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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구역
이영수(듀나) 지음 / 국민서관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국민학교 이후 처음 SF소설을 읽었다. 듀나 Djuna의 <면세 구역>. SF 소설을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듀나의 소설을 읽고 싶어 펴든 책이지만, SF소설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인터넷 상의 듀나의 게시판을 수시로 찾아가며 느끼는 거지만, 듀나는 자신의 주종목인 SF소설, 영화 외에도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도.대.체. 모.르.는.게. 없.다. 네티즌들이 수없이 퍼부어대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 올라오기까지 15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드물고, 쓸데없이 깽판을 놓을 작정으로 달려드는 웹상의 무법자들에겐 얄밉도록 신사적으로, 근사하게 대처한다. (물론, 무법자들을 완전히 깨부숴 버린다.) 대단한 센스와 재능의 소유자, 도대체 이 인물은 누구인가? 그의 작품집을 읽으면, 좀 가닥이 잡힐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펴든 책이다.
책 속의 단편들을 한편 한편 읽어가면서, '기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바로 나) SF소설에 적응하기 힘들거야'라는 선입견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적어도 듀나의 SF 세상은, 상상력의 장벽을 허물기에 효과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또 하나의 신나는 이야기 세상일뿐이었다. 주인공들이 존재의 한계(반드시 인간일 필요도 없고), 역사의 한계, 자연 법칙의 한계로부터 좀 더 자유롭다는 점이 다를 뿐.
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엔 항상 읽는 이의 뒷통수를 탁탁치는 반전들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도 듀나다웠다. 대부분이 사건 전개 상의 반전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정체와 관련된 반전이라 점도 듀나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작품 말미의 작가 해설마다 '이 단편은 누구누구의 어떤 작품의 패러디다.' 혹은 '어떤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적혀있는데, 그걸 보며 '너무 알아도 걱정, 너무 정직해도 걱정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듀나 스스로가 이미 너무 많은 작품들을 읽은 탓에, 자신의 소설 속에서 전에 읽었던 작품들의 그림자가 자꾸 발견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원작들을 하나도 안 읽어본 사람의 입장에선 듀나의 작품 하나 하나가 독창적이고 신선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한편으론, 그 '작가 해설'이라는 것 때문에 듀나가 여전히 '아마츄어리즘'을 즐기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일종의 취미로 쓰고 있을 뿐, 스스로를 본격 작가의 반열에 올릴 생각이 없다'는 메세지처럼 느껴진 것이다. 본격 작가들이라면 '나는 작품으로만 말한다'고 외치지, 이렇게 두어 줄 길이의 가벼운 코멘트를 덧붙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독자의 입장에선 이만큼 글을 잘 쓰면서 왜 작가 행세를 않는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듀나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러한 위치를 즐기는 듯하다. 그가 Djuna라는 이름 뒤에 숨어 익명성의 자유를 한껏 누리 듯이.
게을러서 장편은 못 쓸거라는 듀나 본인의 말처럼,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재의 위치를 만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라는 이름의 무게에서 벗어난 덕분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의 추종 독자들은 앞으로도 그에게서 '읽을 거리'를 얻기 위해 게걸스럽게 달려들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이만큼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그의 정체에 대해 떠오른 생각 한가지. '여보, 듀나는 여자야' 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자, 남편도 동의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 물증은 없다. 그저 육감일 뿐. 물론 우리 부부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면 또 어떠리? 듀나 스스로 밝히기를 원치 않는데, 우리도 더 이상 캐묻지 말아야 겠지.