높여주는 사주라고 하면서 아주 탐이 난다며 잘 해보잔 식으로 말했는데, 그 '잘 해보자'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재차 확인했다고. 당황한 동기가 자기 지방에서 와서 집에 돌아가야 된다고 하니 너무 아쉬워하더라면서.... 복비도 하나도 깎아주지도 않고 현금으로 받았다고. 돈내고 성희롱 당하고 뭔짓이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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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 씨의 일요일 그레고 씨의 드로잉 노트 1
요셉 요한슨.조성민 지음 / 위고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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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이웃은 아시겠지만 나는 요즘 그림 일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소모임에서 하는 거라 공식적으로는 끝났지만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멀티플레이가 안 되는 두뇌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한가지에 꽂히면 계속 그것만 해야되어 요즘은 그 재밌는 추리소설도 잠시 쉬고 있는 실정이다. 하여, 예전부터 모아온 그림 관련 책을 뒤적거리는 재미에 빠져있다.

누누히 대니 그레고리를 좋아한다고 밝혔지만 이 조성민도 완전 짱!
전공자(아마도?) 특유의 연필선과 내공이 있다. 유럽식 건물과 주방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역시 또 다시 유럽, 유우럽을 가야한다는 충동질을 들게 한다. 예쁜 피사체를 나도 이렇게 담아 보고 싶다는 느낌과 그냥 잘생긴 오빠들을 다시 보고 싶은 소녀의 마음이 요동친다..ㅋㅋ

언어 공부를 하려면 바로 책부터 구비해야하고 새 공책을 사야하는 습관성 작심삼일 언어학습자로서 유럽 비행기 티켓을 끊고 싶은 마음이 크다. 유투브만 틀어도 외국어를 꽁으로 가르쳐주는 이런 오픈 소스 시대에 하드웨어를 구비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네이버에만 쳐도 유럽의 고성이 나오고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버젓이 잘 나오는데도 괜히 직접 가고 싶다. (실상은 가서 사진 찍기 바쁠거면서...아니면 소매치기 피하느라 피해의식 만땅의 여행자가 될수도 있지...)

하지만 역시 책의 미덕은 내용이 잘 드러나는 파격적인 구도와 불독 요나스의 씹덕 포인트, 그리고 유우머다. 유머러스한 그림에 따뜻함이 느껴진다. 진정 고수!

저자의 다음책이 나오면 바로 살거다.

결론은.... 유럽을, 유럽을 가고 싶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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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2-06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습관성 작심삼일자, 저도요.
뽈쥐님 그림일기 그리는데는 시간 많이 걸리지만 나중에 모이면 꽤 좋은 기록 될 수도 있을거예요. 자주 보러 올게요. 좋은밤되세요.^^

뽈쥐의 독서일기 2017-02-07 09:21   좋아요 1 | URL
서니님께서 응원을 해주셔서 신나는 마음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즐거워요. 서니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스트리트 페인터 - 초보 화가, 길에서 인생을 배우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수신지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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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하면 자유로움을 떠올리게 된다. 희안하게 잘 볼 수도 없는 미국 서부에나 있을 법한 끝없이 시원한 길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어느 나라 말이나 '길'은 인생이나 방식의 은유로 쓰이는데 대체로 뉘앙스가 아주 다정하지는 않다. 자유를 상징하기는 하지만 자유를 누리기는 힘든 만큼 '길거리'에서 자란다거나 구른다거나(?) 하는 것은 무지 천박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거친 종자들을 상대할 가능성도 많고 모든 걸 혼자해야 하니까.


[스트리트 페인터]는 작가가 한 때 경험한 생활 밀착형 리얼리티 그래픽 노블이다. 국내 작가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닌데 확실히 비슷한 환경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경험할 수 있는 수준높은 울컥함을 선사해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전부터 [3그램]이라는 작품을 알고 있긴 했는데.. 왠지 줄거리만 봐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만나서 감동을 받은 이유로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 용감하게 읽어 보기로 했다. 독자의 의리로!


졸업을 앞 둔 대학교 4학년 아랑은 당연히 진로와 생계를 걱정한다. 학교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온 후에도 쓴 돈이 있으니 이왕이면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가지고 싶고 미술학원 알바는 이미 신물이 난다. 학자금 대출도 있으니 걱정은 더 커진다. 특히 취업에는 쥐약인 인문보다도 더 힘들다는 순수 예술을 전공한 아랑은 직접 선택 전 돈도 벌고 경험도 쌓을 겸 일종의 직업 체험형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 마침 과 사무실 앞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고 구청에서 주최하는 '거리의 화가'에 지원해 보기로 한다.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간 자리에 아랑을 포함해서 베테랑인 것 같은 작가 4명이 더 왔다. 작품으로 말하는 그들은 모두 면접을 보고 아랑은 선배의 충고대로 '무조건 예쁘게' 그린다. 면접 결과는 지원자 수가 적어 싱겁게도 지원자 모두로 결정되었다. 어느 기간 동안 합법적인 길거리 화가로 살게 되는 아랑은 똘망하게 생기지 못한 관계로 동료(?)들에게 가벼운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자신을 구해준 떡볶이 아줌마에게도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는 식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너무 생생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거리의 화가는 일한 만큼 받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손님을 잘 끄는 게 매우 중요한데 요령이 없던 아랑은 기센 손님들과 옆에서 반칙적으로 행하는 호객 행위에 비실거린다. 돈 벌기가 쉽지 않은 만큼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많다. 앞에서 싸우는 커플, 자기가 아주 예쁜 걸 알고 있는 미녀, 애를 맡겨 놓고 한 시간이나 쇼핑하고 오는 밉살스러운 아이 엄마까지!(나도 이거 예전에 당해봐서 정말 열받았다.) 스스로 왕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 공임을 깎고 싶어 에누리 시도하는 사람들에 길에서 배우는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다. 나도 읽으면서 콧등이 뜨끈해졌다. 동정이 아니라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전공을 살려서 하는 일은 남에게서나 스스로에게나 기대가 많은만큼 실망도 크고 자괴감도 큰 일이다. 나도 졸업 후에 직장을 몇 곳 전전하면서 굳이 전공을 살리는 곳에 들어갔는데 그 때 자괴감과 한계를 느낀 적이 있어 큰 공감이 갔다. 결국 지금도 계속 얇은 끈을 구질구질하게 잡고 놓치 못하고 있지만 아랑이 유치원에 가서 하루에 100명씩 아이들을 그리며 노력하는 것을 보며 힘을 얻었다. 놀이 동산에서 귀엽게 치장하고 그림을 그리는 선배에게 붙어 대목을 노리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나 일하면서 아주 잠깐의 마약같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니 이건 노블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 중에는 대부분이 진상이지만 그래도 빛 한 줄기와 같은 노래하는 훈남이 와서 아랑의 볼을 빨갛게 물들여주고 상상속에서 결혼에 시집살이까지 하는 젊은 여자의 상상은 깜찍하고 너무 귀여웠다. 게다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려고 해도 출발선이 다른 금수저 친구를 보며 허탈감에 빠지고 마침 비까지 내려 완전 비참한 기분에 들어갔을 때 무지개 빛으로 아랑의 이름을 써주는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우아한 예술가 할머니한테서 치유를 받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맘을 먹어도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면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에 또 그런 자신이 못나보이는, 그런 바닥을 치는 날이 있으니까. 울컥 울컥.  


길거리에서 돈을 버는 것은 힘들다. 자유.. 이름은 좋지만 보험도 안 되고 날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아도 진짜 너무 힘든 일이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제공받았다는 이유로 다른 상인들의 질투를 사서 구청에 항의를 받게 된다. 구청도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민원을 처리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행히도 한 명을 짜르기도 한다. 왠지 좀 더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아저씨 베테랑 4명이지만 아랑도 학자금 대출에 학교 생활 내내 알바까지 햇을 정도로 딱한 사정이 있다. 결국은 잔인한 방법으로 한 명을 떨구기로 한다. 이름하여 실적주의로.


모두 절박한 사정으로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이가 있는 덕용 아저씨는 아이가 아프다는 사정으로 중도 하차를 하고 결국 아저씨는 탈락하게 된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은 승리. 모두 말이 없다. 아랑은 계속 생각한다. 그들과 나눴던 추억을. 그리고 자신이 빠질 것을 선언한다. 자신의 힘든 무게만큼 처자식 딸린 아버지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생각한 것일까. 남은 아저씨들은 착잡한 심정이지만 아랑에게 고마워 하고 아랑의 광고 전단지를 모두 붙이며 아랑에게 일감을 조금씩 나눠주는 따뜻한 결말로 마무리.


돈을 벌어보니 삶이 참 녹록치 않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삶의 질 또한 뚝뚝 떨어지는 걸 느낀다. 그 전에 너무 곱게 자랐다는 걸 느낀다. 평범한 삶이 어렵다는 얘기에 공감하고 현실에 타협하며 사는 것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그래픽 노블보다 더 눈물이 찔끔했던 건 현실적이고 생생한 우리 이야기를 신파적이지도 자기 연민을 하지도 않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부제가 더 마음에 든다. 초보 화가, 길에서 인생을 배우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게 삶이고 아무리 인복이고 행운이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혼자 배워서 걸어가야 하는 게 인생이란 걸 느끼고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건 없지만 스스로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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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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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7층]을 읽고 다시 선택한 책. 손가락 살점을 물어 뜯어 도망치듯 아빠에게 갔을 때 냉담했던 아주 쿨~ 한 반응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북유럽이라도 부녀관계가 이렇게 이성적일 수가 있단 말이냐! 가족이 너무 끈끈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여기가 이상한 건가 했던 반응은 의외로 타당한 거 였다.


아무리 독립을 주장하는 나라들도 급한 상황에서는 손주도 기꺼이 봐주고 독립한 자식 집에 쳐들어(!)가서 빨래도 척척, 요리도 후루룩 해주는 게 꽤 만연한 정서였던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우리나라 엄마들이 자식한테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작가 오사 게레반의 그림은 여전히 투박하다. 글 또한 너무 솔직해서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오사 게레반의 솔직함은 자신도 어느 정도 구원한 것 같고 독자의 지지도 많이 받는 것 같다. 일단 나는 지지! SNS에 자신의 순간적인 우울증을 드러내는 내 감정 스펀지들과는 다른 솔직함이다.

[그들은 등뒤에서는~]은 오사 자신이 어린 시절 '원가족'(이런 표현이 맞다면)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힘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굳이 거창하게 심리학 이야기를 할 것도 없지만 경험으로 어린 시절에 가족과의 애착 관계나 충분히 사랑받은 경험이 중요하다는 건 잘 안다.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별 큰 사고 없이 자라면 다행인데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행한 가정이 워낙 많기에 이런 가정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져야 될 것이다. 


'정서적 방치'


생각보다 이런 경우 많다. 가정 폭력이 꼭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닌 언어 폭력도 포함하듯 이 또한 학대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인터넷 상에 이런 글, 생각보다 많이 올라온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래도 너희 부몬데..." 같은 인정적(?) 비전문가적 조언도 아직 많다. 이런 종류의 학대가 물리적인 폭력이나 굶기는 것과 같이 생명을 당장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데도 오래 걸리고 막상 가해자 쪽인 부모는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드러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생명을 위협하는 학대도 나쁘지만 이런 정서적인 학대, 방치도 나쁘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니.


오사는 운 나쁘게도 도리는 다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는 부모를 만나서 그들의 등 뒤의 냄새를 맡고 자랐다. 인정과 애정을 바랐던 오사는 뭔가를 잘 한다는 칭찬에 꽂혀 모든 걸 스스로 깨치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것이 상식이었던 오사는 친구네 집에가서 큰 충격을 받는다. 숲 속에서 커다란 뱀을 만나서 둘이 도망치다가 엄마를 만나서 마음껏 울음을 터뜨리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나서 오사의 상식은 깨진다. 뭐 뱀을 만난게 대수라고! 하지만 친구의 엄마는 친구를 끌어안고 달래면서 뱀이 누구보다 더 무서웠을꺼야~ 라며 간질간질한 말까지 해준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며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세요~'같은 말에 그럼 나는 못하나?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어린 오사나 아동법이 점점 강화되면서 자기보다 학대당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불행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오사는 관심을 달라고 호소도 해보고 울부짖어도 보고 난리 부르스를 쳐봐도 오히려 부모는 겁을 집어 먹고 거리를 둘 뿐 더 가까워지지 않는다.


오사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아주 약간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 했다. 굶주린 영혼은 역시 어떻게 해도 잘 채워지지 않는다. 오사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섹스를 한다. 상대방의 영혼없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우연히 뱉은 '사랑해'는 단비와 같아서 오사는 그 말에 집착을 하고 '피곤한' 여자가 되어간다. 왜 사랑해? 빨리 또 말해줘, 어서! (전 작품 [7층]에 나와서 손가락 살점을 물어뜯긴 일이 단 한 페이지로 나온다.)


오사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절대 먼저 오지 않는 부모에게 전화를 하고, 병원도 주기적으로 가보고, 술과 클럽을 모두 끊고 끝내 끔찍한 결과를 맞았던 스스로를 고립시켜보는 실험까지... 


모든 시도의 결과로 자신이 얼마나 특이하고 슬픈 환경에서 성장했는지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사는 현재, 다행히 남편을 좋은 사람을 만나 귀여운 아이도 둘을 낳고 열심히 사랑을 주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어릴 때의 상처는 깊어질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손주에게 여전히 관심조차 주지 않는 부모, 게다가 아이들의 방을 꾸미면서 자신이 쓰던 어린 아이 침대에 온통 손톱 긁은 자국으로 지저분했던 걸 의아하게 생각했던 기억 등이 갑자기 그녀의 일상을 뒤흔들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돼!"라는 각성이 든 그녀는 또 상담센터로 전화를 한다. 지금은 조금 흔해진 '정서적 방치'라는 진단을 내려준 상담사를 믿고 오사는 열심히 치료를 하고 스스로 상처받은 기억의 시점으로 가서 어린 오사들을 안고 데리고 가서 휴식을 취한다. 


물론 그 과정은 아주 힘들었지만 부모가 자고 있었을 때 몰래 그들의 등 뒤로 가서 좋은 향기를 맡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서는 아주 아름다운 발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들은 전혀 기억이 없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부모 자격증'이라도 발급해야 하는 건 아닐까? 모든 상처받을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은 '제니'다. 쓰다가 작가의 자전적인 얘기라고 해서 그런지 오사라고 해버렸다..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오늘 학교에서 티나가 나한테 침을 뱉었어.. 여기, 내 팔에다가."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그랬을 리 없어."
"정말이라니까. 선생님한테도 말했는데 내 얘길 안 들어주셨어."
"어머, 제니! 그런 거 가지고 선생님을 귀찮게 하면 어떡하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으실텐데!"
"....?"
"그 애가 정말 너한테 침을 뱉었다고?"

갑자기 내가 진짜 그런 일을 당했던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설사 그렇다고 치자. 네가 먼제 뭔가 잘못했으니까 그 애가 그랬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티나가 나한테 침을 뱉은 게 사실이더라도 어쨌든 잘못은 내게 있다는 얘기였다.(37-38p)

나는 저주스러울 만큼이나 늘 다른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했다.
한밤중에 깨어나면 나는 엄마 아빠가 깊이 잠들었을 걸 알고 아주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엄마 아빠의 침대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서는 그 사이에 누웠다.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 친밀감의 욕구를 채웠다. 에너지를 충전하듯이.
몇 해 동안이나 나는 거의 매일 밤 이런 행동을 반복했다.
엄마 아빠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74-75p)

하지만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한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그가 처음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이 말은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의 세계가 통째로 뒤집어 엎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기 위해 나는 20년이란 세월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야 드디어 만났다. 날 사랑해 줄 사람...
(중략)
의지할 데 하나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난 그저 매달리기만 햇다. 매달려도 잘 안 되자..
... 나는 그 주문을 외워줄 새로운 남자를 찾아 필사적으로 해매 다니기 시작했다.
이 남자 저남자 닥치는 대로 잠자리를 같이 했다.(123-127p)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나란히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점점 더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학대 받는 어린 아이가 관심을 갈구하며 내 안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매일매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가 내가 갖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아물었던 상처가 또다시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안에서 울부짖는 아이가 차츰 나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나는 끝내 깊은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163-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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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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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된 영상이긴 한데 국내에서도 조금 화제가 되었던 TED 영상이 있다. 제목은 "왜 가정 폭력 피해자는 떠나지 않을까."


http://www.ted.com/talks/leslie_morgan_steiner_why_domestic_violence_victims_don_t_leave/transcript?language=ko#t-26180


요기로 가면 한국어 자막은 물론 영상도 볼 수 있다.


도서전에 참가했다가 에코백을 받을 요량으로 구매했던 구매했던 책. 작가 오사 게레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20대 졸업작인 이 작품을 구입하기로 바로 결정했다. 일단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것에 끌렸고 뭔가 거친 그림체가 하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래픽 노블은 그림도 문체라도 봐도 좋기에 그림에 대해서는 더욱 관대해지는 것 같다.


다른 작품을 봐도 일러스트에서 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라고는 생각되지만 오히려 그림이 너무 예쁘면 등장 인물에만 너무 이입을 해서 '이 예쁜 여자한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니, 평면적인 그림이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주제가 더 잘 전달되는 느낌이다. 


제목인 [7층]은 주인공인 그녀(=작가)가 아주 잠깐, 남자 친구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때, 뛰어내리려고 생각했던 아파트 층수이다. 잘못된 남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자기 파괴적이고 슬픈 일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사는 예술학교를 오게 되면서 가족들과 떨어져서 생활하게 되었다. 가족과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 엄마에 대한 애증 등등의 감정으로 불안정하면서도 설레는 대학 생활의 첫 단추는 재미있었다. '블랫 오사'로 통했던 온통 검정 옷과 고딕 악세서리, 스모키 패션도 여기서는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게다가 정말 멋진 남자 닐과 사귀게 되었으니. 닐은 정말 멋진 남자였다. 누구든 그의 외모와 말투를 좋아했다. 그런 남자한테 사랑받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가끔 "누구 누구는 너무 창녀같지 않냐?"와 같이 친구들의 험담을 하거나 "키스할 때 눈을 감지마! 딴 남자 생각을 하면서 하는 건줄 알 수 없자나!"같은 정도가 심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정말 그는 완벽한 남자였다. 꼭 듣고 싶은 말만 해주고 사랑받는 느낌도 듬뿍 주었는데.. 


하지만 이런 싸인은 틀리지 않는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처럼. 그는 본색을 드러낸다. 일관성 없이 분노하고 여자를 친구들이나 학교 생활로 부터 서서히 고립시킨다. 또 주위 험담을 하며 "저런 염색이니 화장하는 애들은 너무 창녀같지 않냐?" 라는 말을 쓴다. 여자는 이제 스스로 남자가 싫어할 행동을 피하게 된다. 오사는 검정색 옷을 버리고, 머리를 염색하지 않게 되었고, 진한 눈화장을 지웠고, 주르르 달린 귀고리를 뺐다. 이제 오사는 학교를 가서도 그만을 바라봐야 되게 설계된 사람처럼 그만 바라본다. 그래야 후환이 없으니까. 남들은 베스트 커플이라고 부러워한다. 오사는 이 생활이 힘들지만 남들에게는 말을 못한다.


여기까지도,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끔찍한 일은 우리 사회에서도 세계곳곳에서도, 계층과 상관없이 자주 나타나지만 폭력이 점점 심해져 살인이 될 때까지도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피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고립된 무력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도 가해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또 어떻게 해야할 줄 몰라서. 


위의 TED의 영상에 나오는 여성도 아주 구체적인 대책으로 "주변에 알리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물론 당사자가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려운 1차적인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미국이라 그런지 몰라도 공권력이 강한 나라는 여성을 생각보다 강력하게 잘 케어해주었고, (물론 [적과의 동침]같은 영화처럼 끝까지, 집요하게 찾아서 전부인, 전여친을 죽이는 놈도 있기야 하지만) 강연자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 아이 셋을 낳고, 혼다 차를 몰고, 검정 리트리버를 키우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나라 커뮤니티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불신이 있었던 것 같다. '저건 미국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우리나라 경찰이 저렇게까지 보호를 해줄까?' 와 같은 자조적인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슬프게도 무진장 동감을 하고 말았다.


책 [7층]의 배경은 스웨덴. 북유럽이다. 복지가 좋고 여권이 높은 나라에도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은 있는 모양.(그렇기야 하겠지. 뭐 거기가 천국이겠나.) 고딕스타일을 유지하던 겉으로만 강한 여성은 이제 본격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의 7층 아파트에서. 그는 계속 여자를 스스로 자기 스타일에 변화시키라고 강요한다. 전에 있던 물건과 일기장을 버리게 한다. 그리고 잠자리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누구 누구는 정말 창녀야. 벌써 2명하고 잤대. 10명하고 잔 여자는 창녀 아니냐?" 결국 아무리 피하려고 했던 '창녀'라는 것을 자신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사는 끔찍한 자기 환멸에 쌓이고 그날 밤 뜬 눈으로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관계를 다 지워버리려고 노력한다.


계속해서 '고문'을 하는 남자. 그들이 같이 사는 방은 작업실이 되기도 하니까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어두운 면을 분리하려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오사를 데리고 차 안으로 끌고가 달리는 차에서 여자를 마구 때리고 윽박지른다.(운전을 잘 못하는 내가 보기에 너무나도 위험하고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제 차 안은 '고문실'이 되고 오사는 너무 힘들어진다. 그리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남자. 운전하는 오사의 손을 이로 물어뜯어 살점이 나간 것이다. 오사는 드디어 이제 "헤어지자"고 말을 한다. 그리고 '고문실'이었던 차가 이제는 구세주로 바뀌어 아빠가 사는 집으로 차를 몰고 들어온다.


아빠는 침착하게 오사를 데려다 준다. 오사를 다시 맞이한 닐은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며 그녀를 꼭 껴앉지만 그녀는 끝내 헤어지자는 말을 똑똑히 한다. 열받은 그가 나가버리고 오사는 주로 자신의 물건만 부서져 있는 걸 깨닫는다. (오사의 아버지가 바로 남자친구를 응징하러 오질 않는다는 게 은근 문화 충격. "닐이 없어서 다행이야. 있었으면 그 자식을 죽일 뻔했거든" 정도의 대사를 하는 침착한 아버지라니. 물론 아버지가 딸을 믿고 있고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뭔가 컬쳐 쇼크 같은 부분은 있었다.)


또 오사는 어느 교수에게도 전화에서 상황을 알린다. 교수는 침착하게 기숙사 같은 것은 자기가 알아봐줄테니 일단 "무조건 병원에 가라"라고 한다. 오사는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는다. 또 경찰에게 신고도 한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또박또박 그와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한다. 모두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격려해준다. 오사는 다시 염색을 하고, 검정 옷을 입고, 고딕 패션으로 치장한다. 또 재판을 받는다. 다행이도 전에 받아 놓은 진단서 덕에 재판에 이긴다.


그런데 오사가 바로 '블랙 오사'로 돌아오기 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시 조립하는 과정은 이미 한 차례 무너졌던 자존감 때문에 쉽게 망가지기도 했고 이미 세뇌된 생각으로 스스로 '창녀'같지 않은지 검열하기도 했다. 그녀는 힘겹게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또 그렇게 생각한다. 또 언젠가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7층]은 작가의 졸업 작품이고,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한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힘이있다.   


잘못된 애정 관계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파괴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또 회복하는 방법도. 결국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오는 용기와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적극적으로 외부에 도움을 청하라는 것.


오사가 밖에 말을 했을 때, 당장 "병원에 가라"든지 같이 경찰서를 가주는 등의 성숙한 대처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앞에 영상을 본 국내 커뮤니티의 반응처럼 우리 나라도 이런 성숙한 대처가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요즘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등의 보도가 이뤄지고 와글와글 한 것 보면 우리도 점점 이런 대처가 성숙하게 이뤄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왜 그를 떠나지 않아?" 라고 말하기 보다는 "일단 병원에 가자. 그리고 같이 경찰서에 가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



그가 다른 친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할 땐 등골이 오싹할 때도 종종 있었다.
도가 지나칠 때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의 과도한 질투는 어디까지나 나에 대한 깊은 사랑의 증거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등지고 살았다. 미래는 우리만의 것이었다!(p.18)

얼마가 지나자 나는 더 이상 오사가 아니게 되었다. "블랙 오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 편이 훨씬 나았다.나 또한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틀에 짜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끊임없이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닐과 함께.(p.29)

난 그야말로 난파선과도 같았다. 내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건의 고된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신감, 소신, 희망, 기쁨, 취미, 선택)
나는 다시 주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망가뜨렸거나 내가 없애버린 CD와 책들을 다시 사 모았다. 내 머리 색깔도 되찾기로 했다. 화장도 다시하고.
하지만 이 모든 게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단단히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짓이야... 빨간 립스틱을 바르다니 창녀같잖아.`
나 자신에 대한 재건의 노력은 종종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산산조각이 나고...
친구들도 자주 만났다. 하지만 어딜 가든 이 거대한 짐 덩이가 나를 따라 다녔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시금 나를 파괴시키곤 했다. (p.7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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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1-0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작가의 책을 알라딘 서재에서도 가끔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자전적이야기는 아무래도 실제가 갖는 힘이 있는 듯 해요,

뽈쥐님, 쌀쌀한 월요일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뽈쥐의 독서일기 2015-11-02 22:31   좋아요 1 | URL
진실함은 언제나 힘이 있지요. 읽으면서도 아픈 느낌이 있었어요. 무섭기도 했구요. 서니님이 가끔 보시는 걸 보니 요즘 주목받는 작가인가 보네요.
언제가 되야 월요병이 나을까요~ 서니님도 저녁시간 편안하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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